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민주주의란

 

플라톤은 폴리스는 5,0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2만 내지 3만으로도 전원 출석하여 민회를 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선거로 뽑는 500명의 평의회에서 민회에 올린 안건을 심의하고, 거기를 통과한 중요문제에 대해 아테네의 신전 앞 광장에서 민회를 열었다. 재판은 6,000명의 민중법정 형태로 이루어졌다. 66

 

전문가만으로 이루어지거나 투표율 100%라고 모두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이 고조되며, ‘모두가 어우러져 결정했다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모두가 어우러져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어우러져 행하지 않으며, 모두에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 활성화된다는 것은 모두혹은 우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이다. 74

 

폴리스=도시국가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폴리스는 정치를 행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곧 제의이기도 하며, 신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검을 지닌 남자들이 모인다. 폴리스는 폴리틱, 즉 정치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편 오이코스란 집의 영역이다. 그곳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일하며, 아이를 낳고 기른다. 오이코스는 오이코노미코스(미코스는 관리)형태를 취해 오늘날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의 어원이 된다. 그러나 이를 정치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근대적인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는 자유와 항상의 영역’, 오이코스는 필연과 무상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77

 

무연의 영역, 자유의 영역, 공의 영역은 아무나 들어와도 되는 퍼블릭의 영역이다. ‘이것은 퍼블릭 하다라고 쓰여 있을 경우, 유럽에서는 누구나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인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목욕탕에서는 누구나 나체가 되어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아질이라 하여, 무연의 영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85

 

의석비율에 민의가 드러나지 않고 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런 문제를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타 진영간의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민회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든 사람들 가운데에 플라톤이 있었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인 제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진리를 부르짖는 스승을 사형에 처한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폐해를 그대로 담아둔채로는 기대를 걸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생각해낸 것이 철인왕통치이다. 98

 

플라톤은 국가(그래봤자 수만 명이었지만)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타락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이에 들어맞는, 지혜의 덕을 체현한 왕이 이끌어가는 왕정이 있다. 그러나 통치하는 중에 용기를 덕으로 삼는 전사들이 끼어 들어오면, 복수의 인간에 의한 명예정(귀족정)으로 옮겨간다. 그런 복수통치에 부유층이 참여하면 과두정이 된다. 과두정은 빈부의 격차를 초래하므로 빈자가 부자를 무찔러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정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정은 참주정으로 이행한다. 106

 

미국에서도 상원은 인구수에 비례한 것은 아니다. 상원이라는 말도 Senate인데 원뜻이 원로원이다. 민중의 대표인 하원과 귀족(미국에는 귀족이 없다)의 대표인 상원이 의회를 구성하고, 하원은 민중의 소리를, 상원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취지이다. 하원은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좋으므로 특권화되지 않도록 임기가 짧고, 상원은 임기가 길어 차분히 오래도록 지혜를 쌓아나가라는 제도이다. 112

 

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홉스는 물체론, 그리고 인간론, 마지막으로 정치론을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퓨리턴 혁명 등의 정변에 휘말려 정치론만을 우선적으로 완성했다. ..데카르트가 왕에게 이성이 있지만 농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뉴턴은 형태나 감촉 따위는 무시해도 좋으며, 질량이라는 본질만으로 환원하면 법칙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홉스는 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신분이라든가 성별은 무시해도 좋으며, 그렇게 하면 인간 세계의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홉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은 모두 물체의 운행과 원인 결과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정치체제도 그 생각 아래 논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왜 국가가 필요한 것인가?’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옛날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국가란 가족과 같은 것이니까’, 혹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으므로등의 말로 마감하고 사고지점을 멈춰버린다. 하지만 이 점을 파고든 사람이 홉스였다 홉스는 우선 자연상태라는 것을 설정한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정치나 국가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자연권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감각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간주한다.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플라톤의 선과는 다름)’으로 간주하며, 선을 추구하기 위해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심신능력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다...이것이 농민이 철로로 기사를 때려눕히는 전란과 혁명의 시대에 태어난 홉스가 갖게된 의문이자 답이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싸움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은 그러한 경험에서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로 그렇게 된 시점에서 전원이 일단 자연권을 방기하고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연권, 즉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인공적인 권력을 만드는 계약을 체결한다. 138-141

 

홉스가 생각한 정치체제는 어디까지나 인공적 산물로서,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계약해제도 가능하다. 또한 전원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애국심을 가졌다든지 마음의 고향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어는 코먼웰스 commonwealth'이므로, 말하자면 공공의 복지라든가 공공재이다. ’공통의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고 할만한 뉘앙스를 품고 있고, 라틴어의 공공체 res puplica, 즉 공화국 republic에 가까운 의미이다. 141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을 우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수단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홉스나 로크가 말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르다. 홉스나 로크는 자연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어서, 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나 루소의 경우는 계약할 때 일체의 자연권, 즉 몸도 마음도 재산도 전부 공동체에 양도하여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집단 출가와도 같은 것이다 개인 소유의 물건은 모두 놔두고 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되면, 공동체로서 공통자아가 생겨난다. 그것이 일반의지를 가진다고 설파했다. 일반의지라는 것은 구성원의 의지의 단순총합인 전체의지와는 다르다. 뒤르켐의 사회가 개인의 집합을 초월한 실재인 것처럼, 일반의지 또한 개인 의지의 집합을 넘는 사물이다. 뒤르켐은 사회를 사물 chose'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루소 또한 일반의지를 사물chose’로 비유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합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합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저 집합체에 지나지 않을 때에는, 자신과 타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제대로 이루어지면 개별적인 목소리가 녹아들어,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일반의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146-7

