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제와 소유는 선을 원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각각 낳은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이기때문이며 제각기 사회의 두 요소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유제는 독립성과 비례균형을 무시하는 반면, 소유는 평등과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등, 법, 독립성, 비례균형이라는 이 네 가지 원리에 토대를 둔 사회를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


1. 평등은 어떤 경우라도 정의와 형평을 침해하지 않는다.


2. 법은 사실들에 대한 과학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결코 독립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3. 개개인 상호간의 독립성 즉 사적 이성의 자주성은 재능과 능력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법의 한계 안에서는 아무 위험없이 존속할 수 있다.


4. 비례균형은 물질의 영역이 아니라 지능과 감정의 영역에서만 인정되는 것으로서, 정의 및 사회적 평등을 침해하지 않고도 준수될 수 있다.

 

공유제와 소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이 제 3의 사회 형태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를 것이다.(자유란 권리와 의무를 균형잡는 일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균형을 잡는 것, 즉 자신을 다른 사람의 수준에 놓은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사회성은 성찰을 통해 정의가 되고, 능력들의 맞물림을 통해 형평이 되며, 자유를 그 정식으로 삼는다. ..의무와 권리는 우리들 안에서 욕구로부터 생겨나는 바, 이 욕구라는 것은 외부 존재와의 관련에서 생각되면 권리가 되며, 우리 자신과의 관련에서 생각하면 의무가 된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칭찬에 값는 것은 의무이며, 우리가 우리의 업적에 따라 평가받는 것은 권리이다. 우리에게 먹고 자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면과 영양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 것은 권리이며, 자연이 필요로 할 때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다. 407-410

 

 

사회성은 감성적 존재들 사이의 인력과 같은 것이다. 정의는 성찰과 인식을 수반하는 바로 이 인력이다....정의가 사회적 본능과 성찰의 혼합물인 것처럼, 형평은 정의와 취향의 혼합물, 내가 원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 평가하고 이념화하는 능력의 혼합생산물이다. ...사회성, 정의, 형평,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동료들과의 소통을 추구하게 하는 본능적인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 定意 이다. 이 본능적 능력의 물리적 표현 형태는 [자연 및 노동의 생산물에서의 평등]이라는 정식으로 나타난다....만일 내가 사회에서 내 동료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한동아리가 아니다.

 

 

정의란, 무게를 달고 길이를 잴 수 있는 유형의 물질들을 배분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나타나는 사회성이다. 반면에 형평이란 측정될 수 없는 물질, 즉 경의와 존중을 동반하는 정의이다....법률학, 경제학, 심리학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평등의 법칙을 부여한다. 권리와 의무, 재능과 노동에 따른 보상, 사랑과 열정의 약동, 이 모든 것이 굳건한 척도에 의해 미리 정해지며 수와 균형에 의존한다. 조건들의 평등, 이것이야말로 사회들의 원리이고, 보편적 연대성, 이것이야말로 이 원리의 재가이다....

 

 

피억압자에 대한 배려는 장관들의 곤혹스러움에 우선한다고, 그리고 조건들의 평등은 원초적인 법칙이며 공공 경제와 입법도 여기에 의존한다고. 노동의 권리, 그리고 재산의 균등한 분배에 대한 권리는 권력의 근심걱정 앞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나는 어중간하게 끝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일 언약의 궤에 손을 댄다면 내가 그 뚜껑을 벗겨내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좋다. 불의라는 성역을 둘러싼 신비를 벗겨내야 하고 낡은 언약의 석판을 부숴버려야 하며, 모든 낡은 숭배 대상들을 짐승의 먹이로 던져 버려야 한다. 327-364

 

 

 

뱀발.

 

 

