새벽 산책을 다녀오다. 조금 더 새벽은 더디온다는 느낌이 들 무렵, 벌써 밝다. 둥근빛들이 군데군데 남아있고, 별도 가웃거린다. 독서흔적도 없는 나날이다. 오늘은 무사할까~. 4k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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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몸과마음으로녹여내는법 

락서 여기~

[ㅁ ㅇ . ㅡ ㄹ]의 변주 :  머리가 마음으로 번져 몸으로 우려난다면, 마음이 머리로 몸으로 피어난다면, 마음에 피는 향기가 바람결에 울타리를 벗어나 저기로 머문다면, 나가 여기있는 것이 아니라 늘 저기에 있거나 숨어있는 것이라면, 몸이 마음으로 번져 머리로 녹여낸다면, 나가 늘 빈 너로 채워지는 것이라면, 잃어버린 나가 늘 여기저기 있는 것이라면, 머리에 든 것이 아니라 머리에 든 것이 흐르는 것이라면 마음이되고 몸이 될 것이고, 몸도 장미향처럼 향을 내는 것이라면 가슴으로 마음으로 머리로 흔들리는 것이고, 나는 여기저기 들어올 곳 많은 울타리이고, 너는 저기여기 갈 곳 많은 빈 나라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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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프로메테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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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그물에 퍼덕이다 돌아온다. 그물이 퍼덕이고 빛나고 예리하다. 몸은 할퀴우고 속살이 베이고 그물은 더 연결되어 파득거린다. 내가 잡은 것인가 잡힌 것인가 서로 잡힌 것인가 내가 물고기인가 그물인가 네가 그물인가 네가 물고기인가. 그물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도 강물도 날것으로 싱싱하다. 시간에 당당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란 현실에 무력함을 느끼는 것이 시간에 대해 당당한 것보다 훨씬 현실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생으로 절망이란 그림자가 돌아다니고 비참함에 이르러서야 온몸으로 눈물 한방울 우려날 수 있는 것이고, 눈물 한방울에 시간도 다시 몸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라.

-모임과 생각 편린들-

 내가 움직일때 내가 보이는 것이라면, 움직임이 겹쳐지면 그때 너-나가 함께 보이는 것일텐데. 나를 그렇게 놓는다면 움직임 사이로 너-나가 한가득일텐데. 이리저리 섞이다보면 저기 묻힌 나가 아니라 얇은 천을 뚫고 솟아나거나 하는 너-나로 튀는 것들이 보일텐데. 그렇다면 나를 주장하는 일이 퀘케한 것만 드러내서 옛일만 상기시키려는 강박이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드러나는, 몽글몽글 오르는 씨앗들이라면 나는 많이 희미해지고 나--너로 붙어 그것들만 드러날 수 있을텐데. 그물안에 나가 아니라 너-나가 한가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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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손님들. 온전한 홀로 시간이 나질 않는다. 저녁을 들고, 바닷바람에 잔술. 돌아오니 밤10시가 넘어선다. 아직 마저 읽지 못한 책들 가운데 [화성의 인류학자]가 들어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장을 보다. 

심봉사가 눈을 뜨면 어떨까? 다들 개안하고 다 볼 수 있어 좋겠다고 하지만, 실제 그런 사례들이 300년간 10건 안쪽이라한다. 1700년대 시각장애인에 대한 대화들이 있다한다. 실제 눈을 뜨게 되면 어떠할 것이냐구 말이다. 로크가 부정적인 답을 한다.  

촉각으로 사물을 보아온 사람은 시간과 운동에 제한되어 있다. 눈을 뜬다고 하더라도 망막이나 기능이 온전치 못하단다. 더구나 거리에 의한 공간 감각은 내재화된 것이 아니란다. 그러니 눈을 뜨더라도 색감과 거리감각이 없음으로 인한 새로움과 혼란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라 한다. 오히려 촉감으로 모양을 다시 확인한다한다. 촉감으로 사물과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 몸에 배인 것이다 한다. 

아침. 내 손을 촉각으로 음미해본다. 마디 하나 마디하나 사이의 시간이 길다. 실제 본 것보다 긴 길이와 매듭이 있다. 내겐 촉각으로 사물을 별반 음미해본 적이 없다.  

눈의 뜬 뒤, 온전치 못한 삶이 이어진다. 결국 죽음으로 이르듯이. 충격은 예사롭지 않고 익숙하지 않는 것이다. 

뱀발.  

1. 너무도 다른 영역이란 점이 다가선다. 시각과 촉각, 공간감각력.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것은 아닐까. 촉각의 느낌은 있는 것일까? 알라딘 마을엔 느릿느릿 움직이는 촉감의 세계는 있는 것일까? 아픔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일텐데. 사람에게 너무 쉽게 스타일을 핑계로 대하는 것은 아닐까? 아픔도, 슬픔도 한번 마음먹고 배우는 것은 어떠할지? 오프라인에 만난다면 훨씬 쉽게 그(녀)를 알고 느낄 수 있으리라.  괜히 생각이 번진다. 새벽 땀 한줌을 들다. 갈때 22' 올때 21' 7k. 달님은 아미처럼 가늘어져 있다. 

2. 아픔을 밟아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짜릿한지 하지만 그것에 중독이 되면, 아프다는 것 조차 인식이 없어진다. 하지만 아픔이 거꾸로 내게 몸서리쳐지게 되면, 그것을 참아내고 돌아봐 그래도 견뎌낼 힘이 생긴다면, 그래서 아픔을 조금 배우게 된다면, 그 쾌락이 혼자 것이란 생각에 아 조금 아플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이 아주 조금 올라오는 것이다. 새싹처럼. 안타깝게도 세상은 나이가 든다고, 나이가 많다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더 예민한 것이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해조차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양보하고 상황에, 다른 말에 자신을 들여놓는 것이다. 다시는 배울 수 없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 똑 같은 박자..똑같은 패턴이 나만 식상해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타까움에 마음 한점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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