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민주주의란
플라톤은 폴리스는 5,0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2만 내지 3만으로도 전원 출석하여 민회를 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선거로 뽑는 500명의 평의회에서 민회에 올린 안건을 심의하고, 거기를 통과한 중요문제에 대해 아테네의 신전 앞 광장에서 민회를 열었다. 재판은 6,000명의 민중법정 형태로 이루어졌다. 66
전문가만으로 이루어지거나 투표율 100%라고 모두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이 고조되며, ‘모두가 어우러져 결정했다’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모두’가 어우러져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어우러져 행하지 않으며, 그 ‘모두’에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즉, 활성화된다는 것은 ‘모두’ 혹은 ‘우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이다. 74
폴리스=도시국가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폴리스는 정치를 행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곧 제의이기도 하며, 신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검을 지닌 남자들이 모인다. 폴리스는 폴리틱, 즉 정치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편 오이코스란 집의 영역이다. 그곳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일하며, 아이를 낳고 기른다. 오이코스는 오이코노미코스(미코스는 관리)형태를 취해 오늘날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의 어원이 된다. 그러나 이를 ‘정치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근대적인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는 ‘자유와 항상의 영역’, 오이코스는 ‘필연과 무상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77
무연의 영역, 자유의 영역, 공의 영역은 아무나 들어와도 되는 ‘퍼블릭’의 영역이다. ‘이것은 퍼블릭 公하다’라고 쓰여 있을 경우, 유럽에서는 누구나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인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목욕탕에서는 누구나 나체가 되어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아질이라 하여, 무연의 영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85
의석비율에 ‘민의’가 드러나지 않고 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런 문제를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타 진영간의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민회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든 사람들 가운데에 플라톤이 있었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인 제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진리를 부르짖는 스승을 사형에 처한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폐해를 그대로 담아둔채로는 기대를 걸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생각해낸 것이 ‘철인왕’ 통치이다. 98
플라톤은 국가(그래봤자 수만 명이었지만)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타락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이에 들어맞는, 지혜의 덕을 체현한 왕이 이끌어가는 왕정이 있다. 그러나 통치하는 중에 용기를 덕으로 삼는 전사들이 끼어 들어오면, 복수의 인간에 의한 명예정(귀족정)으로 옮겨간다. 그런 복수통치에 부유층이 참여하면 과두정이 된다. 과두정은 빈부의 격차를 초래하므로 빈자가 부자를 무찔러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정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정은 참주정으로 이행한다. 106
미국에서도 상원은 인구수에 비례한 것은 아니다. 상원이라는 말도 Senate인데 원뜻이 원로원이다. 민중의 대표인 하원과 귀족(미국에는 귀족이 없다)의 대표인 상원이 의회를 구성하고, 하원은 민중의 소리를, 상원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취지이다. 하원은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좋으므로 특권화되지 않도록 임기가 짧고, 상원은 임기가 길어 차분히 오래도록 지혜를 쌓아나가라는 제도이다. 112
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홉스는 물체론, 그리고 인간론, 마지막으로 정치론을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퓨리턴 혁명 등의 정변에 휘말려 정치론만을 우선적으로 완성했다. ..데카르트가 왕에게 이성이 있지만 농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뉴턴은 형태나 감촉 따위는 무시해도 좋으며, 질량이라는 본질만으로 환원하면 법칙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홉스는 ‘선’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신분이라든가 성별은 무시해도 좋으며, 그렇게 하면 인간 세계의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홉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은 모두 물체의 운행과 원인 결과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정치체제도 그 생각 아래 논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왜 국가가 필요한 것인가?’나 ‘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옛날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국가란 가족과 같은 것이니까’, 혹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으므로’등의 말로 마감하고 사고지점을 멈춰버린다. 하지만 이 점을 파고든 사람이 홉스였다 홉스는 우선 ‘자연상태’라는 것을 설정한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정치나 국가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자연권’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감각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간주한다.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선(플라톤의 선과는 다름)’으로 간주하며, 선을 추구하기 위해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심신능력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다...이것이 농민이 철로로 기사를 때려눕히는 전란과 혁명의 시대에 태어난 홉스가 갖게된 의문이자 답이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싸움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은 그러한 경험에서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로 그렇게 된 시점에서 전원이 일단 자연권을 방기하고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연권, 즉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인공적인 권력을 만드는 계약을 체결한다. 138-141
