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푸른 잎을 씹으며 

 귀향하듯 

 옛 애인의 집을 찾아가네 

 

 계단은 열한 계단 

 그 아래 쪼그려 앉은 할머니 

여전히 졸면서 

구천을 건너는 생불 生佛 이네 

 

라일락 푸른 잎 

그 사랑의 쓴 맛을 되새기며 

 

대문은 파란 대문 

엽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가네 

 

세상의 모든 집

옛 애인의 집 

 

내 이름을 지우다 

 

평사리 무딤이들의 보랏빛 

꽃무리 속에 

저 홀로 하얗게 피어난 자운영과 

실상사 삼층석탑 옆 

두 그루 희디힌 배롱나무 

 

자운영이 백운영으로 

백일홍이 백일백으로 

제 이름을 버리고 사는 이들이여 

 

녹슨 칼날을 갈며 

돌연변이의 팽팽한 시위를 당기며 

흰 소를 타고 

낯선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 

야, 이원규! 

반갑게 부르기도 하지만 

안면 몰수하고 

가던 길 그대로 가고 싶다 

아득하고 아득하니 

날 부르는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마저 지워지고 

 

무명비 하나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뱀발.  지난 봄날. 겨울. 실루엣이 선명히 남아있는 백일홍을 본다. 한여름 화사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갈색의 꽃대. 화려한 꽃이 아니라, 화려한 이름이 아니라 서로 잔잔히 녹아 경계가 없는, 서로가 나의 경계인 그 목소리가 좋다. 떨어진 동백꽃을 줍는 그의 마음이 좋다. 시집 몇권을 보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9-03-09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피는 그대에게

꽃피는 그대 먼 길 오시는데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보살행의 황어떼가 오르고
매화 꽃망울 막 벙그시는데

백태 낀 눈으로 반기려니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맞아야 할 분들이
어디 꽃피는 그대 뿐이랴

다래 돈나물 돋으시는데
소화불량의 아랫배 움켜쥐고
이것 참, 이것 참.

-이원규, [옛 애인의 집] 73쪽, 꽃피는 그대에게-

여울 2009-03-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이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한꽃 품어 꽃핀다/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딱 한번 꽃리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한소끔의 밥꽃을/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단지 짧거나 어둡다/담대한 꽃냄새/방금 꽃핀 저꽃 아직 뜨겁다/피는 꽃이다!/이제 피었으니/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 정과리 [와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