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 철학적 개념

 

철학적 개념 또한 그것이 무엇을 배제했는가 또는 무엇을 말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징후로서 분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사회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점은 그들이 이런 작업을 사전에 충분히 행하지도 않고는 좀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 - 사회 자체나 자유, 관료제, 지배 같은 을 사유의 종착역 내지 해석을 위한 궁극적인 틀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들 개념은 반대로 가장 절박하게 변증법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들로서, 사회적인 것이 사회에 대한 사유에 부과하고 있는 궁극적인 족쇄를 폭로하는 것은 분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러한 형식적인 의사보편성이나 과학적인추상을 파헤칠 때 가능할 것이다. 111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관점이 갖는 특징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상호교차시켜 양자를 모순된 긴장관계 속에 함께 묶는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경험적인 것을 임의적 연구과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경우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사회적인 총체성은 직접적으로 포착될 수도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단호히 입증될 수도 없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메타비평적 성격을 띠게 마련인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이론화 작업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개념들이 이 개념들이 해석하려는 재료로부터 분리해내서 이것들을 사회학자들이 수집했다고 생각하는 자료들과 똑같이 사회적 역사적 징후들의 드러남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112-113

 

아도르노가 가끔씩은, 독자들에게 색다른 지적 실천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그런 배리 paralogism에 부딪치도록 만들 때 매개를 구축하는 작업을 포함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끝까지 밟아나감으로써 자신의 사회학적 임무를 더 잘 수행하고 있다고 느꼈음은 분명하다. 사실 딜레마나 모순이 있기 때문에 매개라는 것도 존재하며 그 때문에 심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런 예고 없이 사회적 자료로 변화할 수 있고, 반면에 사회적 사실은 끊임없이 상상력의 결과로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 115

 

사회학과 심리학의 분리는 허위면서 또한 동시에 진실이다. 허위인 까닭은 그러한 분리가 전문가들로 하여금 둘이 분리된다는 사실에 의해서조차 요구되는 총체성에 대한 인식의 포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진실인 이유는 그러한 분리가 개념을 통한 성급한 통일을 꾀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균열을 비타협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116

 

형이상학과 경험주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루어진 동전의 변증법적인 두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자신의 사회학적 사명이라고 생각한, 실증주의에 대해 벌인 화해 불가능한 전쟁인 소위 실증주의논쟁을 비판의 양쪽 가닥을 요약함으로써 끝맺는다. 118

 

문화비판의 이해득실

 

이데올로기라는 낡고 진부한 개념을 담론, 실천, 에피스테메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용어나 관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 또한 비슷한 처지에 있음을 본다. 나 자신의 입장은 항상, 사람들이 하부구조/상부구조의 관념을 독자적인 이론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어떤 한 문제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그 해결은 항상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해방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할 때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보통 집과 집의 기초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철도 분야에서 쓰여온 전문용어인 듯하다. 여기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각각 수송수단과 선로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러한 관계는 우리를 갑자기 전혀 다른 그림, 즉 이데올로기와 그의 효과가 그려져 있는 그림 속으로 밀어넣는다. 127

 

물질적인 현실을 교환가치의 세계라고 부르는 데 반해 이러한 교환가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기존의 상태가 존속되는 한 그러한 거부가 가상에 불과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문화의 허위가 상품세계의 허위를 고발하는 교정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화가 지금까지 실패해왔다는 사실이 그러한 실패를 부추기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130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결론 - ‘문화비판뿐 아니라 사유 일반에 해당되는 을 내린다면 우리는 문화(이념으로서나 현상형식으로서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화뿐 아니라 철학에도 해당된다. 130

 

 

볕뉘. 

 

1. 변증법적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 부딪치는 딜레마와 모순을 바닥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드러내보이는 것이자 그 구도가 보여주지 못한 이면의 통찰을 확인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편린같은 것이 섬찟하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이 삶과 기존 관념은 찔려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자, 다른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실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존엄에 대해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세가지 질문을 하고 따진다고 하자. 필연적으로 삶의 디테일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낸다고 객관적인 사실로 끝날 수 있을까?

