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푸른 잎을 씹으며
귀향하듯
옛 애인의 집을 찾아가네
계단은 열한 계단
그 아래 쪼그려 앉은 할머니
여전히 졸면서
구천을 건너는 생불 生佛 이네
라일락 푸른 잎
그 사랑의 쓴 맛을 되새기며
대문은 파란 대문
엽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가네
세상의 모든 집
옛 애인의 집
내 이름을 지우다
평사리 무딤이들의 보랏빛
꽃무리 속에
저 홀로 하얗게 피어난 자운영과
실상사 삼층석탑 옆
두 그루 희디힌 배롱나무
자운영이 백운영으로
백일홍이 백일백으로
제 이름을 버리고 사는 이들이여
녹슨 칼날을 갈며
돌연변이의 팽팽한 시위를 당기며
흰 소를 타고
낯선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
야, 이원규!
반갑게 부르기도 하지만
안면 몰수하고
가던 길 그대로 가고 싶다
아득하고 아득하니
날 부르는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마저 지워지고
무명비 하나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뱀발. 지난 봄날. 겨울. 실루엣이 선명히 남아있는 백일홍을 본다. 한여름 화사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갈색의 꽃대. 화려한 꽃이 아니라, 화려한 이름이 아니라 서로 잔잔히 녹아 경계가 없는, 서로가 나의 경계인 그 목소리가 좋다. 떨어진 동백꽃을 줍는 그의 마음이 좋다. 시집 몇권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