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두루' 보고 느끼려는 것이  어떤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1. 전체사, 전체성, 전체를 보려하는 것


- 경제로만 판단하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의 관계 속에 판단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경제의 전일적인 과학으로 판단하게되면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 속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루이스 멈퍼드가 경계한 것은 기술과 과학으로만 보게 되면 신석기 시대와 중세 등 일련의 과정이 기술발달에 국한되게 되어, 실로 수많은 과정과 작은 혁명들을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개량이나 가축, 대중목욕탕, 공원 등 일상과 연관된 무수한 과정의 혁신이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과 연결된 문양과 예술, 관계도 뭍히게 되는 것이다.


- 전지구적인 것은 전지역적인 것이 되어 지역에 전지구적인 것의 정치적 과제가 흘러넘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정치인은 해결해야할 과제를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지만 점점 더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경고한다.

 

-

 

 

2. 전체를 보면 다시 보이게 되는 부분


- 시장경제는 교환가치의 실현으로 문턱을 넘게 된다. 자급자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의 방편인 것이다. 시장경제의 큰 흐름에 독점과 권력의 특이한 형태가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전일적이고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는 밤의 손님, 특이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삶에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급자족, 호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그대로 의미를 갖고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 자본주의가 딛고 서있는 자리에 숱한 빈 공간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고 처리하고, 비만과 병치료, 재해로 인한 추가 교환의 그물에 거래의 그물에 잡혀야만  자본이 말하는 성장의 안테나에 잡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되고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다양한 방법과 그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 만들 세계는 상상력과 고정된 생각밖의 시도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 것이다.

 

- 칼폴라니의 embeded의 개념


- 기술은 본래 삶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 속에서 세대라는 시간을 갖고 삶 속에서 개발된, 삶과 붙어있는 기술이 본래 더 많았던 것이다. 예술도 그런 삶과 사람의 켜를 바탕으로 자라고 밑바탕의 근육을 키워나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삶으로 되먹임된 것이다.


- 노동은 없다. 사람이 기술과 자동화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화화되었고 기술의 고삐를 사람이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도 그러하다. 기술과 과학을 사람의 프리즘으로 통과하려는 기술과 노력은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신장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조련하는 기술과 과학은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정상과 주류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여전히 정상성에 사로잡혀 무한반복을 외친다.

 

 

3. 왜 없다고 안된다고 해야 하는가


- 희망, 노력 모두가 좋은 말이다.

 

- 전태일이 있다보다 전태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노동과 노동사이를 올바로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자리, 노동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자리는 없다.

 

- 노동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팽개쳐지는 삶, 쫓겨나는 삶, 비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그래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 신자유주의라고 뭉뚱그리는 순간 얼마나 많은 고통도 하나로 버무려져 해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이 되는가를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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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의 가정에 따라 사유하게 되면 어떤 시야가 생기는가

 

- 쓸데없는 희망처럼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현실은 물밀듯이 쓸려오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다짐에 목숨을 내놓는 것.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지 못하는 것.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막을 수 있는 방편이 아니라, 삶의 다른 길도 갈 수도 있다는, 그래서 결국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열명에 한명은 살아간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가지지 않은 것보다 낫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삶의 저주의 나락만이 아니라 그래서 좌절과 약물과 고통만이 아니라 패배자가 아니라는 인식만 얻는 것이 아닌 것보다 낫다. 밀려오는 분노와 악다구니를 모두 남에게 퍼부어버린 결과와 원인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만이 이 고통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헛된 희망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지금 여기'를 다시 살피는 일, 지난 사유의 헛점을 되짚는 일. ...

 

 

볕뉘. 시간이 되면 살을 덧붙여야겠지만, 겨울 바람이 쓰라리다. 아이러니의 시대다. 소통할수록 소통할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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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에 보이지 않는 과학기술의 곁들

 

