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주검, 그리고 연무 같은 환생의 가능성

 

과학기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드리운 그 과학기술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과학기술을 살릴 수 있다.’

 

1.

첨단은 없었다. 세월호 침몰과 구조작업, 그 이후 원인을 밝혀내는 작업에 있어 첨단과학기술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화성을 탐사하고, 심해바다를 헤집고 다니고, 사고를 예측하는 첨단과학기술의 무능을 똑똑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철저히 사람과 시스템의 유용성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거꾸로 과학기술자들의 역할이 철저히 법의 시녀로 면죄부를 발급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점만 도드라진다. 검사기관도 학계도 크루즈산업 육성을 위해 기술적인 하자나 문제가 없다고 증명해내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 최고의 조선대국과 선박기술을 갖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은 후진국형 참사다. 선박을 만들고 파는 기술은 세계 최강일지 모르지만, 재난과 재해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과학기술은 최하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부끄럽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해야 한다. 인터넷 최강국임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렇게 돈을 버는 기술이 최고이지 그 기술로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일과 연결된 기술과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도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얼마나 행복과 무관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며 죽음의 극단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하는 일과 얼마나 상관없는지 영화처럼 보여준다. 현실이다. 어쩌면 돈을 버는 일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바랄 수 있다는 비참함이 일상에 스며들지 오래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토록 원하고 열망하는 과학기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원하던 원자폭탄과 원자력발전이 걸어온 길, 그 아래는 늘 환호하는 대중이 있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화석연료를 캐고 쓰고, 석유로 지탱해온 문명의 결과가 이렇게 지구의 기후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그 편리성에 여전히 탄성을 지르는 우리가 있다.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다는 인터넷 혁명과 환호 속에는 개인정보 누출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입을 틀어막으려는 역기술이 음지를 배회한다. 위정자는 이런 대중의 분위기에 영합해서 한 번도 과학기술의 이면을 제대로 살펴보게 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이 배설하는 오염의 악취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다시 달에 태극기를 꽂으면 절반이상이 환호하고 애국의 욕망을 투여하기에 바쁘다. 그 욕망으로 인해 지근거리에 있는 나의 삶과 지역의 삶, 나의 안전과, 지역의 안전, 우리의 안전에 과학기술이 다가서기가 낯설다.

 

2.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배설물을 또 과학기술이 치워야 한다고 말한다. 치울 수 있다고 한다. 배설량은 처리량보다 많아 치울 오물은 끝이 없다. 이렇게 능력도 없이 해결사를 자처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아야 한다. 문학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철학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예술이 우리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철부지다. 과학기술의 숱한 분야만 해도 소통하고 나누는데 오히려 인색하다. 유전자로 환원하여 이야기하고, 뇌과학이 또 다른 유토피아를 만들 것이라고 하고, 로봇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한다. 디지털이 적자라고 한다. 거대과학기술이 지금 이렇게 숱한 위험을 낳은 것임에도 자신의 분야가 다른 분야를 휘하에 둘 것처럼 말한다. 또 거대과학기술로 과학기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처럼 과학기술만으로 어떤 해결도 할 수 없다. 예술과 철학과 문학이 갖는 가능성만큼만 해결의 조짐을 더할 수 있다.

첨단과학기술과 재난재해안전을 위한 기술,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을 위한 기술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재난과 재해, 안전 분야에 국가가 투입하는 연구개발 예산은 1%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도 2010년이 되어서야 1%이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기술만을 위한 기술들 사이사이가 끊어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능에 가까운 거대과학기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의 흔적조차 없었음을 각성해야 한다. 세상이 일사분란하게 돈이 되는 과학기술로 매몰되어 묶어낸 그 과학기술의 결과물이 얼마나 초라할 수밖에 없는지 다시 한 번 똑똑히 봐야한다.

‘100미터와 같은 단거리 경주를 하기 위해서는 백색의 속근을 키울 수밖에 없고, 무산소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힘을 쓰도록 몸을 만들고 단련해야한다. 어쩌면 우리 과학기술이란 경제성장에 종속되어 폭발적이고 가시적인 산업기술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만미터, 하프마라톤 경보, 마라톤의 중장거리를 뛰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 체력과 적색의 지근 비율도 낮기만 한 것은 아닌가. 사회, 정치, 문화, 지역과 사람 속에서 문제를 찾고 접목시킬 수는 없었는가.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려가기 위한 길고 긴 중장거리 마라톤을 위해서는 다른 근육의 단련이 필요하다. 크고 강한 근육만이 아니라 작고 끊임없이 유산소호흡을 하는 잔 근육의 근지구력으로 우리 몸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가. 산업발전을 위해 이렇게 크고 강한 근육만 자랑했던 자만을 재고해야 한다. 작고, 강한 기술들이 사회와 지역들 사이의 그 진짜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근력과 근지구력을 키워야 한다. 인터넷의 혁명이 재난과 재해에 문제의 소지를 줄이고 없애는데 혈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요소에 손 내밀어 접붙여 또 다른 중간기술을 만들어내야 한다. 심해저 자원을 캐내고 확인하는 과학기술의 움직임이 만일의 재해에도 관여할 수 있도록 격벽을 트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3.