홉스가 생각한 정치체제는 어디까지나 인공적 산물로서,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계약해제도 가능하다. 또한 전원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애국심을 가졌다든지 마음의 고향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어는 ‘코먼웰스 commonwealth'이므로, 말하자면 ’공공의 복지‘라든가 ’공공재‘이다. ’공통의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고 할만한 뉘앙스를 품고 있고, 라틴어의 공공체 res puplica, 즉 공화국 republic에 가까운 의미이다. 141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을 ‘우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수단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홉스나 로크가 말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르다. 홉스나 로크는 자연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어서, 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나 루소의 경우는 계약할 때 일체의 자연권, 즉 몸도 마음도 재산도 전부 공동체에 양도하여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집단 출가와도 같은 것이다 개인 소유의 물건은 모두 놔두고 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되면, 공동체로서 ‘공통자아’가 생겨난다. 그것이 ‘일반의지’를 가진다고 설파했다. 이 ‘일반의지’라는 것은 구성원의 의지의 단순총합인 ‘전체의지’와는 다르다. 뒤르켐의 ‘사회’가 개인의 집합을 초월한 ‘실재’인 것처럼, 일반의지 또한 개인 의지의 집합을 넘는 ‘사물이다. 뒤르켐은 사회를 ’사물 chose'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루소 또한 일반의지를 ‘사물chose’로 비유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합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합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저 집합체에 지나지 않을 때에는, 자신과 타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제대로 이루어지면 개별적인 목소리가 녹아들어,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일반의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146-7
홉스, 로크, 스미스, 벤담, 밀 - 이들의 사상을 꿰맞추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럼에 투쟁이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사회는 풍요로워져 공존공영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은 수량화할 수 잇고, 그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시장의 화폐 거래량, 정치 영역에서는 득표수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정권을 차지 않다. 이렇게 다수결로 법률과 정책이 결정되는 제도를 만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 다만 정치는 가급적 민간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소수의견의 존중은 필요하다. 대체로 이런 정도일 것이다. 159
미국은 우선 타운이 있고, 타운이 연합하여 스테이트가 형성되고, 스테이트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연합함으로써 유나이티드 스테이트가 된 나라이다. 토크빌이 주목한 것은 이 타운십에서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 참가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권력의 분권화가 이루어져 스테이트와 타운에서 자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않아도 원활히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또 타운십의 성원들이 돌려가며 맡는 공무가 대단히 많다. 정부가 경찰이나 법원을 만들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교대제로 이루어진 보안관과 배심원을 맡는다. 타운십에는 행정을 실시하는 행정위원,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위원 외에 징세관, 회계관, 경찰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민회에서 선발되어 돌려가며 맡는다. 이러한 공무원에게 고정된 보수는 없고, 봉사행위를 한 정도에 따라 보수가 지불된다. 공무를 고의적으로 맡지 않는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163
하지만 지금은 토크빌이 생각하는 미국과 달리 스타트 지점부터 재력과 지위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지역사회에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허다한 역사적 연고가 얽혀 있고, 이념적인 결속도 잘 안 되는 사회라면 과연 어떨까? 그런 사회는 귀족이나 명문가, 아니면 사장이나 노조위원장 같은 중심적 인물이 우리의 대표라고 여겨지는 동안만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할 뿐이다. 165
근본적으로 대의제는 봉건제의 산물이다.....자유주의와 대의제와 민주주의, 이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인류 역사상 특정한 사회조건 아래에서 100년 정도 그렇게 유지되는 시대가 있었을 따름이다...점점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이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란 일종의 혼합정체이다. 투표를 통한 대의제란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은 개입하지 말라.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국정 따위는 내 알바 아니다. 좋은 왕이 치안과 외교만을 담당하라는 사고방식이다.....대의제 자유민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대의제가 봉건제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데모나 국민투표는 봉건주의의 파괴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는 할 수 없다. 165-7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도 20세기 들어 그 현황과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원래 종교적인 구제 목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싹텄지만, 지금은 그런 목적합리성이 상실되고, 영혼이 사라진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미 마련된 제도와 절차를 지키면 된다는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베버는, 사람들이 일단 납득은 하지만 본래의 정신은 상실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전통적 보수주의자나 전체주의자도 전통이나 공동체가 지닌 덕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똑 같은 한표라는 제도로 중우정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전체주의자는 유태인을 비롯한 자본가가 민족의 정신, 정수를 파괴하려 든다고 했다. 168
