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요구없이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인권운동가 Frederik Douglass 

 
힐링과 치유가 대세다. 힐링도 해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것이나마 있는 것이 다행이 아닌가라고 했다.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아픔을 달래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루만지기만 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물로 달래는 마음은 자고 일어나도 또 다시 현실은 버티고 서있다. 이런 연유로 현실 문제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제도와 법, 정치가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vs 급진주의
 

419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에는 2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는 관념적이다. 사회현실을 파헤치다 보면 그 핵심을 관념과 개념, 언어, 태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다. 그와 대조적으로 급진주의자는 유물론적이다. 그들은 사회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실제 제도의 합므오 보고, 그 제도들이 폭력을 비롯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기본 사회 단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이어서 사회의 기본 조직을 개인으로 본다.  따라서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전략은 거의 항상 개인행동에서 출발한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의 기본 조직을 계층이나 단체로 본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을 단체의 성원으로 보는 것 자체가 해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급진주의자들은 함께 박탈당한 사람들과 공동의 이익을 찾고 동지에 대한 충성심을 길러 나가는 것을 해방 운동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억압을 실수, 오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교육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급진주의자들은 억압을 서로 맞물린 제도와 체제의 문제라고 간주하고 권력과 직접 대결해 문제의 제도와 체제를 해체하는 것을 최선의 전략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와 급진주의를 구분한다. 개인과 계층,단체, 관념적인 것과 유물론적인 것, 문제해결 방법의 차이로 나뉜다. 지금 여기에서 흔한 방법인 '내탓이오'류와 대안문화를 만드는 해결책들이 그것에 가깝다. '도를 아십니까'나 근본생태주의가 개인을 중심에 두고 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개인에 방점을 둔 해결책들이 너무 일상화된 것이 아닌가하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홀로해결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그 한계가 명백하다. 현실은 요지부동 벽처럼 버티고 서있다. 스스로 해결책이라고 문화를 지켜나가는 이도 흔들리고 흔들린다. 그 벽을 부수거나 제도를 바꾸어내어 받는 수혜에 민감하지 못한 건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라고 한다.

 

420 

미국 좌파는 자유주의를 너무 마음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실제 무언가를 실행에 옮겨 성과를 거두는 일과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되었다. 사회 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집단 치유로 둔갑했다. 이제 무엇을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해졌다. 어떤 행동이든 권력의 물리적 균형을 바꾸려는 목적이 아니라, '주체감'과 '공동체'를 느끼거나, 못된 엄마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유년의 나를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 사랑과 연민을 주려는 목적에서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자아를 중심으로 한 끝없고 쓸모없는 행위다. 이런 워크숍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자아 성찰 행위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지구는 학살당하고 있다. 자기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결국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자는 힐링과 치유, 워크숍 문화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뭔가 바꾸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회운동은 이런 집단치유에 목매고 있는지 되살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극단적 채식주의나 문제 해결에 빠지는 것도 정작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법이라 충고한다. 그 방식은 정작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용기와 희생, 끈기, 명예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변화만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개인주의의 막다른 골목은 '생활 방식 운동가'들의 극단적 정결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사회 운동가의 임무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 갈고닦아 체제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접근법(개인의 심리학적 변화 혹은 개인적 생활 방식의 선택) 모두 범세계적 권력구조를 깨뜨리는 데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들은 궁극적으로 불의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으로, 운동의 목표를 정치적 변화에서 개인적 변화로 변경해 버린다. 이 방법은 쉽다. 훨씬 쉽다. 우리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기나 희생, 끈기, 명예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우리 한 가족이 뱉어내는 소비재 쓰레기가 제3세계 마을을 하나씩 채우고도 남는 현실에서 지역 식량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방법 외에 좀더 다각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한다.


 

427 우리의 모든 사회적, 영적, 성적 복지는 차 2대, 아이 둘, 행복한 이성 결혼 관계의 핵가족에 의존하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소비재 쓰레기는 제3세계 국가의 마을 하나를 채우고도 남는다.

 

이제는 우리의 책임을 다시한번 상기해야 한다. 유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책임을 절감해야 한다.  지구는 우리가 치유자처럼 생각하는 한 구체적인 변화는 없다. 새로운 대안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지배문화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힘은 한번도 요구없이 내준 적도, 앞으로도 절대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인권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말을 남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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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뿌리는 궁극적으로 지배-종속 관계를 에로틱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다." -  Sheila Jeffrery 성정치학자

 

여성 혐오증, 인종 차별주의, 군국주의가 사회에서 조금 희석되며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 여성성이 좀더 들어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세상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 의문에 회의가 드는 지금이다.  제도적인 문제, 사회적 약자로 여성을 봐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애정어린 시선으로 남성성을 표현하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니다. 무척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로 과도한 여성성때문에 남자가 피해보고 있다라고 문제를 전혀 엉뚱한 구석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즉자적인 상황만 보려하고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사한 채, '그래 여자때문이야'라는 말들이 번지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이주노동자'때문이야.  '흑인'과 '동양인'때문이라는 인종차별처럼 말이다.

