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두루' 보고 느끼려는 것이  어떤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1. 전체사, 전체성, 전체를 보려하는 것


- 경제로만 판단하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의 관계 속에 판단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경제의 전일적인 과학으로 판단하게되면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 속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루이스 멈퍼드가 경계한 것은 기술과 과학으로만 보게 되면 신석기 시대와 중세 등 일련의 과정이 기술발달에 국한되게 되어, 실로 수많은 과정과 작은 혁명들을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개량이나 가축, 대중목욕탕, 공원 등 일상과 연관된 무수한 과정의 혁신이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과 연결된 문양과 예술, 관계도 뭍히게 되는 것이다.


- 전지구적인 것은 전지역적인 것이 되어 지역에 전지구적인 것의 정치적 과제가 흘러넘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정치인은 해결해야할 과제를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지만 점점 더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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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체를 보면 다시 보이게 되는 부분


- 시장경제는 교환가치의 실현으로 문턱을 넘게 된다. 자급자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의 방편인 것이다. 시장경제의 큰 흐름에 독점과 권력의 특이한 형태가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전일적이고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는 밤의 손님, 특이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삶에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급자족, 호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그대로 의미를 갖고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 자본주의가 딛고 서있는 자리에 숱한 빈 공간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고 처리하고, 비만과 병치료, 재해로 인한 추가 교환의 그물에 거래의 그물에 잡혀야만  자본이 말하는 성장의 안테나에 잡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되고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다양한 방법과 그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 만들 세계는 상상력과 고정된 생각밖의 시도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 것이다.

 

- 칼폴라니의 embeded의 개념


- 기술은 본래 삶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 속에서 세대라는 시간을 갖고 삶 속에서 개발된, 삶과 붙어있는 기술이 본래 더 많았던 것이다. 예술도 그런 삶과 사람의 켜를 바탕으로 자라고 밑바탕의 근육을 키워나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삶으로 되먹임된 것이다.


- 노동은 없다. 사람이 기술과 자동화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화화되었고 기술의 고삐를 사람이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도 그러하다. 기술과 과학을 사람의 프리즘으로 통과하려는 기술과 노력은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신장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조련하는 기술과 과학은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정상과 주류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여전히 정상성에 사로잡혀 무한반복을 외친다.

 

 

3. 왜 없다고 안된다고 해야 하는가


- 희망, 노력 모두가 좋은 말이다.

 

- 전태일이 있다보다 전태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노동과 노동사이를 올바로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자리, 노동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자리는 없다.

 

- 노동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팽개쳐지는 삶, 쫓겨나는 삶, 비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그래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 신자유주의라고 뭉뚱그리는 순간 얼마나 많은 고통도 하나로 버무려져 해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이 되는가를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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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의 가정에 따라 사유하게 되면 어떤 시야가 생기는가

 

- 쓸데없는 희망처럼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현실은 물밀듯이 쓸려오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다짐에 목숨을 내놓는 것.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지 못하는 것.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막을 수 있는 방편이 아니라, 삶의 다른 길도 갈 수도 있다는, 그래서 결국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열명에 한명은 살아간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가지지 않은 것보다 낫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삶의 저주의 나락만이 아니라 그래서 좌절과 약물과 고통만이 아니라 패배자가 아니라는 인식만 얻는 것이 아닌 것보다 낫다. 밀려오는 분노와 악다구니를 모두 남에게 퍼부어버린 결과와 원인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만이 이 고통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헛된 희망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지금 여기'를 다시 살피는 일, 지난 사유의 헛점을 되짚는 일. ...

 

 

볕뉘. 시간이 되면 살을 덧붙여야겠지만, 겨울 바람이 쓰라리다. 아이러니의 시대다. 소통할수록 소통할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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