1. 양치기 소년과 늑대라는 이솝우화에서 양치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자 키득키득 웃는다. 또 양치기 소년은 거듭되는 따분함을 녹이려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마을사람들이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모여든다. 여전히 재미있어한다. 결국 늑대는 나타났고 양치기 소년의 외침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었고 양들을 모조리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거짓과 거짓, 거짓의 다음은 진실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과학, 신경과학의 발달의 진전과 성과는 활발하고 빠르다. 행동경제학을 비롯해 많은 응용분야를 낳고 있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면 수십종류가 되는 상품을 고르려면 하루종일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충동적이고 쾌락적이기도 하다. 감성과 직관을 바탕으로 선택하고 움직이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대중의 직관을 쓴 저자 존 L. 캐스티는 말한다. 역사상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사회적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미래에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장한다. “사건이 대중심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건을 조종한다.” 곧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사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과학은 무엇인가' '기술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기를 주저한다. 과학기술이 몇세기동안 누렸던 호사와 혜택에 경도되어 여전히 지난 추억처럼 기억하고 떠받든다. 대중은 이성적이지 않다. 황우석사태를 비롯해, 온갖 과학기술의 악몽이 드리워져도 자본과 과학기술의 세기를 살아남은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먹을거리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험은 멱급수로 커져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어도 낙관을 버리지 못한다.

아프리카와 북한 등 세계 곳곳의 인류가 굶어죽고, 삼림이 황폐해져도 그것은 남의 일이고 지금여기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을 쉽게 알리고 이해하는 대중화에 관심이 있지, 반대편에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살피지 못한다. 어쩌면 한 세기를 넘어 어두운 사건이 지근거리에서 직접 피해를 입는 지옥을 몇차례 접하고 나서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유전자는 조금 변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재앙에도 대중은 놀라서 대오 각성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들은 오히려 점점 더 교묘하게 묻히고 덮힌다. 합리적인 이성과 환원론에 집착하는 과학의 도식은 우리 문화를 잠식한지 오래다. 그 문화와 습속에 배여온 지금 여기의 대중은 합리적일 수 없다. 과학은 합리적이성과 객관적인 사실을 기초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어한다.

 

2.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우화를 보는 시각을 달리해보자. 양치기 소년의 역할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위험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은 첫번째 거짓말에 속고, 두번째 거짓말에도 속았다면 소년을 혼내고 돌아갈 일이 아니었다. 모여서 양의 안전에 대해 논의하고 대비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가올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 사회에서 바꾸고, 고치고,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 결국 늑대에 의해 양들은 희생당하고 만다.

리차드 세넷은 68혁명이후 절대성과 확신이 세상을 별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지금의 거대도시가 지나치게 계획적이라는 것에 문제삼는다. 상업지구, 주택지역, 녹지지구를 통해 모둠별로 모아놓아 도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나 다른 삶과 섞이지 않는다. 사회의 위험이나 고충에 대해서도 더 이상 피부로 와 닿는 것이 없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겪어내지 못해 청소년의 정체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차이를 겪어내면서 성인의 복잡다단함을 얻어내지 못하는현대도시의 자발적 노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4세기 역사학를 학문으로 정립한 이븐할둔은 전야(田野)생활과 도회 생활을 비교한다. 도시 시민은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짓고 바꾸어나가는 용기와 저항정신이 전야생활의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법률과 규정에 의해 움직이도록 체계가 만들어지고 도시 시민의 영혼에 무력함과 나태함생겨 약하디 약한 인간으로 퇴화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인간은 대부분을 제도에 일임했기에 더 이상 문제와 시스템과 싸울 능력마저 잃어버린다고 밝히고 있다.

참사라는 끔직한 재앙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의 세상 사람들은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유사한 위험의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 기존의 자본에 수혈을 하던 과학기술, 제도와 시스템은 다른 국가의 선진 사례를 이땅에 적용하기를 몸소 거부한다. 거대도시를 꿈꾸던 자본의 관성은 더욱더 시스템을 꼭 움켜쥐려 버티는 것이다. 제도와 제도, 규정과 규정 사이 지뢰처럼 걸려있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용기도 없다.

