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짜리 삶
50만원짜리 삶
-50 만원짜리 삶
100만원짜리 삶
- 100 만원짜리 삶
이백,삼백
그리고 500만원짜리 삶
그리고 또 1000만원짜리 삶

다 버겁고 무겁고 힘들고
삶이 전시되어야만
삶들을 느낄 수 있다

다 지치고 불안하고 어렵고
삶들도 전시되어야만
삶을 고를 수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삶은 늘 닫혀있다
삶은 늘 갇혀있다

나만은
우리만은
열외일 것이라고

짜리의 삶이
쇼윈도우에 팔리고 있는 걸 본다
죽어야 죽음을 알 수 있듯
삶들을 전시해야
삶의 자장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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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인 방법은 언제나 내재적 비판의 방법입니다. 즉 전적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방금 설명한 의미에서 사태에 외적인 기준을 사태에 적용해서는 결코 안 되며, 어떤 단언이나 단순한 착상이어서는 안 되고, 사태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사태 자체에, 사태 자체의 개념에 근거해 평가해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경우, 이는 결코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이른바 이상적인 사회 예컨대 어떤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내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어디서나 세심히 피했습니다. 이는 헤겔이 어디서도 유토피아나 실현된 이념 그 자체를 그려내는 일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교환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이 사회는 계약당사자로서 자유롭게 교환하는 주체들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가 어떤 상태인지 보고자 한다...” 66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사고를 마르크스가 비판할 경우,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자유와 정의의 이념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이념과 대질되는 현실에서는 그 이념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이 제시될 뿐이며, 이로써 물론 이제까지 통용되고 있는 자유와 정의의 개념들 자체도 수정됩니다. 즉 그것들은 이제 처음 사유와 맞설 때처럼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화됩니다. 이 모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듯하며,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변증법은 그렇게 끔직하게 나쁜 게 전혀 아니며, 모순이라는 것도 결코 그렇게 진지한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군, 그렇다면 오히려 전체는, 어느 정도 편협하지 않고 제한된 사고들을 확장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식으로 바로 전체에 도달한다는 상식의 규칙으로 귀결되는군.” 변증법에는 사실상 이러한 상식의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완전히 멋지고 그렇게 완전히 매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67

 

사태는 이렇습니다. 비판적 사고, 즉 사태를 그 자체에 비춰 평가하고 그 자체와 대질하고 사태를 더욱 밀고 가는 사고는 자체의 부정적 행위만을 주목하고, 자체의 진행과 결과를 그 긍정적 측면에서도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의 표정으로 여유만만하게 사고를 넓혀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정말 무조건 무자비하게 변증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내가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한 바에서, 즉 전체는 결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며, 진리는 경직된 것 혹은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 아니라 어떤 생성되는 것, 생겨나오는 것이자 결과라는 데에서 나오는 귀결입니다. 67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우선 완성된 이론 체계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일단 훌륭히 이론 전체를 아주 평온하게 파악한 다음 이로부터 실천적 결론들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사유의 모든 단계에서 불꽃이 일면, 이 불꽃은 이론적 성찰의 극에서 실천적 행위의 극으로 옮겨붙는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는 전통적 사유와 근본적으로 상이합니다. 70

 

최초의 명제 혹은 최초의 원리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우선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고,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어떤 제일 명제를 얻었다면 점차 더욱 풍요로운 것을 추가로 얻기 위해 그것을 더욱더 실행해가야 하지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일 뿐이라는 등의 개념들이 헤겔의 경우 여러분들에게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훨씬 더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겠습니다....헤겔의 경우 추상적이라는 개념 역시 단순히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리된 것 혹은 개별규정이야말로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추출된’, 공제된 한에서-추상적입니다. 그리고 전체를 향한 운동인 사유의 운동 자체는 헤겔의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 즉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향한 운동입니다....시작자체가 본질적으로 진리가 자체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71-72  19580522

 

볕뉘.

 

1.  일터 분들 가운데 동네 인근에 있는 분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또 다른 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그것이 갖는 삶의 자장이 있는 것 같다. 근처의 맛집이며, 세세하기 돌아가는 장소의 이력까지...소개받은 물회집만 여러 곳이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부터 사람을 챙기고 대하는 것에서 단순한 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 없다. 혼자 일터-집-건강이란 동선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르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시선을 갖게 만든다. 현장과 사무실의 문턱, 사무실이 들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나누는 양념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 . 토스트, 만든 딸기쨈, 버터 오렌지 한조각,  쥬스 아직 아침에는 낯설다.  5월 22일의 제4강을 읽어본다.

 

2.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나 절대원리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 말투(문체)에서도 나타납니다. " 이 사회가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진보는 늘 자유와 평등이 선험적인 것 마냥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의자가 생기고 전진과 발전에 발목을 잡혀, 처지고 버려지는 것에서 사유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진보는 없습니다.

