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개비꽃 피어

 

                                                  나희덕


 

너의 말은 아마도
달개비꽃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

 

자꾸만 뒷걸음질치다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을 찾지 못해 피어난 꽃

 

낮고 습한 곳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푸른 꽃

 

몸을 숙여 손을 뻗어보지만
너무 푸르스름해 끝내 만지지 못한 꽃

 

죽음의 눈 또한
왠지 푸른빛일 거라는 생각

 

수줍은 네 피가 식어
무덤 위에 내려앉은 북두칠성처럼

 

겨울의 죽음에도
어느덧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그 별빛

 

 

뱀발. 눈물이 나도록 시린 가을하늘을 찍어바른... ... 어제는 시가 몹시 생각나 방바닥에 널려있는 시의 집들을 수소문하다. 나희덕시인의 시들이 걸린다. 시린 마음들이 시린 시들이 오히려 따듯하다.  삶의 비밀번호라...네 삶으로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있다면... 엉뚱하게 말은 자란다. 네 삶들로 다가갈 수 있다면... ... 겨울의 죽음에도  여름을 알리는 그 별빛.  별빛이 총총하다. 푸른 빛이 가득하다.

 


 

 

풀의 신경계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흙 위에 돋는 혓바늘처럼

흙의 피를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는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넘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다

 

풀 속에서는 풀을 볼 수 없고

다만 만질 수 있을 뿐

 

제 몸을 뜯어 달아나고 싶지만

뿌리박힌 대지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는 풀,

그 소용돌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고

나는 자꾸 말을 더듬고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고

 

풀은 너무 멀리 간다

더 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

 

 

다시, 다시는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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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2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14-12-12 12:02   좋아요 0 | URL

아~~ 축하드려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이십니다. ㅎㅎ 제가 시집 `야생사과`를 보았을 때, `어두워진다는 것`의 나희덕이 더 좋다고 여겼어요. 그리고 더 좋은 시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보면서 주제도 그렇고 달라져있다는데서 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또 읽을 수 있겠구나 달라지고 있구나에 방점이 있어서요. 님이 말씀하신대로 장황하고, 리듬감, 참신함은 떨어지는군요. 끊임없이 조련하고 달라지는데 점수를 준 셈이죠. 3,4부 더 읽어보고 코멘트 드릴께요. 글 감사요.
 
과학기술의 주검, 그리고 연무 같은 환생의 가능성

 

 

 

1.

 

노동은 없다 - 경제, 노동 현실 수치를 생동감있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현실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통계 데이터를 분석하는 감각을 맡긴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자본의 흐름과 씀씀이를 헤아리거나 건드리거나 또 다른 경로를 만들 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세해야 한다. 한국의 현실이 이론상, 추상으로 드러나는 이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민해야 한다. 논문에서 구하기도 하며, 눈여겨볼 수 있는 현실의 지표를 찾아두기도 하며 흐름을 읽으려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림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연계하여 이어나갈 수 있다면 유효한 의미를 갖지 않을까 한다.  - 4천원인생은 조망하나 나와 끈을 놓치게 만든다. 현실의 측은감을 불러오지만 지금을 한발 나아가게 하는 무엇인가가 없다. 현실에서 멈춘다. 그 장벽을 넘게 하는 밧줄이나 지형구조물에 대한 최소한의 조망이 있어야 한다. 벽너머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청춘은 없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얼마나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는지, 닥치고 정치 역시 얼마나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무력화시키는지에 대해 체감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거나 대면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쉽게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인지도 느껴야 한다. 위로와 정치의 각성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위로와 정치의 각성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아야 한다. 위무, 힐링과 '선거잘해라' 외에 일상에서 무엇을 가져오는가? 토론하게 하는지 아프게 해서 제도의 벽을 같이 흔들게 하는 것인지? 아무도 현실의 지반에서 흔들리는 것이 없다. 그저 토닥거린 마음으로 머리만의 각성으로 똑같은 걸음걸이로 움직이는 것밖에 없다. - 20대와 다가올 20대에게 노동은 없다. 일자리가 없다. 누가 감히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가. 없으니 없다라고 해라. 나머지는 기를 쓰고 고생해도 안되니 살아갈 궁리를 하라고 해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방법, 경제가 나아져도 수가 없다라고 해라. 솔직함이 현실을 그대로 제대로 볼 수 있게하는 것이라고 해라. 어디든 틈새가 있다면 끼고 살아야 한다고 해라. 삼포세대다. 나라가 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해라. 해줄 것이 없으니 서로서로 기대며 먹고 살 궁리를 하라라고 말해라.