한편 모든 산업과 관계들의 탄탄한 배경역할을 하는 자동화 기술 또한 숨겨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편리성의 이면에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재능, 그리고 우리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동장치가 긴급한 위험시 오히려 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목적지에는 도착하게 해주지만 왜 그런지 상상하는 수고로움조차 잊게 만들어 기본적인 능력조차 감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는 기술의 역할을 살핀다. 기술은 경제 속에 함침되어 팽창과 신축의 탄력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 진보가 민주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합리성을 향한 진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공익에 기초한 더욱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려면, 이렇게 변덕스러운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정치적인 힘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비코는 사회가 인간에 의해 창조됐으므로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보다 인간사회의 원리를 찾지 않는 것을 개탄한다. 당대의 인물인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유명한 명제에 출발한 원리는 수학과 자연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제외한 역사나 실천적인 지혜, 수사, 시학 등은 도리어 인간에 의해 가장 잘 인식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인간사회의 원리는 그렇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인간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코는 오직 추상적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적으로 뛰어나도 '합리적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승리처럼 보였던 지난 몇세기는 오히려 과학과 경제를 앞세우고 힘없는 인간과 자연을 지운 역사였다. 자본주의를 치켜세운 경제의 쌍두마차인 과학은 인간의 역사에서 튕겨 나와 오히려 사람과 삶을 거꾸로 짓이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계의 원리를 분기한 시점인 그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비코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학문의 성과를 되살필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왜곡된 현실에서 더 이상 경제의 해결사로만 자리매김을 해서는 안된다. 경제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애초의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과 멀어지게 된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 예술을 함유하면서 공명하는 과학기술의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문제의 중심에서 여러 맥락들이 살아움직일 수 있도록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대과학기술이 응축해놓은 문제의 그늘을 살펴야 한다. 국가의 신민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에서 살아움직이는 과학기술로 몸을 한껏 낮추면서 내려와야 한다. 분야의 우물만 독립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얇은 과학이 아니라 두루 살피고 그 그늘의 영향이 겹쳐 어떻게 위험을 낳을지 미리 살피는 제도적 혜안, 정치적 혜안도 미리 감안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국경이 없어야 한다. 3세계의 기아라는 국경선을 넘으며 해결하는 적정기술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를 보살피고 선순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권계급, 특권국가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노동을 요구하는 과학기술의 결과물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자본만의 융통을 바라는 시간에 약한 기술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내구성에 강한기술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또한 사회문제, 지구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와 문화에 관여하여야 한다. 그 해결책으로 지역과 함께 공존하는 중간기술, 적정기술, 강한기술들이 생동감있게 어울려야 한다. 이런 조화로 인해 지역과 문화, 삶에 자리매김하는 역할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과학만이 살아남을 수 없다. 미래세대의 몫을 빼앗아 불꽃처럼 써버리는 축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은 물신화하여 숭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야생동물을 길들이듯이 고삐를 쥐고 조련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손을 벌리고 또 다른 손을 마주잡아야 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인문의 결로 삶 속에서 호흡하여야 한다.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예술적인 감각도 가져야 한다.

 

 

 

 

 

 

 

 볕뉘. 참터 10주년 기념 문집이다. 곧 10주년 행사다. 멀리서 가지 못하지만 마음도, 문집에 게재한 글도 남겨 적적한 마음을 달래본다. 앞으로 10년 잘 되길 바래본다.

참터 창립10주년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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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능력의 습득을 전제로 한다. 그 능력이란 어떤 숙달된 기술을 갖게 하여, 이를 통해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모든 반론을 제거하고 축소하는 제도에 [아니다!]라고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우리를 옭아매어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말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고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대중들은 모으고 더욱 복종시키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고하는 데 필요한 힘들고 위험한 연습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의식구조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리고 대중들은 더욱 손쉽게 다루기 위해서 문제의 정확성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연구하지도 못하게 한다. 133 기관총은 방정식은 그대로 두고 식에 사용된 항만 바꾸는 일이다. 말라르메는 기관총이다.


다소 느리고 노골적으로, 비극적으로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는 제도들은, 말라르메의 시를 읽는 눈에 띄지 않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더욱 위협을 느낄 것이고, 그들의 지배력도 그만큼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권력층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 문제에 관한 한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어디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체재가 강요된다면, 그들이 우선 본능적으로 찾아내서 추방하거나 제거하는 대상은 바로 말라르메의 독자일 것이다. 이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말이다. 131


사고만큼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행동은 없다. 사고보다 더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또한 그보다 더 부끄러운 것도 없는데, 이 사실은 결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다. 사고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사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고한다는 그 [행동] 자체가 정치적인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어느때보다 사고하지 못하게 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가 은밀하게 번지고 있다. 그리고 은밀한 만큼 더 큰 효과를 얻고 있다.  127