 

가부장제의 진짜 영리한 부분은 억압 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 잔혹한 행위를 하는 주체는 성적 흥분을 느낀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런 행위는 증오로 가득 찬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남자들이 벌거벗기고 굴복의 자세를 취한 채로 사진에 찍히면, 그에 나타난 권력과 억압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전 세계가 분노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소녀가 팔려 가 강간을 당하고 '전시'되면, 전 세계는 더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성매매 수입에 온 나라의 예산이 왔다 갔다하는 나라도 있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영악함과 남성성의 유지는 억압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 연유라고 꿰뚫는다. 이라크전쟁에서 여군이 이라크 병사들을 끌고 벗기고 고문하는 사진에 전 세계가 일제히 문노한다.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이 강간하려고 한 사실에는 그 권력과 억압의 관계가 드러나기는 커녕 그 여자가 누구인지 더 보고 싶어하는 이중성있는 태도를 통찰력있게 설명해낸다. 전자가 미군의 야만성과 인권무시에 대해 철저한 규탄을 불러왔다면 후자는 그런 행태가 반복됨에도 그 뿌리깊은 권력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을 여전히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이 바래버렸다.

 

 

지배라는 개념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덧입히는 한 여성 혐오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종 차별주의의 종식도 없다. 바로 이 문제야말로 좌파들이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선 남성성이 왜 자가증식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에로틱한 이미지가 권력과 지배, 그 모순들 속에 겹치는 순간, 문제는 희석되며 상황은 계속 반복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파시즘의 뿌리도 과도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동때문이라는 성정치학자 쉴러 제퍼리의 말을 새겨듣지 않으면 안된다. 


(채식의 배신.  415-41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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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 오르고 긴가민가 갈피가 없는 이야기에 오른다. 뻥이 절반이 넘는 듯싶어 들은 얘기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고 싶단 생각도 해본다. 피곤에 절어 들어온 늦은 시각.  차에 둔 반기는책을 들고와 펼쳐본다. 이런 일이 서툴다. 헌데 책들 사이사이 취기에도 솔깃하고 궁금하고 설레는 건 어떤 이유인가? 늘 너의 단맛에만 빨대를 꽂으려 하는 데  폭염 속 선풍기 바람만 오른 미열을 식히는 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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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장석준샘이 무슨당 부대표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오히려 궁금해지는 것은 그의 노력의 흔적과 관심사이다. 그간의 공들인 작업은 서툴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약도? 진보?의 약도 대안?의 약도. 그것을 그리기 위해 읽고 읽고 또 읽는데에 진심이 있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진영에 갇혀있다면, 그것이 전공이든, 지인들과 관계든 그것이 구애받지 않고, 새롭게 읽고 그 지점을 약도에 그려넣고, 또 다시 읽으려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온다. 지근거리에서 보고 느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지만, 속마음과 속내는 서재 안의 고민과 숨결에서 새롭게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식소매상, 수입상, 진영의 파도가 넘나들던 시대가 지난 것은 아닐까? 한 젊은 청년의 박가분이란 서재의 블로그에서 오로지 지금 여기, 책의 숲을 통해 나름대로 관점을 이룬 것과 그 과정의 깊이와 열정이 느껴져 반가웠다. 이렇게 앎의 맥락을 갖고 쌓아나가기는 예전처럼 어렵지 않다. 앎이란 것 그것에서 새로운 실뿌리와 새로운 시도를 읽지 않고 앎에 장벽을 치는 순간 진영이 생긴다. 짐짓 차이가 별반없음에도 색다르고 절대절명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보다 진영에 갇히지 말고 앎의 경계를 두지 않고 찾아내어 비교, 감별해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이 실사구시는 아닐까?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식중개상이나 소매상, 수입상이 활약한 근거가 이제는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다 알고 더 나은 것은 누구든 취사선별할 수 있다. 주장하지 않아도 앎의 흔적을 가져올 수 있기 지금여기의 고민을 서재의 여기저기 그 고민들을 풍성하게 대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웁지 않은지? 녹색 생태 기본소득 마니넬레나 민중의집......앎은 차고도 넘친다. 진영에 갇히지 않고 그 셈세한 생각과 아이디어, 그 맥락을 갖고 또 논의해도 늦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 숱한 다른 입장이 있어 앎에 조금이라도 진도가 나갈 수 있다면, 그래도 진보가 작은 덧셈은 한 것은 아닐까?

