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익어가는 것일까? 햇살은 아니오라구 한다. 그늘은 냉기를 품고 있지만 그래도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한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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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의 비늘] 그녀를 바라보려해도 바라볼 수가 없다. 그와 시선을 피한지가 오래되었고, 그녀를 만나도 도통 눈빛 한번 줄 수가 없다. 그녀가 꼬리를 감출 무렵에서야 그의 여운을 바라볼 뿐, 아니면 그녀가 다가 올 무렵에야 그쪽을 응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그녀의 금빛 향香을 받아 안는다. 그녀가 준 햇분粉을 볼에 바른다. 반짝이는 만개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 안는다. 

 



#2. [달의 비늘] 달과 사귄지도 아마 이천여일이 되었을게다. 그런데 난 지금에서야 그 녀석이 저렇게 둥둥 떠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렇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시냇물처럼 흐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걸린다. 바스락거리기도 하고, 파르르 떨리기도 하고, 부서져내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상상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바닷가에 호수에 저혼자 천개의 비늘로 멱을 감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아마 난 그녀가 너무 가까이 있어 늘 그려러니 했을 것이다. 

 

뱀발. 퇴근길 보름이 가깝다. 달이 많은 도시. 호수를 지날 무렵 비친 달은 잔물결에 흐느낀다. 밝은 조명등아래 도시인들은 눈길한번 주지 않는다. 난 시인이 필요했고, 저기 달에게 말한번 건네줄 이가 가까이 있으면 했다. 가까이 함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 이렇게 몸의 유격에서야만 발견해내는 어리석음에 곡한다. 해가 많은 도시.섬으로 돌아서는 노을에 비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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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밴드공연] 마음 포옥 담그고 가시래요...



# 1. [음악을 추구하는 것](벡터 1)과 [음악을 사랑하는 것](벡터 2 or 스칼라 1)의 사이. 벡터 1과 벡터 2가 만나는 접점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것보다는 벡터 1과 스칼라 1의 만남은 쉽게 성사될 것이다. 벡터 1은 스칼라 1의 자장을 뚫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스칼라 2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음악에 대한 선입견이나 밀쳐짐이 배인 나는 아직도 온전히 음에 심취하지 못한다. 문외한이 느끼는 단편 가운데 하나.  이것 역시 해석하려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몸의 공명같은 것을 느낀다. 그렇게 주파수가 맞게 되면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전율처럼 흔들게 만드는 무엇. 그것을 위해 차곡차곡 노래의 결들에 마음도, 머리도, 가슴도 차곡차곡 정보의 켜로 쌓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해석 말이다. 문서의 정보처럼 분산된 낱낱이 아니라, 그림처럼 응축된 힘들이 느껴지는 곡들이 있다. 그리고 그 표현을 하는 가수의 몸으로 풍겨나와 흔들린다.  

이들은 경계의 확장을 다소 다른 방법으로 하는 듯하다. 머리를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민하게 발달된 촉수를 따로 쓰는 듯하다. (주어 듣는 얘기로는) 음악인들은 몸의 확장을 즐겨하는 듯하다. [음악에 대한 사랑]의 감도를 넓히기 위해 자신을 넘어선 것에 대한 유혹에 관심을 강하게 표현한다. 이런 습속은 [음악을 추구하는 입장]에선 너무도 머리나 가슴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는 것 같다. 몸을 넓혀 다른 자극이나 다른 경로의 훈련, 감동을 얻는 방법이긴 한데 정작 별반 시도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신선한 매듭이다. 

# 2.
http://ch.gomtv.com/7799/22291/222808

(재즈보컬리스트,이윤형)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한다는 말은, 재즈의 즉흥성(스켓)은 노래의 정서를 얼마나 담아 표현해내는가의 문제하고 연결된다고 한다. 뒷부분 국악과 닮아있다는 재즈민요의 소개?와 판소리에 연결되어 있는 듯한 모습, 노력들이 인상에 남는다.