먼저 사고란 엄격한 것, 까다로운 것, 진저리나는 것, 맥빠지는 것, 엘리트만의 것, 사람을 마비시키는 것, 그리고 끝없이 권태로운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 형용사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연습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126


그들은 호사스럽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남아도는 [자유로운] 시간을 과연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시간은 말 그대로 자유로울 수도 있고, 그들을 활동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대개는 그들을 숨막히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결국 그들의 적이 되고 만다. 아마도 가장 분노스러운 것은 오늘날에 와서 금지된 가치들, 즉 문화의 가치, 지성의 가치 같은 것을 완전히 압수해 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는 그 가치들이 그다지 [잘 팔리는 상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가치들이, 죽기전에나 볼 수 있는 깊은 혼수상태로 젊은이들을 몰고 가는 이 사회제도를 흔들리게 할 위험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15


허구적인 해결책이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진정한 문제들을 인식할 기회가 올 것이다. 간교한 허상을 끊고 출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가 속해 있는 상황에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드디어 그 사건에 조명을 비추고,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 특히 피해야 할 함정들이 무엇인지만은 틀림없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반드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만 우리의 운명에 대항해서, 또 우리의 운명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운명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얻게 되고, 다시 건강을 되찾는 일도 가능해진다. 비록 그 운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아무리 끔찍한 것이라 할지라도.. 102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는 최근의 현상들, 즉 노동이 없어졌는데도 아직까지 우리의 삶을 노동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현상들이 이처럼 계속될 때, 엉뚱한 곳에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방관적인 태도의 습관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문제가 잘못 제기되었음을 지적할 것. 피해진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시 거론할 것. 가리워진 질문들을 숨김없이 드러내 놓을 것. 더 이상 문제될 것도 아닌데도 의도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아직까지 거론되고 있는 질문들을 삭제할 것. 이렇게 하는 것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본질적이고도 시급한 온갖 질문들을 밝혀낼 수 있게 한다. 101


우리의 삶이 달려 있는 문제 앞에서, 마치 온 몸이 마비된 환자처럼 이렇듯 수동적인 태도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닌가? 진정으로 우리가 해야 할 질문들 중의 하나는, 과연 우리가 살아남도록 그들의 프로그램 안에 입력되어 있기나 한 것인지, 그것부터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는 이런 질문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100


해결책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잘못 제기되었으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어설픈 해결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제 해결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라면,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더욱 진지한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최소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데서 오는 이득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99


정치가들은 그 해결책의 인질이 되고 만다. 유권자들은 항상 신속한 해결에 대한 약속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들로서는 신빙성 없는 약속일지라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국민들은 절대로 그 임무를 그들로부터 면제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진짜 근본 문제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고, 지엽적인 사소한 문제에만 성급하게 달려들고 있다. 97


아직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 비록 봉급은 얼마 안되지만 그래도 실직을 하지 않고 일을 하러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를 일종의 특혜자로 여긴다. 남의 이익을 가로챈 자가 바로 그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 경우, 실직이라는 학대의 사건을 기준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하지만 그들에게 요구하는 연대감을 재산의 분배, 이익의 분배로까지 확장시켜 보는 일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이익의 분배, 재산의 분배가 우리 시대에는 말도 안 되는 것, 생각할 수도 없는 것, 그야말로 돼먹지 않는 생각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89


길바닥에 나앉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사회제도에 적응하는 것보다 힘이 덜 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제도는 길바닥보다 더 냉랭하니까.... 88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 총체성의 부차적인 결과, 예를 들면 실업문제같은 것만 문제삼을 뿐이지, 총체성을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그 방식 가지고 있는 지배력을 비난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저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분이다. 79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국민들로부터 무관심을 얻어냈다는 것은, 부분적인 동의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뜻한다. 사실 어떤 체제가 대중적인 동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대중들의 무관심에 의해서이다....무관심은 무엇보다도 해롭고 불가결한 것인,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바로 그 비극적인 증인이다. 75

 