 

홉스, 로크, 스미스, 벤담, - 이들의 사상을 꿰맞추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럼에 투쟁이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사회는 풍요로워져 공존공영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은 수량화할 수 잇고, 그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시장의 화폐 거래량, 정치 영역에서는 득표수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정권을 차지 않다. 이렇게 다수결로 법률과 정책이 결정되는 제도를 만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 다만 정치는 가급적 민간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소수의견의 존중은 필요하다. 대체로 이런 정도일 것이다. 159

 

미국은 우선 타운이 있고, 타운이 연합하여 스테이트가 형성되고, 스테이트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연합함으로써 유나이티드 스테이트가 된 나라이다. 토크빌이 주목한 것은 이 타운십에서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 참가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권력의 분권화가 이루어져 스테이트와 타운에서 자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않아도 원활히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또 타운십의 성원들이 돌려가며 맡는 공무가 대단히 많다. 정부가 경찰이나 법원을 만들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교대제로 이루어진 보안관과 배심원을 맡는다. 타운십에는 행정을 실시하는 행정위원,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위원 외에 징세관, 회계관, 경찰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민회에서 선발되어 돌려가며 맡는다. 이러한 공무원에게 고정된 보수는 없고, 봉사행위를 한 정도에 따라 보수가 지불된다. 공무를 고의적으로 맡지 않는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163

 

하지만 지금은 토크빌이 생각하는 미국과 달리 스타트 지점부터 재력과 지위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지역사회에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허다한 역사적 연고가 얽혀 있고, 이념적인 결속도 잘 안 되는 사회라면 과연 어떨까? 그런 사회는 귀족이나 명문가, 아니면 사장이나 노조위원장 같은 중심적 인물이 우리의 대표라고 여겨지는 동안만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할 뿐이다. 165

 

근본적으로 대의제는 봉건제의 산물이다.....자유주의와 대의제와 민주주의, 이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인류 역사상 특정한 사회조건 아래에서 100년 정도 그렇게 유지되는 시대가 있었을 따름이다...점점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이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란 일종의 혼합정체이다. 투표를 통한 대의제란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은 개입하지 말라.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국정 따위는 내 알바 아니다. 좋은 왕이 치안과 외교만을 담당하라는 사고방식이다.....대의제 자유민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대의제가 봉건제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데모나 국민투표는 봉건주의의 파괴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는 할 수 없다. 165-7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도 20세기 들어 그 현황과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원래 종교적인 구제 목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싹텄지만, 지금은 그런 목적합리성이 상실되고, 영혼이 사라진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미 마련된 제도와 절차를 지키면 된다는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베버는, 사람들이 일단 납득은 하지만 본래의 정신은 상실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전통적 보수주의자나 전체주의자도 전통이나 공동체가 지닌 덕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똑 같은 한표라는 제도로 중우정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전체주의자는 유태인을 비롯한 자본가가 민족의 정신, 정수를 파괴하려 든다고 했다. 168

 

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불확정성의 원리 - 주체가 객체를 관측한다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온도계를 써서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180

 

일단 나와 너가 있고, 그것이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개체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에 비해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상대방과 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계론이라 부르도록 하자. 인간은 좀처럼 개체론적인 발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역시 네가 나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살펴본 바를 헤아려가며 따진다. 그럴 때 잠깐 일단 머릿 속을 비워보자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럿이 곧 에포케인데, 흔히 판단정지라고 번역된다. 이런 생각을 후설은 1차 세계대전 전부터 주장해왔지만, 전후가 되어서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전쟁이 경험, 과학의 변화, 독일 사회의 동요 등이 겹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감각이 퍼졌던 것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0

 

센카쿠 열도 문제라고하면 흔히 일본과 중국의 문제인 것처럼 언급되지만, 일본과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며, 일본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중국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을 중일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편견을 가지고 구축된 인식이다. 이러한 문제를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우익단체가 끌어들이고, 매스컴이 끌어들이고,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정치가가 국익이라고 의식하게끔 되었는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국익이 구축되어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식 위에서면 문제의 해결방법이 달라진다. 195

 

이 관계를 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변증법이다. 헤겔이 주창하고 마르크스가 이어받았다. 변증법리라고 옮겨지는 독일어 dialektik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의 독일어역이고, 영어의 대화 dialogue와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 특히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혼자서는 진리에 좀처럼 도달할 수 없다.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이게 진리야, 네 생각을 바꿔!”라고 말한댔자 반발이나 살 뿐이다. 게다가 자신도 사실 진리에 도달해 있다는 보증이 없다. 그래서상대방의 주장에 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질문을 던져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하면 처음부터 설교에 마주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모순에 눈을 뜨며 내면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질문을던지면, 마찬가지로 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상호 간에 발전을 이루며 진리에 도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에 도달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가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198-9

 

근대화와 전통은 자본가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동전이 양면과 같다. 그렇게 때문에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전통이 이겨 근대화를 멈추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근대화가진행되어 전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다. 아무리 옛날 생활방식이 사라져도,아니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흔적과 역사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이어진다. 근대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전통이 강고해질수록 근대화 욕구 또한 깊어진다. 근대화와 전통은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202

