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자유, 자치 그리고 적극적 시민

 

공화국은 인민의 일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결합해 있는 사람들의 집단 모두가 인민인 것은 아니다. 인민이란 법과 권리에 대한 공통의 합의에 의해 그리고 상호 이익이 되는 것에 참여하려는 갈망에 의해 결합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_ 키케로

 

기독교가 수많은 공동체 위에 강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사 속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인간을 끌어당긴 가치나 열망 등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결코 세계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그토록 중시했던 여러 이상들에 대한 관심을 기독교가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예컨대 정치적 평등의 이상은 기독교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비록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삽입되었지만 말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최저 생존 수준 또는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경제적 잉여의 수준이 극히 낮았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에서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어느 누구도 도덕적·정치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평등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나마 평등을 꿈꾸는 것이 최소한 좀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68

 

세속적 지배의 영역과 여적 지배의 영역 간의 구분은 아퀴나스에 의해 재검토되었다. 아퀴나스는,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수세기 동안 서구에는 잊혀 있다가 13세기 중반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을 기독교의핵심 교의와 통합하고자 했다. 아퀴나스의 저술에는 혼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군주제가 최선의 통치 형태이지만 무제한적 권위를 부여받아서는 안 되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지배는 자연법-, 인간의 이성에 드러나는 신법의 일부’-을 군주가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국가는 종교적 교의를 해석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통치자에 대해 심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나아가 통치자가 자연법을 계속해서 침해한다면 그에 대한 반란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제한 정부 사상은 아퀴나스에 의해 일찍이 제시되었던 셈이다. 비록 그의 궁극적 관심은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이었지만 말이다. 69

 

중세, 기독교적 만국사회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사회는 분쟁과 갈등을 해결할 권위를 신에게서 찾았으며, 종교적 교의가 일차적인 정치적 준거점이었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가정이 기독교적 만국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등장과 종교개혁이 야기한 갈등에 의해 서구 기독교 왕국이 도전에 직면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정치적 통제 형태가 전반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반이 형성되고 근대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70

 

11세기 말 공화주의는 어느 정도 부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집정관’, 즉 황제와 교황의 법적 통제권 주장에 맞서 자신들의 재판 업무를 관장할 행정관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집정관 체제는 새로운 정부 형태로 대체되었다. 사법 및 집행 업무에서 최고권을 행사하는 포데스타라는 행정관을 장으로 하는 통치 평의회를 갖춘 정부 형태가 그것이다. 그런 평의회는 피렌체, 파도바, 피사, 밀라노, 시에나 등에 존재했으며, 이에 바탕해 12세기 말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도시국가 또는 몇몇 논평가들이 선호하는 개념인 도시 공화정이 되었다. 더욱이 포데스타는 선출직이었고 임기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평의회에 책임을 졌다. 71

 

고전적 아테네 민주주의 시기의 정치 참여의 범위와 깊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은 그다지 특별하거나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장들과 권력들이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봉건 유럽의 권위 구조에 비추어 볼 경우, 그런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통치 조직이란 신이 부여한 권력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지배적 가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전제적 절대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이 영감이 원천이 되어 왔던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3

 

아테네에서 그랬듯이 시민은 아주 배타적인 남성 집단만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대개 귀족이 포데스타로 지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종 시민들의 불만과 소요를 가져왔고, 배제된 시민 집단은 결집하여 자신들만의 별도의 평의회와 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다시 정치 갈등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폭력과 무정부적 상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터규 가문과 캐풀렛 가문 사이의 전투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화정이 무질서와 허약성을 초래한다고 결론내리고, 강력한 군주정체로 복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고 18세기 말까지 자치적 정체로서 생존한 도시 공화정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73

 

공화정이 전개된 처음 1세기 동안 공화정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13세기 중반에 재등장한 뒤에야 민주주의는 유럽 정치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대로 민주주의란 단어는 경멸적 의미를 띠었고, 사회 하층의 정치와 연관되었다. 즉 공공의 이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통치,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전제적이 되어 모든 사회적 차이나 기득권을 없애 버리고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형태라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공화주의의 몇몇 특징들은 민주정치의 형태라기보다는 귀족주의적 또는 귀족적 공화주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분명히 도시 공화정의 옹호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부르지 않았다. 74

 