볕뉘.  글은 답을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질문한다. 결론 역시 답은 없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응시할 때 그것이 지금길일지 모른다고 한다. 심연을 들여다 보는 연습...어쩌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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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탈자들은, 토착민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다.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신념, 지식 들의 사용이 중단되어 이후로는 이런 기준들조차 무의미해졌기에, 결국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힘든 것은, 이 모든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의욕마저 잃었다는 점이다. 하물며 저항하겠다는 의욕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들, 오늘날에도 인정받을 수 있는 훌륭한 전사로서의 가치를 지닌 자들마저 이 포식하는 지금의 문명 속에 감금되어 사라졌다. 262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무엇 때문에 굳이 있는 힘을 다하여 악착같이 노동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를 배반한 것, 횡령당한 것, 혹은 이미 달아나 버린 것,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노동에 대한 개념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고용에 이처럼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멸해 가면서까지라도 (왜냐하면 더 이상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해 보았자, 일자리는 소멸중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바치려는 그 일자리라는 것에 그토록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258


모두들 세계화라는 요구에 적응할 계획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세계화를 겪는 훈련이 아니라, 세계화로부터 빠져 나오는 훈련을 함으로써 세계화에 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삶의 [일자리], 즉 인류 전체의 삶에 관한 일의 의미를 찾고, 요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개인을 전부 포함하는 전체의 [일자리]에다 몇몇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왜 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 몇몇 사람이 부여한 의미가 이제 불가능한 것임이 알려진 이상 더욱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59


그들이 필요없다는 것은,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시장경제에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이 경제에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필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행해지는 학대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처벌,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오만하고 거침없는 폭력, 그리고 증가하는 불행들....이런 것들 앞에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보여 주고 있는 말없는 동의, 혹은 무관심, 수동성 등은 끝없는 부차적인 현상들의 출현을 예고할 수 있다. 박해당한 대중들은, 이제부터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구상하는 세계에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57


어떤 위기의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좋으니, 우선 검토만이라도 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시장에서의 활발하고 유리한 거래인가, 아니면 국민들의 복지인가? 복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생존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246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마들이 여기에 있으므로" - 태고적부터 계속 되물이되어 온 사실, 즉 노동 혹은 직업, 혹은 고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사 우리가 제대로 소화해 내고 있는 판국인데, 지금 와서 느닷없이 노동 그 자체가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도 전혀 도움이 못될 뿐더러, 착취될 가치마저 없다는 그 사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210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독재적인 경제에 좌우되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를 위험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제의 권력과 규모가 어느 정도에 달해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보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경제는 세계화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경제의 권력에 의지하고 있는 덕분에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구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아직까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이 경제세계에 적어도 눈길이라도 한 번 던져보고, 아직도 우리에게 허용된 것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식별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경제가 우리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고, 강탈하고, 정복하는 현상이 과연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는 어디까지 갈 위험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적어도 모든 정당들이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하였다면...그렇다면 비록 내쫓기는 상황에서나마 최소한 우리 각가자 어느 정도의 위엄과 자율권을 지니고 존재할 수 있는 자유만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204-205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겪었다. 그것은 근본적인 혁명이었음에도 사전에 선언된 이론도 없이, 밝혀진 이념도 없이 소리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무런 선언도, 아무런 주석도, 아무런 통고도 없이 지극히 조용히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사건들 속에서 인정된 혁명이다. 역사 속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 무대 위에 소리없이 정착한 사건들... 그 혁명은 자리가 완전히 잡히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 그리고 나타나기도 전에 앞으로 자신에게 반대하게 될 저항세력을 미리 막고, 마비시킬 줄 알았던 거대한 원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시장이라는 굴레는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우리 온몸을 완전히 둘러싸기에 이르렀고, 이제 그 피부는 육체의 피부보다 더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다.  193


일자리를 찾도록 자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용당하도록 자극한다는 것, 즉 빈곤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쫓겨난 자]로나마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나마 쫓겨난 자로 남아 있지 않으면, 그야말로 완전히 삶으로부터 내쫓기게 될 형편이므로  181


부의 창조로부터 출발하여 고용을 창출하려는 것은 인도주의자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장은 발전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물적 산물의 경영으로도 나아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은 꿈처럼 이상한 답보상태로 머물게 할 뿐, 노동의 필요성으로 통하는 법이 결코 없다. 그러니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노동에 과연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이 성장은 오히려 인간의 잠재력을 축소시키는 기술주의 시스템과 자동기계화를 도입하거나, 혹은 그 설비를 더욱 완벽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게 만든다. 165


