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맥주 캔을 따서 한모금 들이키는데, 문자가 온다. 살아있으면 응답하라....그래서 함께 자꾸 늦어지는 지역 방송의 시스템을 운운하며 시시콜콜한 선거이야기를 한다.  

그러다보니  십여년쯤 일이다. 엠비로인해 나서지 않은 사람이 나서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말 꺼리가 되는 현실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민주당이 눈앞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외려 진보에 눈길이 간다.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몸으로 열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별반없다. 온몸으로 성장을 말하는 자본주의신자임이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진보가 정녕 진보라면 이 환상의 잔치, 이 땅의 어리석은 알을 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그래도 한차례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죽은 노무현을 빌미로 그들은 성장을 이야기할 것이다. 어떻게 되는 성장인지 모르고 그저 무의식에 감염된 신자들앞에 발전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 치적과 입발린 소리를 어쩔 수 없으므로 또 되뇌일 것이다. 그래 이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디제이와 노무현. 발을 딛고 선 상황은 변함없다.  시민사회단체는 별의별 프로포즈를 다했다. 정치한다고, 제도권의 등을 업고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명멸한 수많은 별과 진로를 보았다. 그런데도 반엠비의 응집력만 있다. 아무생각없는 반대의 응집력만 간신히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이 단단한 알을 뒤덮고 있는 자본의 공기와 그 호흡의 중독은 다른 공기로 살 수 없다 한다. 자본주의신자는 자본의 증식이 없는 순간, 목숨이 다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알을 깰 수 없다. 진보의 바늘들. 진보의 생각들이 아니라 진보의 몸들. 진보의 다른 삶들이 어쩌면 조금씩 조금씩 그 단단한 껍질을 조금씩 조금씩 금을 가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동선이 조금씩 다른 공기와 다른 호흡의 맛을 보여줄지 모른다.

구호를 믿을 수 없다. 반대로 나온 구호나, 삶을 담지 않은 구호를 보아왔다. 좋아할 수 있으나 좋아할 것이 없다. 행여 반성한다면...죽은 이를 들여놓지 말고 정말 반성한다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것이 있는지? 별반 바랄 것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늦은 시간, 손님이 온다. 오전 일정도 틀어지는 바람에 시간도 어정쩡해 먼저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말미 몇가지 챙길 일들이 생기면서 또 한차례 늦어진다. 십여분정도 시간에 대지 못할 것 같았는데,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하니 30분 이상 늦었고, 회의는 벌써 들어가 있다. 


#1.

참*와 아***는 이상일까? 어제밤 헤어지며 받은 말이 남아있다. 생*이 현실이라면 말이다.

 

어제 지하철을 타면 읽은 꼭지가 튄다. 요지는 이렇다.

이론은 근육이다. 중력에 풀죽으며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근육을 써서 중력을 벗어나 반동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판단이란 것은 이미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것이며 행동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이란 현실의 벽에서 그것을 넘기위해 새롭게 탐구하며 시도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현실이란 바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상이라면, 현실에 연착륙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재정-잡지-회원-먼회원-웹진-돈-작은모임-대중강좌-회비-연구팀. 그래 우리 수준을 냉정히 파악하자. 우리가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냉정히 따지다보면 정말 뜻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손이 펼쳐지는 것이다. 알음알음의 수준을 어떻게 벗어나는 것인지? 벗어난 적이 있는데 눈치를 차릴 수준이 되지 않는 것인지? 시도와 합의된 실험을 해보기나 한 것인지? 우리가 부담지우는 것이 열정일 뿐이어서, 그 다음은 간수도 관리도 하지 않는 것인지? 행여 돈냄새나는 영업행위로 비춰져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인지?