 

존재의 격차를 두게되자마자 그 존엄은 흔들린다. 빠져나오더라도 다시 사회경제적맥락으로 잠입해들어가야 한다. '나'는 균질하지도 균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질문은 다시 다른 차원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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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과 외래적인 것

 

우리가 이제 요청받고 있는 것은, 달의 뒷면처럼 직접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개념의 다른 측면, 즉 개념의 바깥 면을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념이 그러한 다른 얼굴을 잠시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옛날 방식대로 개념의 내부에 머물면서 개념을 계속 사용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국면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무의식의 관념이 끼여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념은 궁극적인 철학적 해결이 될 수 없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진다...사유하는 정신에 극단적인 타자의 차원을 부과하려는 비슷비슷한 수많은 상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의 범주들은 일종의 보충적 사회심리학으로 이용했지 중심적인 개념이나 조직원리로 만들지는 않아야 한다. 91

 

동일성에 관해서는 이 개념이 사실은 교환관계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대체하는 아도르노의 용어다. 이 문제에서 아도르노가 거둔 업적은 그가 좀더 높은 철학적 인식을 위해 교환가치 이론에 함축된 의미나 반향을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 전통에 속해 있는 어떤 다른 사상가들보다도 철저히 일반화시켜 세세한 국면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총체성에 관해서는...개념이 앞에서 제기한 문제, 즉 개념을 수단으로 개념에 반대되게 사유한다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나 체계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다. 92

 

아도르노의 가장 강력한 철학적 내지 미학적 간섭행위는 우리가 체계 내부에 사로잡혀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체계의 사슬은 망각이나 억압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구가 막혀버린 체계와 비슷한 것으로서 잊혀지고 억압될수록 좀더 효율적으로 체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총체성이다. 동일성이라는 폐쇄회로를 뚫고나오기 위해 체계나 총체성을 의식적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95

 

체계는 정확하게 개념의 바깥 면, 즉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바깥 면이다. 그러나 왜 체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체계와 총체성이라는 이 쌍둥이 개념이 내적 변형이나 변증법적 다의성에 대해, 동일성 개념이 어떤 것들을 가리켰던가를 보았을 때와 같은 실험 정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철학적 체계의 이상이란 이성이나 보편성 또는 추상화에 대한 요구와 다른 것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개념 속에서 체계화를 일구어내는가의 문제는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것 속으로 삼투해들어가는 체계의 현존은 개념의 형식, 즉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이 어떠하든 이와 무관하게 항상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형식 속에서 감지될 수 있다. 95-96

 

순수하지 못한 외래적인 언급의 기능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석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위한 것으로서, 체계로부터 빠져 달아나버리면서 다시 체계를 항구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체계의 어쩔 수 없는 결과 이러한 사정은 사유가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포착한 요소에 흠뻑 젖어 이와 맞설 때, 그리고 이러한 요소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들만큼이나 주관적인 과정에도 완전히 침투하여 이 과정을 결정할 때조차 일어난다 라는 회상을 다시 사유의 내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100

 

해석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것이나 텍스트 또는 현상을 향한 체계적 관심 이를 위한 해석의 척도는 시야의 바깥에 있는 사전전제된 총체성이다. -이 발견하는 것은, 텍스트 속에서 말해진 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총체성 자체에 관계하며 이를 변경시키려 드는 것이지 개별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별자란 단순한 핑계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사례나 삽화로 만들면서 총체성을 주제화하는 것(예를들면 독점자본주의) 또한, 충격이나 새로움을 통해 또는 개별 사례라는 이름을 내세워 해석을 기도하는 충격요법에 대한 핑계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105

 

에세이에게 문화란 존재 위에 떠도는 부수현상으로서 제거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에세이가 제기하는 비판의 대상은 오히려 문화 밑에 있는 것, 즉 잘못된 사회이다. 그 때문에 에세이에서 원천은 상부구조만큼이나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에세이의 자유는 대상선택의 자유이며, 사실이나 이론의 어떤 우위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에세이의 절대적 주권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에세이에서 모든 객체는 동등하게 중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즉 모든 것은 마법에 걸려 있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문학노트) 106

 

 

볕뉘. 사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술의 하나로는 반복이기도 하다. 희석되려는 것을 거듭 재고함으로써 흐릿하지 않고 돋을 새김이 되도록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뿌옇게 되는 순간이 희망이자 다른 시야를 보여주는 계기일런지도 모른다.  짙은 안개 속에 태양은 또렷이 드러나듯이... .. 방법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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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류 속에서 본 아도르노