 

 

 

3.

 

정치는 없다 - 선거에 앞서서는 어떤 공약이든지 긁어모으고 실현할 수 있다고 외친다. 하지만 이것저것 걸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고, 약속했던 맹세도 부질없게 만든다. 파격을 하려는 시도는 꿈꾸지조차 못한다. 예산이라는 것도 관행대로 써야할 뿐, 그대로의 권력지형과 돈의 재분배를 감안하여 이루어진다. 짜투리나 여기저기 조금 더, 쓰이고 눈치밥에 조금 더 챙겨주는 수준이다. 시민이 요구하는 것은 전지구적이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 돈의 회계에 머무르는 한, 경제성장에 잡히는 교환만 생각하는 한, 다른 거래와 행동은 무용이다. 사회문화적 자본은 돈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밋밋한 지원에 그칠 수밖에 없다. 파격을 원한다면 정치이상이 필요하고, 정치밖의 준비가 요구된다.

 

 

 

4.

 

괄호는 있다 - 주변에 밀릴 수밖에 없는 것들. 밀려나는 가장자리에는 기대거나 기댈 수밖에 없는 옆이 있다. 그렇게 무리지어 있는 유적인간이 있다. 아둥바둥을 벗어난 텅빈 기호로서 삶이 있다. 그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을 명한다. 혼자 삶을 헤쳐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댈 수 있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삶들도 있다. 다른 길에는 헤쳐가는 삶이 강요하는 재산의 늪이 아니라 지금을 버텨낼 삶의 윤활유가 있다. 더 더 더를 요구하는 자본의 성이 아니라 번지고 나누는 삶의 다른 길과 노잣돈이 있다. 한푼의 세수도 주지않을 삶공간이 있다. 정치의 밖이자 노동의 밖이자 청춘의 밖이다. 삶을 쥐어짜지 않는 곳이 있다. 삶을 기댈 곳이 있다. 자욱한 어둠, 짙어지는 터널의 가장자리의 빛은 더 밝다. 삶을 걸지 않아도 삶은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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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인 삶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매어 둘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균적인 삶과 상식이 만약 연관이 있다면 노동과 경제에 촉수가 예민하게 뻗쳐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셈을 하고 따지고, 스스로 평균적인 삶, '사회적인 나, 가족, 우리'의 삶을 견주어보는 것은 아닐까? 장하성교수는 한국자본주의에서 논쟁을 바란다고 했다. 책도 많은 시간을 투여해서 준비한 첫작품이라고 했다. 전태일은 없다. 평균의 삶은 없다. 평균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사내유보금 추이를 밝혀내서 분배의 문제를 삼는 것도 주요한 지표라고 여긴다. 노동과 노동의 격차를 불러내는 것도 평균과 형평을 살려내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상식과 인권은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고인이 된 김기원교수의 형평에 대한 연구와 노력, 사회디자인연구소의 분석, 그리고 문화부 기자의 정서적 접근이 또한 마음을 흔든다. 삶을 바꿔내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벽같은 데이터에서 사람의 숨결을 읽어내고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편한 삶에 얼마나 다른 이들의 고통이 새겨져 있는지.....참 모르겠다. 상식이라는 것도 사람의 권리라는 것도... ... 모두 다 죽겠다고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뭐가 죽겠는지 셈하는 것은 터부라도 되는 것인냥... ...'평균적인 삶', 강물에 휩쓸려내려가는 그 삶은 숨이나 붙어있기나 한 것일까........