운영에 대한 걱정을 내리는 것이 부담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현실의 바닥의 깊이를 같이 느끼는 것이 오히려 운영을 모호하게 대리하는 것이 아니다. 운영에 대해 아프지만 공감하는 편이 스스로 서는 것에 도움되지 않을까? 의탁이나 대리행위는 이제 줄여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나의 문제의 일부분으로 가져가는 것이 낫다라고 판단한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 늘 다른 생각이나 관점을 현실에 섞거나 만드는 것인데, 우린 작은 일상과 문제에는 너무 인문의 결이 살아숨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삶의 결은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상의 작은 것들에 새눈을 붙여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는 법에도 인색하고, 현실을 달리 여겨볼 엄두도 내지 않는 것이 지금의 모습은 아닌가?

#2

궁해서 증명을 찾는 것일까?  생각을 위로받기 위해 시차를 두고 책들이 나온다. 그래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다고 증명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풀어서 나올 쯤이면 비슷한 순간과 환경에 솟아나온 것이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보면 조금 새로운 생각들은 차라리 현실에서 밀고 나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책들로 합리화를 받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고, 문제는 현실을 얼마나 밀고 나가는 것인가이다. 그것이 열매로 맺든, 상처로 결과짓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열매이든 상처이든 그 과정을 빌미삼아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유명(한이,한것)에 목을 단 이들은 여전히 패션을 찾을 것이고, 그 글귀를 목에 걸면서 합리화를 할 것이다. 그렇게 명분이 생겨야만 움직일 수 있는 이나, 습관은 고질병이다. 말로만 인문을 외치는 환자이다. 진보를 자칭하는 자들은 여전히 유명한 이의 렌즈를 통해서만 자기 말을 한다. 결국은 자기 말이나 생각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리는데, 그들의 고민 속에는 일상이 없다. 일상을 삭여내는 이가 드물다(없다라고 쓰고 이렇게 양보하고 있다.). (유명)렌즈의 자막과 슬로건만 있을 뿐이다.

일상에 인문의 결을 들이밀지 않는다. 일상의 결에 인문을 스미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인문도 없으며 새로움도 없다. 현실이란 일상에서만 새로운 것이 뿌리내릴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아니한 것은  뿌리내릴 수 없으므로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낼 수 없다.

# 3

삶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혁명은 없다. 혁명은 삶위에만 착근할 수 있다. 만들어진 삶이 없다면 어떤 혁명도 실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삶이 지난 뒤에야 이론이 생긴다. 이론이 생기면서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다.(이론은 근육이다라는 논리를 빌린다면)

자꾸 작고 세세한 것에 집착하는 이유다. 세밀하고 작은 것에 간을 배이게 할 수 없다면 하물며 인문을 적용하고 연습해볼 현실은 어디에 있을까? 저기 렌즈를 빌려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쓸 뿐, 기껏 아이에게 실험을 할 뿐 그 이상은 없다.

# 4

+ 지금에 대한 관심과 연결 강도, 위원회의 자발성, 자발적 알림,관심도
- 결정난 사항에 대한 진척 부족, 사*국의 고민 외화부족, 영업아이디어-실행력부족, 소수집중,공개정도 약함
* 소위*회의 현실에 대한 아이디어와 사회적 실험-역할분담, 고민의 자생성
/ 동아리의 울타리, 타단체의 경험 접목부족,기획능력(만)

 

뱀발.  

1. 일터 일로 중간중간 어제 느낌을 단다. 달다보니 기분에 따라 달리 말들이 앞을 선다. 뱉은 느낌은 바늘이 되어 고스란히 돌아온다. 마음에 박히다. 

2. 김수영의 말이 남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딴지 펌] 요즘 '이 남자'가 제일 멋있다!


broken heart

>> 접힌 부분 펼치기 >>

마음이 무겁다. 늦은 점심에 졸음이 밀려와 의자에 눈을 붙인다. 그래도 몸은 편치 않고 갑갑한 마음이 더해진다. 사무실을 조금 일찍나와 뭔가 마음의 가닥을 풀 꺼리를 찾지 않으면 안될 듯 싶다. 일터 일도 그렇고 깔끔하게 해결될 기미가 적은 것들이 마음에 잔뜩 채워져 있어,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싶다란 꼭지를 그림에 건다. 강렬한 색의 어감을 설핏 들어왔기도 하고, 뭔가 몸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겠지.