 

역사논쟁은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시대구분 자체를 문제삼을 때 진정으로 생산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구분의 문제는, 스스로를 지극히 역사와 무관한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온갖 종류의 역사적인 서사와 서사적인 재해석을 열망하는 시대에는 중심적인 이론적 이슈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은 어느 정도 최근의 역사학을 포함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왈가왈부에 대한 흥미로서 이러한 흥미는 역사의 무게로부터 새털처럼 가벼운 일탈을 기도하는 흐름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 될 것이다. 52

 

그의 철학적 저서나 미학적 저서가 갖는 독창성은 후기자본주의를 총체성-우리의 개념들이나 예술작품 자체의 형식적 속성에 있어서-으로 파악하는 기발함에 있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도 보편과 특수,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아도르노처럼 치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했다. 극소수의 당대 사상가들만이 복잡한 철학 개념을 다룰 수 있는 세련된 능력을 적절한 심미적 감수성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크로체나 사르트르를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반면 루카치는 여러 면에서 훨씬 큰 역사적 인물이겠지만, 이런 면에서는 희극배우에 가깝다. 63

 

아도르노의 개념 중 자연, 또는 소위 비동일적인 것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취하고 있는 태도에 관한 우리의 진부한 상식을 바로잡아줄 것이며, 또한 지배의 모티브를 강조하는 푸코와 깊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도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사의 관념 자체가 푸코의 권력개념이 지니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 모두를 제거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65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도 여타의 문화현상들처럼 사회경제적 문맥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에 유용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마르크스주의나, 지금 우리의 독특한 후기자본주의 또는 제3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를 해석할 수 있는 그의 독특한 능력이 갖는 각별한 중요성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 담긴 의미로서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중에라도 better late than never라는 여전히 항상 타탕한 모토보다 더 극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68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동일성과 반동일성

 

사유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유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자신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러한 식으로 정의해보는 것은 해볼 만하다. 76

 

초점은 한편으로, 겉보기에는 태양계처럼 중심을 싸고도는 안정된 단자같은 문장들을 텍스트 내의 좀더 큰 구문이나 시간관계에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비자율적 접사나 연결사에 맞추어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분리된 문장들을 필사적으로 좀더 큰 시간성 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요소들, 즉 앞에 나온 것들을 환기시키거나 주제를 반복하는 요소들에 집중된. 아도르노의 텍스트 독해는 그리고와 같은 그러한 연결사들의 평정한 논리보다는 문장에 굴레를 씌우는 폭력 또는 그러나’, ‘그렇지만’, 휠덜린의 말하자면과 같은, 보통 같으면 단순한 기능어에 머물 만한 단어들의 의미가 갖는 서사적 비논리에 주목한다....79

 

동일성의 기능은 지배와 억압의 계기를 통해 특징지워진다는 상황에 의해, 동일성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동일성에서 배제된 것들을 소극적으로 암시하는 대안적 내지 보충적 묘사가 생겨난다. 고전적 변증법조차-여전히 동일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의심할 여지없이 경험의 질적 다양성을 희생한다는 쓰디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헤겔은 여전히 낡은 동일성철학의 전통 위에서 플라톤 이래 무상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폐기처분당하고 헤겔 자신 게으른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 개념 없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 인용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개념성에 들어 있는 금욕적 자체나 체념 그리고 바로 이러한 체념에 대한 원한감정으로서, 이러한 태도는 아도르노의-동일성의 억압적 기능에 국한되지 않는-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언어의 육체를 죄악시하는전통철학자들의 수사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욕망과 억압의 언어가 가느다란 고음으로 새어나오듯, ‘비동일성의 특징을 통해 동일성의 본질에 접근하는 이러한 계기를 갖는다. 85

 