 

 

 

 

[36.5 월급 120만원과 세계의 비참]

 http://hankookilbo.com/m/v/44d63a2e892141b9bb570f14c1f43fc2

기사내용▼

 

저임금 근로자라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월 급여는 얼마인가. 사람마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게 돈의 본질적 속성이므로, 체감의 기준은 제 각각일 것이다. 올해 대졸 신입사원 초임 평균이 278만원이고,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은 것도 오랜 일이니, 200만원 미만 어디쯤, 대략 150만~200만원 사이가 저임금의 실질적 하한선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했다. 대형마트 10년차 비정규직 월급이 온갖 수당을 포함하고도 110만원이 안 된다는 데 분개하고,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지 않는 아파트 경비원이 월 100만원도 못 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내 사고의 지형 속에서 그들은 대체로 소수적 예외로 주변화되곤 했다. ‘저임금’, ‘저소득’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일부’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는 명사였고, 양극화니 어쩌니 해도, 나는 여전히 중산층이 다소나마 불룩한 다이아몬드형 다이어그램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틀렸다. 월 급여 200만원 미만은 결코 주변부가 아니었다. 10월말 발표된 통계청의 ‘2014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기사를 보고 나는 대경실색했다. 대한민국 임금근로자 1,800만명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는 임금이 월 100만~200만원 미만이었다. 무려 37.3%, 그러니까 매일 아침 출근해 늦은 저녁 퇴근하는 직장인 10명 중 4명이 100만원대의 월급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월 100만원 미만의 임금근로자 12.4%를 더하면 월급쟁이 절반이 한 달에 200만원을 못 벌고 있는 셈이다. 200만~300만원의 월급은 임금근로자 전체의 24.8%만이 받을 수 있는 상당한 ‘고임금’이고, 300만~400만원은 13.1%, 400만원 이상은 12.4%밖에 안 되는데, 나는 그동안 이 ‘고임금 근로자’들을 평균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언어가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경우야 수다하지만, 이처럼 치명적 기만이 있을 수 있을까. 임금근로자 절반이 받는 급여를 어떻게 저임금으로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오래 생각했다. 도대체 100만원대의,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50%의 임금근로자들은 어디에 있나. 나의 세계인식은 왜 이렇게 허술하고 그릇됐나. 주변에 슬금슬금 물어보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큰 아이가 다니는 공립유치원 급식실 파업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학교 비정규직 조리원은 1일 8시간을 근무하고 일당 4만6,770원을 받는다. 근무일 275일을 곱해 12개월로 나누면 월 107만원. 둘째가 다니는 민간 어린이집 보육교사 초임은 109만원, 여기에 정부의 처우개선보조금 등 각종 지원금이 붙으면 대략 140만~150만원. 친척 동생이 일하는 백화점 매장의 판매원 초임은 120만원 전후, 자주 가는 동네 커피전문점의 바리스타는 매니저급임에도 초임 약 110만원…. 120만원 안팎의 월급이 도처에 매복하고 있었다. 내가 몰랐을 뿐, 올해 최저임금 5,210원에서 달랑 몇 백원을 더 얹은, 이 인간존엄을 말살하는 노동가치의 환산액이 노동시장에는 이미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값이 도대체가 사람값이 아니라는 것. 세계의 모든 비참은 여기서 비롯됐다.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한 달에 200만원도 못 버니, 결혼 출산 육아 교육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도 네 능력이 그것뿐인 걸 어떡하냐고, 억울하면 공부 잘해서 출세하지 그랬냐고 도처에서 막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사교육에 목숨 걸지만, 대부분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끔찍한 악순환. 능력주의는 이제 이 땅에서 괴물이 됐다. 세상의 어떤 하잘것없는 능력도 한 시간 투여한 결과가 5,210원일 수는 없는데, 놀랍고도 슬프게도 모두가 능력주의를 수긍한다. 

  

기업 사내보유금이 500조가 넘고, 실질임금 증가율은 0%대에 들어섰으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아직도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기사가 쏟아진다. 그 대책 없이 쌓인 돈, 임금으로 풀어주시면 좋으련만, 자영업자부터 대기업 CEO까지 세상의 모든 사장님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월급 올려주세요”니 난망이다. 이럴 때 쓰라고 정부가 있는 것인데, 대책이라고 나온 게 ‘정규직 과보호 완화’란다. 우리가 잘못했다. 애를 너무 많이 낳았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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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 윗기사에 대한 견해 ▼

 

