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성질
55 1922년의 일기에서 카프카는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의 불일치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적어놓았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자는 것도, 깨어나는 것도, 삶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계가 맞지 않는 것이다. 내부의 시계는 사악하게 혹은 악마라도 씐 듯이-어쨌든 비인간적으로-달려간다. 반면 외부의 시계는 비틀비틀하면서도 자신의 본래 속도를 유지하며 걸어간다.” 그의 주인공들은 너무 일찍 도착하면 부조리함을, 늦게 도착하면 죄의식을 느낀다.
61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어떤 좌표게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이 다른 좌표계에서 관찰해보면 얼마나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1916년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들이 갖가지 중력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리고 중력은 가속도와 상응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의 특정한 시간을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62 뒤르켐은 [분류의 미개형태]에서 시간은 사회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지나는 길에 언급했다. 그리고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그는 사적인 시간과 사회적 기원을 갖는 ‘일반적인 시간’을 구분한다. “시간이라는 범주의 바탕에는 사회생활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 등의 분할은 제의, 축제, 그리고 공동 행사의 주기적 순환과 일치한다.” 각 사회는 시간 속에서 생활을 조직하고 리듬을 정립한다. 그러고 나면 이 리듬은 모든 시간적 활동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단일한 틀이 된다.
76 시간을 개별적 단위들의 총합이 아니라 일종의 흐름으로 간주하는 이론은, 인간의 의식을 개개의 정신 기능이나 관념들의 집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는 이론과 연결된다. 최초로 정신을 ‘생각의 흐름’이라고 부른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였다.
78 베르그송에 따르면 “정신의 모든 심상들은 자유로이 흘러가는 주변의 물속에 잠겨들면서 물든다.” 정신적인 사건들은 저마다 그 이전과 이후 혹은 그것의 근거리나 원거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은 정신적 사건 주변에서 ‘달무리’나 ‘가장자리 술장식’처럼 작동한다. 인간의 정신생활에 있어서 단일한 속도란 없다. 정신생활은 “날아다니기도 하고 가지 위에 차분히 앉아 있기도 하는 새들의 생활과 닮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천천히 넘실거리며 흐른다고 할 수 있지만, 각각의 부분들은 상이한 속도로 움직이면서 급류의 소용돌이처럼 서로 부딪치며 흘러간다.
79 제임스와 베르그송이 생각에 대해 다소 상이한 은유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이란 것이 불연속적인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 의식의 모든 순간은 늘 변화하는 과거와 미래의 종합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흐른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94 버지니아 울프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끔찍한 서사방식. 점심 식사 때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의 경과를 서술하는 것,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그저 관습일 뿐이다.” 그녀는 시간을 문학 속에서 다루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토머스 하디의 견해를 언급해 놓았다. “지금 그들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우리는 처음이 있고 다음에 중간이 있고 마지막으로 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신봉자이다.”
96 앙리 위베르와 마르셀 모스는 [종교와 주술에 있어서 시간의 재현에 대한 개략적 연구]에서 종교와 주술에서 시간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시간이 연속의 경험, 그것도 양적인 경험이 아니라 질적인 경험에 대해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시간이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이며 확장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는 가역적이기도하다고 보았다. 뒤르켐과 함께 그들은 시간의 불균질성이 시간의 사회적 기원에 의해 보증된다고 주장했다.
97 베르그송의 뒤를 이어 위베르와 모스는 시간을 역동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을 “능동적인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능동적 긴장에 의해 의식은 자립적인 지속들과 상이한 리듬들 간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우리가 일률적이고 균질적인 시간을 사적으로 경험할 때 심리적 긴장들이 구성되는데, 주술과 종교의 시간이란 바로 이 긴장들 사이의 절충물이다. 기념의식, 특히 주술적인 현상이나 성스러운 현상과 관련된 의식은 개개인의 고유한 삶의 리듬을 사회공동체의 일률적인 리듬에 통합시킨 것이다.
99 시간의 수, 구조,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립양상은 통념적인 시간 분류(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까지 더해지면서 한층 복잡해졌다.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시간은 유일무이하다.’라는 전통적인 견해 자체는 도전받지 않았지만 많은 사상가들은 사적인 시간의 복수성을 주쟁했다.... 사적 시간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간마다 다르고, 사람의 개성이나 인격에 따라 개인간에도 차이가 있다. 또한 사적 시간은 사회조직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에 집단 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사적인 시간은 유동적인 것이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라는 혁신적인 생각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철도가 깔리면서 전원의 아취와 고립이 동시에 파괴되었듯이, 세계 공통의 시간이 보편적으로 부과되자 사적 시간에 있어서의 독특한 사적 경험이 침식되기 시작했다.