교환관계는 아도르노의 저서 전반에 걸친 또 다른 중심동기로서 지금까지 추적해온 동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적 중심동기와 엄격한 의미에서 동일한것이다. 동일화하는 개념에 내재된 지배의 의지를 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은 동일성의 모든 표현형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제적 체계(상품 생산 돈 노동력)의 제약성에 대한 예민한 촉수에 자리를 양보하며, 다른 한편 경제적 제약성이라는 동일성 개념의 하부구조는 왜 자신의 효과가 더 나은 사상이나 새로운 방식의 철학함이나 좀더 적절한(좀더 유토피아) 개념에 의해 가볍게 극복될 수 없는가를 인식시켜준다. 역사는 이미 사유하는 주체를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유가 벗어날 수 없는 사유의 틀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88

 

사회는 주체보다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보듯 사유의 범주들은 집합적이며 사회적이다. 동일성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운명이다. 이성이나 이성의 범주들은 문명이나 자본주의의 발생과 하나이며, 후자가 변화되지 않는 한 거의 변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그러나 오성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도 비합리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88

 

볕뉘. 최근의 아도르노 책들을 함께 구입했지만 겉넘을 것 같아 입문서 겸 흡인력있는 제임슨의 책을 보고 있다. 온전하게 보지 못하면 아도르노로 들어가는 길, 그의 시선을 편취하고 말 것 같은 느낌때문이다.  마음이 온통 책 속에 가 있지만 책만 펼쳐놓고 한자도 읽지 않는다. 메타비평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본질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겉넘으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걸려있기도 한 것 같다. 제일 중요한 모두를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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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비평을 위하여

 

통상적 사고과정을 강화함으로써, 마치 당면한 혼란의 와중에서 정신이 의지와 명령으로 자력에 의해 힘차게 스스로 분기하려는 듯 당혹의 대상에 새로운 빛의 물결이 퍼부어진다. 비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정신의 작용과정과 대면하여(그 정신이 철학적 예술적인 문제와 대상을 다루든 또는 정치적 과학적인 문제와 대상을 다루든) 변증법적 사고는 그런 과정의 적용을 완결하고 완성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의식 속에 포함하기 위해 자신의 주의를 확장하려 애쓴다. 바꾸어 말해서 변증법적 사고는 특정한 문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런 문제가 더욱 높은 차원에서 스스로 해결되도록 전화하며, 문제의 존재와 사실 자체를 새로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과정에서 가장 예민한 순간이다. 358

 

대상지향적인 보통의 정신활동으로부터 이런 변증법적 자의식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어떤 숨막히는 느낌, 즉 승강기의 낙하나 비행기의 급강하에서 느끼는 어떤 메스꺼운 전율과 같은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육체를 새로이 자각하게 만들 듯이, 변증법의 사고전환은 사유자 및 관찰자인 우리의 정신적 입장을 새로이 자각하게 만든다. 실로 그 충격은 근본적이며 변증법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런 전환의 순간이 없다면, 즉 이전의 좀더 소박한 입장에 대한 이와 같은 최초의 의식적 초월이 없다면, 어떤 진정한 변증법적 의식화도 불가능하다. 359

 

헤겔적 문학비평: 통시적 구성물

 

지식인의 습성대로 우리가 일련이 추상화를 쌓아올리며 그때마다 현실적인 것 자체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동시에 이 위태로운 지적 구조물이 사실은 새로운 자연법칙이 아닌 어떤 개인적인 정신적 취향의 규칙에 대한 기념비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의혹에 휩싸일 때, 바야흐로 변증법적 사고는 우리에게 가장 조야한 진실을, 상식 자체만큼이나 불쾌하도록 진부한 사실을 급작스럽게 복원해주는 돌연한 찢음으로, 매듭의 절단으로 나타난다. 360

 

현존하는 기념비들 사이에는 이상적 질서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진정 새로운) 예술작품이 도입되면 수정된다. 새로운 작품이 도래하기까지 현존 질서는 완전하다. 새로운 것이 첨가된 후에 질서가 지탱되려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현존 질서 전체가 변화해야 하며, 이에 따라 전체에 대한 각 예술작품의 관계·비율·가치도 재조정된다. 이것은 물론 매우 변증법적 개념이다. 365

 

모두들 쬐끄만 통찰하나 가지고 해먹으려든다.”...‘역사이론의 번창은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문화적 질병의 징후인 것 같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현재보다 앞서가려는 시도이며, 또한현재 자체까지도 완결된 역사적 순간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 배후에까지 사고해들어가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것은 자기가 처한 순간이 역사책 자체 속에서 영원의 상 아래서 궁극적으로 인준되기도 전에 그것을 명명하고 분류해보려는 시도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시간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래하며, 삶의 역사성을 더욱 강렬하게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환영하고 향유하는,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해 맑스주의가 갖는 감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적 작용이다. 373