경제논리도, 마이너스성장도, 생태만이 아니라 조금 경계를 허물어섞는다면 앎의 잔치는 미리 가능하지 않을까. 이견을 통해 앎의 나눔도 가능하다. 지금보다 나은 것과 조금 멀리, 아니면 근본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도 희미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욕심일까? 제가 내편이 아니라는 생각만 거둔다면... ...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저 책만 보는 것들이라고...또 다른 진영논리를 들이댄다면... ... 지금이 어떤 때인데라고 말하면....당신은 어디 정당소속이냐고 묻는다면...그래 할말있다. 이사람 정당도 아니고, 다른 정당에 또 다른 정당에 소속되고 싶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삼연(지연-혈연-학연)에 알러지있다고...이 책의 장샘의 서문이나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을 쓴 소장 일본재야학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고 하고 싶다. 읽으라고 다시 읽으라고....읽은 것을 제발 한번이라도 섞고 나누자고...같이 읽은 것을...들은 것이 아니라... ...


 

 

뱀발.

 

 

1. 괜한 흥분...장샘의 책을 구해 보고 있다. 틈틈히 기사를 보기는 했지만 곁들여 읽을 책을 권면해줘서 좋다.
권혁범 교수님의 생각도 있고 해서 올려놓는다. 머레이북친의 생각을 곁들여 생태만, 녹색만도 바라는 일인은 아니다. 작고 세세한 티테일을 여기저기서 찾고 구하고 나누고 싶을 뿐이다. 진보가 진보라고 주장하지 않고, 숱한 하고싶은 일들이 하느라 정신없어 하는 것이 진보라 말하고 싶은 일인이다. 진보라는 말이 없어질수록 진보에 가까운 세상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런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꼬리표를 애써 찾으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만 올라오고 취사선택해 가공하는 것이 이 무서운 공간임을 느끼지만, 그래도 실패를 작정하고 다시 한번 나눠보고 싶은 것이다. 오해마시라. 어느 편도 아니다. 덧셈편이고 곱셈편이다... 당신의 진보에 행운이 함께하길... ...

 

2. 문득 그런 생각이 올라왔다. 앎이라는 것이 혼자앎이 아니라 서로앎이 필요하다. 그러고 서로앎의 그림자만큼만 현실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 순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3. 급히 쓰다보니 거칠기만 할 뿐 세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남기는 일이 조심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더 두고 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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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1.

 

접힌 부분(밑줄긋기)을 잘 살리는 일 - 책의 이력과 약간의 가공/분류로 용도에 맞는 반제품도 좋을 듯; 썰기  ....용도...가설정이 좋을 듯... (메모)..키워드...몸통..뼈...생물의 입장으로 나누면 더 좋겠다. 싱싱하게 언제든지 써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팁 2.

 

이력을 남겨놓는 것도 한가지 기억술. 책과 책들을 중계하거나 저자와 저자를 연결하는 일을 쉽게 보지 말 것.  인명 등 명사의 통용, 공유에 대해서도 심심하게 파악해놓을 것.

 

팁 3.

 

줄거리: 스토리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둘 것.

 

팁 4.

 

강독 전후의 차이점을 세분화해 볼 것. 사실만이 아니라 느낌, 글쓰기 기술, 함께 떠오르는 책들, 사람 등등 사소하거나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들 하지만 장황하지 말게 요점만 벼려둘 것.

 

130731  +1

 

팁 5. 

 

 읽는이는 익숙한 것에 반응한다.  경구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지식의 자장이 생기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익숙한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 우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거나, 알고 있던 사실의 배후를 이야기해준다.

팁 6.

 

 사소한 차이: 구별하고자 하는 키워드와 특징을 묘사해줘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통찰력있게 요약하여 건들여주지 않고 허둥지둥대면 안된다. 저자의 뿌리말을 눈여겨보고 특징을 잡아내자. 그리고 그말을 나의 몸말로 전환하는 것까지 책읽는 가운데 작업이 되어야 한다. 예민해지기도 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하는 의무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다른 책이나 다른 요약본이 들어오는 순간 나름 진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방심하고 놓치게 되는 순간 책을 다시한번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나 선입견이 들어서 왜곡하여 이해하게 되고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더 어렵게 된다는 걸 알자. (사물은 세가지가 있다)

 

팁 7.

 

말을 강렬하고 산뜻하게 전달하자. 팍팍! 콕콕! 스밀 수 있게 하자.

 

팁 8.

 

이렇게 연구하고 시험하는 자세가 자신의 스타일과 읽는 이가 좋아하게 되는 패턴이 생기게 하는 근거가 된다.

 

뱀발. 증발해버리고 흔적마저 가물거려 앎 들 사이 서로 인력이라도 주어야겠다 싶다. 투박해지는 일상에 깊게 잔뿌리들이 깊게 내리지 못해 아쉬웠다. 생각머리를 처음부터 돌리는데 곤란함을 느끼기도 한다. 생각줄기나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더 펼쳐두어야겠다 싶다. 그래서 되는대로가 아니라 느낌과 생각을 좀더 추려놓고 써야할 궁리를 해본다. 잡다함이 추상명사에 함락된 연유기도 하다. 어째든 잔잔하게 이 용기에 쓸만한 팁들이 담겼으면 좋겠다.  서재의 다른 이의 방법과 기술도 궁금해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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