 

나와 사회와 관계가 없다든가 내가 나서도 사회가 바뀌지않는다라는 것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며, 단순히 불가능이다.자신이 존재하면서 걷거나 일하거나 말하거나 하면,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를 바꾸게 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나도 너도 관계의 일시적인 현상 형태에 불과하고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활동가도 태어나면서부터 활동가였던 것은 아니며, 보통사람 또한 영원불변하며 보통 사람인 채 지내는 것도 아니다.....변증법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독일 사상가들이 주창했는데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독일은 유럽의 후진국으로서, 영국이나 프랑스 사상을 배운 상층부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가매우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권위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그런 괴리 현상을 강화시킬 따름이었다. 이는 실로 불행한 의식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여오는 설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바뀌어가는 변증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203-205 물화, 현상학, 변증법의 유용성

 

재귀적인 근대화(선택의 증대) -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둘 낳는다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왜 직장을 그만둬야 해’‘가사는 왜 내가 맡아야 하지’‘왜 아이를 나아야 하나’‘이런 남편과 이이와 함께 살아야하지라는 선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선택지가 늘었다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보아야한다. 사회가 크게 바뀐 것이다. 208-210

 

여러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재귀성이 증대한 사회에서 인기를 누린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양한 주장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각국에서 내놓은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발상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자신의 돈,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속한 민족뿐인 것처럼 보인다. 221

 

볕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되짚으며,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서 여러 현대철학의 장점들을 결합하려하고 있다.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어 여러 예로 말하기 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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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자유, 자치 그리고 적극적 시민

 

공화국은 인민의 일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결합해 있는 사람들의 집단 모두가 인민인 것은 아니다. 인민이란 법과 권리에 대한 공통의 합의에 의해 그리고 상호 이익이 되는 것에 참여하려는 갈망에 의해 결합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_ 키케로

 

기독교가 수많은 공동체 위에 강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사 속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인간을 끌어당긴 가치나 열망 등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결코 세계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그토록 중시했던 여러 이상들에 대한 관심을 기독교가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예컨대 정치적 평등의 이상은 기독교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비록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삽입되었지만 말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최저 생존 수준 또는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경제적 잉여의 수준이 극히 낮았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에서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어느 누구도 도덕적·정치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평등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나마 평등을 꿈꾸는 것이 최소한 좀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68

 

세속적 지배의 영역과 여적 지배의 영역 간의 구분은 아퀴나스에 의해 재검토되었다. 아퀴나스는,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수세기 동안 서구에는 잊혀 있다가 13세기 중반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을 기독교의핵심 교의와 통합하고자 했다. 아퀴나스의 저술에는 혼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군주제가 최선의 통치 형태이지만 무제한적 권위를 부여받아서는 안 되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지배는 자연법-, 인간의 이성에 드러나는 신법의 일부’-을 군주가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국가는 종교적 교의를 해석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통치자에 대해 심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나아가 통치자가 자연법을 계속해서 침해한다면 그에 대한 반란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제한 정부 사상은 아퀴나스에 의해 일찍이 제시되었던 셈이다. 비록 그의 궁극적 관심은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이었지만 말이다. 69

 

중세, 기독교적 만국사회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사회는 분쟁과 갈등을 해결할 권위를 신에게서 찾았으며, 종교적 교의가 일차적인 정치적 준거점이었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가정이 기독교적 만국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등장과 종교개혁이 야기한 갈등에 의해 서구 기독교 왕국이 도전에 직면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정치적 통제 형태가 전반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반이 형성되고 근대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70

 

11세기 말 공화주의는 어느 정도 부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집정관’, 즉 황제와 교황의 법적 통제권 주장에 맞서 자신들의 재판 업무를 관장할 행정관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집정관 체제는 새로운 정부 형태로 대체되었다. 사법 및 집행 업무에서 최고권을 행사하는 포데스타라는 행정관을 장으로 하는 통치 평의회를 갖춘 정부 형태가 그것이다. 그런 평의회는 피렌체, 파도바, 피사, 밀라노, 시에나 등에 존재했으며, 이에 바탕해 12세기 말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도시국가 또는 몇몇 논평가들이 선호하는 개념인 도시 공화정이 되었다. 더욱이 포데스타는 선출직이었고 임기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평의회에 책임을 졌다. 71

 

고전적 아테네 민주주의 시기의 정치 참여의 범위와 깊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은 그다지 특별하거나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장들과 권력들이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봉건 유럽의 권위 구조에 비추어 볼 경우, 그런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통치 조직이란 신이 부여한 권력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지배적 가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전제적 절대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이 영감이 원천이 되어 왔던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3

 

아테네에서 그랬듯이 시민은 아주 배타적인 남성 집단만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대개 귀족이 포데스타로 지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종 시민들의 불만과 소요를 가져왔고, 배제된 시민 집단은 결집하여 자신들만의 별도의 평의회와 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다시 정치 갈등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폭력과 무정부적 상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터규 가문과 캐풀렛 가문 사이의 전투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화정이 무질서와 허약성을 초래한다고 결론내리고, 강력한 군주정체로 복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고 18세기 말까지 자치적 정체로서 생존한 도시 공화정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73

 