 

살아있는 인간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거나, 이야기되고 생각되고 상상되고 인식된 바의 그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행동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그들의 실제적 생활과정에 입각해서 이런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의 발전을 입증한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형성된 유령들 역시 물질적 생활과정의 승화물일 수밖에 없는바, 그 물질적 생활과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며 물질적 전제에 구속된다.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여타 모든 이데올로기와 이에 대응하는 의식형태들은 따라서 더 이상 독립적 모습을 띠지 않는다. 그것들에는 역사도 발전도 없다. 물질적 생산과 교류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현실 존재와 함께 사고와 그 사고의 산물까지도 변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다. 삶이 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삶에 의해 결정된다.독일이데올로기에서 379

 

문학적 범주: 내용의 논리

 

사고의 수직적이며 단일한 차원과 같은 것을 구성하는 한, 문체의 핵심에 자리하는 언어적 요소와 언어 외적 요소의 잠재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보다는 생물학이나 과거의 차원이다. 문체는 작가의 대상이며 영광이자 감옥이며 고독이다...그 비밀은 작가의 육체에 파묻힌 기억이다. 문체의 암시적 힘은 말하지 않은 것이 일종의 언어적 간격으로 남아 있는 회화에서처럼 속도가 아닌 밀도의 형상이다. 문체의 비유 속에 거칠거나 부드럽게 조합되어 문체 밑에서 단단하고 깊게 지속되는 것은 언어와는 전혀 다른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388

 

사고가 불완전하게 실현된 경우에만 그러한 실례를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례란 부가적이며 분석적인 반면, 진정한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모든 개개의 대상 속에 전체 과정이 함축되어야 한다. 실례에서는 변증법적 사고와는 반대로 구체적 사유가 전혀 별개의 두가지 작업으로 분열되는데, 하나는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방법의 제시이며, 또 하나는 진정한 대상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일련의 실례일 뿐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의 본질은 바로 사고가 내용 혹은 대상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392

 

형식과 내용의 매개로서의 동어반복

 

이론뿐만아니라 사고의 문제와 범주 자체도 (그 범주가 돈 폭력 사회 문체 시점 등의 실체 중 어떤 것이든 간에) 역사적으로 계속 변화하며, 어떤 고정된 객관적 실재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는, 분명히 분석적 사고로서는 괘씸하다고 여길 만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 자체도 다음과 같은 심히 당혹스런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하고 있다. 즉 우주에 내재하는 법칙 자체가 진화상태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물리법칙 및 고정불변하는 자연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시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해법은 어떤 개별적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도, 그렇다고 개별적 사실 자체로 이해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396-397

 

서사시적 세계가 사라지고 산문세계라 부르는 중산계급 개인주의의 세계가 출현한 것을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개개인은 자신의 개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자신을 타인들의 수단으로 만들고, 그들의 제한된 목적에 봉사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을 수단으로 전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일상적 삶과 산문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개인은 그의 활동원리를 하나의 총체성인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만으로는파악할 수 없고 단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존재다. 그것들을 내면화해냈든 못했든 간에 그는 법률 정치 구조 가족관계 등 자기에 선행하며 자기가 복종해야 하는 외적 영향들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개별 주체는 타인에게 총체성이 아니며, 단지 그의 행동과 소망과 의견에 대해 타인들이 어떤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관심을 갖는가 하는 견재에서만 그는 드러난다. 사람들의 직접적 관심사는 자기네의 목적과 의도에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것뿐이다. .....개인은 언제나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의 밀봉된 통일체로 보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시도와 싸움이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 407

 

구체성의 일정한 차원에서 사물자체 혹은 우리가 후에 그 실존적 현실이라고 부를 것은 많은 다양한 약호 중 어느 것으로나 표현될 수 있으며, 상이한 많은 차원들 중 어는 것으로나 재분절화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문학적 구조로도, 한 특정 사회조직의 체험된 진실로도, 주객관계의 한 특정한 유형으로도, 대상과 언어의 특정한 거리로도, 전문화나 노동분업의 특정 양식으로도, 계급간에 함축된 관계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이 진정 구체적인 것의 장이며,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현실의 한 차원과 다른 차원을 매개하고 관념의 전문적 분석을 사회적 역사의 체험된 현실의 진실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예술작품이 주어졌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이런 궁극적 현실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변증법적 비판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408