의외로 거대한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분노, 성토가 엉뚱한데로 흘러가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일보 박선영기자 역시 나처럼 통계청의 ‘2014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를 주목했다. 이 통계는 임금근로자 총1873만4000명 중에서 월100만원 미만이 12.4%, 100~200만원이 37.3%, 200만~300만원이 24.8%, 300만~400만원이 13.1%, 400만원 이상이 12.4%라는 사실을 보고, 그야말로 충격과 분노를 느낀 모양이다. 임금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200만원 미만인데, 대학진학률 80%에 대졸 초임 평균은 278만원이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대졸초임이 문제 일까? 대학진학률 80%가 문제일까? 임금근로자 절반 이상이 200만원 미만이 문제일까? 박선영 기자는 당연히 임금근로자 절반 이상이 200만원 미만이 문제라고 생각 한다. 그러면서 500조원이 쌓여 있다는 사내유보금에 눈을 흘긴다. 물론 나도 ...문제가 그렇게 간단 명료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제를 파들어가 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의 물질적 재생산 구조를 잘 보여주는 최신 통계인 2012년 기준 통계를 가지고 살펴보자. 총GDP는 1,251.5조원, 피용자 보수는 599.3조원이다. 이 중 임금 및 급료(이건희 월급부터 시간제 알바 월급까지)는 462.8조다. 나머지 136.5조는 기업이 부담하는 사회부담금(4대 보험료 등)이다. 통계청의 2012년 말 기준 임금근로자는 1773만4천명이다. 임금근로자 1인당 평균 임금및 급료는 462.8/1773만4천명 하면 2,609만5천원(월217만5천원)이 나온다. 총 취업자(임금근로자+자영업자)를 기준으로 따지면 사람은 2,468만1천명으로 늘고--조사하는 주에 1시간만 일해도 취업자로 잡으니 이렇게 나온 것이고 8시간 기준으로 따지면 2,299만명이다-- , 수입(근로자 임금 및 급료+ 자영업자 영업잉여)은 462.8조+114.8조원=577.6조원이 된다. 이를 2468만1천명으로 나누면 연2,340만원(월195만원)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제조업은 총취업자(2299만명)의 15.8%에 불과하지만, 총부가가치는 31%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조업의 전반적인 고임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한편 총취업자의 69.8%가 종사하는 서비스업의 경우 총부가가치의 59.5% 생산하는데 이 역시 도소매 및 운수업은 20.4%가 부가가치의 12.6%를 생산하고, 소비자 서비스업(음식 및 숙박서비스, 문화 및 기타서비스)은 13.7%가 겨우 5.3%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생산자서비스업(정보통신·방송, 금융·보험, 부동산·임대, 전문·과학 및 기술서비스, 사업지원서비스)은 18.4%가 25%를 사회서비스업(공공행정 및 국방서비스, 교육서비스, 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은 17.3%가 16.6%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통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제조업의 경우도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현대기아차 등 수출대기업과 독과점 기업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높을 것이다. 또 중소 제조업의 생산현장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엄청 들어와 있을 것이다. 이들이 합쳐져서 1인당 부가가치가 전체 평균의 2배가 되니, 대기업, 공기업, 독과점 기업의 사무관리직 임금과 생산직(조직노동)의 임금 수준이 얼마 높을지는 불문가지. 게다가 사회의 임금의 기준=표준으로 통용되는 공무원의 보수 기준은 이 최상층 308만(100인 이상 민간기업의 상용 사무관리직)을 기준으로 책정했으니 높을 수 밖에.....100만명의 평균이 5300만원 내외 였던가? 문제는 이들은 100만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기업과 그 방계까지 합치면 공공부문 종사자는 대략 250만~300만명 쯤이 되고, 이들의 평균은 5천만원 내외가 될 것이다. 대졸 초임이 의외로 높은 이유는 높은 생산성(이런 데서만 뽑을 테니까!)+독과점 이익+노조효과+공공부문 효과+ 기업의 한국특유의 리스크 헤징 효과+ 기업의 너무 적극적인 글로벌화 효과(이로 인해 기업소득은 늘지만 노동소득은 늘지 않는다) 등이 이중 삼중 사중으로 겹쳤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은 아주 고르게 가져가면 총 취업자 2500만원이 월 200만원 내외를 임금 및 급료로 가져갈 수 잇다. 그런데 한국은 공공부문, 대기업, 독과점 기업 등 합쳐서 대략 500~600만명은 평균의 2배를 가져간다면, 나머지가 어떻게 될지는 답이 빤히 나온다.

