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애인. 아래 몇편을 옮기다가 한자를 옮기지 말까도 했는데, 한편의 시의 운율처럼 읽히지만 그 무게란 감당하기 두려울만큼 묵직하다. '한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거나 '재물을 사유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모든 사람을 두루 사랑한 후에야/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모든 사람을 두루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묵자/소취 -愛人/待周愛人而後/爲愛人/不愛人/不待周不愛人/不周愛/因爲不愛人矣)
재물을 사유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일 뿐/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남을 후대하는 것은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다/사랑은 자기에게는 후하고 남에게는 박함이 없다/자기만을 떠받드는 것은 어진 것이 아니다.(묵자/대취 臧之愛己/非爲愛己之人也/厚人不外己/愛無厚薄/擧己非賢也) |
<< 자기와 남 모두에게 후한 것이다. <<
패턴.흔히 평범하게 스치는 생각들을 선명히 차별없이 투시한다. 그래서 그 굴곡은 어김없이 드러나게 되는 듯 싶다. 친밀함의 농도는 좋아함의 농도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공평함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친밀함에 자연스럽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불평등의 논리를 치밀하게 끌어내리는 듯 싶다. 하물며 귀신에게 젯상을 더 화려하게 차리고 복을 더 구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더 베푸는 마음의 과도를 경계하게 한다. 이러한 지적 패턴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 친밀함에 차별을 둔다면 >>
유가들은 친밀함이 크면 후하게 되고/친밀함이 적으면 박하게 한다고 하지만,/그것은 친한 사람에게는 좋지만 박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의리상 친한 사람에게 후하게 한다고 하지만,/공평하게 행함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행함에 불과하다.(묵자/대취 親厚厚/親薄薄/親至, 薄不至也/義厚親/不稱行 而類行)
지금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서도 바라는 것이 많다면/남들은 그가 나에게 베푸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지금 돼지 한마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면서/백가지 복을 빈다면 귀신도 그가 부해져서/소와 양을 놓고 제사를 지낼까 걱정할 것이다.(묵자/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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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익숙해졌다면 중증이다.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
(나)만과 (너)도의 차이. 인이란 체애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마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고 재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는 잣대의 눈금과 같고, 공동체의 일부분이고 겸을 나눈 것이다라 한다. 2500년의 서양철학의 시작이 개인을 추스려내고 그 개인으로 모든 사고를 규정짓는 것이었다면, 그 개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 않았던 것들은 어떤 이유때문이었을까? 그 성찰하는 사고의 근원은 어떻게 잡고 있을까?
개인을 나누고 위계를 나누는 순간. 사고와 행동의 편리는 가져왔을지언정, 정작 보이지못하는 것은 있지 않았을까? 잣대의 한눈금. 눈을 가린 것은 자기만을 위한 나르시스의 철학이었다는 지적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무서움이나 보지 못한 것이 동시에 2500년 전의 일이다. 똑같이 노예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었음에도 그 회자된 모든 것은 불에 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논리를 궤멸한 것처럼 묵자의 논리도 궤멸된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는 문구를 따라가지만 떨린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겸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별이다.' 어쩌면 자기만 사랑했던 아둔함이나 별로 위계를 세우려는 노력의 누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위주로 사랑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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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란 體愛체애다./'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다만 '인'은 재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우마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다.
'체'는 兼겸(아우름)을 나눈 것이다./'체'란 공동체를 이루는 일부분이다/마치 2분의 1과 같고, 잣대의 부분인 눈금과 같다.(묵자/경.경설 상/상)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겸이요/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별이다/평등을 도로 하면 의로운 정치요/차별을 도로 하면 폭력의 정치다.(묵자 천지 하)
노예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 인민을 사랑하는 것이니/노예에 대한 사랑을 버려 천하가 이롭다고 해도/노예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묵자 대취)
노예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노예를 사랑했다면/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노예에 대한 사랑을 버려 천하가 이롭다 해도/그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묵자 대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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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차별을 전제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결국 그 차이가 거꾸로 당신을 칠 것이다. <<
운명과 구별의 말로. 운명론과 차별의 논리는 백성을 낙담하도록 유세하는 것이라한다. 작금의 현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사람을 구별짓고 은연중에 사해동포가 다 다른 것이라 구별짓는 우리는 운명론과 순박한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만 하고 있는 현실은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듯 별을 비난하고 겸을 옳다하는 것을 서로 협력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어디 따로 잘라쓸 것이 없이 너무 평이하다.
