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 읽는다는 것... ...

 

루터가 말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어버리면 니체가 말한 대로 '회임'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루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충고하고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려 한 번도, 두 번도 이미 충분히 읽었고 들었고 말했다. 뭐든지 근저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갖는 자는, 때 아닌 때에 열매를 맺는 과일 같은 것으로, 절반도 익지 않은 채 떨어져버릴 것이다.'  80

 

종말론이란 유아사고 폐기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역사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 결정적인 끝이나 시작을 살고 있다, 그런 게 아니면 싫다. 이 얼마나 유치한 사고입니까? (중략)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계는 계속됩니다. 세계는 넓습니다. 그 세계는 더욱 넓습니다. 세계는 계속됩니다. 그 세계는 더욱 오래 계속됩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세계는 변합니다. 163

 

국가와 세계혁명

 

국가의 본질은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 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은 아이의 삶을 '수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85

 

세계국가나 세계정부는 등장하지 않는 걸까요? 유엔에는 아이가 없습니다. 유엔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로서의 지위, 자신이 태어났다는 법적 인격을 부여받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재생산하는 원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원리, 즉 '계보원리'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엔은 계속해서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정부라는 구상은 늘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유엔을 개편하려고 하는 자도, 그렇지 않은 자도 말이지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기분 좋게 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국가라는 구상은 늘 어딘가 망상적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의 생생함을 떠맡는다는 데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8

 

텍스트의 세계

 

중세 해석자 혁명은 '공통법'인 교회법을 고쳐 쓴 것이며 텍스트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읽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법은 세례, 교육, 구빈, 혼인, 가족, 성범죄, 고아,과부,병자, 노인의 보호 등을 통괄하는 '삶의 규칙', '재생산의 법'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189

 

르장드르에게 '텍스트'라는 것은 흑인의 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화를, '법'을 춤추고 있는 셈입니다. "독서란 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라고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는데, 르장드르는 "이렇게 하여 그들은 법과 춤추러 찾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자신의 신체에 법과 신화를 걸친 그들의 행동거지, 힘껏 내밟는 일보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심신에 새기게 한 규칙, 시, 문장을 소리 내고, 흔들고,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창의를 덧붙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읽고, 고쳐 읽고, 쓰고, 고쳐쓰는, '문학'행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춤'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203

 

텍스트는 넓습니다. 그것은 좀 더 넓습니다. 자신의 신체라는 종이 위에 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춤으로 써도 됩니다. 자신의 혀라는 종이에 신의 말이 스며든 꿀로 써도 됩니다. 무엇에 무엇을 썼다면 그것은 '규칙'일까요? 이것은 방대한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 무엇을 써도 그것은 문학인 것입니다.  205

 

폭력이 아닌 혁명

 

폭력혁명이 혁명의 '모든 것'이 된 것은 이 '중세 정보 기술 혁명'의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이 행한 것, 그것은 '통치의 정보화'입니다. '모든 것'은 정보가 됩니다. 그 조작의 이물로서 '한데 묶여 나오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폭력입니다. 정보와 폭력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결탁해 있습니다. 요컨대 통치의 정보화와 폭력화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정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 됩니다. 따라서 혁명도 '폭력혁명'이 되어갑니다. 800년에서 850년 동안 우리는 정보와 폭력의 바다에 빠져 있습니다. 209

 

법전을 비롯한 규범에 관련된 것으로서의 '정보', 정보는 아니지만 정보와 결부된 형태로 권력 안에 포함되는 '폭력'. 그리고 아무래도 거기에서 잔여로서 석출되는 사랑과 동경의 절대적 대상으로서의 '주권=국가'. 정보와 폭력과 주권의 삼각형으로 구성되는 '세계', 제도적인 것의 세계는 유럽의 한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따라서 혁명이란 정보도 폭력도 주권 탈취도 아닙니다.  213

 

혁명의 장소

 

한 행을 쓸 때 자신은 그것을 정말 믿는 것일까요? 한 행을 지울 때 자신은 그것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다면 고쳐 쓸 수 없지만,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거기에 무한한 회색의 투쟁 공간이 출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최후에는 고독한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것은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혁명의 장소입니다. 혁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공은 끝나지 않습니다. 정의상,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216

 

예술이란 수태의 예술입니다. '잉태된 것 concept'을 위한 기예 art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예술이 끝났다든가, 문학이 끝났다든가, 그것들이 위기에 처했다든가, 오락이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가, 잡담과 사고의 자폐에 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223

 

뱀발.