 

애초부터 모든 이야기와 일화에 모종의 서술시점의 선택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왔다면, 시점을 역사적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시점이라는 하나의 범주는 현대 중산계급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만큼 역사적으로 다른 형식을 다루기에 부적합한 개념이며, 용어의 모순 없이는 중세설화나 구비서사시에 적용될 수 없다. 413

 

관념론 실재론 유물론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데 대해 한마디 하자. 이 문제에 대해 철학은 항상 지각생이다. 세계에 대한 사고로서 철학은 현실이 그 전개과정을 다 마친 후에야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 현실이 성숙했을 때에야 이상은 현실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상은 이 세계의 본질을 포괄하는 지적 영역의 형태에서 이 세계를 스스로 재구성한다. 철학이 그 백발을 잿빛으로 칠할 때 삶의 형식은 이미 노쇠했고, 이 잿빛으로 칠한 백발은 삶을 회춘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사고를 연구대상와 동일한 측면에서 하나의 역사적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순간, 또한 관찰자인 자신의 입장을 진행 중인 변증법적 사유과정에 포함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헤겔의 모순은 극복되고 우리는 이제 역사적 사고를 행하기 위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없게 된다. 정신적이든 그렇지 않든 본질적으로 깊이 역사적이며 상황적인 모든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맑스의 사상은 역사철학자의 자리를 역사의 바깥에 마련해두었으며, 또 그만큼 가장 역설적인 차원에서 상황 내 존재의 개념을 포착할 수 없었던 헤겔의 상상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419-420

 

서구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영미의 경험적 실재론이다. 이는 모든 변증법적 사고를 위협으로 간주하며, 또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에 법률적 윤리적 해답을 부여할 수 있게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적 평등의 언어로, 자본주의자체에 대한 의심을 자유에 대한 고려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사회의식의 저지를 돕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다양한 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이런 사고방식은 현실을 밀폐된 칸막이로 분할하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역사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을 면밀히 구분함으로써 특정 문제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도록 하며, 또한 사회생활 전체에 대한 통찰로 나아갈지도 모를 어떤 사변적 총체적 사고도 배제하기 위해 모든 진술을 불연속적이며 직접 검증 가능한 것에만 국한한다. 423

 

 

싸르트르의 본래성이나 비트겐슈타인치료요법적 실증주의니체의 계보학이나 또 프로이트의 분석적 상황 자체 등과 같은 역설적이며 자기 연루적인 개념들도, 우리가 여기서 변증법적 자의식이라 기술한 것의 비교적 전문화되고 왜곡된 변종으로 간주하고 싶다. 나아가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같은 미학적 개념이라든가 실제로 현대예술 도처에 보이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의 갱신을 지향하는 심원한 경향등도 변증법적 의식의 운동이 미학적 형식과 미학적 차원으로 나타난 것을 뿐이라고 생각된다...철학적 측면에서 이런 개념들이 진정한 변증법적 사고와 다른 점은 물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우리의 지각이 애당초 왜 마비되었던가를 설명하지 못하고 존재론적 결여도 충분히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책, 다만 윤리적 심미적 용어로 설명할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 왜곡, 즉 상황의 본질적 요소의 구조적 억압은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즉 우리가 사회경제적 진리에 점점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더욱 강력해지는 일종의 저항이나 자기기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회경제적 진리가 철저히 투명하게 자각된다면 당장 우리를 실천으로 몰고 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30

 

맑스주의 대 사회학: 작품의 재정초

 

맑스주의 비평에서 작품이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처음 행해진 상황과 그것이 누구에 대한 응답이었던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일종의 몸짓이나 언어적 일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다시 말해서 맑스주의에 있어 문학에서 사회경제학 혹은 역사로의 이행은 한 전문분야에서 다른 분야로의 이행이 아니라 전문화로부터 구체적인 것 자체로의 이행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맑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여러 가지 연구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연구의 기초가 되며, 현대에서 정치경제학이 인위적으로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로 분할되어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 인류학 등으로 단편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사회생활을 이해하는 통일된 방식인 정치경제학이 지닌 전복성을 함축적으로 언급한다. 433