1. 백만명의 사회, 십만명의 사회, 만명의 사회...천명의 사회라면 굶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자살을 한다면 그 사회의 문제점이 여실히 보일 것이다. 사회적 본능은 무엇일까? 그런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공유제를 주장한다면 다들 반대할 것이다. 공유제는 개인의 독립성이 사라지면 취향과 능력을 반영하는 비례균형을 살리지 못하는 악이다. 이는 지난 이,삼백년을 통해 누구나 절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 그 해법인가? 사회는 평등하지도 않다. 인간을 굶어죽이고 우울하게 만들어 죽이는 법의 부재를 용인할 것인가? 천명의 사회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형평이라고는 조금도 안중에 없는 이 구조를 용인할 것인가? 좀더 정의롭고, 좀더 형평이 맞았으면 좋겠고, 좀더 사회를 배려하면 좋지 않겠는가? 만명의 사회라면 당신은 좀더 생각하고 동의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본능이 왜 만명, 십만명,,,억만명이 산다고 달라져야 하는가? 뭔가 사회의 원리가 다를 것이라고 추측하는가? 다 죽는다. 소유권에 기반하는 법체계는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점유하다가 가는 것이라면, 그리고 굶어죽고, 억울해죽고, 아파서 죽는 이 현실을 통곡한다면,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면 자유만을 평등만을 소유만을 박애만 주장하는 치기에서 벗어나서 자유도 평등도 소유도 정의도 형평도 같이 꿰뚫고 버무리는 사회에 대해 같이 느껴야 한다는 말은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성찰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가슴저리도록....그렇다면 다단하고 복잡한 지금 현실도 한 꺼풀 벗겨질 수 있으리라. 부자됨을 부끄러워할 수 있으리라.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사회를 위해 표시내지 않고 할 일들을 찾아할 수 있으리라. 배고파, 억울해죽고, 우울해죽는 이들의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달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보다가 마음에 걸려 남긴다. 이른 잠, 꿈에 눌려 힘들다. 과거는 한번은 망치로 한번은 해머로 온다. 무거운 날이다. 부채는 이리도 많은지 싫다. 억울함은 이리도 많은지 싫다. 꽃들은 제 몸에 맞는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는데, 우리는 무슨 꼴이람 이렇게 허접하게 굴러가지 않는 세상걱정이나 해야 된다니 말야. 리셋하거나 새로만들거나? 위험한가? 그래 위험하지 당신이 그렇게 위험하다고 느끼는 세속에 절은 그 찌질한 생각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ㅎ.....안 그런가?

 

 

3. 치기는 이렇게 생긴다. 거인의 우쭐에 힘입어, 그 어깨에 타고 잠깐 보이는 안개너머 실루엣... 거인의 어깨에 내려오면 다시 아득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일상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쩌라구...곧 잊혀지고 버리는 소비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을 어쩌라구....방법은 있는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낙숫물로 바위뚫기........! 생각으로 생각뚫기! 말을 먹지 않고 나눈다면...생각을 머금지 말고 나눈다면... ...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왜 살지? 좋을 삶이란 무엇인가? ....입에 풀칠도 못하고 있다고... ...풀칠은 사회가 해줘야하는거야. 최소한 먹고살게는 해줘야하는 거라구....네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라구...이 사람아...세상 제법 산 것처럼 얘기하지 말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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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20 낮술의 변주 - 삶과 진보, 그리고 앎
시간, 공간의 성질 그리고 진보
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시간을 나누고 쪼개어서 아무 형체가 없는 원자로 만들어 버렸다. 삶을 쪼개고 나누어서 삶은 없어지고 일의 신민으로 삶은 해체되어 버렸다. 일만 남고 해체되어 버린 자아는 바쁘다. 일의 마수에 걸려 나는 없어졌다. 너도 너에게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어떤 삶을 살고자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겸연쩍다. 일의 마법에 걸려 나는 조바심이 나고 주체를 못한다. 나를 달래주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팝콘이다. 나는 바빠 어쩔 줄 모른다. 채우는 시간은 일을 위해 쓰이지 온전히 나를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런 나는 늘 허전하다. 공허하다. 주어진 시간은 막막하다.

 

 피로에 절은 몸을 달래주기만 할뿐, 피로에 잠긴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일의 신민으로 가는 길, 알량한 휴식은 그것을 위한 충전일뿐이다. 나의 시간, 나의 삶의 시간으로 쌓인 것이 없다. 나-너의 시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땀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몸에 쌓이던 희열의 시간은 오간데 없다. 추억만 할 뿐.  나의 죽음을 기억하려는 이, 하고 싶은 이도 없다. 나는 오로지 한 일이라곤 일밖에 없으므로, 일은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돈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것처럼. 버림받는 나는 죽음이 두렵다. 죽기싫고, 죽음의 저편을 생각조차하기 싫다. 그래서 건강의 오랏줄만 그러쥔다.

 

 나-너-나의 오목한 그릇에 우리의 시간이 모인다. 시간은 안남미처럼 날리지 않는다. 시간은 찰지며 달라붙는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시간은 너의 시간으로 팔벌여있다. 너의 손을 부여잡고 있다. 시간은 이력을 가지며 나뉘어진다.  나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지고 보인다. 너의 시간이 층층 묵은 맛을 낸다. 온전한 죽음이 온전한 발효,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시간은 더디가고 설레인다. 기다려진다. 숙성된 그 시간의 맛이 기다려진다. 기다려지고 멈춘다. 멈추니 너의 움직임이 보인다.