#1

이른 잠으로 새벽.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이 딴지일보 총수의 안*정대담의 말미 눈물을 훔치는 사진에 스크롤이 가있다. 그리고  한숨 더 잠을 청한다.

큰방에서 토론이 붙었고 대각선 맞은 편에 안*정이 있고 몇번의 논전이 오고간다. 그리고 난 당신이 자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지 질문을 했고, 도대체 하고 싶은 것이 노**의 주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있냐고 말하지만 그는 의중을 넘어 태도를 물고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인 위악으로 받아치고 자리를 일어선다. 그러다가 낡은 건물을 빠져나가려다 한번은 막다른 길을 만나고, 한번은 옥상으로 통하는 굴같은 곳을 간신히 기어올라간다. 그 통로로 가니 가야하는 산중턱의 봉우리위에 지름길로 온 셈이다. 그렇게 장면이 끊기고 어디 전주의 외곽지대에 멈춰선다. 토론하던 곳에서 벌써 멀리 벗어났고, 그곳으로 되돌아가려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을 머금고 있다. 옆에 아리따운 친구가 서있고, 그 친구는 위악의 이유에 대해 이해하겠다고 위로해준다. 따듯한 손을 잡고, 또 한차례 길을 잃고 마음은 그리로 가야하고..

. ...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새벽잠을 설친다.

#2

그의 그림은 성의없다. 판단을 정지하고 도움자료 없이 그림을 본다. 여자의 실루엣이 낙서처럼 여기저기 있고 의도하는 것에 접촉이 되지 않는다. 천천히 흔적보다 색이 강렬하게 들어오는데 제목도 그러하다. 녹색, 노랑보다 덜한 노랑, 빨강보다 더한 빨강....그 바탕에 톤을 깊이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색감에 심혈을 기울이려는 듯 파랑과 검정이 캔버스 위에 두께를 더하고 있다. 몇번을 보고나서야 의중이 올라오는 듯 상처난 마음에 그나마 마음이 머문다. 도록을 보고 몇편의 평론을 살피다보니 색에 대한 부분만 밑줄이 가고, 나머지는 글쎄 ..잭슨폴락처럼 캔버스를 만드는 과정, 몸와 음악의 캔버스 작업에 마음이 가긴 하지만....그렇게 생각과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다.

"마티스의 색은 아름답다. 그러나 모이소의 색은 자유를 가졌다. 칸딘스키의 자연은 음악이다. 그러나 모이소의 언어는 원초적이다. 피카소의 생각의 인간의 이해다. 그러나 모이소는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다. 샤갈은 생명의 찬양을 얻었다. 그러나 모이소는 대중의 삶에 기쁨을 알게 한다. 라파엘로는 예술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모이소는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지웠다."



뱀발. 꿈까지 꾸리라고 생각진 않았는데, 여러 일상들이 여지없이 겹쳐겹치고, 조각난 마음들. 마음에 얕게 붙어있는 몸의 지침처럼 이런 저런 단편들이 모여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090611-12 초급!? 활동가 아카데미_수료?식 흔적들
[반나절 답사] 대전근대역사의 파편들(보문산) 소회

movie.naver.com/movie/bi/mi/mediaView.nhn



 

답사. 지난 보문산을 우회한 반나절답사. 전쟁의 이면을 몸으로 체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렇게 될까 두려워 발 담그길 저어하는 일. 소나기내린 그날의 기억 말미 형무소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일그러진 전쟁의 기억이 옷을 적신다. 그리고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웹알림지도 일정이 다가오는 것이 편치 않았다.  