과학기술은 죽었다. 주검이 되어 도처에 떠다니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기후양극화의 재앙, KTX, 지진재해, SNS의 역습. 사회와 유리된 과학기술은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 주검이 되어있는 것처럼…….

세월호 악몽으로 대변되는 끔직한 재앙은 세상 사람들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과학기술이란 것은 자본에 결박되어 움직여본 적이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있던 위험을 살펴보는 능력을 잃었다. 위험은 커지고 커져 도처에서 생명을 노린다. 위험사회를 너머 재난자본주의라는 지칭까지 과하지 않다. 그런데 자본가의 탐욕만을 탓할 수 없다. 위험은 너무도 커져 똑같이 재앙의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거대도시에 이 나라 절반이상이, 도시에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산다.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유사한 위험의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는 대형 사고들은 '설마''희한''만일''우연' 사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가난과 굶주림을 모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학기술이 안전과 노약자를 모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학기술이 또 다른 괄호를 모신다면 어떻게 될까? 주검이 된 과학기술은 이 빈 괄호에 또 다른 것을 채우려해야 한다.

과학기술을 끌고 온 합리성은 과학기술 밖으로 시선과 행보를 넓혀야 한다. 그 위험을 확률적으로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쓰여야 한다. ‘만일설마의 악몽은 현실에서 눈으로 보일 수 있도록 줄여나가야 한다. 산업발전에만 경도된 기술을 이런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도록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지역과 상황에 맞도록 예행연습을 통해 만일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 행정체계와 제도가 움직여야 한다. 과학기술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녹아들어 있어야만 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이 사회적 합리성을 잃어버려 표류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과학기술이 제자리를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의 시작은 합리성으로 똘똘 뭉친 그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회적 합리성에 기댈 때만 서로 제대로 설 수 있다. 사회를 위해, 이 땅의 가난과 굶주림, 지구의 생태를 위해서라도 과학자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지역으로, 삶의 공간으로 함께 걸어 나와야 한다. 거대한 기술만이 아니라 촘촘한 기술, 작은 기술, 강한 기술들 간의 조화로 이어져야 한다. 단거리 선수가 아니라 장거리 선수에 맞도록 과학기술은 자신을 버리면서 공진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그 과학기술들이 지역과 사람들의 손길, 마음길, 문화와 예술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죽었던 과학기술이 다시 씨앗처럼 사회 속에서 새로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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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정표가 가르키지 않는 곳들 ... ...
    from 木筆 2014-12-09 13:44 
    1. 노동은 없다 - 경제, 노동 현실 수치를 생동감있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현실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통계 데이터를 분석하는 감각을 맡긴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자본의 흐름과 씀씀이를 헤아리거나 건드리거나 또 다른 경로를 만들 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세해야 한다. 한국의 현실이 이론상, 추상으로 드러나는 이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민해야 한다. 논문에서 구하기도 하며, 눈여겨볼 수 있는 현실의 지표를 찾아두기도 하며
 
 
 

 

1. 지난 주말 수소문하던 중 보고프던 지인들이 우연치 않게 수배가 다 되었다. 온유네 닭매운탕에서  모임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애가 끓고, 고민이 넘쳐나는 듯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도 문화단체와 막 만들고 있는 장애인단체 진행중인 것들은 아련하고 생생하다.  질문은 시차같은 것이라고 거래되어야 하고 남겨야 한다고 전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 되묻는 이가 반반이다. 정확한 물음에 앞서 당위를 건넨다. 시민교육이라는 것의 한계는 우리 교육시스템과 인문학조차 입만 적실뿐 온몸으로 뼛속 깊이 쟁점이 되는 것을 나눠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아는 듯하지만 실제 입으로 나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2. 낯설게 듣지 못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보다 하고픈 말이 더 많았던 듯 싶다.


3. 저장하드 이야기를 하다가 크고 불편할 수록 오래남는다고 서로 이야기한다. 간편하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크고 불편하게 해야 눈에 띄이고 눈에 띄여서 존재가 드러나고 실재 잊히지 않는다고 나누다.