표현해내기 위해 마음을 담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검색하다 게시판에 들어가보니 일본 재즈곡의 최근 번안곡이 부드럽고 좋다.

잠시, 나에겐 음악이 왜  낯설게 할까란 생각을 해본다. 왜 즐거운 놀이가 꼬리를 감추며 숨바꼭질을 하는 것인지? 혹 스스로 좋아하도록 놓아두지 않는 것인지? 느낌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되는 것이란 감옥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유독 낯설음의 이유가 꽤나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을 늘 품고 표현해내기 위한 무던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삶은 낯설지 않음에도 늘 낯선 것으로 문을 닫고 있던 모양이다. 기피하듯이. 깊이 누리지 못함의 문외한이 나를 입막음하고 있는 듯했다. 마음을 울리기 위해, 그것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위해 쉬운 일이 있겠는가만은... ...나로 그것을 가져오니 이런저런 생각과 느낌이 많이 든다. 왜 이리 오래 음악시험을 봐 왔던 것일까? 중학교 낯선 교실. 그 날선 감옥들. 서서히 문을 열어야겠지. fly me to the moon~~!!  

뱀발. 1. 나무밴드 공연을 다녀오다. 뒤풀이 느낌을 조금 담아두었고, 상채기처럼 남아 있는 흔적의 결을 남겨둔다. 그리스 아테네  공연을 보러가게 하기 위하거나, 시민의 의무거나... ... 어쩌면 텔레비젼이 현장성을 팽겨쳐버리고 모든 것을 가두어둔지도 모른다. 판소리의 맛은 마당의 규모일 것이고, 연극을 모니터로 관전한다는 것 역시 시각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아둔함일 것이다. 몇년전 가수를 둔 아빠의 말이 생각나는데, 일본의 예술시장, 음악시장이 큰 이유는 무엇일까? 단 하나 어릴 때 관람을 하게 하는 기억이 평생을 가는 것이란다. 몸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향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접근성이란 것이 몸의 결을 타고 넘을 때, 그리 쉬운 것을, 나이들이 인이 박힌 몸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날, 나무의 뜬금없는 발언으로 무안하기도 하고 뻘줌하기도 하였지만, 가수 민주님의 노래는 내내 아른거린다.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하는 것도 넘어서 고스란히 노래의 정서를 깨진 유리가 박히듯 몸이 주춤선다 싶었다.  2. 부디 마무리 잘 하길 바란다. 다음부턴 그런 객적은 소리 그만하구... ... 앨범을 간직하고 싶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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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이 나를 살게하고
    from 木筆 2013-04-02 09:00 
    음반이 나왔네요!! 이렇게 낯설군요. 낯섬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일... 마음도 지친 몸도 달래면서 길을 걸어나서면 어떨까요. 꽃비가 내리는 날들... 가슴이 먹먹한 노래로 이 달을 시작해보죠... ...
 
 
 

잡감. 

#1. 지난 금요일 일제하의 박물관학에 대한 강연을 듣다. 도서관-박물관학의 개념으로 문화관광부 소속에서 도서관학의 영역은 넓혀지고 있으나, 박물관학은 전공으로 하는 대학의 과도 없을뿐 인식은 거의 없거나 지지부진한 형편이라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일제 하의 일상사나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 역사학 전공자들이 이 분야에 체계적으로 연구하지도 않으며 국문학과 전공자들이 일제시대의 문화, 잡지를 연구하지만 맥락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지 않아 인식과 해석에 있어 많은 점이 아쉽다고 한다.  

 정부의 인식이 그러한 수준이고 오히려 고고학사 등 전문적인 연구는 일본에서 더 활발하다고 한다. 일상사나 문화사의 접근은 중요한데 깊이나 넓이, 제도적 지원, 연구풍토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돈되거나 유행에 따르는 접근, 돈되지 않는 연구에 대한 풍토, 지원, 다른 학문분야에 대한 개방성이 부족한 우리 대학의 현실을 보면 최교수님의 지적처럼 국가권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은연중에 잠식당하고 행동하게 되는 기반으로서 시장권력의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라는 제목의 논문과 함께 읽다.

