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520 낮술의 변주 - 삶과 진보, 그리고 앎
시간, 공간의 성질 그리고 진보
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시간을 나누고 쪼개어서 아무 형체가 없는 원자로 만들어 버렸다. 삶을 쪼개고 나누어서 삶은 없어지고 일의 신민으로 삶은 해체되어 버렸다. 일만 남고 해체되어 버린 자아는 바쁘다. 일의 마수에 걸려 나는 없어졌다. 너도 너에게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어떤 삶을 살고자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겸연쩍다. 일의 마법에 걸려 나는 조바심이 나고 주체를 못한다. 나를 달래주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팝콘이다. 나는 바빠 어쩔 줄 모른다. 채우는 시간은 일을 위해 쓰이지 온전히 나를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런 나는 늘 허전하다. 공허하다. 주어진 시간은 막막하다.

 

 피로에 절은 몸을 달래주기만 할뿐, 피로에 잠긴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일의 신민으로 가는 길, 알량한 휴식은 그것을 위한 충전일뿐이다. 나의 시간, 나의 삶의 시간으로 쌓인 것이 없다. 나-너의 시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땀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몸에 쌓이던 희열의 시간은 오간데 없다. 추억만 할 뿐.  나의 죽음을 기억하려는 이, 하고 싶은 이도 없다. 나는 오로지 한 일이라곤 일밖에 없으므로, 일은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돈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것처럼. 버림받는 나는 죽음이 두렵다. 죽기싫고, 죽음의 저편을 생각조차하기 싫다. 그래서 건강의 오랏줄만 그러쥔다.

 

 나-너-나의 오목한 그릇에 우리의 시간이 모인다. 시간은 안남미처럼 날리지 않는다. 시간은 찰지며 달라붙는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시간은 너의 시간으로 팔벌여있다. 너의 손을 부여잡고 있다. 시간은 이력을 가지며 나뉘어진다.  나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지고 보인다. 너의 시간이 층층 묵은 맛을 낸다. 온전한 죽음이 온전한 발효,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시간은 더디가고 설레인다. 기다려진다. 숙성된 그 시간의 맛이 기다려진다. 기다려지고 멈춘다. 멈추니 너의 움직임이 보인다.

 

 

머무름의 기술: 시간의 향기 책갈피 (콕!)

 

 

사색적 삶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 좋은 삶의 계획이 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면, 영혼이 사색적 삶에서 활동적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때로 유용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타오른 사색의 불꽃을 통해 활동이 그 완전한 충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활동적 삶은 우리를 사색으로 이끌고 사색은 우리가 내면에서 관찰한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다시 활동으로 불러와야 한다. 178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정신이 생겨난 것도 남아도는 시간, 한가로움, 느린 숨결 덕분이었으리라. ...거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도 없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으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181


사색적 삶 속에서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시간 속의 활동과 일, 그리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177


노동과 부지런함이-보통은 위대한 건강의 여신을 추종하지만-때로 질병처럼 날뛴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증오하기 시작한다....사유가 시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유를 좌우한다. 이로써 사유는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된다. 사유는 더 이상 지속적인 것과 의사소통하지 못한다. 173


멈추어 설 줄 모르는 자는 완전한 타자에 접근하지 못한다. 경험은 변신을 가져온다. 경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중단시킨다. 더욱 활동적으로 된다고 해서 경험에 대한 수용성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특별한 수동성이 필요하다. 경험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주체의 활동성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의 다가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167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보통 고차적인 활동이 없다. 개인적 활동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관리로서, 상인으로서, 학자로서, 즉 일정한 부류에 속한 존재로서 활동할 뿐, 결코 개별적이고 유일한 특정 인간으로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게으르다....활동적인 사람들은 돌이 구르듯이 구른다. 어리석은 기계의 원리에 따라서. - 니체 166

 

마르크스의 주체는 그 출신 성분상 언제나 노동의 주체로 남아있다. 그는 설사 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할 능력이 없다. 이 주체는 일 바깥에서는 기껏해야 소비의 주체일 뿐이다. 노동자와 소비자는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 그들은 공히 시간을 소모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사색적 삶에 접근하지 못한다. 160


