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인 방법은 언제나 내재적 비판의 방법입니다. 즉 전적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방금 설명한 의미에서 사태에 외적인 기준을 사태에 적용해서는 결코 안 되며, 어떤 단언이나 단순한 착상이어서는 안 되고, 사태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사태 자체에, 사태 자체의 개념에 근거해 평가해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경우, 이는 결코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이른바 이상적인 사회 예컨대 어떤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내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어디서나 세심히 피했습니다. 이는 헤겔이 어디서도 유토피아나 실현된 이념 그 자체를 그려내는 일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교환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이 사회는 계약당사자로서 자유롭게 교환하는 주체들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가 어떤 상태인지 보고자 한다...” 66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사고를 마르크스가 비판할 경우,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자유와 정의의 이념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이념과 대질되는 현실에서는 그 이념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이 제시될 뿐이며, 이로써 물론 이제까지 통용되고 있는 자유와 정의의 개념들 자체도 수정됩니다. 즉 그것들은 이제 처음 사유와 맞설 때처럼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화됩니다. 이 모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듯하며,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변증법은 그렇게 끔직하게 나쁜 게 전혀 아니며, 모순이라는 것도 결코 그렇게 진지한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군, 그렇다면 오히려 전체는, 어느 정도 편협하지 않고 제한된 사고들을 확장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식으로 바로 전체에 도달한다는 상식의 규칙으로 귀결되는군.” 변증법에는 사실상 이러한 상식의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완전히 멋지고 그렇게 완전히 매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67

 

사태는 이렇습니다. 비판적 사고, 즉 사태를 그 자체에 비춰 평가하고 그 자체와 대질하고 사태를 더욱 밀고 가는 사고는 자체의 부정적 행위만을 주목하고, 자체의 진행과 결과를 그 긍정적 측면에서도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의 표정으로 여유만만하게 사고를 넓혀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정말 무조건 무자비하게 변증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내가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한 바에서, 즉 전체는 결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며, 진리는 경직된 것 혹은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 아니라 어떤 생성되는 것, 생겨나오는 것이자 결과라는 데에서 나오는 귀결입니다. 67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우선 완성된 이론 체계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일단 훌륭히 이론 전체를 아주 평온하게 파악한 다음 이로부터 실천적 결론들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사유의 모든 단계에서 불꽃이 일면, 이 불꽃은 이론적 성찰의 극에서 실천적 행위의 극으로 옮겨붙는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는 전통적 사유와 근본적으로 상이합니다. 70

 

최초의 명제 혹은 최초의 원리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우선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고,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어떤 제일 명제를 얻었다면 점차 더욱 풍요로운 것을 추가로 얻기 위해 그것을 더욱더 실행해가야 하지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일 뿐이라는 등의 개념들이 헤겔의 경우 여러분들에게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훨씬 더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겠습니다....헤겔의 경우 추상적이라는 개념 역시 단순히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리된 것 혹은 개별규정이야말로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추출된’, 공제된 한에서-추상적입니다. 그리고 전체를 향한 운동인 사유의 운동 자체는 헤겔의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 즉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향한 운동입니다....시작자체가 본질적으로 진리가 자체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71-72  19580522

 

볕뉘.

 

1.  일터 분들 가운데 동네 인근에 있는 분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또 다른 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그것이 갖는 삶의 자장이 있는 것 같다. 근처의 맛집이며, 세세하기 돌아가는 장소의 이력까지...소개받은 물회집만 여러 곳이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부터 사람을 챙기고 대하는 것에서 단순한 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 없다. 혼자 일터-집-건강이란 동선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르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시선을 갖게 만든다. 현장과 사무실의 문턱, 사무실이 들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나누는 양념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 . 토스트, 만든 딸기쨈, 버터 오렌지 한조각,  쥬스 아직 아침에는 낯설다.  5월 22일의 제4강을 읽어본다.

 

2.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나 절대원리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 말투(문체)에서도 나타납니다. " 이 사회가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진보는 늘 자유와 평등이 선험적인 것 마냥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의자가 생기고 전진과 발전에 발목을 잡혀, 처지고 버려지는 것에서 사유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진보는 없습니다.

 

루쉰은 늘 이런 주의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그 흘리는 변들을 감당하기도 벅차 모두 똑같다라고 했습니다. 이념과 원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것에서 아도르노는 또한 처절하고 아픈 삶을 살아냈습니다. 이땅은 온갖 혁명이 존재하고 있다. 평균적인 이상의 삶을 사는 저자의 책은 보지 않는다는 정희진도 빼어 닮았다고 여깁니다. 진보가 그림에 사로잡히고 그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를쓴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땅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야합니다. 어쩌면 시작을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등과 자유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 이 무리들은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보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낮잠이 아니라 묘지에 비석같은 변증법 타령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1958년 6월 3일 [변증법 입문] 제5강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2015년 6월 3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죠.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시작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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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2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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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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