그렇지만 도시 공화정이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기독교 군주제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자치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본보기를 제시한 제도적 혁신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며,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 광범한 정치 협정과 텍스트 등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도시 공화정은, 고전 시대 이후의 정치사상에서 자기 결정과 인민주권을 지향하는 논의와 주장이 계발된 최초의 사례로서 기록된다. 75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 생활의 독특한 발전은 정치권력, 인민주권, 시민의 관심사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인식을 촉발시켰다. 많은 도시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념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았다. 하지만 특별히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은 불안정, 내분, 내적 유약함 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로마는, 자유를 덕성뿐만 아니라 시민적 영광 및 군사적 힘과도 연계시킨 통치 모델을 제시했다. 로마는 정치적 참여와 명예와 정복을 결합한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군주제의 주장을 폐퇴시킬 수 있는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공화주의자들에게 자유란 전제군주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공동 관심사를 운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 역시 자유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선을 기꺼이 우위에 두는 영웅적 정신이나 애국주의, 공적 정신 등을 의미했다. 76

 

계발주의사상가들은 시민이 인간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정치 참여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한다. 반면 보호주의 사상가들은 시민들의 목적과 목표, 즉 그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참여의 수단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계발 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전적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리스 폴리스 사상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이다. 특히 폴리스 사상가들이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폴리스와 정치 참여의 본래적 가치에 대해 탐구했던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정치 참여는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화정 로마와 그 역사가들의 영향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보호 공화주의이론은 시민적 덕성의 심각한 취약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민이 귀족이든 군주든 어느 한 주요집단의 정치 참여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시민적 덕성은 부패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보호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시민들의 개인적 자유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79

 

공화주의, 선출제 정부 그리고 인민주권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저작 <<평화의 옹호>> 권력의 충만함을 내세우는 교황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교회를 능가하는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법은 인민의 의사가 총회에서 표출되는 것을 통해, ’모든 인민 또는 인민의 좀 더 중요한 부분에 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책은 당시에 건전한 사람들이 진저리친 책이었다. 교황이나 추기경, 사회질서 유지를 특히 걱정했던 저술가들이 이단자들을 비난할 때면...“저주받은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을 지녔다라고 고발했다.‘ 마르실리우스주의자라는 것은, 수세기 뒤에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붙여진 것과 비슷하게, 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80

 

당시에 거의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르실리우스의 시민권 개념도 정치 참여개념을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소규모 공동체에만 적응될 수 있는 것-도시 공화국의 자치-이었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후대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대규모의 확대된 영토에 대한 공화주의 정부의 적실성에 대해 고찰한 공화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모든 성인을 포괄하는, 현대의 지배적 민주주의 형태인 자유민주주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제도나 절차를 주창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르네상스 공화주의자들은, 인민 정부란 그들의 지역공동체에 대해 확고한(소유권에 기초한)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자율적 통치 형태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들만이 지역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공적 관계와 의무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5-6

 

시민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시민적 영광으로

 

마키아벨리는 선출제 정부와 참여 정치형태를, 시민의 복지와 시민의 영광의 가능성에 연결시켜 주창했다. 이런 연관성은 아마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의 출생지인 피렌체에서 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세계의 정치사상과 새롭게 등장하는 유럽 정치 질서 모두에 굳게 발 딛고서 공화주의적 전통의 논의, 즉 보호 공화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립과 자치와 영광스러운 노력의 조건을 시민의 참여로 찾으려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정치 문화는 이런 여러 관념들을 명료하게 표출해 주었고,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 풍부한 맥락을 제공해 주었다. 87

 

그 이전의 마르실리우스나 그 이후의 홉스나 로크 등과 달리,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표방하고 지켜야 할, 조직체의 어떤 주어진 원칙(예컨대 국가를 개인의 선한 생활이나 자연권을 촉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고정된 관점)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정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는 어떤 자연스러운 틀이나 신이 부여한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에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권력을 획득하고 이용하고 보유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생활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그가 염두에 둔 것은 시민적 영광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마음, 즉 덕성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가이다. 89-90

 