 

물론 피용자 보수를 늘릴 수 있고, 늘려야 한다. 문제는 100조원쯤을 더 가져온다고 해도, 현재의 노동내 양극화 구조가 그대로 인 한, 즉 많이 가져가는 놈이 더 많이 가져가는 한, 그래서 비교우위 산업이 고용을 많이 흡수하고, 비교열위 산업이 고용을 원활하게 방출하지 않는 한, 200만원 이하가 임금근로자의 절반이 되는 일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기업의 중국의 거세 추격으로 인한 중국 리스크, 고용 리스크(해고는 살인이라던가?), 금융 리스크, 저열한 규제품질 등이 엄존하는 한 역시 저임금 문제는 해결 난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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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뉘.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상식이나 인권은 있는 것일까? 경제는 늘 어렵기만 하는 것일까? 같은 그룹, 모둠의 삶에서 평균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 상식적인 차이가 현실인 듯 자신을 되비춰주지만, 그것 역시 제대로 지금여기를 비춰주지 않는다. 장하성교수님의 저작은 다분히 논쟁적이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한국현실을 연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깜보이기 때문이다. 국제학술지에 내야 그나마 처주는데 한국을 연구한다는 것이 학자로서의 교수로서의 이름값에 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사회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탈북한 한대학의 사회학과 박사생은 선수과목인 계량경제학?을 통과하지 못해 논문을 쓰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건네들은 적이 있다. 북한을 연구하기 위해 그렇게 필요한 과목일까? 이런 답답증은 지금여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빌려쓴 것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배여있기 마련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한국현실을 대유하여 연구한 한국자본주의는 여러 데이터에서 무척 다른다. 사회디자인 연구소의 통계분석은 나름대로 여기 경제를 분석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접하다가 인권이나 상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고정관념처럼 생각하는 인권과 상식은 살아있는가? 살아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곁의 삶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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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주검, 그리고 연무 같은 환생의 가능성

 

과학기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드리운 그 과학기술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과학기술을 살릴 수 있다.’

 

1.

첨단은 없었다. 세월호 침몰과 구조작업, 그 이후 원인을 밝혀내는 작업에 있어 첨단과학기술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화성을 탐사하고, 심해바다를 헤집고 다니고, 사고를 예측하는 첨단과학기술의 무능을 똑똑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철저히 사람과 시스템의 유용성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거꾸로 과학기술자들의 역할이 철저히 법의 시녀로 면죄부를 발급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점만 도드라진다. 검사기관도 학계도 크루즈산업 육성을 위해 기술적인 하자나 문제가 없다고 증명해내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 최고의 조선대국과 선박기술을 갖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은 후진국형 참사다. 선박을 만들고 파는 기술은 세계 최강일지 모르지만, 재난과 재해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과학기술은 최하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부끄럽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해야 한다. 인터넷 최강국임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렇게 돈을 버는 기술이 최고이지 그 기술로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일과 연결된 기술과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도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얼마나 행복과 무관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며 죽음의 극단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하는 일과 얼마나 상관없는지 영화처럼 보여준다. 현실이다. 어쩌면 돈을 버는 일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바랄 수 있다는 비참함이 일상에 스며들지 오래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토록 원하고 열망하는 과학기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원하던 원자폭탄과 원자력발전이 걸어온 길, 그 아래는 늘 환호하는 대중이 있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화석연료를 캐고 쓰고, 석유로 지탱해온 문명의 결과가 이렇게 지구의 기후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그 편리성에 여전히 탄성을 지르는 우리가 있다.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다는 인터넷 혁명과 환호 속에는 개인정보 누출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입을 틀어막으려는 역기술이 음지를 배회한다. 위정자는 이런 대중의 분위기에 영합해서 한 번도 과학기술의 이면을 제대로 살펴보게 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이 배설하는 오염의 악취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다시 달에 태극기를 꽂으면 절반이상이 환호하고 애국의 욕망을 투여하기에 바쁘다. 그 욕망으로 인해 지근거리에 있는 나의 삶과 지역의 삶, 나의 안전과, 지역의 안전, 우리의 안전에 과학기술이 다가서기가 낯설다.