공화정이 전개된 처음 1세기 동안 공화정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13세기 중반에 재등장한 뒤에야 민주주의는 유럽 정치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대로 민주주의란 단어는 경멸적 의미를 띠었고, 사회 하층의 정치와 연관되었다. 즉 공공의 이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통치,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전제적이 되어 모든 사회적 차이나 기득권을 없애 버리고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형태라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공화주의의 몇몇 특징들은 민주정치의 형태라기보다는 귀족주의적 또는 귀족적 공화주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분명히 도시 공화정의 옹호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부르지 않았다. 74

 

그렇지만 도시 공화정이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기독교 군주제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자치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본보기를 제시한 제도적 혁신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며,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 광범한 정치 협정과 텍스트 등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도시 공화정은, 고전 시대 이후의 정치사상에서 자기 결정과 인민주권을 지향하는 논의와 주장이 계발된 최초의 사례로서 기록된다. 75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 생활의 독특한 발전은 정치권력, 인민주권, 시민의 관심사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인식을 촉발시켰다. 많은 도시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념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았다. 하지만 특별히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은 불안정, 내분, 내적 유약함 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로마는, 자유를 덕성뿐만 아니라 시민적 영광 및 군사적 힘과도 연계시킨 통치 모델을 제시했다. 로마는 정치적 참여와 명예와 정복을 결합한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군주제의 주장을 폐퇴시킬 수 있는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공화주의자들에게 자유란 전제군주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공동 관심사를 운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 역시 자유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선을 기꺼이 우위에 두는 영웅적 정신이나 애국주의, 공적 정신 등을 의미했다. 76

 

계발주의사상가들은 시민이 인간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정치 참여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한다. 반면 보호주의 사상가들은 시민들의 목적과 목표, 즉 그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참여의 수단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계발 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전적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리스 폴리스 사상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이다. 특히 폴리스 사상가들이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폴리스와 정치 참여의 본래적 가치에 대해 탐구했던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정치 참여는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화정 로마와 그 역사가들의 영향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보호 공화주의이론은 시민적 덕성의 심각한 취약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민이 귀족이든 군주든 어느 한 주요집단의 정치 참여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시민적 덕성은 부패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보호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시민들의 개인적 자유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79

 

공화주의, 선출제 정부 그리고 인민주권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저작 <<평화의 옹호>> 권력의 충만함을 내세우는 교황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교회를 능가하는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법은 인민의 의사가 총회에서 표출되는 것을 통해, ’모든 인민 또는 인민의 좀 더 중요한 부분에 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책은 당시에 건전한 사람들이 진저리친 책이었다. 교황이나 추기경, 사회질서 유지를 특히 걱정했던 저술가들이 이단자들을 비난할 때면...“저주받은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을 지녔다라고 고발했다.‘ 마르실리우스주의자라는 것은, 수세기 뒤에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붙여진 것과 비슷하게, 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80

 

당시에 거의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르실리우스의 시민권 개념도 정치 참여개념을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소규모 공동체에만 적응될 수 있는 것-도시 공화국의 자치-이었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후대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대규모의 확대된 영토에 대한 공화주의 정부의 적실성에 대해 고찰한 공화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모든 성인을 포괄하는, 현대의 지배적 민주주의 형태인 자유민주주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제도나 절차를 주창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르네상스 공화주의자들은, 인민 정부란 그들의 지역공동체에 대해 확고한(소유권에 기초한)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자율적 통치 형태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들만이 지역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공적 관계와 의무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5-6

 

시민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시민적 영광으로

 

마키아벨리는 선출제 정부와 참여 정치형태를, 시민의 복지와 시민의 영광의 가능성에 연결시켜 주창했다. 이런 연관성은 아마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의 출생지인 피렌체에서 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세계의 정치사상과 새롭게 등장하는 유럽 정치 질서 모두에 굳게 발 딛고서 공화주의적 전통의 논의, 즉 보호 공화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립과 자치와 영광스러운 노력의 조건을 시민의 참여로 찾으려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정치 문화는 이런 여러 관념들을 명료하게 표출해 주었고,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 풍부한 맥락을 제공해 주었다. 87

 

그 이전의 마르실리우스나 그 이후의 홉스나 로크 등과 달리,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표방하고 지켜야 할, 조직체의 어떤 주어진 원칙(예컨대 국가를 개인의 선한 생활이나 자연권을 촉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고정된 관점)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정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는 어떤 자연스러운 틀이나 신이 부여한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에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권력을 획득하고 이용하고 보유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생활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그가 염두에 둔 것은 시민적 영광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마음, 즉 덕성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가이다. 89-90

 

마키아벨리는 역사 연구를 통해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혼합정체만이 덕성의 기반이 될 문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논리 역시 이론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개별 정체의 결점을 보완하도록 조직된 혼합정체는 경쟁적 사회집단 특히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의 균현을 잡아주는 데 가장 뛰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후대의 주장 - 국가 내의 권력분립이나 정당 경쟁에 기초한 대의 정부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자와 빈자가 모두 통치 과정 안으로 끌어들여진다면, 그리고 그들 간의 공직 배분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 표출될 정당한 통로가 마련된다면, 그들은 일정한 형태의 상호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당시 지배했던 전통적 사고와 달리, 적대적인 사회 세력과 이견의 존재가 선하고 효율적인 법률의 가능성을 침식시키기는커녕 그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나 자치적 정치체제만이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으 이익을 촉진하고 방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갈등과 불일치 역시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1

