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뿌리는 궁극적으로 지배-종속 관계를 에로틱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다." -  Sheila Jeffrery 성정치학자

 

여성 혐오증, 인종 차별주의, 군국주의가 사회에서 조금 희석되며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 여성성이 좀더 들어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세상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 의문에 회의가 드는 지금이다.  제도적인 문제, 사회적 약자로 여성을 봐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애정어린 시선으로 남성성을 표현하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니다. 무척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로 과도한 여성성때문에 남자가 피해보고 있다라고 문제를 전혀 엉뚱한 구석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즉자적인 상황만 보려하고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사한 채, '그래 여자때문이야'라는 말들이 번지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이주노동자'때문이야.  '흑인'과 '동양인'때문이라는 인종차별처럼 말이다.

 

가부장제의 진짜 영리한 부분은 억압 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 잔혹한 행위를 하는 주체는 성적 흥분을 느낀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런 행위는 증오로 가득 찬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남자들이 벌거벗기고 굴복의 자세를 취한 채로 사진에 찍히면, 그에 나타난 권력과 억압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전 세계가 분노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소녀가 팔려 가 강간을 당하고 '전시'되면, 전 세계는 더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성매매 수입에 온 나라의 예산이 왔다 갔다하는 나라도 있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영악함과 남성성의 유지는 억압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 연유라고 꿰뚫는다. 이라크전쟁에서 여군이 이라크 병사들을 끌고 벗기고 고문하는 사진에 전 세계가 일제히 문노한다.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이 강간하려고 한 사실에는 그 권력과 억압의 관계가 드러나기는 커녕 그 여자가 누구인지 더 보고 싶어하는 이중성있는 태도를 통찰력있게 설명해낸다. 전자가 미군의 야만성과 인권무시에 대해 철저한 규탄을 불러왔다면 후자는 그런 행태가 반복됨에도 그 뿌리깊은 권력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을 여전히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이 바래버렸다.

 

 

지배라는 개념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덧입히는 한 여성 혐오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종 차별주의의 종식도 없다. 바로 이 문제야말로 좌파들이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선 남성성이 왜 자가증식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에로틱한 이미지가 권력과 지배, 그 모순들 속에 겹치는 순간, 문제는 희석되며 상황은 계속 반복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파시즘의 뿌리도 과도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동때문이라는 성정치학자 쉴러 제퍼리의 말을 새겨듣지 않으면 안된다. 


(채식의 배신.  415-41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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