 

1. 읽은지가 좀 된 책이라 접힌 곳을 그러모으니 생경하다.  몇몇 단락에 꼭지를 씌워본다. 종교에 대한 아성을 허물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다시 돋구고, 국가에 대한 근본 물음을 다시 재기함으로써 시대가 갖고 있는 모순을 다시 흔든다. 더구나 종말론에 대한 시니컬한 해석과 평론, 지식인의 그물망에 잡혀 있는 인식의 세계가 얼마나 협소한가 하는 비판에 수긍한다. 자본주의 300년에 박자를 두고 사고하는 울타리를 저자는 법과 규칙의 연원이 되는 800년으로 지평을 넓혀준다.

 

2.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한지 백년남짓 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해석자의 세계였다면 이렇게 지금의 국가는 죽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지적재산권 소유의 문제도 아니다. 외치고 주장하고 고민하는 이가 늘어나고 그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 통찰력을 필부필녀가 가져가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일인가? 그런면에서는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지극히 보수적인 것은 아닐까 한다. 무엇 무엇의 종언이라는 책들에 부화뇌동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지평을 시간의 자장에서 멀리볼 수 있는 책은 떨리고 설레이고 섬뜩하다.

 

3. 그래서 당분간 이 떨림은 오롯이 가져가기로 한다. 읽기 쓰기, 깊이 읽기, 깊이 쓰기... 살기 살기, 깊이 살기, 깊이 살기... ...

 

4. 과격하다 오독을 해도 상관없으리라. 지금 그렇게 느낀다. 혁명을 되뇌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백일홍이 피고지고, 지고피고....더운 여름을 가로질러 혁명한다.  아 붉고 흰 혁명, 그 이름난으로도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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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뻔뻔스러움과 겸손함 - 뻔뻔스러움이란 나에게 표출할 의견이 있고 그것을 발언할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겸손함이란 내가 아는 진리가 언제나 부분적이고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 세 개는 겸손함과, 나머지 두 개는 뻔뻔함과 관련 있다.

 

1. 우리는 이 안에서 모두 함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 우리는 다름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3. 우리는 생명을 북돋는 방식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4. 우리는 개인적인 견해와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5. 우리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한명을 키우려면 마을하나가 필요하듯, 마을하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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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쟁점에서 언제나 이견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자유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자, 그 위대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견을 드러낼 때 더 좋은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이견이 독기와 증오로 가득차 있거나 폭력적이라면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의견의 강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든 그것이 살아남는데 근간이 되는 "마음의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제가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기"라고 부르는 마음의 습관 말입니다. 우리 안의 차이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끌어안는 법을 배울 때 갈등이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엔진으로서 보다 나은 사회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계속 이끌어간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17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질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래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 the brokenhearted'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부서져 흩어지는  broken apart'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 broken open'마음이 요구된다.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애매함'과 '긴장'을 끌어안아야 한다. 21

 

"안전과 만족은 돈보다 친구로부터 더 쉽게 획득된다." 121

 

여러 일을 하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 아이 한 명을 기르기 위해서, 대화에서 우리의 생각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의 개념을 현실로 변화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모으기 위해서, 심지어 가장 고독한 형태의 창의적인 작업을 자극하고 지지하기 위해서 마을 하나가 필요한 것이다. 124

 

양자택일하도록 유혹하는 딜레마를 해결하고 "제3의 것"이 떠오를 때까지 충분하게 긴장을 붙드는 방법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슈마허의 말을 들어보자  ' 갈라져나가는 문제들은 보다 상위의 힘들에 대한 수요를 유발하고 따라서 그 공급을 촉진한다. 그 결과 사랑,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진리가 삶 속으로 들어온다. 오로지 그런 상위의 힘들을 통해서만 삶의 정황 속에서 대립들이 화해될 수 있다. 132

 

예술 뒤에 깔려있는 문명화의 충동 - 긴장을 심미적 형태로 끌어안으면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사물을 공감으로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드러내고, 마음과 정신에 깃든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우며, 다름을  공포의 근원에서 성장의 근원으로 바꾸어준다. 탁월한 예술은 어떤 모델이든 긴장을 끌어안는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긴장을 보고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다. 147

 

분리되어 사는 사람들은 각자 모두의 나머지 운명에 대해 이방인이다. 자신의 자녀와 사적인 친구들만이 인류의 전체다. 그는 나머지 동료 시민에게 가까이 있지만 보지 않는다. 그는 그들과 접촉하지만 느끼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안에서 또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친척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다 해도, 그는 여하튼 자신의 나라를 잃어버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2