공간의 성질
343 일반 상대성 이론과 함께 공간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자아내는 모든 중력장들을 포함하며) 움직이고 있는 좌표계의 수만큼 공간이 있는 셈이었으니까. 1920년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대담하게 요약했다. “무한수의 공간이 있고, 그 공간들은 서로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 다행스럽게 레닌은 혁명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주목하지 못했다.
345 모든 생물은 하나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만의 주변세계를 갖고 있다. 종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외부세계에 반응하며 그 반응은 자신만의 특별한 내부세계를 창출한다. 하등동물들은 자극에 직접반응하며, 오직 시각기관을 보유한 고등동물만이 그들 특유의 공간감각을 발전시킨다. 고등동물의 뇌는 직접 접촉을 통해 주변세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대상들을 환경 속에 비춰볼 수 있으며, 심지어 환경 속에서 공간적 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반영세계 혹은 역세계는 신경계와 근육조직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이리하여 내부세계, 주변세계, 역세계는 동물 각각의 ‘얼개구도’에 따라 다르며 각각의 공간감각을 구성해낸다.
368 현대의 미술은 더 이상 과학적 원근법의 규칙에 노예노릇을 할 수 없다. “강과 수목의 잎들, 그리고 강둑의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실제적인 비례에 충실하다 해도, 그 폭이나 두께, 높이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며, 이 차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도 측정되지 않는다....”“수축시키든 팽창시키든 회화 평면을 변형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전 인격이다. 그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평면은 그 인격성을 관람자의 이지 위에 다시 비춰주는데 바로 그때 회화 공간이 설정된다. 감성이 두가지 주체적 공간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통로로서의 회화 공간이 설정된 것이다.“ 소실점 기법의 전통적인 회화공간과 결별한 입체파의 글레즈와 메칭거
372 “우리가 안 지 오래된 곳들은 지금은 다만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낸 작은 공간에 속해 있을 뿐이다. 그들 중 어느 곳도 그때 우리의 삶을 구성하더 인접한 인상들 사이에 끼어 있는 얇은 조각에 불과했다. 특정 형태에 대한 기억은 곧 특정 순간에 대한 회한일 뿐이다. 집, 길, 거리들은 아! 세월만큼이나 쉽사리 사라져가는구나.” 공간은 관점, 생각, 감정 등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공간 안의 사물들이 시간 속에서 부단히 변하는 과정을 겪는다.
375 객관적인 사실의 진리성에 대한 실증주의자의 신념과 정반대로 니체는 그런 것은 없으며 오직 있는 것은 관점들과 해석들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에게 “인식을 위해 다양한 관점과 정서적 해석을 이용하라.”고 촉구했다.
377 20세기 들어 관점주의를 정식화한 사람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였다. 합리주의자들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주관적인 관점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들을 제거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관점주의를 정립한다. “이런 식으로 가정되는 유일불변의 현실은 .... 존재하지 않는다. 관점의 수만큼 현실들이 존재한다.” “ 신은 시점이며 위계다. 악마의 죄는 시점의 오류였다. 이제 시점은 관점들이 복수화됨에 따라 완벽해진다.” 합리주의적 입장은 공간의 균질성을 주장했는데, 오르테가는 현실에는 시점의 수만큼 많은 공간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379 오르테가는 수학자의 관점이든 철학자의 관점이든 국가의 관점이든 간에 어쨌든 하나의 관점만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 자기중심주의에 도전한 것이었다. 지성이 발전하고 문화가 진전하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의 다양성이 사회에 충분히 수용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다. 현실을 “하나의 종에서 다음 종으로,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이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흘러가면서 점점 더 보편적인 현실성을 획득하는 생의 흐름 속에” 놓을 수 있는 관찰자야말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다.
뱀발.
1. 어제 밤 술에 감겨 해닥사그리할 때까지 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빈 컵라면 그릇이 좌탁에 놓인 걸보니 어젯일이 옹송망송... ... 모처럼의 휴식 게으름도 보태고 오전의 말미까지 잇다가 책꽂이에서 지난 책을 꺼낸다. 조정환의 촛불의 시간까지 시간에 대한 세권을 따로 포개어 둔다.
2.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는 다시 펼쳐보니 발췌독을 하였다. 다시 잡아드니 1차세계대전까지 자본주의와 학문의의 경계들 넘나들면 통합적으로 쓴 38년간의 기록이다. 미술, 철학, 소설, 역사, 지역 어느 한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맥락을 이어주는 놀라운 책이다. 그 가운데 시간/공간의 성질에 대해 따로 새겨보다.
3. 카이로스 - 혁명은 시간은 여러번 강독하여 잔영이 아직 몸에 남아있다. 비교하여 읽다보니 오히려 시간, 공간에 대한 건드림의 맛이 차이가 난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