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불확정성의 원리 - 주체가 객체를 관측한다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온도계를 써서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180
일단 나와 너가 있고, 그것이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개체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에 비해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상대방과 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계론이라 부르도록 하자. 인간은 좀처럼 개체론적인 발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역시 네가 나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살펴본 바를 헤아려가며 따진다. 그럴 때 잠깐 일단 머릿 속을 비워보자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럿이 곧 에포케인데, 흔히 판단정지라고 번역된다. 이런 생각을 후설은 1차 세계대전 전부터 주장해왔지만, 전후가 되어서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전쟁이 경험, 과학의 변화, 독일 사회의 동요 등이 겹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감각이 퍼졌던 것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0
센카쿠 열도 문제라고하면 흔히 일본과 중국의 문제인 것처럼 언급되지만, 일본과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며, 일본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중국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을 ‘중일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편견을 가지고 구축된 인식이다. 이러한 문제를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우익단체가 끌어들이고, 매스컴이 끌어들이고,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정치가가 ‘국익’이라고 의식하게끔 되었는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국익’이 구축되어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식 위에서면 문제의 해결방법이 달라진다. 195
이 관계를 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변증법이다. 헤겔이 주창하고 마르크스가 이어받았다. 변증법리라고 옮겨지는 독일어 dialektik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의 독일어역이고, 영어의 대화 dialogue와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 특히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혼자서는 진리에 좀처럼 도달할 수 없다.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이게 진리야, 네 생각을 바꿔!”라고 말한댔자 반발이나 살 뿐이다. 게다가 자신도 사실 진리에 도달해 있다는 보증이 없다. 그래서상대방의 주장에 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질문을 던져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하면 처음부터 설교에 마주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모순에 눈을 뜨며 내면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질문을던지면, 마찬가지로 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상호 간에 발전을 이루며 진리에 도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에 도달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가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198-9
근대화와 전통은 자본가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동전이 양면과 같다. 그렇게 때문에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전통이 이겨 근대화를 멈추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근대화가진행되어 전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다. 아무리 옛날 생활방식이 사라져도,아니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흔적과 역사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이어진다. 근대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전통이 강고해질수록 근대화 욕구 또한 깊어진다. 근대화와 전통은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202
‘나와 사회와 관계가 없다’든가 ‘내가 나서도 사회가 바뀌지않는다’라는 것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며, 단순히 불가능이다.자신이 존재하면서 걷거나 일하거나 말하거나 하면,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를 바꾸게 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나도 너도 관계의 일시적인 현상 형태에 불과하고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활동가도 태어나면서부터 활동가였던 것은 아니며, 보통사람 또한 영원불변하며 보통 사람인 채 지내는 것도 아니다.....변증법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독일 사상가들이 주창했는데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독일은 유럽의 후진국으로서, 영국이나 프랑스 사상을 배운 상층부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가매우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권위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그런 괴리 현상을 강화시킬 따름이었다. 이는 실로 ‘불행한 의식’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여오는 설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바뀌어가는 변증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203-205 물화, 현상학, 변증법의 유용성
재귀적인 근대화(선택의 증대) -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둘 낳는다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왜 직장을 그만둬야 해’‘가사는 왜 내가 맡아야 하지’‘왜 아이를 나아야 하나’‘이런 남편과 이이와 함께 살아야하지’라는 선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선택지가 늘었다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보아야한다. 사회가 크게 바뀐 것이다. 208-210
여러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재귀성이 증대한 사회에서 인기를 누린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양한 주장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각국에서 내놓은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발상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자신의 돈,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속한 민족뿐‘인 것처럼 보인다.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