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이 과정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유과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등장하지만, 이러한 등장은 과정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결과 속에는 그 과정이 지양되어 있고, 이 전체 과정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 진리에 속하며, 마치 그것이 단순한 예비학인 것처럼, 여러분이 이제 얻어내고 찾아낸 그 결과에서 간단히 빼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

 

 

변증법은 현상이 자체에 근거해서는 이해될 수 없어서 도식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전체를 밖에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개별 현상을 조명하고 이 개별 현상에 머물면서 개별 현상을 규정하되, 바로 이 규정을 통해 그것이 자체 내에서 스스로를 넘어서고, 이로써 바로 그 전체, 바로 그 체계에 이르기까지 투명해지도록 하려는 시도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변증법적 사유가 일단 실제로 순진한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제기하는 요구, 즉 한편으로 완고한 전문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개별 현상들에 머물지 말고 그것들을 총체성 내부에서-그 속에서 비로소 그 현상들은 기능하고 의미를 얻게 됩니다-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한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총체성, 이 전체를 실체화하지 말고, 즉 독단적으로 외부로부터 끌어들이지 말고, 이러한 이행을 언제나 사태 자체에 근거해 수행하라는 요구입니다. 53...변증법은 어떤 처방이 아니며 진리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이야말로 바로 변증법의 본질인 것입니다. 54

 

 

볕뉘. 어제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산재교육 겸해서 울렁거리는 사진을 봐서인지, 근거없이 돌변해서 부는 선선한 바닷바람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작정 걷고 싶기도 하였다. 걷다보면 바다가 나올까 하고 단촐한 차림에 휴대용 물병을 들고 어슬렁거렸다. 천변을 걷다보니 공사중인 다리에서 마음도 멈추어 버렸다. 바다에 가는 길은 없다. 냉천은 흘러가지만 나는 더 갈 마음이 막혔다. 그래서 돌아선다. 돌아서고 길을 건너고 시끄러움을 후회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문화 몇호 몇호라고 적혀있는 도로가 아주 넓은 단층 주택가를 거닐었다. 저 집에 살아볼까, 나무가 제법이고 아담한데  아니 시끄럽지는 않을까. 시끌벅적하기에는 너무 조밀한데 이러면서 완보를 즐겼다.  그렇게 걷다나니 맥주 한잔이 필요하다.  맥주한잔에 정치학의 자본론이라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만지작거렸다. 짧고 굵은 단문들은 그때 그때 긴장감이 넘쳤다. 순간순간을 넘어가지 않았다. 긴장이 맺혔다. 역시 대가들의 글이란....프루동과 논쟁하는 모습의 마르크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가 빠진 메이지인의 일본을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은 시대와 논쟁하지 않는다. 시대를 뚫고 가려하지 않는다. 어디서 들은 절대원리를 빌리거나, 떨어진 진리를 줏어다가 시늉을 한다.

 

진리는 하루하루를 산다. 진리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진리는 결과이다. 결과의 한점으로 사태는 빛을 발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한다. 묵묵한 긴장들 사이사이 팽팽함이 결과의 한점으로 구체와 맥락을 살린다. 1958년 5월 20일 제3강을 듣고보다.

 

모임일로 긴통화를 했다. 진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상황을 묵묵히 살아내고 또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긴장을 불러내고, 주문한 나도 바뀌고 그리고 그 결과의 마지막 지점에서 모두 다시 한번 바뀌는 것이라고 진리는 과정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냥 잘해보자고 말했다. 존재, 주체, 객체, 나와 너 모두에 관여되기에 괜찮은 사유다라고 여긴다. 나에 대한 주문, 너에 대한 주문, 진리에 대한 주문이 다르지 않다. 방법을 달리해야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직까지는, 이것이 오늘 느낀 소회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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