 

루쉰은 늘 이런 주의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그 흘리는 변들을 감당하기도 벅차 모두 똑같다라고 했습니다. 이념과 원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것에서 아도르노는 또한 처절하고 아픈 삶을 살아냈습니다. 이땅은 온갖 혁명이 존재하고 있다. 평균적인 이상의 삶을 사는 저자의 책은 보지 않는다는 정희진도 빼어 닮았다고 여깁니다. 진보가 그림에 사로잡히고 그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를쓴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땅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야합니다. 어쩌면 시작을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등과 자유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 이 무리들은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보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낮잠이 아니라 묘지에 비석같은 변증법 타령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1958년 6월 3일 [변증법 입문] 제5강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2015년 6월 3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죠.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시작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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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4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리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이 과정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유과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등장하지만, 이러한 등장은 과정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결과 속에는 그 과정이 지양되어 있고, 이 전체 과정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 진리에 속하며, 마치 그것이 단순한 예비학인 것처럼, 여러분이 이제 얻어내고 찾아낸 그 결과에서 간단히 빼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

 

 

변증법은 현상이 자체에 근거해서는 이해될 수 없어서 도식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전체를 밖에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개별 현상을 조명하고 이 개별 현상에 머물면서 개별 현상을 규정하되, 바로 이 규정을 통해 그것이 자체 내에서 스스로를 넘어서고, 이로써 바로 그 전체, 바로 그 체계에 이르기까지 투명해지도록 하려는 시도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변증법적 사유가 일단 실제로 순진한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제기하는 요구, 즉 한편으로 완고한 전문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개별 현상들에 머물지 말고 그것들을 총체성 내부에서-그 속에서 비로소 그 현상들은 기능하고 의미를 얻게 됩니다-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한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총체성, 이 전체를 실체화하지 말고, 즉 독단적으로 외부로부터 끌어들이지 말고, 이러한 이행을 언제나 사태 자체에 근거해 수행하라는 요구입니다. 53...변증법은 어떤 처방이 아니며 진리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이야말로 바로 변증법의 본질인 것입니다. 54

 

 

볕뉘. 어제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산재교육 겸해서 울렁거리는 사진을 봐서인지, 근거없이 돌변해서 부는 선선한 바닷바람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작정 걷고 싶기도 하였다. 걷다보면 바다가 나올까 하고 단촐한 차림에 휴대용 물병을 들고 어슬렁거렸다. 천변을 걷다보니 공사중인 다리에서 마음도 멈추어 버렸다. 바다에 가는 길은 없다. 냉천은 흘러가지만 나는 더 갈 마음이 막혔다. 그래서 돌아선다. 돌아서고 길을 건너고 시끄러움을 후회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문화 몇호 몇호라고 적혀있는 도로가 아주 넓은 단층 주택가를 거닐었다. 저 집에 살아볼까, 나무가 제법이고 아담한데  아니 시끄럽지는 않을까. 시끌벅적하기에는 너무 조밀한데 이러면서 완보를 즐겼다.  그렇게 걷다나니 맥주 한잔이 필요하다.  맥주한잔에 정치학의 자본론이라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만지작거렸다. 짧고 굵은 단문들은 그때 그때 긴장감이 넘쳤다. 순간순간을 넘어가지 않았다. 긴장이 맺혔다. 역시 대가들의 글이란....프루동과 논쟁하는 모습의 마르크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가 빠진 메이지인의 일본을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은 시대와 논쟁하지 않는다. 시대를 뚫고 가려하지 않는다. 어디서 들은 절대원리를 빌리거나, 떨어진 진리를 줏어다가 시늉을 한다.

 

진리는 하루하루를 산다. 진리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진리는 결과이다. 결과의 한점으로 사태는 빛을 발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한다. 묵묵한 긴장들 사이사이 팽팽함이 결과의 한점으로 구체와 맥락을 살린다. 1958년 5월 20일 제3강을 듣고보다.

 

모임일로 긴통화를 했다. 진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상황을 묵묵히 살아내고 또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긴장을 불러내고, 주문한 나도 바뀌고 그리고 그 결과의 마지막 지점에서 모두 다시 한번 바뀌는 것이라고 진리는 과정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냥 잘해보자고 말했다. 존재, 주체, 객체, 나와 너 모두에 관여되기에 괜찮은 사유다라고 여긴다. 나에 대한 주문, 너에 대한 주문, 진리에 대한 주문이 다르지 않다. 방법을 달리해야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직까지는, 이것이 오늘 느낀 소회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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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상상002호가 발간되고, 이회영, 한용운, 정약용을 만나는 답사가 몇 좌석 남지 않았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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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 사물인터넷, 데이터 마이닝, 빅데이터, 관계, 권력,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 한병철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금속 을 만지고 다루는 것을 좋아하던 그가 사고로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한다. 디지털 무리가 왜 좋아요의 현상학에 잠식되어 나르시스트, 우울증, 정보과잉증후군에 시달리는지, 왜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된다. 빅데이터로 돈? 벌고 싶다면 일괄독서를 추천한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우리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노인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그러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팔을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노인의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볕뉘. 창가에 햇살이 곱다 커튼 사이로 비추는 사선, 저자 한병철을 읽다가 스마트폰과 IT에 광분?하는 사람들과 미리 나누고 싶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자화상이면 좋겠다 싶다. 마지막을 발판 삼아, 디지털의 심연이 깊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욕심일 것이다. 가볍게 씩 웃는 때가 다시 올까. 말하지 않아도 많은 말을 하는....말끝과 돌아섬의 이유를 헤어지고 난 뒤 곰곰이 삭힐 줄 아는 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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