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찬탈자들은, 토착민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다.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신념, 지식 들의 사용이 중단되어 이후로는 이런 기준들조차 무의미해졌기에, 결국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힘든 것은, 이 모든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의욕마저 잃었다는 점이다. 하물며 저항하겠다는 의욕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들, 오늘날에도 인정받을 수 있는 훌륭한 전사로서의 가치를 지닌 자들마저 이 포식하는 지금의 문명 속에 감금되어 사라졌다. 262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무엇 때문에 굳이 있는 힘을 다하여 악착같이 노동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를 배반한 것, 횡령당한 것, 혹은 이미 달아나 버린 것,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노동에 대한 개념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고용에 이처럼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멸해 가면서까지라도 (왜냐하면 더 이상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해 보았자, 일자리는 소멸중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바치려는 그 일자리라는 것에 그토록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258
왜 모두들 세계화라는 요구에 적응할 계획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세계화를 겪는 훈련이 아니라, 세계화로부터 빠져 나오는 훈련을 함으로써 세계화에 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삶의 [일자리], 즉 인류 전체의 삶에 관한 일의 의미를 찾고, 요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개인을 전부 포함하는 전체의 [일자리]에다 몇몇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왜 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 몇몇 사람이 부여한 의미가 이제 불가능한 것임이 알려진 이상 더욱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59
그들이 필요없다는 것은, 그들 외의 사람들에게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시장경제에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이 경제에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필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행해지는 학대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처벌,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오만하고 거침없는 폭력, 그리고 증가하는 불행들....이런 것들 앞에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보여 주고 있는 말없는 동의, 혹은 무관심, 수동성 등은 끝없는 부차적인 현상들의 출현을 예고할 수 있다. 박해당한 대중들은, 이제부터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구상하는 세계에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57
어떤 위기의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좋으니, 우선 검토만이라도 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시장에서의 활발하고 유리한 거래인가, 아니면 국민들의 복지인가? 복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생존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246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마들이 여기에 있으므로" - 태고적부터 계속 되물이되어 온 사실, 즉 노동 혹은 직업, 혹은 고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사 우리가 제대로 소화해 내고 있는 판국인데, 지금 와서 느닷없이 노동 그 자체가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도 전혀 도움이 못될 뿐더러, 착취될 가치마저 없다는 그 사실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210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독재적인 경제에 좌우되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를 위험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제의 권력과 규모가 어느 정도에 달해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보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경제는 세계화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경제의 권력에 의지하고 있는 덕분에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구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아직까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이 경제세계에 적어도 눈길이라도 한 번 던져보고, 아직도 우리에게 허용된 것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식별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경제가 우리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고, 강탈하고, 정복하는 현상이 과연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는 어디까지 갈 위험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적어도 모든 정당들이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하였다면...그렇다면 비록 내쫓기는 상황에서나마 최소한 우리 각가자 어느 정도의 위엄과 자율권을 지니고 존재할 수 있는 자유만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204-205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겪었다. 그것은 근본적인 혁명이었음에도 사전에 선언된 이론도 없이, 밝혀진 이념도 없이 소리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무런 선언도, 아무런 주석도, 아무런 통고도 없이 지극히 조용히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사건들 속에서 인정된 혁명이다. 역사 속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 무대 위에 소리없이 정착한 사건들... 그 혁명은 자리가 완전히 잡히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 그리고 나타나기도 전에 앞으로 자신에게 반대하게 될 저항세력을 미리 막고, 마비시킬 줄 알았던 거대한 원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시장이라는 굴레는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우리 온몸을 완전히 둘러싸기에 이르렀고, 이제 그 피부는 육체의 피부보다 더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다. 193
일자리를 찾도록 자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용당하도록 자극한다는 것, 즉 빈곤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쫓겨난 자]로나마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나마 쫓겨난 자로 남아 있지 않으면, 그야말로 완전히 삶으로부터 내쫓기게 될 형편이므로 181
부의 창조로부터 출발하여 고용을 창출하려는 것은 인도주의자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장은 발전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물적 산물의 경영으로도 나아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은 꿈처럼 이상한 답보상태로 머물게 할 뿐, 노동의 필요성으로 통하는 법이 결코 없다. 그러니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노동에 과연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이 성장은 오히려 인간의 잠재력을 축소시키는 기술주의 시스템과 자동기계화를 도입하거나, 혹은 그 설비를 더욱 완벽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게 만든다. 165
지금 우리의 교육은, 젊은이들을 기업체에 넣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키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기업체들이 이 젊은이들을 원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기업체에 맞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안달이다. 좀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우리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탓이다. (적어도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상 더욱더 꿈꾸는 자가 되며, 더욱 더 허구적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충분히 집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하기까지 한다. 그 목표란, 한시라도 빨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샐러리맨의 세계 속에 학생들을 등록시키는 것이다. 151
우리는 어쨌든 수백만 명의 사람들 각자가 수백만의 분노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리고 매번 그 상황들이 단 하나뿐인 그들의 삶 전체, 그 소중하고 이해하기 힘든 삶의 실체를 삼켜 버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개되면서 소멸해 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삶의 실체를..... 146
사회는 지금 자신의 역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 역사는 사회라는 것을 빼놓은 채 저절로 구성되고 있으며, 사회를 제거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바로 이 역사의 맨 앞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터치라인 밖에 있다. 따라서 올 데까지 와서 종착역에 도달했으면서도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주장하는 이 사회보다 그들이 앞선 삶을 산다기보다는, 사회가 그들보다 더 뒤로 물러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인류가 끝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만일 어제의 문명이 이미 뿌리뽑혔음을 인정하고, 대신 새롭게 승인된 문명 속에서 새롭게 편성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라진 옛세대의 표현대로 수치감 속에서 학대당하며 사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지지자들이 잉여의 쓸모없는 이 존재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는, 죽는 순간까지 그 세계 속에서 배척당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시들어가게 될 것이다. 143
그 제도는 그들이 거부당한 바로 그것을 그들에게 다시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거부당한 것이라니? 임금제도에 연결된 삶, 임금제도에 의존되어 있느 삶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우리가 유용하다고 말하는 그 삶. 그것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승인된 삶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실현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고 있는 그 삶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에 대한 환상이 그들을 붙들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삶의 부재라는 현실이 만들어낸 공허감에 지배받지 않을 수 없다. 136
볕뉘. 장그래, 오상식에게 건네는 말들 가운데 이런 말은 있어야 한다. 노동은 없어진지 오래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없어도 살아갈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쫓겨난 자들은 점점 많아지고, 들어갈 자리는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에서 나는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세상이어야 한다. 세상의 바닥은 거기라고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고, 세상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음으로써 갖는 낭패감과 좌절과, 삶의 잔혹함은 더할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편,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최소한 어떤 삶이 덜 나쁜가가 판단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조차도 모르면서 삶을 허우적거려야 한다.
경제'만'이 사회를 끌고 가는 모순 속에 사회는 문화와 정치, 자본주의라는 경제에만 삶이 있다는 허망을 벗겨내야 한다. 시장에서 교환되었을 때만 그 자본주의라는 경제에 숫자가 잡힌다. 그 사이 사이 사람들은 시장경제 사이 사이를 그래도 살고 있다. 그 사이사이는 그래도 경제'도'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와 안녕, 아니 청춘은 아프다라고 말하면 안된다. 차라리 절망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삶에게는 ... ... 미안하다. 아직 가는 길을 모르겠다. 같이 아파하는 법도 서툴기 그지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