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말 수소문하던 중 보고프던 지인들이 우연치 않게 수배가 다 되었다. 온유네 닭매운탕에서 모임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애가 끓고, 고민이 넘쳐나는 듯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도 문화단체와 막 만들고 있는 장애인단체 진행중인 것들은 아련하고 생생하다. 질문은 시차같은 것이라고 거래되어야 하고 남겨야 한다고 전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 되묻는 이가 반반이다. 정확한 물음에 앞서 당위를 건넨다. 시민교육이라는 것의 한계는 우리 교육시스템과 인문학조차 입만 적실뿐 온몸으로 뼛속 깊이 쟁점이 되는 것을 나눠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아는 듯하지만 실제 입으로 나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2. 낯설게 듣지 못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보다 하고픈 말이 더 많았던 듯 싶다.
3. 저장하드 이야기를 하다가 크고 불편할 수록 오래남는다고 서로 이야기한다. 간편하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크고 불편하게 해야 눈에 띄이고 눈에 띄여서 존재가 드러나고 실재 잊히지 않는다고 나누다.
4. 이제 사적인 생활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얘기한다. 얕은 비가 내렸다. '사생활'에 대해 어디까지 존중되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나누어본 적이 없다. 묻지마 휴가와 모른 척하기가 얼마나 삶에 소중한 경험이 되는지 사람마다 다르다. 어디까지 모른 척하고, 알면 되지 않는 것인지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근력이 생길텐데. 우리는 금기와 금기된 것을 나누는 토론은 부재하다. 묻지도 않는다. 그 사고의 다양한 결과, 현실을 살피려하지 않는다.
5. 왜 19금만 있는 것일까? 29금, 39금, 49금은 있어서는 안되는가? 성적인 것만 금지선이 있고 삶속의 다른 금지선을 밟으면 안되는 것인가? 29세가 넘어서 삶의 현실로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비교해보거나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39세가 넘어서 부모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과 붙어서 대신 아프지 못하는 아픔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49세가 넘어 세상이 짖는 소리만 컹컹 짖는 것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빌려쓰는 것이 난감한 일인지 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금지선을 만든 것이 얼마나 세상을 빌려쓰는데 허망한 것인지? 체념과 고통, 죽음의 금지선이 왜 필요한 것인지 되새길 수는 없는 것일까? 69금일지 59금일지....그 금지선 가운데 하나쯤은 세상을 바꾸는, 금지선을 넘는 법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6. "세상은 만만, 나는 쓸만" 과 "세상은 천만, 나는 *만" 그 사이에 살아있다는 것이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상관없이 잘 살아야 할 이유도 있고, 현실을 잘 느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느낄 수 없게 알 수 없게, 알아서도 안되는 것인 것처럼 줄 긋고, 벽 세우고, 눈가리고... 알고 깨달아야 할 이유가 있다. 누구나.
141128 온*네, 대*부** ㅇㅇㅈ, ㄱㄷㅅ, ㅅㅈㅂ, ㅇㅇ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