어제의 기억이 온전히 몸으로 남아 있는 지금, 나는 두달반의 몸을 기억을 갖고 있는 동기와 그제 이십년이 지난 뒤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삶의 흔들림을 고스란히 듣고 주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많은 부분 나로 인해서였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크게 그가 느끼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 여운이 채 밀려가기 전, 지난 밤의 혼미함과 몸의 노근함이 도움이 될까? 답사. 노근리로 향하는 길, 우편물에 담긴 황해문화의 특집기획은 아니나 다를까 전쟁 60년 논문들이다. 이동중에 곧 활동을 멈추게 될 진화위의 조사자료가 반영된 전남 영암 구림마을의 좌우익 망라한 흔적이 돋아 올라온다. 지난 한해 잠깐 스친 동네가 그렇게 죽음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멈칫한다.

 

 

나는 어느 새 터널안에 갇혀있고, 철길과 기총소사하는 아비귀환의 와중에 있다. 나무를 기대어서 그 흔적을 촛점에 남겨보려하지만, 떨리고 마음을 후벼파는 아픔은 꿈속의 가위눌림처럼 어찌할 수 없다. 수수꽃다리.....지키고 선 나무들은 기억하겠지. 저기를 쳐다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 형무소에도 골령골에도 뜨거운 여름이 오듯, 나무의 잎이 진해지듯, 꽃들의 꽃눈으로 보아왔겠지. 지나친 슬픔이 밀려와, 이렇게 슬픔에 잠겨....연신 꿈자리까지 내준다.  

 

뱀발.  

1. 노근리-골령골-자유회관(구 대전교도소), 뒤풀이 자리에서 1년쯤 여물어가는 기억을 한 활*가가 불러낸다. 그래서 이렇게 기억을 다시 더듬어본다. 삶의 농도란 무엇일까? 어슷하게 교차하는 듯하지만, 그렇게 교차하면서 낸 생각의 상처들이 삶으로 아물고, 그 흔적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삶을 새롭게 돋아나게 할 수 있을까? 새롭게 예전과 다른 결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을까? 스물여섯의 나이도, 서른여섯의 나이도, 마흔여섯의 나이도 그럴 수 있겠지.  

2. 그리고 막걸리와 이야기가 익을 무렵, 시간이 배여있지 않는 선거논쟁이 붙다.  

3. 이십년 만에 만난 동기들..녀석들과 포옹. 세월의 간극은 밀려가고 그렇게 첫마음으로 서로 안다. 참 따듯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 팔장을 끼고 걸어보자. 팔장을 끼고, 어깨동무를 하고 걷자. 말보다 따스한 가슴의 말을 듣자. - 팔장을 끼고 앞을 보고 걸으니 듬직하고 기분좋다. 걷다보니 지나친 슬픔도 다독여주고 조금 자리를 비켜서는 듯하다. 뒤풀이의 따듯함이 밀려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더 지독한 꿈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피곤에 절은 몸은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이렇게 가까이에 벗들이 있고, 생겨나고, 또 다른 고민의 울타리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목도하게 되니 그래도 조금씩 슬픔을 감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온다. 

4. 소나기 내리는 반나절 답사의 여운처럼 어제도 돌이켜보니 그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한국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 박경태(성공회대 교수)

 

(1) 소수자란? 신체적, 문화적 특징때문에 차별을 받는 집단이나 이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소수자)
- 신체적: 여성, 장애인
- 문화적: 종교(무슬림, 재일조선인-여학생
- 흑인 중에서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 적극적 조치를 주장하는 사람은 흑인이 아니다. 그곳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다수자에 가 있는 것이다.
- 여성에게 불리한 입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은 소수자가 아니다.

(2) 만약에 소수자 성들이 충돌한다면 어떠할까? 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이 만났을 경우, 이렇게 교차될 경우에는 (어떤 면에서는 다수자이며, 어떤 면에서 소수자이다) 그 사회의 문화적 주도성을 고려해야 한다. (2.1) 남자 직장상사와 여성 직원이 남성직장상사가 동성애자임을 알았을 때 처럼

(3) 대표지위: 소수자이때문에, 소수자는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수자는 개인으로 존재한다. 여류시인, 여성....-직업이 지위자를 규정하지만 소수자에겐 소수자 성이 더 강한 규정을 갖게 된다.