지금 우리의 교육은, 젊은이들을 기업체에 넣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키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기업체들이 이 젊은이들을 원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기업체에 맞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안달이다. 좀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우리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탓이다. (적어도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상 더욱더 꿈꾸는 자가 되며, 더욱 더 허구적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충분히 집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하기까지 한다. 그 목표란, 한시라도 빨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샐러리맨의 세계 속에 학생들을 등록시키는 것이다. 151


우리는 어쨌든 수백만 명의 사람들 각자가 수백만의 분노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리고 매번 그 상황들이 단 하나뿐인 그들의 삶 전체, 그 소중하고 이해하기 힘든 삶의 실체를 삼켜 버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개되면서 소멸해 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삶의 실체를..... 146


사회는 지금 자신의 역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 역사는 사회라는 것을 빼놓은 채 저절로 구성되고 있으며, 사회를 제거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바로 이 역사의  맨 앞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터치라인 밖에 있다. 따라서 올 데까지 와서 종착역에 도달했으면서도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주장하는 이 사회보다 그들이 앞선 삶을 산다기보다는, 사회가 그들보다 더 뒤로 물러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인류가 끝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만일 어제의 문명이 이미 뿌리뽑혔음을 인정하고, 대신 새롭게 승인된 문명 속에서 새롭게 편성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라진 옛세대의 표현대로 수치감 속에서 학대당하며 사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지지자들이 잉여의 쓸모없는 이 존재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는, 죽는 순간까지 그 세계 속에서 배척당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시들어가게 될 것이다. 143


그 제도는 그들이 거부당한 바로 그것을 그들에게 다시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거부당한 것이라니? 임금제도에 연결된 삶, 임금제도에 의존되어 있느 삶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우리가 유용하다고 말하는 그 삶. 그것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승인된 삶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실현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고 있는 그 삶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에 대한 환상이 그들을 붙들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삶의 부재라는 현실이 만들어낸 공허감에 지배받지 않을 수 없다. 136

 

 

볕뉘. 장그래, 오상식에게 건네는 말들 가운데 이런 말은 있어야 한다. 노동은 없어진지 오래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없어도 살아갈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쫓겨난 자들은 점점 많아지고, 들어갈 자리는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에서 나는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세상이어야 한다. 세상의 바닥은 거기라고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고, 세상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음으로써 갖는 낭패감과 좌절과, 삶의 잔혹함은 더할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편,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최소한 어떤 삶이 덜 나쁜가가 판단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조차도 모르면서 삶을 허우적거려야 한다. 

 

경제'만'이 사회를 끌고 가는 모순 속에  사회는 문화와 정치, 자본주의라는 경제에만 삶이 있다는 허망을 벗겨내야 한다. 시장에서 교환되었을 때만 그 자본주의라는 경제에 숫자가 잡힌다. 그 사이 사이 사람들은 시장경제 사이 사이를 그래도 살고 있다. 그 사이사이는 그래도 경제'도'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와 안녕, 아니 청춘은 아프다라고 말하면 안된다. 차라리 절망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삶에게는 ... ... 미안하다. 아직 가는 길을 모르겠다. 같이 아파하는 법도 서툴기 그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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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바깥에 머무는 것들은 모두 사용가치밖에 없습니다. 시장이라는 좁은 문의 경계를 건너는 것들은 전부 교환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 기초적 시장을 경계선으로 어느 편에 있느냐에 따라 개인, 행위자가 교환에 포함되느냐 아니냐가 구분됩니다. 이 교환 영역을 나는 경제생활이라고 칭하여 물질생활과 대조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과 구분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27

 

오리 등을 파는 농부들은 시장의 가장자리에 슬쩍 걸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생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으로 해결했습니다. 길거리와 촌락에서 소량의 상품을 파는 행상들은 교환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거래량과 금액이야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이 이미 계산의 세계, 차변과 대변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소매상인은 분명히 시장경제의 행위자입니다. 28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 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통상적 감독을 막아주거나 적어도 우회할 수 있을 만큼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현지 무역이라든가 중국과 거래하는 무역은 두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높은 이익을 거두는 것은 거래하는 지역과 품목을 갈아타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66

 