 

파벌의 특수이익을 억누르기 위해 혼합정체가 필수적이지만, 경재 국가들의 도전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안은 자신이 봥쇄당하기 전에 그들을 봉쇄하는 것이다. 팽창정책은 한 집단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힘의 이용은 자유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92

 

부자나 귀족만 공적 업무에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맥락에서 정치 참여를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인과 소상인을 포함하는 통치 과정을 원했다. ‘인민또는 시민이란, 공공 업무에 실질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생각되는 자립의 수단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노예, ‘부양가족등은 그런 이해관계를 가진 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94

 

공화국과 일반의사

루소는 18세기의 마키아벨리로 묘사된다. 루소는 공공 영역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체제를 공화정이라 불렀다. ‘공화죽의 적절한 형태에 대한 루소의 언급은 분명 그 이전의 선배 공화주의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처럼 루소는 민주주의 개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고전 아테네에 연결지었는데, 루소가 보기에 아테네만으로는 정치적 이상이 되기에 불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입법 기능과 집행 기능의 명백한 분리를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리하여 불안정과 파멸적 내분, 위기 시의 우유부단함 등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96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존경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당대의 실제 공화국의 권력 구조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루소는 최소한 이상적 정부에 대한 이론적 저술 작업에서 그와 같은 타협을 일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정한 형태의 공화국에 대한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97

 

루소는 개인을, 자신의 삶을 규율하는 법을 직접 제정하는 데 원칙적으로 관여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개념을 주장했다. 모든 시민은 무엇이 공동체에 최선인지를 결정하고 적절한 법을 제정하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치자는 통치자여야 한다. 루소에게 자치의 이상은 그 자체 목적으로 설정된다. 공적 업무를 살펴 처리하느 데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정치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지 국가만으로는 안 되고 어떤 유형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의 업무가 일반 시민의 업무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그것이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으며, 같은 이유에서 양도될 수 없다.....인민의 대리인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민의 대행인을 뿐이며, 아무 것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인민이 자기 스스로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다. 그것은 전혀 법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에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98

 

루소는 어떤 시민도 타인을 살 만큼 부유하지 않고, 자신을 파아야만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도 없는상태를 바랐다. 주요한 이익 다툼이 조직적 파벌 분쟁 - 일반 의사 형성의기반을 절망적으로 붕괴시킬- 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의 전반적 유사성밖에 없다. 그는 절대적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평등을 권력과 부의 정도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이 폭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법과 권위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101

 

모델 2.2에 요약되어 있는 루소의 공화 정부 개념은 , 여러 면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통틀어 자유와 참여를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더구나 정당한 정부의 원리와 집합적 이익을 위한 자치의 원리를 연계시킨 것은 그 당시 정체(특히 구체제)의 정치적 원리에 대한 도전이었을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원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자치 정부 개념은 가장 급진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일부 핵심 가정 - 특히, 민주주의란 시민에게 이따금씩만 책임지는 특정한 유형의 국가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생각 -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102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화주의 사상사는 여성성과 여성을 기분 나쁘게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성 풍조에 맞선 인물이 울스턴크래프트(1759-97)이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및 18세기 말 유럽 전역에 확산된 급진주의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면서, 루소 저작의 여러 부분에 대해 경탄했다. 그런 사건들과 루소가 제기한 쟁점 등에 고무되어 사회 정치 이론에서 가장 놀라운 팸플릿의 하나인 <<여권의 옹호>>1791년 저술했다. 이 책은 그녀가 참여한 급진 서클-고드윈이나 페인도 일원이었다-내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볕뉘.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정치사상과 사상가를 역사적인 배경과 인물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시각을 폭넓고 깊게 인식하게 만든 책이다. 꼼꼼하면서도 비교의 관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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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싫어하면서 배운다를 너머서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그리고 그 조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공화주의의 문제의식이다. 서문 11-14

 

루소 자유로운 인민은 복종은 하지만 예종은 하지 않으며, 지도자는 두지만 주인은 두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민은 오직 법에만 복종하며, 타인에게 예종하도록 강제될 수는 없는데, 이것은 법의 힘 때문이다.” 17

 

노예를 두지 않은 최초의 공화국들이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직 완전한 시민권은 시민들 중 소수의 특권층만 누리고 있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루카, 시에나와 기타 몇몇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벽 안에는 군주도 왕도 없이 시민들이 하나의 법제도 아래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다. 바로 이 성벽과 공회당 안에서, 그리고 법률가, 역사가, 정치사상가들의 서재 안에서 근대적인 공화주의의 사상이 태어났다. 33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이 말하는 자기 통치의 원리, 즉 자치의 원리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로마법의 원리에서 도출해냈다. 모두 그러한 의사결정에 똑같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공공선의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35

 

공화주의는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론체계였다기보다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 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38

 

자유주의에는 공화주의에서 볼 수 없는 창작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연적인(양도불가능한 또는 생래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독특한 개념이다. 이 자연권 이론은 자유주의의 기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명백한 이론적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권리도 오직 법과 관습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권리는 역사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법과 관습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것은 도덕적 요청 정도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마키아벨리는 후세의 사상가들과 달리 자연권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유만이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선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좋은 청치제도와 군사제도를 갖추어야하며, 개인들이 충분히 시민적비르투를 체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운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힘세고도 공격적인 국가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아야 한다. 40-41