 

 

머무름의 기술: 시간의 향기 책갈피 (콕!)

 

 

사색적 삶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 좋은 삶의 계획이 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면, 영혼이 사색적 삶에서 활동적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때로 유용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타오른 사색의 불꽃을 통해 활동이 그 완전한 충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활동적 삶은 우리를 사색으로 이끌고 사색은 우리가 내면에서 관찰한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다시 활동으로 불러와야 한다. 178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정신이 생겨난 것도 남아도는 시간, 한가로움, 느린 숨결 덕분이었으리라. ...거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도 없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으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181


사색적 삶 속에서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시간 속의 활동과 일, 그리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177


노동과 부지런함이-보통은 위대한 건강의 여신을 추종하지만-때로 질병처럼 날뛴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증오하기 시작한다....사유가 시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유를 좌우한다. 이로써 사유는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된다. 사유는 더 이상 지속적인 것과 의사소통하지 못한다. 173


멈추어 설 줄 모르는 자는 완전한 타자에 접근하지 못한다. 경험은 변신을 가져온다. 경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중단시킨다. 더욱 활동적으로 된다고 해서 경험에 대한 수용성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특별한 수동성이 필요하다. 경험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주체의 활동성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의 다가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167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보통 고차적인 활동이 없다. 개인적 활동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관리로서, 상인으로서, 학자로서, 즉 일정한 부류에 속한 존재로서 활동할 뿐, 결코 개별적이고 유일한 특정 인간으로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게으르다....활동적인 사람들은 돌이 구르듯이 구른다. 어리석은 기계의 원리에 따라서. - 니체 166

 

마르크스의 주체는 그 출신 성분상 언제나 노동의 주체로 남아있다. 그는 설사 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할 능력이 없다. 이 주체는 일 바깥에서는 기껏해야 소비의 주체일 뿐이다. 노동자와 소비자는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 그들은 공히 시간을 소모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사색적 삶에 접근하지 못한다. 160


노예는 주인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일의 명령은 이제 주인과 노예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일의 노예인 노동사회, 노동하는 자들의 사회가 탄생하다. 모든 것이 노동이어야 한다. 노동이 아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의 명령은 시간마저 일하도록 만든다....모든 행위의 에너지가 노동에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에, 일이 없는 시간에 가능한 것은 그저 수동적인 오락뿐이다. 156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다. 소비의 대상은 사색적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물건들은 최대한 빨리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제품, 새로운 수요를 위한 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색적 머무름은 지속되는 사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소비의 강요는 지속성을 철폐한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도 지속성을 정립하지 못한다. 소비태도로 본다면 '슬로푸드'도 '패스트푸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물이 소모되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키지는 못한다. 진짜 문제는 지속되는 것, 긴 것, 느린 것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즉 삶에서 완전히 제거되어간다는 데 있다. 사색적 삶의 형식은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처럼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세운 존재 양식과도 동일한 것이다...노동으로서의 시간은 지속성이 없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시간을 소모한다 반면 긴 것, 느린 것은 소모와 소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지속성을 확립한다. 사색적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150

 

 

 

권 태


깊은 권태의 원인은 행위의 결단에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강박주의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 135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 134


적극적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권태를 깊게 만든다. 시간 자체가 공허해진다. 시간은 더 이상 묶어두고 모아들이는 중력을 발산하지 않는다. 시간은 더 이상 충만하지 못하다. 행위 주체의 자유만으로 아무런 시간의 중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의 행위 충동이 새로운 대상을 점유하지 못할 때, 따분하게 느껴지는 공허한 간격이 생겨난다. 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129

 

가속화와 사색의 상실


가속화는 불안정하다는 것, 정주할 곳이 없다는 것, 받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속화된 장면들과 사건들의 연속이 오늘날 세계의 걸음걸이라면, 이는 곧 받침대의 부재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생활세계의 전반적인 가속화는 단지 증상일 뿐이고, 그 원인은 더 깊은 층위에 놓여 있다. 119


하이데거의 토착성과 고향의 철학은 소멸해버릴 위기에 처한 정주의 터전을 안정시키려는 시도이다. 하이데거의 사물은 사용과 소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사색적 머무름의 장소이다. 항아리는 세계 안에서 정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물의 좋은 사례가 된다. 담아두는 용기이자 내용물이 흘러내리거나 줄줄 새지 않도록 받쳐준다. 117