노예는 주인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일의 명령은 이제 주인과 노예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일의 노예인 노동사회, 노동하는 자들의 사회가 탄생하다. 모든 것이 노동이어야 한다. 노동이 아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의 명령은 시간마저 일하도록 만든다....모든 행위의 에너지가 노동에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에, 일이 없는 시간에 가능한 것은 그저 수동적인 오락뿐이다. 156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다. 소비의 대상은 사색적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물건들은 최대한 빨리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제품, 새로운 수요를 위한 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색적 머무름은 지속되는 사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소비의 강요는 지속성을 철폐한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도 지속성을 정립하지 못한다. 소비태도로 본다면 '슬로푸드'도 '패스트푸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물이 소모되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키지는 못한다. 진짜 문제는 지속되는 것, 긴 것, 느린 것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즉 삶에서 완전히 제거되어간다는 데 있다. 사색적 삶의 형식은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처럼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세운 존재 양식과도 동일한 것이다...노동으로서의 시간은 지속성이 없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시간을 소모한다 반면 긴 것, 느린 것은 소모와 소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지속성을 확립한다. 사색적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150

 

 

 

권 태


깊은 권태의 원인은 행위의 결단에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강박주의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 135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 134


적극적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권태를 깊게 만든다. 시간 자체가 공허해진다. 시간은 더 이상 묶어두고 모아들이는 중력을 발산하지 않는다. 시간은 더 이상 충만하지 못하다. 행위 주체의 자유만으로 아무런 시간의 중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의 행위 충동이 새로운 대상을 점유하지 못할 때, 따분하게 느껴지는 공허한 간격이 생겨난다. 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129

 

가속화와 사색의 상실


가속화는 불안정하다는 것, 정주할 곳이 없다는 것, 받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속화된 장면들과 사건들의 연속이 오늘날 세계의 걸음걸이라면, 이는 곧 받침대의 부재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생활세계의 전반적인 가속화는 단지 증상일 뿐이고, 그 원인은 더 깊은 층위에 놓여 있다. 119


하이데거의 토착성과 고향의 철학은 소멸해버릴 위기에 처한 정주의 터전을 안정시키려는 시도이다. 하이데거의 사물은 사용과 소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사색적 머무름의 장소이다. 항아리는 세계 안에서 정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물의 좋은 사례가 된다. 담아두는 용기이자 내용물이 흘러내리거나 줄줄 새지 않도록 받쳐준다. 117


가속화와 사색적 삶의 상실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색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무능력이 어떤 원심력을 발생시켜, 이로부터 전반적인 조급증과 산만성이 초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의 과정이 가속화된 것도, 사색적 능력이 없어진 것도,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실종시킨 역사적 구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14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105


하이데거는 가속화에 의한 "일상 세계의 파괴"의 원인을 현존재의 본성에 내재하는 "가까움을 향한 경향"에서 찾는다. "현존재는 본성상 거리를 제거하려 한다. 현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로서 언제나 존재자를 가까이 오게 한다....현존재 속에는 본성적으로 가까움을 향한 경향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어는 정도 타의적으로 함께 따라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가속화는 먼 거리의 극복을 독려한다. 102..뉴미디어의 시대는 내파의 시대다. 공간과 시간은 내파되어 여기와 지금이 된다. 모든 것이 탈거리화된다. 탈거리화해서 안 되는 신성한 공간, 비워져 있다는 것을 본질로 하는 그런 공간은 더 이상 없다.... 사색적인, 머무르는 시선은 탈거리화하지 않는다. 103

 

 

 

시간의 향기


모든 시간은 각자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겠는가?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밤은 또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100.

아직 좀더 남았네요. 책갈피가...

 

 

뱀발. 시간에 대한 깊은 사색을 대면하게 되어 설레인다.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지? 정말 하고싶은 것이 번개처럼 스쳐 삶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끄는 것처럼 문득 끌려가는 삶에 대한 자각. 아니면 불현듯 나무 한그루가 꽃 한송이가 마음을 뒤흔들어 계절따라 반복되지만 자라는 시간들. 받침대 같은 뭔가 기댈 수 있는 고향의 나무같은 존재들. 시간이 그물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너-나-너의 그물에서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도곁과 안의 변화가 정치의 논리와 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제도밖의 변화의 준거를 시간으로 잡아보면 어떨까? 그 시간의 결이 진부한 진보를 가르는 것일 수 있다면... ... 진보가 정녕 이념의 진보가 아니라 삶과 삶들의 자장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 실뿌리같은 희망, 진정성있는 저류의 진보란 잣대가 시간을 대하고 어루만지는 것에 있다면... ... 아마 이것도 목련 직박구리가 탐하는 소리겠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