 

--민주화이후 비판적연구가 확산되었지만----------

#2 이분법의 경직성이나 문화를 타계하기 위해선 자유주의가 국가권력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는데 필요하다는 지적과 동시에 시장권력으로부터 보호를 위해서도 적극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진보이념들을 좀더 보편적인 이념에 개방시켜 현실정합적이도록 변형시킬 수 있는 활력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맥락에 따른 앎의 합종연행이란 연구가----------

# 3.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을 실제적으로 잘 운영시키기 위해서는 목적윤리보다 책임윤리를 강화하여 현실에 바탕을 두어 실제로 변환시키는 정책이나 연구의 틈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작금의 협치라는 틀내에 국가권력에 잠식되거나, 바탕을 깔고 있는 시장권력을 무의식중에 핥고 있으므로, 맥락도 시도도 다양화하여야 한다는 지적으로 읽힌다.


---답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는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풍토가 ----


[한국의 진보적 지식사회와 지식인의 변형], 제12회 비판사회학대회 기조강연, 2009. 10월 31일

  

 

 

 

 

 

 

뱀발. 1. 묵자의 利의 관점, 그간 대학의 지적풍토에 대한 지적과 협치의 문제점. 현실적인 연구의 방향과 풍토를 바꾸기 위한 노력에 대한 충고가 많이 남는다. 

2. 황해문화 겨울호 중간부분에 게재된 내용이다. 일요일 내려오는 길, 기차 안. 흔적은 어제 정리를 해두다.  

3. 영문책이 눈길이 가는데, 눈길만 줘야겠지. 빨리 번역되길 바라면서. 쩝. 

4. 문화에 대해 일제시대의 근대화론과 같이 읽힐 수 있을까란 다소 도발적인 문제가 강연도중에 나왔다. 식민의 숨결은 문화의 영역에선 적나라하게 드러나 이론의 여지가 많이 줄어든다 싶다. 그래도 보관해주지 않았느냐의 파렴치에 대한 쟁점. 그런면에서 지금도 그 잔재나 보존의 길도 멀고 험하다. 그림자의 잔영은 이제 다른 차원으로 뒤덮일 가능성이 있다. 젊은 일본연구자의 연구. 그리고 거기에 가치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서로 풍부해지려면 서로 연구의 뿌리도 깊고 넓어야 하지 않을까? 부여가 다시 가고 싶어지는 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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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감. 

애인. 아래 몇편을 옮기다가 한자를 옮기지 말까도 했는데, 한편의 시의 운율처럼 읽히지만 그 무게란 감당하기 두려울만큼 묵직하다. '한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거나 '재물을 사유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

패턴.흔히 평범하게 스치는 생각들을 선명히 차별없이 투시한다. 그래서 그 굴곡은 어김없이 드러나게 되는 듯 싶다. 친밀함의 농도는 좋아함의 농도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공평함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친밀함에 자연스럽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불평등의 논리를 치밀하게 끌어내리는 듯 싶다.   하물며 귀신에게 젯상을 더 화려하게 차리고 복을 더 구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더 베푸는 마음의 과도를 경계하게 한다. 이러한 지적 패턴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 친밀함에 차별을 둔다면 >>



(나)만과 (너)도의 차이. 인이란 체애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마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고 재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는 잣대의 눈금과 같고, 공동체의 일부분이고 겸을 나눈 것이다라 한다. 2500년의 서양철학의 시작이 개인을 추스려내고 그 개인으로 모든 사고를 규정짓는 것이었다면, 그 개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 않았던 것들은 어떤 이유때문이었을까? 그 성찰하는 사고의 근원은 어떻게 잡고 있을까?  