 

자기의 자아보다 커다란 실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그리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과제는 없다. 205

 

젊은이들은 자신의 배움에서 목소리를 부여받고, 사회적-인격적-지적 성장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발달에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와 주변 환경에 자신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교실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차원에서 새로운 실행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학생상담원, 멘터링, 견습, 회복적 정의, 자기주도학습, 그리고 공유된 거버넌스의 실행은 학생들의 소속감, 자율성 그리고 문제설정 능력 등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다준다. 212  버지니아 주 햄프턴의 '청소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 방법은 직면하게 하는 것이고, 이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중략) 따라서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왜?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구축을 통해 복합성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개인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형성되고 곧바로 굴복하지 않는 개인, 강제에 저항하고 모든 형태의 조작과 선동에 맞서는 개인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은 우리가 민주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전달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아는 한 그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218

 

왜,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우리에게 말하나요? 왜 마음 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 말씀을 마음 속에 둘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우리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네. 언젠가 그들은 말할 걸세. 마음이 부서져 그 말씀이 그 속으로 떨어졌다고." 237

 

이상주의자가 가장 쉽게 굴복하는 현대적 폭력의 그릇된 형태가 하나 있다. 실천과 과로가 그것이다. 현대적 삶의 분주함과 압박감은 내적인 폭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적 관심사에 쏠리고, 너무 많은 요구를 수락하고, 프로젝트에 가담하고,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활동가의 열광은 자신의 일을 무효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결실을 파괴한다. 일의 결실을 풍요롭게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기 때문이다.  250

 

조직화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도 결합시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은 "이익만이 아니라 가치"이기 때문이다. 간츠는 이 절차를 "공적인 서사"라고 부른다..(중략)  서사는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사는 가치를 구체화하고 소통한다. 우리는 가치들의 공유된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섞일 수 있고, 서로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찾고, 가능성을 탐구하며, 불가피한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262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꺼내놓는 이야기들은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고립시키며, 지금의 희망을 앗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공적인 서사가 요구하는 이야기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빚어낼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나 혼자만 그렇게 무력하고, 고립되어 있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하고, 연합되어 있고 희망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265

 

뱀발.  민주주의와 마음, 마음만으로도 설레는데, 마음과 민주주의를 이어놓는 책이 반갑다.  통진당의 사멸을 맨눈을 뜨고 지켜보면서, 조직들이 자꾸만 딱딱해지는 갑각류같은 것에 아무 반향없는 외침을 하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보는 이도 없는 여기에 낚서처럼 끄적일 뿐, 그 공허함과 허전함은 외로움으로 기우뚱하기도 한다. 단체나 조직, 아니 그냥 모임의 문화적인 건강성으로 의도적인 안티를 주장하고, 이견을 장려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고 서투르게 외쳐본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대부분은 고립되어 있고, 그 분위가 자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일 역시 지금여기에 공허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의견을 따라가는데, 따라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른다는 것, 이견과 다양성은 몇이 모이더라도 경험의 축적치와 역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마음도 연성화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조직적인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생각 연습에 자맥질하는 것이 현실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불편하고 더디다.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우회로를 거쳐 가는 것이 답답할 것이다. 손쉬운 방법을 내밀고 싶지만 마음을 나누거나 섞고자하는 것이 얼마나 갑갑증 나는 일인지는 견뎌본 사람들을 알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는 이렇게 마음이 부서지고, 마음이 스며들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인지 몰라 새롭게 한걸음씩 내디뎌야 할 것이다. 서사, 마을...한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민주주의의 내면화를 위해서도 마을과 모임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주 조금씩, 몸으로 마음으로 해야할 것을 함께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온도만이 옆으로 번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 앎은 그저 정말 지엽적인 것인지 모른다.

 

글을 되적다가 문득 마음이 이상주의자에 걸린다. 나도 끊임없이 스스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고, 한숨 한번 베어문다.

 

더위에 벙개모임을 하며, 잠시 긴장을 겪은 적이 있는데, 지금 되살펴보면 우린 그 긴장을 생동감있게 쓰는 법, 그 긴장과 대면하는데 무척 낯설고 부족한지 모른다 싶다. 그래서 그 불화를 다루고 놀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몸익은 이가 있으면 훨씬 분위기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불화에 친숙해라. 그리고 그 주장이 뭔지 오롯이 겪고, 다른 주장을 뻔뻔스럽게 뱉고, 그 이견의 긴장을 너머서는 방법이 없는 것인지 다룰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반가운 것은 그런 불편함이 자주 올 듯하지 않는가?