(4) 옛날보다 차별이 더 줄어들었는가? 그렇기도 하구 아니기도 하다. 생명권까지 처분한 시절도 있어서는 줄어들었지만 과거와는 다른 형식이 존재한다. 근대적 가치는 근대의 기준으로 차별하고 이는 자본주의적 기반이자 상품성을 표면에 나타낸다. 장애인은 노동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자본주의적 외모를 갖추지 않는 것도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도 그 기준이다. 또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퍼져있다. 과거 신분의 차별과 달리 이런 이데올로기로 인해 당사자 개인이 잘못해서 생긴 문제로 치부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이 많을수록 희생자를 비난하는 강도가 커진다. 억울하면 출세해라라는 슬로건으로 정당화된다. 과거에는 없었는데 근대가 되면서 국가, 인종간의 차별이 생겨나게 된다. 중세의 유럽에선 국경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합스부르크왕조의 연합개념은 있었어도 국가개념은 다르다. 국민간의 차별이란 개념이 없었다. 국가가 생기며 비자라는 개념, 국민간의 차별이 생긴다.

(5) 인종차별 역시 근대적인 개념, 인종차별이 언제 생겼을까? 대항해의 시대, 발견의 시대, 신대륙의 발견,  고대의 경우는 피정복지에서 생긴 노예로 이와는 다르다. 흑인에 대해서 양가적인 설명이 나타난다. 이와 달리 항해의 시대에 노예를 착취하면서 생겨난 근대적인 현상이다. 국내에서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미군정이후에서 생겨난다고 봐야할 것이다.

(6) 차이는 차별의 원인인가? 차이는 차별의 원인이 아니다. 키의 차이, 혈액형의 차이(한국과 일본) 어떤 차이와 차별이 원인이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18-9세기 유럽 자연과학자의 신체특징 연구를 하게 된다.(폴보브카 뇌용량크기 -->스티븐 제이굴드 반박자료, [인간에 대한 오해], 백인은 남자 두개골을 흑인은 남녀 두개골을 대상으로 함) 차별은 기준을 정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만들어지게 된다.

(7)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문제 - 잘 되는 민주주의라면 소수자 문제는 잘 되지 않겠느냐? 어던 해법이 있을까? 그러나 쉽지 않은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회주의가 혁명으로 해결, 목표완수가 한번으로 해결하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 없어졌다. 그렇게 한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1인 1표란 대의민주주의는 소수자들이 소수이므로 해결되지 않는다. 선량한 다수자들이 해결해주길 바랄 수 있다. 또한 대개는 경제적으로 빈곤하므로 민주주의의 적극적인 동원기제인 자금이 없으므로 또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절차적인 민주주의로 조금은 나아졌을 수도 있지만, 민주화가 되면 함께 억압받던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므로서 그 격차가 더욱 커지게 된다. 상대적으로는 더욱 열악해지는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민주주의는 도달 지점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과정이다. 완수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8) 그러면 소수자의 목소리가 실리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 소수자의 연대, 이주노동자들이 2003년 농성을 할 때 동성애 인권 연대가 지원을 한다.


#2.

어떻게 다문화를 읽어낼 것인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문화 이론이 이 가운데 한가지이므로 다른 것은 견주어 볼 수 있다.

(1) 기능주의 시각
* 동화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수자처럼 살 수 있다. a+b+c = A, 미국의 경우 백인처럼 살 수 있다. 는 논리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여러 미국영화 가운데 이태리계의 진입(앵글로색슨계 중심에서 이민자들이 많아지자), 아일랜드계는 유럽에서 조크의 대상이었는데, 못알아듣는 사람의 대상이었기에 백인취급을 하지 못하다가 이민자들이 많아지자 백인의 경계를 넓혀주게 된다. 가장 최근에서야 유대인들이 돈, 경제력이 커지게되므로 확장이 된다. 하지만 더 오래 있던 흑인들이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그렇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볼 때 동화론은 맞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 융화론, 융합론 a+b+c=D , 도가니, 용광로, melting pot 이론 - 과연 각각이 동등하게 녹아들어 갔는가?
*** 다원론  a+b+c = A, B,C 샐러드 bowl 이론