교환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곳에 자리하는 교환이고, 이러한 교환은 투명하기 때문에 경쟁의 힘이 항상 작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교환이고 섬세하며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지배하는 메커니즘도 다르고 행위자도 다릅니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자리하는 영역은 첫 번째 교환이 아니라, 두 번째 교환입니다....최초의 자본주의가 자기 모습을 펼치고 세력을 형성하며 우리 눈앞에 등장한 것은 사회의 최상층에서였습니다.....사람들은 보통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둘이 중세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같은 걸음으로 걸어왔기 때문이고, 자본주의를 경제가 발전하는 동력이라고 내세우거나 경제가 고도로 발전된 상태로 묘사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있습니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합니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봅니다. 76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입니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역과 그 영역들이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78

 

북유럽은 고래의 자본주의 중심지였던 지중해 지역이 그들에 앞서 아주 오랫동안 찬란하게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그냥 가져갔을 뿐입니다. 북유럽사람들은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기술에서도 그렇고 사업 관리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암스테를담은 베네치아를 본떴을 뿐입니다. 그다음 런던은 암스테르담을 본뜨고, 다시 또 뉴욕이 런던을 본뜨게 됩니다. 매번 이러한 변화를 유발했던 문제의 핵심은 세계 경제의 무게 중심이 경제적인 이유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제적 이유는 자본주의 본연의 속성이라든가 무건가 비밀스러운 자본주의의 특징과는 무관한 것들이었습니다....막스 베버가 오류에 빠지게 된 본질적 이유는 그의 연구 초반에 근대 세계의 촉매제로 자본주의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데 있는 것이 아니가 생각합니다. 79-80

 

부르주아지의 기생은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됩니다.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을 끊임없이 파괴해 들어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의 부상은 아주 느리고 끈질기게 진행됩니다. 그렇게 그들의 야망은 후손 대대로 이어지며 차곡차곡 진행됩니다.83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필수불가력한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허약하거나 호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도 이러한 국가의 호의성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자본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은 주로 과거부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사회적 요인에 기인합니다......여기에 자본주의는 수직적 위계를 필요로 합니다...그러한 사회의 위계를 살펴보면, 결국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특권과 권력을 누립니다...없던 사회적 위계를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위계를 이용했습니다... 87-88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라는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수직적 위계는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89

 

자본주의는 규칙적인 위계 형성에서 활력을 얻습니다. 외곽의 주변부가 중간 지대를 먹여 살리고, 무엇보다 중심부를 먹여 살립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 같은 중심을 두고 전체 구조물을 지배하는 꼭대기, 즉 자본주의적 상부구조라고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관점은 양방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중심이 주변부에 물자공급을 의존한다면, 주변부도 자신을 지배하는 중심의 필요에 의존합니다. 108

 

국민경제는 물질생활의 필요와 혁신을 반영하여 국가가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통일되고 응집된 경제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 공간의 활동이 한꺼번에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영국만이 일찌감치 이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영국을 다루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농업혁명도 있었고, 정치적 혁명, 금융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목록에 추가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국민 시장을 만들어낸 혁명이 그것입니다. 116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이 어떻게 발생했느냐는 문제에는 두 가지 시각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내적요인과 외적요인, 양쪽 시각 사이의 통렬한 논쟁은 의미없다고 여겨집니다. 세계를 착취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그리할 만한 힘을 키워야 하고, 힘을 키우는 과정은 쉬운 게 아니어서 천천히 진행됩니다. 그처럼 완만한 내적 과정을 거쳐야만 그 힘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의 다른 지역을 착취할 수 있다면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은 자명합니다. 이 같은 이중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내재적 설명과 외재적 설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맞물려 있습니다. 129

 

자본주의란 것은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적어도 그처럼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경제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자본주의는 그 밑에 두터운 층 두 개 물질생활과 촘촘한 시장경제 를 겹으로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최상층의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세계 전체를 향해 손을 뻗는다, 둘째 집요하게 독점을 유지한다. 셋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130-131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펼친 부분 접기 ▲

볕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3 권의 저작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경제만 설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정치, 사회, 문화와 관계를 통해서 전체사를 바라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이 경제가 더 발달했음에도, 유럽의 나라마다 차이점, 동양의 과거제도를 통한 부의 축적이 장기간 되지 않은 점 등 400년을 보는 시각을 풍부하고 깊은 통찰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본 저작에 손을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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