 

이데올로기가 적을 비방하면서 동시에 특정 계급의 인간적 위엄과 깨끗한 양심을 선양하도록 고안된다는 점은 우리가 자주 듣지만 또 자주 잊어버리는 교훈이다. 실제로 이 두가지 작용은 하나이며, 문화적 내지 지적 대상인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런 양면구조, 즉 접근방향에 따라 체계나 기능으로 나타나는 사상들의 복합체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예라는 봉건계율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계급들을 비방하며,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는 귀족들의 태만과 과시적 낭비를 매도하고, 19세기 중산계급의 남다름이란 개념은 육체적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중산계급을 노동자와 분리한다. 436

 

맑스의 계급 개념은 우리가 지금짜지 강조한 변벌적 공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통시적 차원도 포함한다. 계급은 당대 다른 계급과의 적대적 관계 못지않게 역사적 과정상의 위치에 의해, 역사적 전개의 주어진 특정 단계에 대한 참여로 규정된다. 그러나 계급의 이런 시간적 운명은 밖으로부터, 즉 경제사회의 전과정을 개관하는 외면적 도표나 차트 위에서 측정되기보다 안으로부터, 일종의 내부온도의 상승과 하강 같은 것에서, 다시 말해서 열린 가능성과 역사적 기회의 만조를 타는 자신감이나 아니면 자신에게 빠져드는 일종의 침울 또는 침체와 허망함, 그리고 문이 닫히고 재능이 쇠퇴하고 활력이 낭비되는 듯한 느낌으로 측정된다. 상승기에서 하강기로 옮아가는 한 계급의 기분이 이렇게 바뀌는 현상을 맑스주의는 진보적 혹은 반동적이라는 잘 알려진 정치용어로 묘사한다. 441-442

 

현대적 창조의 모범이 개별 장인의 기술보다는 제도화된 공장노동이 된 만큼 우리는 이제 개인적 측면보다 집단적 측면에서 생각하기를 기대할 것이며, 따라서 동력인은 이미 확립된 과정에 직면한 노동자계급으로 굴절되며, 그들을 고용하는 계급도 포함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펠레스 모형에 따라 자본주의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려면 예술작품을 수제품보다는 생산품으로 간주해야 하며,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분배와 소비 양식도 다뤄야 한다. 그것은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자에 대한 연구도 포함할 것이며, 실로 공급 및 원료의 근원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게 될지도 모른다. 448

 

지적 삶의 상품구조에 대해 라이트 밀스는 생산자란 지식을 창조하여 최초로 발표하고, 또 이를 검사하기도 하며, 최소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시장 부문이 이를 글로 구매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생산자 속에는 아직 지배적 유형인 개인기업가와 사실상 생산단위 관리자인 다양한 연구기관의 법인 간부들이 있다. 그다음에는 도매업자가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사상을 생산하지는 않고 다른 학자에게 이를 교과서로 배급하며, 그 학자들은 다시 이를 직접 학생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가르치는, 그리고 단지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은 지식과 자료의 소매업자인데, 그중 좀 나은 자는 원생산자로부터, 좀 못한자는 도매업자로부터 공급을 받는다. 모든 대학인은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의 생산물의 소비자, 즉 책을 통해서 생산자와 도매상에 대해, 그리고 어느 만큼은 지역시장에서 개인적 담화를 통해 소매상에 대해 소비자가 된다. 그러나 소비만 전업으로 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들은 책의 사용자라기보다 훌륭한 이해자가 되며 서지목록에 밝다.” 449-450

 

계급의식은 사회 전체의 지도나 도표 같은 것으로, 즉 다른 계급과 관련해 나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변별적 감정으로 내부에 간직된다. 455

 

맑스주의와 내적 형식

 