 

한 여름 모임과 몸과 맘을 챙기는 것이 쉽지 않다. 불편을 감내한 연유겠지만 힘들다. 入秋에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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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대, 原

 

 

 

김영대, 原

 

 

 

가국현, 짝사랑

 

 

 

장욱진

 

 

 뱀발. 더위로 지친다. 아해들과 함께 며칠을 지내는데, 집안일들을 잘한다. 알아서 먹을거리도 쓱싹쓱삭, 청소도, 다른 것도 밟히지 않게 챙긴다. 불볕더위만 아니었더라면 편안한 휴식이었을텐데 책도 글도 쉬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나마 니체극장의 완독은 더 힘들게 만들고, 그 기운이 아직도 뻗쳐있어 우울하다. 트랙을 조금 곁눈질하고서야 맘이 곧추선다. 더위에 또 이글거리긴 하지만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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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정치-재계의 흐름을 신랄하게 드러낸 추적자는 한마디 한마디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카드게임과 같이 순간을 놓치면 영원을 잃는 듯,  약점을 잡고 잔학함을 보태고, 끊임없이 대상화하면서 자기 것을 취한다. 그래서인가 대사 한마디한마디가 오싹하고 살점을 부여잡는다.

 

 

돈중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수십조원이 있더라도 조금 더 갖고 싶다는 욕망은 무엇일까? 아마 마약같거나 도박을 하며 맛본 중독같은 것은 아닐까? 도저히 돈을 수중에 넣는 것 말고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은 아닐까? 여론을 틈타 인천공항 기름공급권까지 슬쩍 넘기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중독은 파렴치의 한도를 넘는다. 기회만 엿보고, 사건을 만들고, 피해자가 속출하든 말든 제 수중에 넣으려는 것은 아닐까? 루쉰이 말한대로 페어플레이는 이르다. 꺼진 불도 다시보고, 몽둥이로 *야 그제서야 기세가 죽는 것일지 모른다.

 

 

사업비

 

모임 사업비가 없어 허덕거린다. 그렇다고 손벌릴 수도 없고 근근히 떼우며 살림살이 해나간다. 넉넉치 못한 형편에 좌판벌려 이야기를 나누는 데 어찌 더 처량해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자존심 세우고, 넉살 좋은 돈 모금하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들 없어도 십시일반 살림살이 챙기려 안간힘을 쓴다. 벌써 여덟해가 다가온다. 용케도 버틴 것인지? 퇴직금도 변변히 적립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스럽기도 하다.

 

 

두권의 책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강독하다. 앞의 책은 문학의 혁명이다라는 주제이다. 뒤의 책은 모순을  비통함으로 받아들여, 마음을 산산히 부서뜨리고 다시 모아야 나도 우리도, 현실도 바뀐다고 한다.  혁명과 르네상스의 기원을 저기 12세기로 본다. 로마법을 다시 필경하여 세상에 심어 교회법을 만든 그 때의 혁명을 말한다. 마호멧, 예수, 부처....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말한다.

 

 뒤의 책은 성공의 습관이 아니라 마음의 습관을 다룬다. 다양성을 위한 뻔뻔스러움과 마음을 모으는 겸손함이 일상에 습관처럼 되어야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랄 수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피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비통함을 마음에 내리고 달래면서 꽃피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명왕성

 

후배가 영화를 가까이서 찍고 있어 일요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프로듀서님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친히 촬영장에 데려가 설명까지 해줘 몸둘 바를 몰랐다.  저예산 상업영화, 내년 개봉된다고 한다. 학교폭력 스릴러물....[타이밍] 생각이 겹친다.  프랑스 카날플러스 단편영화 상까지 받는 친구의 작품이 기대된다.