 

2.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배설물을 또 과학기술이 치워야 한다고 말한다. 치울 수 있다고 한다. 배설량은 처리량보다 많아 치울 오물은 끝이 없다. 이렇게 능력도 없이 해결사를 자처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아야 한다. 문학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철학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예술이 우리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철부지다. 과학기술의 숱한 분야만 해도 소통하고 나누는데 오히려 인색하다. 유전자로 환원하여 이야기하고, 뇌과학이 또 다른 유토피아를 만들 것이라고 하고, 로봇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한다. 디지털이 적자라고 한다. 거대과학기술이 지금 이렇게 숱한 위험을 낳은 것임에도 자신의 분야가 다른 분야를 휘하에 둘 것처럼 말한다. 또 거대과학기술로 과학기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처럼 과학기술만으로 어떤 해결도 할 수 없다. 예술과 철학과 문학이 갖는 가능성만큼만 해결의 조짐을 더할 수 있다.

첨단과학기술과 재난재해안전을 위한 기술,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을 위한 기술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재난과 재해, 안전 분야에 국가가 투입하는 연구개발 예산은 1%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도 2010년이 되어서야 1%이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기술만을 위한 기술들 사이사이가 끊어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능에 가까운 거대과학기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의 흔적조차 없었음을 각성해야 한다. 세상이 일사분란하게 돈이 되는 과학기술로 매몰되어 묶어낸 그 과학기술의 결과물이 얼마나 초라할 수밖에 없는지 다시 한 번 똑똑히 봐야한다.

‘100미터와 같은 단거리 경주를 하기 위해서는 백색의 속근을 키울 수밖에 없고, 무산소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힘을 쓰도록 몸을 만들고 단련해야한다. 어쩌면 우리 과학기술이란 경제성장에 종속되어 폭발적이고 가시적인 산업기술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만미터, 하프마라톤 경보, 마라톤의 중장거리를 뛰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 체력과 적색의 지근 비율도 낮기만 한 것은 아닌가. 사회, 정치, 문화, 지역과 사람 속에서 문제를 찾고 접목시킬 수는 없었는가.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려가기 위한 길고 긴 중장거리 마라톤을 위해서는 다른 근육의 단련이 필요하다. 크고 강한 근육만이 아니라 작고 끊임없이 유산소호흡을 하는 잔 근육의 근지구력으로 우리 몸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가. 산업발전을 위해 이렇게 크고 강한 근육만 자랑했던 자만을 재고해야 한다. 작고, 강한 기술들이 사회와 지역들 사이의 그 진짜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근력과 근지구력을 키워야 한다. 인터넷의 혁명이 재난과 재해에 문제의 소지를 줄이고 없애는데 혈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요소에 손 내밀어 접붙여 또 다른 중간기술을 만들어내야 한다. 심해저 자원을 캐내고 확인하는 과학기술의 움직임이 만일의 재해에도 관여할 수 있도록 격벽을 트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3.

과학기술은 죽었다. 주검이 되어 도처에 떠다니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기후양극화의 재앙, KTX, 지진재해, SNS의 역습. 사회와 유리된 과학기술은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 주검이 되어있는 것처럼…….

세월호 악몽으로 대변되는 끔직한 재앙은 세상 사람들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과학기술이란 것은 자본에 결박되어 움직여본 적이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있던 위험을 살펴보는 능력을 잃었다. 위험은 커지고 커져 도처에서 생명을 노린다. 위험사회를 너머 재난자본주의라는 지칭까지 과하지 않다. 그런데 자본가의 탐욕만을 탓할 수 없다. 위험은 너무도 커져 똑같이 재앙의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거대도시에 이 나라 절반이상이, 도시에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산다.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유사한 위험의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는 대형 사고들은 '설마''희한''만일''우연' 사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가난과 굶주림을 모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학기술이 안전과 노약자를 모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학기술이 또 다른 괄호를 모신다면 어떻게 될까? 주검이 된 과학기술은 이 빈 괄호에 또 다른 것을 채우려해야 한다.