개인을 나누고 위계를 나누는 순간. 사고와 행동의 편리는 가져왔을지언정, 정작 보이지못하는 것은 있지 않았을까?  잣대의 한눈금. 눈을 가린 것은 자기만을 위한 나르시스의 철학이었다는 지적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무서움이나 보지 못한 것이 동시에 2500년 전의 일이다. 똑같이 노예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었음에도 그 회자된 모든 것은 불에 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논리를 궤멸한 것처럼 묵자의 논리도 궤멸된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는 문구를 따라가지만 떨린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겸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별이다.' 어쩌면 자기만 사랑했던 아둔함이나 별로 위계를 세우려는 노력의 누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위주로 사랑한다는 것은 >>


운명과 구별의 말로. 운명론과 차별의 논리는 백성을 낙담하도록 유세하는 것이라한다. 작금의 현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사람을 구별짓고 은연중에 사해동포가 다 다른 것이라 구별짓는 우리는 운명론과 순박한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만 하고 있는 현실은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듯 별을 비난하고 겸을 옳다하는 것을 서로 협력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어디 따로 잘라쓸 것이 없이 너무 평이하다.

>> 숙명론과 낙담의 전염 >>

로고스의 기준점. 군사부, 차별, 유별, 삼강(오륜 )에 비교해 삼표의 지표를 삼는다. 말이란 것이 순환하듯 미끄러져 자칫 그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현실에서 분간을 할 수 없게 만들기에 그 기준점을 둔다. 저기 뜬구름의 현학이 아니라,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말의 출발이 두루 이익을 주는지, 현실의 눈으로 사고 하는지, 지난 궤적들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 태초에 말이...>>

천하무인. 천하에 남이란 없다. 남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남의 집안도, 남의 나라도 내 나라처럼 생각하라. 겸애와 이익을 교환하는 교리는 저기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함을 요구한다. 저울처럼 끊임없이 선취하고 버리는 것에 모아둠이 없다. 사랑을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미루지도 않는다.

>> 천하무인 >>

기다림과 구별의 빗나감을 말하지 않는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사이 사랑은 왜가 붙지 않는다. 나도 너도, 그리고 그 판별은 너무도 쉽다. 이롭게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누구나 판별할 수 있다. 후하거나 박하거나, 진하거나 묽거나, 많거나 적거나 하는 논리는 모두 차별을 전제로 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일이다. 말로만, 몸은 그 머리에 볼모로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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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나 민주주의도 어쩌면 다시 사고의 끈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죠. 실타래를 풀기엔 너무 시간이 걸리고 풀 수도 없을지 모르죠. 문턱을 두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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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의 서문에 놀라고, 늦봄문익환목사님의 편지글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이탁오선생의 삼교귀유나 노자나 공자나 ....루쉰과 함께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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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편지 말미 서운함을 표현하시는 것이 어찌 기대승과 퇴계선생의 글과 아쉬움을 보는 듯하다. 알아주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투정부리는 모습이 어찌 귀여운? 구석까지 있어 보인다.(혼날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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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1. 내려오는 길, 덧글을 달고 있는데 접속도 되지 않구 말썽이다. 그나마 덧글 흔적이 남아있을까 했는데 날림저장 모습도 찾을 길이 없다. 이렇게 기억을 되살려야 하나. 아쉽다. 
 

2. 기독교에 대한 관점은 폴라니, 언약으로 개념을 뒤흔들고 넓힌 색스이 책,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소개하는 책자가 생각난다. 

3. 기세춘선생님과 갑장이신 홍근수목사님의 반론도 보완이 된다. 무례한 나같은 반신론자에겐... 3. 무례와 겉넘음을 범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양해를 바라면서 도를 넘는 수사를 해본다. 4. 늦봄의 생생하던 목소리가 그립니다. 휫날리는 머리결부터... 조금 가다듬어야겠다. 감안하시고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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