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뻔뻔스러움과 겸손함 - 뻔뻔스러움이란 나에게 표출할 의견이 있고 그것을 발언할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겸손함이란 내가 아는 진리가 언제나 부분적이고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 세 개는 겸손함과, 나머지 두 개는 뻔뻔함과 관련 있다.
1. 우리는 이 안에서 모두 함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 우리는 다름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3. 우리는 생명을 북돋는 방식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4. 우리는 개인적인 견해와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5. 우리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한명을 키우려면 마을하나가 필요하듯, 마을하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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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쟁점에서 언제나 이견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자유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자, 그 위대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견을 드러낼 때 더 좋은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이견이 독기와 증오로 가득차 있거나 폭력적이라면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의견의 강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든 그것이 살아남는데 근간이 되는 "마음의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제가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기"라고 부르는 마음의 습관 말입니다. 우리 안의 차이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끌어안는 법을 배울 때 갈등이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엔진으로서 보다 나은 사회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계속 이끌어간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17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질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래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 the brokenhearted'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부서져 흩어지는 broken apart'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 broken open'마음이 요구된다.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애매함'과 '긴장'을 끌어안아야 한다. 21
"안전과 만족은 돈보다 친구로부터 더 쉽게 획득된다." 121
여러 일을 하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 아이 한 명을 기르기 위해서, 대화에서 우리의 생각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의 개념을 현실로 변화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모으기 위해서, 심지어 가장 고독한 형태의 창의적인 작업을 자극하고 지지하기 위해서 마을 하나가 필요한 것이다. 124
양자택일하도록 유혹하는 딜레마를 해결하고 "제3의 것"이 떠오를 때까지 충분하게 긴장을 붙드는 방법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슈마허의 말을 들어보자 ' 갈라져나가는 문제들은 보다 상위의 힘들에 대한 수요를 유발하고 따라서 그 공급을 촉진한다. 그 결과 사랑,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진리가 삶 속으로 들어온다. 오로지 그런 상위의 힘들을 통해서만 삶의 정황 속에서 대립들이 화해될 수 있다. 132
예술 뒤에 깔려있는 문명화의 충동 - 긴장을 심미적 형태로 끌어안으면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사물을 공감으로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드러내고, 마음과 정신에 깃든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우며, 다름을 공포의 근원에서 성장의 근원으로 바꾸어준다. 탁월한 예술은 어떤 모델이든 긴장을 끌어안는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긴장을 보고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다. 147
분리되어 사는 사람들은 각자 모두의 나머지 운명에 대해 이방인이다. 자신의 자녀와 사적인 친구들만이 인류의 전체다. 그는 나머지 동료 시민에게 가까이 있지만 보지 않는다. 그는 그들과 접촉하지만 느끼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안에서 또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친척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다 해도, 그는 여하튼 자신의 나라를 잃어버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2
자기의 자아보다 커다란 실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그리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과제는 없다. 205
젊은이들은 자신의 배움에서 목소리를 부여받고, 사회적-인격적-지적 성장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발달에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와 주변 환경에 자신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교실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차원에서 새로운 실행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학생상담원, 멘터링, 견습, 회복적 정의, 자기주도학습, 그리고 공유된 거버넌스의 실행은 학생들의 소속감, 자율성 그리고 문제설정 능력 등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다준다. 212 버지니아 주 햄프턴의 '청소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 방법은 직면하게 하는 것이고, 이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중략) 따라서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왜?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구축을 통해 복합성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개인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형성되고 곧바로 굴복하지 않는 개인, 강제에 저항하고 모든 형태의 조작과 선동에 맞서는 개인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은 우리가 민주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전달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아는 한 그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218
왜,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우리에게 말하나요? 왜 마음 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 말씀을 마음 속에 둘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우리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네. 언젠가 그들은 말할 걸세. 마음이 부서져 그 말씀이 그 속으로 떨어졌다고." 237
이상주의자가 가장 쉽게 굴복하는 현대적 폭력의 그릇된 형태가 하나 있다. 실천과 과로가 그것이다. 현대적 삶의 분주함과 압박감은 내적인 폭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적 관심사에 쏠리고, 너무 많은 요구를 수락하고, 프로젝트에 가담하고,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활동가의 열광은 자신의 일을 무효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결실을 파괴한다. 일의 결실을 풍요롭게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기 때문이다. 250
조직화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도 결합시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은 "이익만이 아니라 가치"이기 때문이다. 간츠는 이 절차를 "공적인 서사"라고 부른다..(중략) 서사는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사는 가치를 구체화하고 소통한다. 우리는 가치들의 공유된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섞일 수 있고, 서로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찾고, 가능성을 탐구하며, 불가피한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262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꺼내놓는 이야기들은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고립시키며, 지금의 희망을 앗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공적인 서사가 요구하는 이야기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빚어낼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나 혼자만 그렇게 무력하고, 고립되어 있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하고, 연합되어 있고 희망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265
뱀발. 민주주의와 마음, 마음만으로도 설레는데, 마음과 민주주의를 이어놓는 책이 반갑다. 통진당의 사멸을 맨눈을 뜨고 지켜보면서, 조직들이 자꾸만 딱딱해지는 갑각류같은 것에 아무 반향없는 외침을 하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보는 이도 없는 여기에 낚서처럼 끄적일 뿐, 그 공허함과 허전함은 외로움으로 기우뚱하기도 한다. 단체나 조직, 아니 그냥 모임의 문화적인 건강성으로 의도적인 안티를 주장하고, 이견을 장려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고 서투르게 외쳐본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대부분은 고립되어 있고, 그 분위가 자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일 역시 지금여기에 공허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의견을 따라가는데, 따라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른다는 것, 이견과 다양성은 몇이 모이더라도 경험의 축적치와 역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마음도 연성화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조직적인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생각 연습에 자맥질하는 것이 현실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불편하고 더디다.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우회로를 거쳐 가는 것이 답답할 것이다. 손쉬운 방법을 내밀고 싶지만 마음을 나누거나 섞고자하는 것이 얼마나 갑갑증 나는 일인지는 견뎌본 사람들을 알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는 이렇게 마음이 부서지고, 마음이 스며들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인지 몰라 새롭게 한걸음씩 내디뎌야 할 것이다. 서사, 마을...한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민주주의의 내면화를 위해서도 마을과 모임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주 조금씩, 몸으로 마음으로 해야할 것을 함께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온도만이 옆으로 번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 앎은 그저 정말 지엽적인 것인지 모른다.
글을 되적다가 문득 마음이 이상주의자에 걸린다. 나도 끊임없이 스스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고, 한숨 한번 베어문다.
더위에 벙개모임을 하며, 잠시 긴장을 겪은 적이 있는데, 지금 되살펴보면 우린 그 긴장을 생동감있게 쓰는 법, 그 긴장과 대면하는데 무척 낯설고 부족한지 모른다 싶다. 그래서 그 불화를 다루고 놀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몸익은 이가 있으면 훨씬 분위기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불화에 친숙해라. 그리고 그 주장이 뭔지 오롯이 겪고, 다른 주장을 뻔뻔스럽게 뱉고, 그 이견의 긴장을 너머서는 방법이 없는 것인지 다룰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반가운 것은 그런 불편함이 자주 올 듯하지 않는가?
한 여름 모임과 몸과 맘을 챙기는 것이 쉽지 않다. 불편을 감내한 연유겠지만 힘들다. 入秋에 기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