 

공화주의는 우리가 타인에 예속되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자유주의는 우리가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때 자유롭다고 한다....고전적 공화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은 요컨대 예속이 간섭보다 자유에 대한 훨씬 고통스러운 침해라는 것이다...자유라는 것이 우리가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생래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거나 우리가 공공 회의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기만 하면 그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만 가지게 되면, 또 그만큼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신, 바로 이런 정신을 진작시킨다. 44-47

 

공화주의는 정치적 자유의 사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실현과 유지에 꼭 필요한 열정들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다. 공화주의 사상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변함없이 이야기해 오고 있는 지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시민들이 시민적 비르쿠라 불리는 품성을 가지고있는 곳에서만 자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적 비르투란 숭무적이면서도 웅장하고 금욕적인 덕성이 아니라, 상업적 공화국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세련되면서 평범하고 관용적인 덕성이다. 그것은 엄격성과 유머, 정직과 융통성, 무거움과 가벼움 등을 조화롭게 가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 리가 그의 전저작과 전생애를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49-50

 

공화주의적 애국자들에게 있어서 나라사랑은 계속해서 불어넣어야 하며, 또한 정치적 수단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되어야 하는 인공적인 열정인 데 반해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오염, 문화적 동화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자연스러운 생래적 감정이다. 54

 

정치사상은(또는 정치철학) 철학이나 법학과 같은 사이언스(학문)’에 속하는 분과가 아니라 레토릭’(말하는기술 또는 수사학)에 속하는 분과라는 점이다. 오늘날은 저작활동을 하고 논문을 쓰지만 마키아벨리나 다른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정치사상을 말하는 기술에 속하는 활동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즉 그들은 단지 독자들의 합리적 이성적 동의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까지 움직여냄으로써 어떤 정치적 아이디어에 대해 그 독자들에게 찬반을 설득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서 저술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성을 말하는 기술로써 보강하고자, 라치오ratio'오라치오oratio'로써 보강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범사례, 비유, 실제 이야기, 격정적 권고 등 고전 레토릭의 모든 수단들을 즐겨 동원했다. 59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은 공공 회의장에서 실제로벌어지고 있는 것은 합리적 이성적 논의가 아니라, 서로 당파적 입장에 서서 레토릭의 여러 기법들을 총동원해 가면서 갑론을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무엇보다도 듣는 사람들의 열정, 감정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필립 페팃이 잘 지적하였듯이, 합리와 이성의 공화국이 아니라 수사와 웅변의 공화국이다....17세기까지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던 말하는기술에 입각한 정치사상하기가 복원되어야한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에 있다...60-61

 

2장 자유의 새로운 이상향

 

간섭 또는 방해를 받는다는 것과 예속되거나 사적 주종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의 차이 시민들이 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독재자나 과두지배계급에 의해 핍박받는 경우, 여성이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할 수 없거나 사후적으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 근로자들이 고용주나 감독자의 크고 작은 횡포 아래 놓여지게 되는 경우, 퇴직자가 자신이 당영히 받을 권리가 있는 연금을 수령함에 있어서 담당공무원의 변덕에 좌우되는 경우, 환자가 건강을 되찾는 것이 의사의 호의에 달린 경우, 젊은 학자들의 직업적 미래가 연구성과의 질이 아니라 선배 학자의 변덕에 좌우되는 경우, 시민이 검사의 자의적인 말 한마디에 의해 언제라도 감옥에 수감될 수 있는 경우 등 이 모든 경우에서 간섭은 보이지 않는다....위의 예와 같이 예속상태에 있는 사람들은(그들이 아내이건, 근로자건, 퇴직자건,병자건, 또는 젊은 학자건 간에) 우리가 자유를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방해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 이해하는 경우, 한마디로 100퍼센트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잇다. 하지만 이들은 타인의 자의에 노출되어 있고, 따라서 프라우투스가 자신의 희극에서 묘사한 노예들의 삶과 같은 그런 예속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92-93

 

예속을 파가노는 자유의 부정과 그것이 가져오는 공포라고 정의했다. “폭압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더라고 여전히 자유에 대한 공격이 된다. 자유는 너무나도 상하기 쉬워서 약간의 그림자만으로도 그 색이 어두워지고, 살짝만 입김이 닿아도 뿌옇게 그 투명함을 잃는다. 다른 사람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나에게 폭압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나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공포는 자유가 솟아나는 그 샘 자체를 파괴한다. 그것은 강물이 흘러나오는 발원에 깊숙이 퍼뜨린 독이다.” 94 “인민의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안전을 믿는데서 나오는 마음의 안정상태이다. 이러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록 정치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95

 

4장 공화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는 자신의 핵심 원리인 자유의 이름으로 비판받았던 적은 (형식적 자유가 아닌 진정한자유 또는 실체적자유의 이름으로 도전 받았던 적을 제외한다면) 한 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자유주의자들은 힘센 자들의 주종적 지배에 맞서 싸우려 할 때, 이러한 목적에 걸맞지 않는 그들의 자유 개념, 간섭의 부재라는 의미의 자유 개념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 대신 정의나 평등 같은 다른 이상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125-6

 

