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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3-0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이건 봄테러야요.꽃테러~

여울 2009-03-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러가 아니라 혁명이라죠. ㅎㅎ. 꽃혁명~ 꽃으로 혁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꽃만으로...그렇다면 꽃지뢰든 꽃테러든 맘껏 당하고 하리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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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푸른 잎을 씹으며 

 귀향하듯 

 옛 애인의 집을 찾아가네 

 

 계단은 열한 계단 

 그 아래 쪼그려 앉은 할머니 

여전히 졸면서 

구천을 건너는 생불 生佛 이네 

 

라일락 푸른 잎 

그 사랑의 쓴 맛을 되새기며 

 

대문은 파란 대문 

엽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가네 

 

세상의 모든 집

옛 애인의 집 

 

내 이름을 지우다 

 

평사리 무딤이들의 보랏빛 

꽃무리 속에 

저 홀로 하얗게 피어난 자운영과 

실상사 삼층석탑 옆 

두 그루 희디힌 배롱나무 

 

자운영이 백운영으로 

백일홍이 백일백으로 

제 이름을 버리고 사는 이들이여 

 

녹슨 칼날을 갈며 

돌연변이의 팽팽한 시위를 당기며 

흰 소를 타고 

낯선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 

야, 이원규! 

반갑게 부르기도 하지만 

안면 몰수하고 

가던 길 그대로 가고 싶다 

아득하고 아득하니 

날 부르는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마저 지워지고 

 

무명비 하나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뱀발.  지난 봄날. 겨울. 실루엣이 선명히 남아있는 백일홍을 본다. 한여름 화사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갈색의 꽃대. 화려한 꽃이 아니라, 화려한 이름이 아니라 서로 잔잔히 녹아 경계가 없는, 서로가 나의 경계인 그 목소리가 좋다. 떨어진 동백꽃을 줍는 그의 마음이 좋다. 시집 몇권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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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3-09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피는 그대에게

꽃피는 그대 먼 길 오시는데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보살행의 황어떼가 오르고
매화 꽃망울 막 벙그시는데

백태 낀 눈으로 반기려니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맞아야 할 분들이
어디 꽃피는 그대 뿐이랴

다래 돈나물 돋으시는데
소화불량의 아랫배 움켜쥐고
이것 참, 이것 참.

-이원규, [옛 애인의 집] 73쪽, 꽃피는 그대에게-

여울 2009-03-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이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한꽃 품어 꽃핀다/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딱 한번 꽃리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한소끔의 밥꽃을/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단지 짧거나 어둡다/담대한 꽃냄새/방금 꽃핀 저꽃 아직 뜨겁다/피는 꽃이다!/이제 피었으니/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 정과리 [와락]에서 -
 

 

세계테마기행 - 스위스편을 보다 머큐리의 동상, 그가 작곡하던 호수... ...가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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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습속과 변화에 대한 전망

 

 압축성의 기로. 우리의 신체. 아니 몸의 각인. 전근대-근대-탈근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가 오히려 문제라는 말. 식민성과 천민성, 놀라울 정도로 청각과 촉각의 언저리에 남아있는 우리들.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 다니는 우리들의 습속. 합리성의 잣대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를 넘어 흐른다. 감성과 카리스마, 승자독식. 각개약진. 휩쓸림은 여전할 것이고. 머리로만 움직이는 자는 망할 것이고, 머리의 진화에만 뿌리박는 자 역시 소멸할 것이고. 가슴과 몸이 더 온도가 높고 빠르면 바뀔 것이고, 그 공명이 합리로 체화될 수 있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진중권님이 논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청각과 촉각의 잔유가 탈근대의 코드와 잘 섞일 수 있음. 하지만 문자문화의 합리성으로 사유하거나 움직이는 몸과 가슴이 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에 공감. 몸에 덕지덕지 붙은 식민성과 천민성을 얼마나 성찰할 수 있는지, 철저히 고립된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실이 그나마 다행. 그 몸과 사유를 얼마나 바꿔낼 수 있는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런면에서 시각과 개인으로 섬을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를 넘는 것의 자양분으로 중세의 구술-구체성-오감-오미의 회복 가능성은 지금을 풍부히 해줄 수도 있다는 점. 유럽과 동아시아. 우리는 더욱 더 차이가 있다는 점. 그 차이에 관심. 그 관심이 풍요로울 수 있는 비교가 요구됨. 

관조의 시각적 편향이 다초점과 이차원의 생생함이나 구체성으로 내려올 때 성찰이 뿌리내릴 근거가 마련된다는 점. 머리와 가슴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키치. 일회성, 삶 속에서 무용. 몸으로 끌려내려 오거나, 몸을 끌고 갈 수 있는 바뀜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무용. 일상의 회복. 감성에 기반한 더 나은 합리. 카리스마를 동반한 합리의 단초를 공명해내는 것.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는 머리과 가슴의 열정은 내내 가슴앓이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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