4. 이제 사적인 생활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얘기한다. 얕은 비가 내렸다. '사생활'에 대해 어디까지 존중되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나누어본 적이 없다. 묻지마 휴가와 모른 척하기가 얼마나 삶에 소중한 경험이 되는지 사람마다 다르다. 어디까지 모른 척하고, 알면 되지 않는 것인지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근력이 생길텐데. 우리는 금기와 금기된 것을 나누는 토론은 부재하다. 묻지도 않는다. 그 사고의 다양한 결과, 현실을 살피려하지 않는다.


5. 왜 19금만 있는 것일까? 29금, 39금, 49금은 있어서는 안되는가? 성적인 것만 금지선이 있고 삶속의 다른 금지선을 밟으면 안되는 것인가? 29세가 넘어서 삶의 현실로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비교해보거나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39세가 넘어서 부모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과 붙어서 대신 아프지 못하는 아픔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49세가 넘어 세상이 짖는 소리만 컹컹 짖는 것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빌려쓰는 것이 난감한 일인지 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금지선을 만든 것이 얼마나 세상을 빌려쓰는데 허망한 것인지? 체념과 고통, 죽음의 금지선이 왜 필요한 것인지 되새길 수는 없는 것일까?  69금일지 59금일지....그 금지선 가운데 하나쯤은 세상을 바꾸는, 금지선을 넘는 법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6. "세상은 만만, 나는 쓸만" 과  "세상은 천만,  나는 *만"  그 사이에 살아있다는 것이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상관없이 잘 살아야 할 이유도 있고, 현실을 잘 느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느낄 수 없게 알 수 없게, 알아서도 안되는 것인 것처럼 줄 긋고, 벽 세우고, 눈가리고... 알고 깨달아야 할 이유가 있다. 누구나.

 

 

141128 온*네, 대*부** ㅇㅇㅈ, ㄱㄷㅅ, ㅅㅈㅂ, ㅇㅇ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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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바래기 마련이다. '너'를 다시 만나면 물어야 한다. '너'가 얼마나 통증을 느끼고 있는지 어루만져야 한다. 그대로 멈추어 있다면 '너'는 시간의 흐름만큼 보수주의자가 되어있을 것이므로. '나'는 확인한다. '너'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책들을 살필 것이며, '너'의 마음을 뺏은 일들을 되물을 것이며, '너'의 축이 얼마만큼 기울었는지 느끼려할 것이다. '너'는 빛든다. 달빛처럼 빛물든다. 새로운 별빛처럼 스며들 것이다. '나'는 시간의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보여주려 할 것이다. '얼마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손톱마디가 진흙투성이인지 보여줄 것이다. 얼마나 이를 악물고 '나'의 축을 끌었는지 묻길 기다릴 것이다. 햇살과 시간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에 넋놓는 일은 세월과 같다. 그렇게 '과거 뫔'을 봐야하는 일이 곤혹스럽다.  '너'의 비늘을 보고싶다. '나'의 비늘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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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너'의 고민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고민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대부분 시간이 지나도 '고민'은 자라지 않는다.  그때 한 이야기나, 그때 사로잡힌 고민에서 맴돌아 벗어나지 못한다. '너'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너'로 향하고 있지 않으니 늘 잘나간 '한때'에 머물러있다. '나'를 푸념하고 싶기만 하다.  고민도 일상도 삶마저 저당잡혀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줄 수도 나눌 수 없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또 너에게 귀기울이고 몇년전에 했던 얘기를 또 기억해내야 하고, 십년도 더 우려먹던 이야기를 챙겨줘야 한다. 너에게 마음을 기울인다. 쫑긋 너로 빨려들어가고 싶다. '한때'에 사로잡힌 쇠스랑을 끊어주고 싶다. '나'의 우울도 '너'의 우울도 이해하지만 '과거'를 사는 '너'가 더 자라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때로 분노가 치민다. 앎도 지혜도 삶도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해  머리만, 몸만커져 남보다 낫다는 '너'를 끊고 싶다.

 

'너'는 오늘도 너'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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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저자, 강연자, 연구자 그리고 대중 사이

 

책을 내지만 사람들은 책을 보지 않는다.  저자는 강연을 하되,  대중은 책의 깊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많되 소통하거나 연구실적을 나눌 길이 없다. 학회는 있되 학회에서 듣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들만 있다. 학회지는 많지만 학회지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관련분야 밖의 독자들은 없다. 나눌꺼리는 많지만 사이 사이 층은 얇고 모두 떨어져 있어 연결되지 않는다. 말하게 하는 법, 알고 있는 것 밖의 것을 연결하는 법, 책 속의 것을 질문하는 법, 아는 이를 끌어내는 법, 얇고 얇은 벽 사이를 관통하는 일들. 그런 시도나 실험, 기획. 진짜 삶문제를 잘 추스려내는 일. 맥락에 있는 분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일. 모여 같이 기대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을 불어넣는 일. 한두번의 시공간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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