공동체의 최고의 목적은 자유주의자들이 개별 구성원들의 생명, 자유, 소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이미 사람들이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정치공동체를 만들게 된 제일 이유는 바로 소유의 안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도 공동의 편익이 자신의 것들을 자유롭고 걱정없이 향유하고, 자기 아내와 자식들의 명예가 침해받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유토피아 담론에 맞서 사회갈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유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혁신적인 생각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민중파와 귀족파 간의 사회갈등이 로마를 자유롭게 유지한 첫 번째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양성을 옹호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야지 남의 방식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구절을 더 새겨야할 것이다. 127-9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는 원작과 개작의 관계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의 가장 쓸 만한 교리적 원리들은 공화주의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었고, 자유주의가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원리들은 시간이라는 시험을 그리 잘 견뎌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이론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공화주의적 관점을 상실해버렸고 예속상태를 제거하는 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131-2

 

마키아벨리를 필두로 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달리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래적이거나 자연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적 권리 개념은 공화주의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삶의 이상이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토크빌은 어느 개인도 비르투가 없이는 훌륭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나라도 권리에 대한 존중 없이는 위대해질 수 없다. 심지어 권리에 대한 존중과 비르투 어느 하나가 빠져서는 사회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강제력 하나만으로 뭉쳐놓은, 이성과 지성을 가진 존재들의 조직이라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135

 

자유라는 이상을 단지 간섭의 부재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일정한 사회적 의무들 자선기관에 기부하기, 사회연대 프로그램 후원하기, 주요 시민사회 단체에 참여하기 등 을 이행하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행동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거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공동체가 좀더 품위 있고 평온해질 수 있다고 믿거나 또는 공익에 봉사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오만한 통치자, 오만한 시민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을 설득하여 공익을 위해 돈을 내거나 시간을 내서 봉사를 하도록 하는 법률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것을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자유는 간섭의 부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기술했듯이 봉사의 면제이기도 하다...하지만 공화주의적 이상을 받아들인 시민은 공공 봉사 의무를 자유의 필연적 동반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36-7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시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자치적인 종족-문화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레스 푸브리카또는 키비타스의 멤버십에 따르는 여러 시민적 정치적 권리들을 행사한다는데 있다고 믿었다..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공공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인데, 공동체주의자들은 도덕적 선 관념을 공유함으로써 이것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138-9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공화국의 공적 삶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를 유지하고 시민들에게 시민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중요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권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화국의 주된 가치나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를 지키고 최고의 시민들을 선발하여 책무를 맡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직접 참여 여부보다는 통치와 결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공공선에 진정으로 봉사하려 하느냐 여부이다. 140

 

공화주의적 평등은 단지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평등만으로 이루어져 있진 않다..모든 시민들에게 존엄과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들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한다...어는 시민도 가난을 이유로 공적인 명예로부터 배제되거나 오명을 얻게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버려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사적인 혜택들을 미끼로 다른 시민들의 굴종을 사버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140-141

 

공적(그리고 사적) 구호(자선)는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경우라 하더라도 시민적 삶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늙는 것은 결코 범죄가 아니다. 공화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라, 시민들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려 노력하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 따라서 공화국은 동정행위로서가 아니라 시민이 가진 당연한 권리에 따라 그러한 구호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화국은 시민들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그 의무를 다른 사적 개인들에게 떠 넘겨서도 안 된다...“기독교적 자비는 배고픈자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먹였고, 헐벗은 자들을 보면 그들을 입혔으며,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그 가난과 헐벗음의 원인들을 어떻게 제거할까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었다.“ 142-143

 

공화주의적 덕성

 

몽테스큐는 시민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거나 사생활의 쾌락에서 헤어나게 되면 그들은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수도원의 금욕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열정의 분출구가 막혀버린 수도사들이 자신의 종단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시민들은 엄격하고 검약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이와같이 몽테스큐는 물적 탐욕과 정치적 야심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 역시 시민적 덕성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보았으며, 시민적 덕성이 꽃피는 이상적인 토양은 엄격하고 검약하게 살아가는 작은 공화국이라고 믿었다. 147-8

 

피렌체 공화국의 통령을 역임했던 살루타티는 카토의 대리석 같은 엄격함을 닮을 필요가 없는데, 그는 공화국에 봉사했는지 몰라도 자신의 가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고 한다...15세기 피렌체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시민적 덕성은 사생활의 포기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은 사생활을 즐겁고 안전하게 만드는 사생활의 주춧돌이었다...알베르티는 가정에 관하여 제3권에 이렇게 말한다. “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좋은 시민은 평온함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평온함보다는 다른 좋은 사람들의 평온함을 더욱 존중한다고 말하겠네. 좋은 시민은 개인적 쾌락을 즐기지만, 자신의 쾌락보다는 다른 시민동료들의 사적 쾌락을 더욱 존중할걸세. 좋은 시민은 자기 가정의 화합, 안녕, 평화, 그리고 평온함을 바라지만 자기 고장과 공화국의 화합, 안녕, 평화, 그리고 평온함을 더더욱 기대하네.” 149-151

 