 

 

뱀발. 마음, 혁명  그 단어를 어루다보면 가슴이 찡하다. 그 꽃들이 무더위에 피워내는 것도 그러하다. 세상은 어쩌면 권력을 잡고, 제도를 바꾸고 하는 것도 한방편이지만, 그것보다 마음을 빼앗고, 마음을 흔들고, 저기 그(녀)가 걷는 삶의 한켠에 마음을 흩뿌려 아마 저맘때 마음이 뭍어나 나눌 수 있다면 그것도 참 진하게 바꾸는 것일 수 있겠다 싶다. 요사이 말들이 가리지 않고 삐죽삐죽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니 딱딱하던 표면도 조금, 아니 많이 말랑해졌다 싶다. 세상도 변할 듯 싶다...이렇게 명왕성 같은 소리만 하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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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요리사 김윤희[남명옥배우]는 자살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채업자 양동철[조중석배우]의 집으로 향한다. 무대는 단 한곳- 양동철의 집.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양동철의 집은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다.밖에서는 악랄한 사채업자일지 몰라도 그도 어느 평범한 집의 가장처럼 가족들에겐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끝내는 둘 다 안쓰러운사람들.

 

 

연극, [지상최고의 만찬]을 보다. 사채업자 동철은 윤희에게 비아냥거리면 말한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해야한다고 말이다. 악랄함은 공적인 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사용할 기술과 같은 것이고, 아이에게 무한애정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자살한 남편은 찌질함의 저끝은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딸아이에게 가해질 위험이 폐부에 닿고서야 처절함에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며칠전 통계청의 발표를 듣고 넘겼다.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 뉴스에서 다시 듣게된다. 45세까지 남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데 고졸이하의 학력이 절반이 넘는다.절반이.  여성의 경우 대졸자가 그러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이유때문만은 아니다. 불화나 이혼 등 여러사유가 있겠지만, 돈이 그 관계를 난도질하는 것이 팔할을 넘을 것이다.

 

살아지는 순간, 자의든 반타의든 가정을 이루며 아이를 낳고 시작하는 삶은 끊임없이 평균적인 시선과 시각을 요구한다. 따듯함을 사적인 틀로 끌어들이며 책임을 지운다. 사회적 삶은 평균적인 삶을 옭죄면 배추잎을 소금에 절이듯 점점 진하게 배어든다. ....그래서 살아지는 삶의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디는 순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수면아래의 삶 - 그 맥락은 쉽게 판별이 되지 않는다. 삶의 이력이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는 끈들이 얽히섥히 난삽하다. 하지만 세상은 되뇌인다. 단란한 가정이 있고, 따듯한 개인이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있고, 우울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유쾌가 있다고 한다. 살아지는 삶에 있어 그 수면을 떠오르기가 쉽지 않다. 개인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운신으로 해결할 수조차 없는 다른 것이 있다.

 

비극이다.

 

살기위해 동료를 팔아야 하는 비극.  결혼해도 폭력에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 아무리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해도 병원비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 있어 가정이란, 결혼이란,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점점 더 그 삶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이가 늘고 있는 현실에서 나만, 나만 자유로울 수 있거나 원하는대로  갈 수 있는 확율이 높다는 생각은 안전할까?

 

따듯함이 점점 줄어드는 속도를 의심해봐야 한다. 나의 따듯함, 차거움이 따듯함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보면, 주위가 급속히 차거워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시선은 따듯함에만 주면 안된다. 차거움의 이유에 대해 직시해봐야 한다. 피하지 말아야 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단란함에 기대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연결된 나, 서사적인 나. 살아가는 삶, 자본의 결기을 비웃고 감고 나갈 수 있는 연결된 삶의 시도. 그래야만 아마 조금 삶의 늪에 빠진 이에게 손길을 건네거나 손잡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가 마련되는 것은 아닐까? 

 

무더위의 한 복판, 서편의 반달은 점점 기울어진다. 이야기는 점점 익는다. 결혼하는 이의 삶의 시작이 좀더 풍요롭거나 삶의 늪에 도저히 빠질 수 없는 가벼운 이들과 가벼운 삶의 연결로 이어지고 그 삶이 좀더 부럽고 샘이 나면 어떨까 싶다.  밥-삶-일-관계-만듦의 연결망이 현실을 장난치며 넘을 수는 없을까?

 

 

뱀발.

 

1. [해마]이후 비슷한 주제의 연극을 다시 접한다. 벙개 겸해서 뒤풀이 겸 조촐한 맥주만찬을 하다.

 

2.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누길 좋아하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사채업자 양동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똥바가지에 똥을 맞은 기분이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다. 비극의 현실을 너무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기농산물을 먹고 싶어도, 다이어트를 위해 한끼만 먹는 이가 아니라 한끼밖에 식사를 할 수 없는 이들. 투명인간의 현실에 그저 스치고 서로 지나가는 사이는 아닐까? 현실에서 관계라는 것도... ...

 

3. 배우들의 몰입연기에 아찔하다 싶다. 혹 다치지나 않을까?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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