전체적으로 볼 때 권력의 편중문제가 설명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2) 갈등주의 시각

* 내부식민지론  a+b+c = a/(b,c)  a가 착취를 하기 위해서 b,c 는 착취의 수단이다. a가 잘사는 이유는 b,c때문이다. (흑인이 왜 가난하지?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생각.-아버지가 있는 상태에서 자라는 아이는 1/3이 되지 않는다. 마을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마약딜러, 감옥에 가는 비율이 28%, 대학에 가는 비율이 11%인 것이 현실이다. )

** 계급론 a+b+c = X:Y   실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부가 인종을 기준으로 수직으로 잘라져 있다.  고도의 농장주나 노동운동의 역사가 그러한 법적, 정치적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 3

소수자의 인권을 어떻게하면 좋을까?

(1) 계급, 계층문제와 함께 고민하여야 한다. 작년 1300억원의 예산을 쓰고, 예산이 유일하게 늘어났는데 다문화 현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경제적인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김치만들기를 한다는 것은 행사이전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 같다.

(2) 통합의 관점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 여러 프로그램을 별도의 건물과 별도로 분리되어 운영하는 것은 문제이다. 이는 따로 있는 문제로 여기게 만든다.


질의응답

- 소수자의 개념이 제도나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나 문화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소수자란 것을 의식하지 않게 되면, 소수자의 위치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닌가? 정의 자체만으로 소수자에 상담해주거나 배포해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정의와 자각하게 되는 연결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견) 조건과 의식: 앞의 부분은 기득권, 비기득권으로 구분되어 있고

- 성적 소수자란 말을 많이 쓰고 있고, 인식이 강한데, 실제 풀어지는 부분은 미국의 게이문화를 들어 세련되어 문화적 예술적 취향이 고급스럽다라면 이 정의에서 소수자란 개념에서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개념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은 아닌가?

(의견) 사회적 약자(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소수자의 차이는 영속성에 있는 것 같다. 질병으로 완치되거나 장애인의 차이, 구별되는 지점이 있은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동성애자의 경우 커밍아웃할 경우 대부분 경제적 조건이 어렵고 복합적이다.

- 어떤 사회가 되면 소수자 문제가 해결되는지? 끊임없이 소수자가 생겨날 것이다. 언제나 진행형이므로 어떻게 하면 빨리? 시간이 지나면 소수자 문제가 해결되는가? 프랑스의 폭동에서 볼 수 있듯이, 관용의 허용치가 높은 나라에서도 생기는 것, 런던 폭탄테러, 호주에서 아랍계 희생에서 대해서 폭동이 일어나듯이...

마무리:  

소수자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다수자가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권리의 수준이 우리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   

 

 

 

 



[인권과 소수자]

>> 접힌 부분 펼치기 >>

뱀발.   

1. 인권 세미나 초청 강좌다. 연두부의 학연을? 빌미로 연결된 모임의 초청모임. 시간이 닿아 이야기를 서툴게 옮겨본다.  민주주의도, 근대차별의 핵심이라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목차도 눈길이 간다. 좀더 깊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깊지만 질문들로 여운을 더해 본다. 여*회와 양인나 모임의 감수성이 어떨는지 궁금하지만, 현실과 일상을 얼마나 차이없이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는가도 질문의 하나다. 그저 머리로 가져간다면 별반 다를 일이 있을까? 또 하나의 멋진 강사가 다녀갔을 뿐... ... 저자의 책을 몇권 검색하다가 목차, 남겨놓는다. 최근 출간 소식도 있다한다.  

2. 이야기들을 모임으로 깊숙히 우려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정말 손발로 가져간다면 서늘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저 그런일들은 현재 국면과 관계를 벗어나는 일이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