과학기술을 끌고 온 합리성은 과학기술 밖으로 시선과 행보를 넓혀야 한다. 그 위험을 확률적으로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쓰여야 한다. ‘만일설마의 악몽은 현실에서 눈으로 보일 수 있도록 줄여나가야 한다. 산업발전에만 경도된 기술을 이런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도록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지역과 상황에 맞도록 예행연습을 통해 만일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 행정체계와 제도가 움직여야 한다. 과학기술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녹아들어 있어야만 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이 사회적 합리성을 잃어버려 표류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과학기술이 제자리를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의 시작은 합리성으로 똘똘 뭉친 그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회적 합리성에 기댈 때만 서로 제대로 설 수 있다. 사회를 위해, 이 땅의 가난과 굶주림, 지구의 생태를 위해서라도 과학자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지역으로, 삶의 공간으로 함께 걸어 나와야 한다. 거대한 기술만이 아니라 촘촘한 기술, 작은 기술, 강한 기술들 간의 조화로 이어져야 한다. 단거리 선수가 아니라 장거리 선수에 맞도록 과학기술은 자신을 버리면서 공진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그 과학기술들이 지역과 사람들의 손길, 마음길, 문화와 예술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죽었던 과학기술이 다시 씨앗처럼 사회 속에서 새로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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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정표가 가르키지 않는 곳들 ... ...
    from 木筆 2014-12-09 13:44 
    1. 노동은 없다 - 경제, 노동 현실 수치를 생동감있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현실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통계 데이터를 분석하는 감각을 맡긴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자본의 흐름과 씀씀이를 헤아리거나 건드리거나 또 다른 경로를 만들 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세해야 한다. 한국의 현실이 이론상, 추상으로 드러나는 이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민해야 한다. 논문에서 구하기도 하며, 눈여겨볼 수 있는 현실의 지표를 찾아두기도 하며
 
 
 

 

1. 지난 주말 수소문하던 중 보고프던 지인들이 우연치 않게 수배가 다 되었다. 온유네 닭매운탕에서  모임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애가 끓고, 고민이 넘쳐나는 듯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도 문화단체와 막 만들고 있는 장애인단체 진행중인 것들은 아련하고 생생하다.  질문은 시차같은 것이라고 거래되어야 하고 남겨야 한다고 전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 되묻는 이가 반반이다. 정확한 물음에 앞서 당위를 건넨다. 시민교육이라는 것의 한계는 우리 교육시스템과 인문학조차 입만 적실뿐 온몸으로 뼛속 깊이 쟁점이 되는 것을 나눠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아는 듯하지만 실제 입으로 나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2. 낯설게 듣지 못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보다 하고픈 말이 더 많았던 듯 싶다.


3. 저장하드 이야기를 하다가 크고 불편할 수록 오래남는다고 서로 이야기한다. 간편하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크고 불편하게 해야 눈에 띄이고 눈에 띄여서 존재가 드러나고 실재 잊히지 않는다고 나누다.


4. 이제 사적인 생활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얘기한다. 얕은 비가 내렸다. '사생활'에 대해 어디까지 존중되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나누어본 적이 없다. 묻지마 휴가와 모른 척하기가 얼마나 삶에 소중한 경험이 되는지 사람마다 다르다. 어디까지 모른 척하고, 알면 되지 않는 것인지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근력이 생길텐데. 우리는 금기와 금기된 것을 나누는 토론은 부재하다. 묻지도 않는다. 그 사고의 다양한 결과, 현실을 살피려하지 않는다.


5. 왜 19금만 있는 것일까? 29금, 39금, 49금은 있어서는 안되는가? 성적인 것만 금지선이 있고 삶속의 다른 금지선을 밟으면 안되는 것인가? 29세가 넘어서 삶의 현실로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비교해보거나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39세가 넘어서 부모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과 붙어서 대신 아프지 못하는 아픔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49세가 넘어 세상이 짖는 소리만 컹컹 짖는 것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빌려쓰는 것이 난감한 일인지 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금지선을 만든 것이 얼마나 세상을 빌려쓰는데 허망한 것인지? 체념과 고통, 죽음의 금지선이 왜 필요한 것인지 되새길 수는 없는 것일까?  69금일지 59금일지....그 금지선 가운데 하나쯤은 세상을 바꾸는, 금지선을 넘는 법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6. "세상은 만만, 나는 쓸만" 과  "세상은 천만,  나는 *만"  그 사이에 살아있다는 것이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상관없이 잘 살아야 할 이유도 있고, 현실을 잘 느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느낄 수 없게 알 수 없게, 알아서도 안되는 것인 것처럼 줄 긋고, 벽 세우고, 눈가리고... 알고 깨달아야 할 이유가 있다. 누구나.

 

 

141128 온*네, 대*부** ㅇㅇㅈ, ㄱㄷㅅ, ㅅㅈㅂ, ㅇㅇ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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