가속화와 사색적 삶의 상실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색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무능력이 어떤 원심력을 발생시켜, 이로부터 전반적인 조급증과 산만성이 초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의 과정이 가속화된 것도, 사색적 능력이 없어진 것도,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실종시킨 역사적 구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14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105


하이데거는 가속화에 의한 "일상 세계의 파괴"의 원인을 현존재의 본성에 내재하는 "가까움을 향한 경향"에서 찾는다. "현존재는 본성상 거리를 제거하려 한다. 현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로서 언제나 존재자를 가까이 오게 한다....현존재 속에는 본성적으로 가까움을 향한 경향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어는 정도 타의적으로 함께 따라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가속화는 먼 거리의 극복을 독려한다. 102..뉴미디어의 시대는 내파의 시대다. 공간과 시간은 내파되어 여기와 지금이 된다. 모든 것이 탈거리화된다. 탈거리화해서 안 되는 신성한 공간, 비워져 있다는 것을 본질로 하는 그런 공간은 더 이상 없다.... 사색적인, 머무르는 시선은 탈거리화하지 않는다. 103

 

 

 

시간의 향기


모든 시간은 각자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겠는가?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밤은 또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100.

아직 좀더 남았네요. 책갈피가...

 

 

뱀발. 시간에 대한 깊은 사색을 대면하게 되어 설레인다.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지? 정말 하고싶은 것이 번개처럼 스쳐 삶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끄는 것처럼 문득 끌려가는 삶에 대한 자각. 아니면 불현듯 나무 한그루가 꽃 한송이가 마음을 뒤흔들어 계절따라 반복되지만 자라는 시간들. 받침대 같은 뭔가 기댈 수 있는 고향의 나무같은 존재들. 시간이 그물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너-나-너의 그물에서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도곁과 안의 변화가 정치의 논리와 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제도밖의 변화의 준거를 시간으로 잡아보면 어떨까? 그 시간의 결이 진부한 진보를 가르는 것일 수 있다면... ... 진보가 정녕 이념의 진보가 아니라 삶과 삶들의 자장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 실뿌리같은 희망, 진정성있는 저류의 진보란 잣대가 시간을 대하고 어루만지는 것에 있다면... ... 아마 이것도 목련 직박구리가 탐하는 소리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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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가 사멸하도록 내버려두자. 노쇠한 독직자들이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자.

 거룩한 대지가 그들의 뼈를 덮지는 않으리라.

 

 세기의 부패에 격분하고 정의의 열정에 목마른 젊은이여.

 만일 그대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만일 인류의 복지를 염려한다면,

자유의 대의를 과감히 껴안아라.

그대의 낡은 이기심을 벗어 던지고

갓 태어난 평등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맡기라.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프루동 선언문 

 

 

 

 

 
 

캐캐묵은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 새로운 태양 아래서 지표면도 새로워질 것이다. 한 세대가 사멸하도록 내버려두자. 노쇠한 독직자들이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자. 거룩한 대지가 그들의 뼈를 덮지는 않으리라. 세기의 부패에 격분하고 정의의 열정에 목마른 젊은이여. 만일 그대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만일 인류의 복지를 염려한다면, 자유의 대의를 과감히 껴안아라. 그대의 낡은 이기심을 벗어 던지고 갓 태어난 평등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맡기라. 그 물결에 잠긴 그대의 영혼은 지금껏 몰랐던 정기와 활력을 얻으리라. 그대의 유약해진 천성은 억누를 길 없는 활력을 얻으리라. 이미 시들어버린 그대의 마음은 아마도 다시 젊어지리라. 맑아진 그대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새로운 감정들이 그대에게서 새로운 관념을 낳을 것이며, 종교, 도덕, 시, 예술, 언어 등이 더 장대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신념을 확신하고 심사숙고 끝에 더욱 열정적이 되어 보편적 갱생의 여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대, 사악한 법률의 슬픈 희생자, 빈정거리는 세상에 의해 헐벗고 두드려 맞은 그대, 결실 없는 노동과 희망 없는 휴식에 지친 그대여, 용기를 잃지 말라. 그대의 눈물은 보상을 받으리라. 아버지들이 고통 속에서 씨를 뿌렸으니, 아들들이 환희 속에서 그것을 거두리라.