>> 숙명론과 낙담의 전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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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가 별을 비난하고/겸을 옳다 한 것은/귀 밝은 봉사와 눈 밝은 귀머거리가/협력하여 서로 보고 듣게 하며,/팔 병신과 다리 병신이 협력하여/잘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다./처자식 없는 늙은이도/종신토록 부양을 받을 수 있고,/부모 없는 어린 고아들도/의지할 곳이 있어 잘 자라게 하려는 것이다.(묵자 겸애 하)
옛 삼대의 폭군들은 반드시 말할 것이다/"망하는 것도 내 운명이요./궁한 것도 내 운명"이라고/이러한 운명론을 번지르르하게 꾸며 민중을 가르쳐/순박한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든 지가 오래다.(묵자 비명 중)
오늘날 운명론을 고집하는 담론은/천하의 의를 전복시키려는 것이다/천하의 의를 전복시키려는 자들이/백성들이 낙담하도록 유세한다/백성이 낙담하도록 유세하는 자는/천하의 어진 사람을 없애려 한다./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을/윗자리에 앉히려는 노력은 어찌 된다는 것인가(묵자/비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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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나란 것은 너란 것에 붙어있는 것으로 사유한다면 <<
로고스의 기준점. 군사부, 차별, 유별, 삼강(오륜 )에 비교해 삼표의 지표를 삼는다. 말이란 것이 순환하듯 미끄러져 자칫 그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현실에서 분간을 할 수 없게 만들기에 그 기준점을 둔다. 저기 뜬구름의 현학이 아니라,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말의 출발이 두루 이익을 주는지, 현실의 눈으로 사고 하는지, 지난 궤적들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 태초에 말이...>>
말에는 반드시 본받을 표준을 세워야 한다/말에 표준이 없다는 것은/마치 돌림대 위에서/동서남북을 가르키는 것과 같아서/시비.이해를 분별할 수 없고/지혜를 얻을 수 없다/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가지 표준이 있어야 하며/그것은 本.原.用이다/첫째, 무엇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가? 위로 성왕의 역사를 본으로 삼아야 한다/둘째, 무엇을 근원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래로 백성들이 보고 들은 실정을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셋째, 무엇을 실용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로써 정치를 하여 국가와 인민의 이익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삼표론)
삼표론은 가치의 근원이 군사부일체, 남녀-부부유별. 삼정 또는 삼강에 반대하여 본받을 표준을 정한 것이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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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오독이겠죠. 진지해지셨나요. <<
천하무인. 천하에 남이란 없다. 남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남의 집안도, 남의 나라도 내 나라처럼 생각하라. 겸애와 이익을 교환하는 교리는 저기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함을 요구한다. 저울처럼 끊임없이 선취하고 버리는 것에 모아둠이 없다. 사랑을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미루지도 않는다.
>> 천하무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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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겸애와 교리는/어떻게 해야 하는가?/묵자가 말했다/"남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남의 집안을 내 집안처럼 생각하고/남의 나라를 내 나라처럼 생각하라" (묵자/겸애 중)
무릇 도술을 배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삼천대천세계를 사랑함도/사바세계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겸애도 이와 같아서/상세를 사랑하고 후세를 사랑하는 것이/금세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처럼 같다/"성인은 사랑만 있을 뿐 이익은 없다"고 하는 것은/유가의 말이거나 외지인의 말이다/"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것이/묵자의 말이며 이것뿐이다. (묵자/대취)
묵자는 하느님의 뜻을 겸애와 교리라 했고 이는 곧 천하무인의 안생생 사회의 도덕률이 된다. 이 교리의 실천적 원리로서 대취, 소취론이 있다. 묵자는 이것을 저울에 비교한다. 부득이 해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이와 해를 저울질하여 해가 최소화하도록 균형을 잡아야 공정하다는 것이다. 대취는 '이익을 큰 것을 취한다'는 원칙이며, 소취는 '해로운 것은 작은 것을 취한다'는 원칙이다. 즉 자유의 평등은 이로운 것이므로 최대로 해야 하며, 차별과 차등은 해로운 것이므로 최소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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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범은 평범 속에 있다죠. 천상천하 유아독존도 불교에서...인데 잘못쓰이고 있다죠. <<
기다림과 구별의 빗나감을 말하지 않는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사이 사랑은 왜가 붙지 않는다. 나도 너도, 그리고 그 판별은 너무도 쉽다. 이롭게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누구나 판별할 수 있다. 후하거나 박하거나, 진하거나 묽거나, 많거나 적거나 하는 논리는 모두 차별을 전제로 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일이다. 말로만, 몸은 그 머리에 볼모로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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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자기 집을 위하여 저장하지 않으며/오히려 사유를 비난한다/사유는 자기를 위할 뿐/자기와 인민을 다 같이 사랑한 것이 아니다/인민을 후대하는 것은 자기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사랑은 후하고 박함이 없다/자기만 내세우면 어진 사람이 아니다/의는 이며 불의는 해다/뜻은 인민을 이롭게 한 실적으로 분별될 뿐이다(묵자 대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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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구별에 익숙하죠. 도하고 모로 먼저 나누고..모든 것을. 그것때문에 덧셈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에요. 덧셈은 무심에서 보이고, 나누지 않을 때 겨우 보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르죠. <<