시민적 덕성도 부와 완전히 양립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신사에게 있어서부는 덕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물론 덕이 없이는 부는 여전히 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패하지 않은 시민들은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중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으며, “양자를 견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양자 모두 놀랍게 성장하게 된다.” 덕성을 지닌 시민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삶에서 나오는 평안을 사랑한다.....영광에 대한 갈증이 시민적 덕성에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믿었다....“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군주라면 부패한 국가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 좋은데, 물론 그것은 카이사르처럼 더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물루스처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라고 기술한다.....이러한 덕성은 개인들의 열정과 이익을 희생시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와 사적인 사교생활에 안정된 정치적 토대와 도덕적 고양을 주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덕성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다양성을 적극 포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며, 그래서 멋진 것이다. 공화국을 경험한 적이 없는 18세기 프랑스의 한 사상가가 시민적 덕성을 저 멀리 있는, 그리고 너무 이상적이고 빛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상상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공화국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좀더 가볍고 그래서 실현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156-9

 

6장 공화주의적 애국

 

루소는 조국을 자유, 비르투와 연결짓는다. “자유없이 애국은 불가능하며, 비르투 없이 자유는 불가능하며, 시민들 없이 비르투는 불가능하다.” “자유와 진정한 시민이 없는 곳에서는 빠트리’, 즉 조국(나라)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고 단지 뻬이’, 즉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만을 논할 수 있다.” 169

 

조국을 구성하는 것은 성벽이나 사람들이 아니다. 조국을 구성하는 것은 법과 관습, 구성원들의 습관, 그리고 정치방식, 또 이런 것들로부터 나오게 되는 특정한 생활방식이다. 조국은 국가와 그 구성원들 간의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변하거나 끊어지게 되면 국가도 그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170

 

토크빌 뉴 잉글랜드 지역 타운들에서 직접 목도한 애국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애정은 권력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애국심은 정복당한 나라에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뉴 잉글랜드 사람들이 자신의 타운에 대해 애착하게 되는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구성원이며 또한 노고를 무릅쓰고라도 한번 운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롭고도 힘 있는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172

 

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사상이며, 그 땅의 자식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다. 당신의 형제 중 어는 하나라도 투표권이 없어 나라 일에 자신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교육바디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한, 그리고 어는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고 또한 일하고자 하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가난 속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야 하는 한, 당신에게 당신이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조국은 없다. 모두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바로 그 조국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173

 

공공선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이다. 그것과 우리를 묶는 것은 애국이니 우리를 낳고 고통과 눈물 속에서 보살펴 주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니 하는 그런 거창하기만 하고 내용이 없는 상투어가 아니다....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것과 공공선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공공선을 내 것처럼 아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가장 사랑스럽고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일들이, 그리고 이 일들의 성사를 위한 조건들이 바로 이 하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80-181

 

볕뉘. 레토릭있게 두루 공화주의에 대해 느낌 수 있게 쓴 책.  예전에는 너무 쉽게 넘겨버렸는데, 저자의 의도까지 읽는다면  공화주의라는 원작에 자유주의는 개작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생명, 소유,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키케로, 말키아벨리 등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요소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만을 이야기할 뿐, 힘센자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다른 수사를 덧대는 이론적인 강점도 없다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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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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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두시간 넘게 택시로 달려온
친구.

십여년만의 만남이
급해 옆자리 눈총마저
받은 친구와 두시간여 독대.

살피지 못한
지난 격과 이력. 삶의 자본이
밟힌다. 원하는 답을 알면서도
앞뒤를 살피거나 늦추는 나이가 되어
슬프다.

눈치삶이 고수인 친구들은
어누룩한 내틈을 몇번씩이나 들낙거렸을텐데.

이번엔 그 마음 속을 빌려
뱀꼬리처럼 늘여터지는 불금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선술집마다 들려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다보니
어제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새벽이다.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부모님은 밤새 서성거렸을테다.

아직도 허름한 당*개 국밥집에서
몸도 마음도 다독인 후, 집 문을 두드렸다.

갈지자같은 삶들이 구역구역 속에 들어와 동면할 뱀처럼 뒤엉켜. 그뒤로 며칠내내 단 한줄의 활자도 체해 한모금을 넘기질 못해.

뱀발.

 

1. 일터 동기들 모임이다. 임원을 단 친구도, 다른 일터에서 일하는 이들도...애틋함이 남아 있고, 그래도 살아가는 원칙을 고수하는 이들이 많아 늘 모임은 활력이 넘친다. 성격도 다양하고 애정도 깊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드리고 급히 잡은 택시가 두시간이 더 걸렸단다. 택시요금도 만만치 않다. 같은 동네 방향으로 1,2차를 파한 후 택시로 함께 가는데 이번 역시 만만치 않다. 한강변은 불야성이어서 탄성만 질렀다. 그러다 허름한 연탄구이집을 발견해서 함께 내렸다. 고기와 김치만 팔았다. 주인장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조선족 말로 대전사람이라고 한다.

 

2. 일년에 한두번씩 만나 그들의 삶을 살피겠지. 참관도 참견도 얼씬거리지 못하는 어느 거리에서. 자식들 퇴로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아비들이 되어. 그래 날밤이든 날것이든 싱싱한게 뫔에 많이 좋다.

 

3. 한 친구는 자신이 일터 원칙을 지키느라 가까운 친구의 절실함이 닿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조금만 더 융통성이 있더라면 가까운 이들에게 모질게 못했을텐데하고 말했다.  교육을 되물어왔다. 그러다가 슬며시 삶의 이력이 담긴 얘기를 건넨다. 혹시나 다음에 만나면 좀더 깊은 이야기나, 열정이 느껴지는 얘길 나누었으면 더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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