마키아벨리는 역사 연구를 통해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혼합정체만이 덕성의 기반이 될 문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논리 역시 이론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개별 정체의 결점을 보완하도록 조직된 혼합정체는 경쟁적 사회집단 특히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의 균현을 잡아주는 데 가장 뛰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후대의 주장 - 국가 내의 권력분립이나 정당 경쟁에 기초한 대의 정부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자와 빈자가 모두 통치 과정 안으로 끌어들여진다면, 그리고 그들 간의 공직 배분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 표출될 정당한 통로가 마련된다면, 그들은 일정한 형태의 상호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당시 지배했던 전통적 사고와 달리, 적대적인 사회 세력과 이견의 존재가 선하고 효율적인 법률의 가능성을 침식시키기는커녕 그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나 자치적 정치체제만이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으 이익을 촉진하고 방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갈등과 불일치 역시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1

 

파벌의 특수이익을 억누르기 위해 혼합정체가 필수적이지만, 경재 국가들의 도전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안은 자신이 봥쇄당하기 전에 그들을 봉쇄하는 것이다. 팽창정책은 한 집단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힘의 이용은 자유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92

 

부자나 귀족만 공적 업무에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맥락에서 정치 참여를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인과 소상인을 포함하는 통치 과정을 원했다. ‘인민또는 시민이란, 공공 업무에 실질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생각되는 자립의 수단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노예, ‘부양가족등은 그런 이해관계를 가진 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94

 

공화국과 일반의사

루소는 18세기의 마키아벨리로 묘사된다. 루소는 공공 영역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체제를 공화정이라 불렀다. ‘공화죽의 적절한 형태에 대한 루소의 언급은 분명 그 이전의 선배 공화주의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처럼 루소는 민주주의 개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고전 아테네에 연결지었는데, 루소가 보기에 아테네만으로는 정치적 이상이 되기에 불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입법 기능과 집행 기능의 명백한 분리를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리하여 불안정과 파멸적 내분, 위기 시의 우유부단함 등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96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존경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당대의 실제 공화국의 권력 구조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루소는 최소한 이상적 정부에 대한 이론적 저술 작업에서 그와 같은 타협을 일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정한 형태의 공화국에 대한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97

 

루소는 개인을, 자신의 삶을 규율하는 법을 직접 제정하는 데 원칙적으로 관여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개념을 주장했다. 모든 시민은 무엇이 공동체에 최선인지를 결정하고 적절한 법을 제정하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치자는 통치자여야 한다. 루소에게 자치의 이상은 그 자체 목적으로 설정된다. 공적 업무를 살펴 처리하느 데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정치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지 국가만으로는 안 되고 어떤 유형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의 업무가 일반 시민의 업무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그것이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으며, 같은 이유에서 양도될 수 없다.....인민의 대리인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민의 대행인을 뿐이며, 아무 것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인민이 자기 스스로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다. 그것은 전혀 법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에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98

 

루소는 어떤 시민도 타인을 살 만큼 부유하지 않고, 자신을 파아야만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도 없는상태를 바랐다. 주요한 이익 다툼이 조직적 파벌 분쟁 - 일반 의사 형성의기반을 절망적으로 붕괴시킬- 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의 전반적 유사성밖에 없다. 그는 절대적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평등을 권력과 부의 정도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이 폭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법과 권위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101

 

모델 2.2에 요약되어 있는 루소의 공화 정부 개념은 , 여러 면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통틀어 자유와 참여를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더구나 정당한 정부의 원리와 집합적 이익을 위한 자치의 원리를 연계시킨 것은 그 당시 정체(특히 구체제)의 정치적 원리에 대한 도전이었을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원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자치 정부 개념은 가장 급진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일부 핵심 가정 - 특히, 민주주의란 시민에게 이따금씩만 책임지는 특정한 유형의 국가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생각 -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102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화주의 사상사는 여성성과 여성을 기분 나쁘게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성 풍조에 맞선 인물이 울스턴크래프트(1759-97)이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및 18세기 말 유럽 전역에 확산된 급진주의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면서, 루소 저작의 여러 부분에 대해 경탄했다. 그런 사건들과 루소가 제기한 쟁점 등에 고무되어 사회 정치 이론에서 가장 놀라운 팸플릿의 하나인 <<여권의 옹호>>1791년 저술했다. 이 책은 그녀가 참여한 급진 서클-고드윈이나 페인도 일원이었다-내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볕뉘.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정치사상과 사상가를 역사적인 배경과 인물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시각을 폭넓고 깊게 인식하게 만든 책이다. 꼼꼼하면서도 비교의 관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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