결사나 민주주의도 어쩌면 다시 사고의 끈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죠. 실타래를 풀기엔 너무 시간이 걸리고 풀 수도 없을지 모르죠. 문턱을 두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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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계, 향약이라 불려지는 동계 또는 동약은 정여립이 활동할 당시는 농민 등 하층민들은 가입할 수 없는 사족들의 결사체였다. 하지만 대동계는 농민을 위주로 하는 반상의 구별 없는 정여립의 대동계는 선구적인 것이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천하만민의 천하입니다./천하를 모으는 것은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같으니/모든 사람이 고기를 나눠 갖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같은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과 같아서/물을 건너면 다 함께 이롭고/실패하면 다 함께 해를 당합니다./그런즉 모두에게 열려있고/닫고 막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육도/무두/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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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의 서문에 놀라고, 늦봄문익환목사님의 편지글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이탁오선생의 삼교귀유나 노자나 공자나 ....루쉰과 함께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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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묵자.예수는 한뿌리에서 나온 세가지라고 선언하셨다. 문목사님은 묵자야말로 기독교 갱신에 촛불이 될 것으로 기대하셨다. 9p
석가여래.묵자.예수, 세분 가운데서 석가가 놓인 문화적인 환경은 예수와 묵자가 놓여 있던 문화적인 자리와 많이 달랐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묵자와 예수는 더 가까웠지만 다른 점이 있었지요. 그 다른 점이라는 게 앞에서도 이런 점 저런 점이 지적되었는데, 한 가지 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요....예수의 하느님이 인간적이었다면 묵자의 하느님은 관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묵자는 하느님을 겸애라는 사상만으로 경험했으니까요. 신관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유일신관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공평한 사랑'이라는 신의 속성에서 예수와 묵자는 일치하지요.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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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편지 말미 서운함을 표현하시는 것이 어찌 기대승과 퇴계선생의 글과 아쉬움을 보는 듯하다. 알아주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투정부리는 모습이 어찌 귀여운? 구석까지 있어 보인다.(혼날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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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 선생은 모세의 야훼 신앙에 대한 편견으로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그게 하나도 기 선생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중략)...이런 단선논리에 빠져 있어 가지고서야 어떻게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중략) 노예들을 해방시키려고 발 벗고 나서서 애굽과 싸운 야훼가 어찌 세계를 침략, 정복, 착취한 백인 기독교의 신과 같을 수 있습니까? 세계를 정복, 착취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기독교 지배자들과 40년이나 해방된 노예들과 함께 사막을 떠돈 모세가 같을 수 있습니까? 묵자의 정의에 심취되어 있는 기 선생의 눈에 이것이 안 보인다니 불가사의군요. 따지고 보면 기 선생에게 이 안견을 씌워준 것이 기독교죠.
(기)유목이란 모두가 한결같이 침략과 약탈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비자급사회이며 하비루의 야훼도 바로 이러한 전쟁의 신임을 선생님께서도 인정하시면서 어떻게 유목에서 평화의 사랑이 나왔다고 하시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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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내려오는 길, 덧글을 달고 있는데 접속도 되지 않구 말썽이다. 그나마 덧글 흔적이 남아있을까 했는데 날림저장 모습도 찾을 길이 없다. 이렇게 기억을 되살려야 하나. 아쉽다.
2. 기독교에 대한 관점은 폴라니, 
언약으로 개념을 뒤흔들고 넓힌 색스이 책,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소개하는 책자가 생각난다.
3. 기세춘선생님과 갑장이신 홍근수목사님의 반론도 보완이 된다. 무례한 나같은 반신론자에겐... 3. 무례와 겉넘음을 범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양해를 바라면서 도를 넘는 수사를 해본다. 4. 늦봄의 생생하던 목소리가 그립니다. 휫날리는 머리결부터... 조금 가다듬어야겠다. 감안하시고 봐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