 

 

 

아아,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내가 이성에 의해 깨닫기전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 정의의 감정을 심어준 신이여,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지금껏 써내려 온 것을 내게 불러준 이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나의 사상을 만들어 주고 나의 연구를 지도하였으며, 나의 정신을 호기심에서, 나의 마음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소이다. 그것은 내가 주인과 노예 앞에 당신의 진리를 널리 펼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준 힘과 재능에 의해 말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은 내가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아, 자유의 신이여! 아아! 나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지워주소서. 인류가 자유롭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마침내 깨우친 인민을 그저 나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고귀한 교육자들이 인민을 계도하게 하소서. 사심 없는 마음이 인민을 인도하게 하소서. 가능한 만큼 우리의 시련의 시간을 줄여주시고, 오만과 탐욕은 평등 속에 묻어 버리소서. 우리를 예종 속에 가두어 놓은 이 영예에 대한 허망한 욕구를 꺾어 버리소서. 이 가련한 자녀들에게 자유 속에는 어떤 위인도 영웅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소서. 권세자에게, 부자에게, 그리고 내가 당신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자들에게 그들의 탐욕이 가져올 공포를 일깨우소서. 그들이 앞을 다투어 회개하게 이끄시고 남보다 먼저 뉘우치는 자를 용서하소서. 그러면 위대한 자든 미천한 자든 박식한 자든 무지한 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애 속에 맺어질 것이며, 모두 함께 새로운 찬가를 부르면서 당신의 제단을 세울 것입니다.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시종 논증과 반증, 설득을 거듭하던 그의 글은 몇번의 갈무리를 함과 동시에 전편을 아우르는 결론으로 다짐을 한다. 명제의 숲과 담장을 넘어 허투르 허물어지는 개념을 다시 잡아 일으켜 세운다. 정신차리라구 말이다. 구약과 신약,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그리스 신화, 철학,  심리학, 식물학, 동물학,수학, 정치학, 비코와 헤겔에 이르면서 말이다. 혁명과 혁명사이를 넘나든다. 혁명의 슬로건과 현실의 반영을 세밀하게 들여다 본다. 경제학자의 논거를 설명하면서 왜 이 부분에서 오버를 할 수 밖에 없는지 타이른다. 어느 상황에서는 반론의 물결을 감안하면서 단호하기까지 하다. 그가 호흡과 격정을 얼마나 참으면서, 얼마나 많은 상황과 논리를 감안하는 비례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는지는  마지막 쪽 말미 책장을 닫기 전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격정과 울분, 노여움,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격문이 무엇이었는지 새롭게 다가서게 만든다. 다른 모든 밑줄이 소용없는 듯 절절해 마음이 아리다 못해 잔 한잔 올리며 느낌을 서툴게 맺는다.

 

 

뱀발. 

 

1.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면, 만약 국제인터내셔널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주도만이 아니었다면 바쿠닌, 프루동의 몫이 더 컸더라면,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다른 이들의 울림의 파고가 더 진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역사란 복기는 없지만 과거를 자양분으로 다시 자라는 것이라면, 공산당선언문 만큼, 프루동의 사상이 응축된 프루동의 격문을 한번 더 새겨보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다시 꼼꼼이 현실과 되짚어 보는 일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긴장도 되고 두근두근 설레이기도 하고, 그가 원하는 깨달음까지 몸 깊숙히 침잠한다면, 그의 말처럼 영웅의 시대는 가고 그 영웅을 묵묵히 받쳐주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역사는 어느 순간 부자도 자발적으로 프루동에게 그의 말대로 감사를 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는 늘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닐까? 벚꽃과 철쭉, 상가 소식이 흩날리는 봄날의 말미에 겨우 책장을 덮는다. 자유와 소유, 공유, 평등, 사회, 형평을 이리 쉽게 꿰뚫으면서 설명해줄 수 있단 말인가? 본디 하나라구... ...

 

2. 공유제도의 장단점, 소유의 장단점, 그리고 공유-소유를 변증법적으로 넘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 공동체가 인류사에서 집어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소유가 도둑질이지만, 축적을 기본으로 하는 경쟁인 반면 취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간명하게 풀어놓는다. 무수한 분권, 자치, 공동체 논의에 참고가 될 만할 듯 싶다.

 

3.  다른 밑줄은 따로 모아두려고 한다. 늦은 밤, 눈썹같은 초승달이 고울 것이다. 봄바람에 벚꽃이 후두둑, 목련이 툭툭 떨어지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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