문학의 원료 내지 잠재적 내용의 본질적 특징은 그것이 애당초 결코 무형식이거나 우연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체적 사회생활의 요소인 말 생각 대상 욕망 사람 장소 활동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이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작품은 이런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애초의 의미를 어떤 새롭고 고양된 의미구성으로 변화시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술작품의 창조나 해석이란 결코 자의적 과정일 수가 없다....나는 이것이 제사로 삼은 실러 발언의 유물론적 핵심이라고 믿는다. “나는 미란 한 형식의 형식일 뿐이며 보통 그 내용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형식화된 내용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459

 

비평과정은 내용의 해석이라기보다 내용의 계시이자 드러냄이며, 다양한 종류의 검열에 의해 왜곡된 내용 배후에 있는 원초적 전언과 원초적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계시는 왜 내용이 그렇게 왜곡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의 형태로 나타나며, 따라서 바로 이런 검열의 기제를 묘사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460

 

공상과학소설 작품에는 환상뿐만 아니라 집단적 삶을 다루며, 또한 우주적 위기를 일종의 전시하의 결속과 사기 같은 것을 부활시키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다른 종류의 환상도 들어 있음을 밝힐 수도 있겠다. 따라서 전지구적 재앙의 생존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 자체는 좀더 인간적 집단성과 사회조직에 대한 왜곡된 꿈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표면의 폭력에는 이중 동기가주어지는데, 그것은 이제 중산계급 생활의 틀에 박힌 일상의 권태를 깨트리고 나오는 것으로도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는 경우에든 위장된 폭력은 이렇게 환기된 무의식적 환상이 실현되지 않는데 대한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변증법적 비평은 이런 관계가 계시되고 다시 한번 드러날 수 있는 방식으로 작품과 내용을 분절화해야 할 것이다. 463

 

헤밍웨이의 마치스모 숭배는 1차대전후 미국의 거대한 산업적 변화에 대처하려는 시도로,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충족하는 동시에 여가를 찬양하며, 또한 전체성을 향한 가장 활력있고 깊은 충동과 오로지 스포츠 속에서만 우리가 온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현황을 화해시킨다. ..헤밍웨이에게 희석된 현실, 즉 외국문화와 외국언어의 현실을 다루는 편이 유리한데, 이런 외국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우리 자신이 연류되어 있는 구체적 사회상황의 밀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그려낼 수 있는 대상들의 명료함을 지니고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말년에 세계가 바뀌기 시작하고 꾸바혁명이 미합중국 변경 내에서 적절한 은둔처를 제공했을 때, 그를 문체적 무기력과 결국 자살로까지 몰고 간 것은 그가 작가로서 결코 취급한 적이 없었던 이런 미국적 현실이 가해오는 저항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역설은 아닐 것이다. 470

 

현대가 비록 비평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프랑스에서 엉성하게 행해지듯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문학창조의 차원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못되는 것 같다.그보다는 비평이 관련되는 범위와 영역이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계기 자체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하는 것이 좀더 정직하고 변증법적이다. 그리하여 문학비평이 검열을 피해 사상과 은밀한 정치적 논평을 밀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전제정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특권적 무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제 외재적 의미가 아니라 내재적 우의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문화작품들은 거의 잊혀져버린 약호의 한 기호로, 더 이상 질병으로 인식되지도 않는 질병의 징후로, 그것을 볼 수 있는 기관을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상실해버린 총체성의 파편으로 나타난다....이제 문학적 사실은 우리 사회현실을 구성하는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로 언급 해석 풀이 진단을 갈구한다. 이때 다른 학문분야에도 호소해보지만 허사일 뿐이다. 영미철학은 위험한 사변능력을 거세당한 지 오래며, 정치학을 보더라도 현재 영미 정치학이 과거의 위대한 정치적 유토피아적 이론들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하는 절대적 무능력으로 인해 우리 문화에서 사유가 얼마나 질식당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473-474

 

계속해서 내부와 외부 및 실존과 역사를 비교하고, 계속해서 현재 삶의 추상성을 심판하며, 구체적 미래라는 이념을 살려나가는 일은 문학비평이 맡아야 할 작업이다. 문학비평이 이런 과제를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474

 

 

볕뉘.

 

1. 조금 늦게 갈무리한다. 출장으로 다음 저작 후기마르크스주의의 여운이 남아 있다. 포스트모던을 맑스주의에서 재사유한 이 책은 아도르노의 삶과 왜곡, 편견을 다시 살피고 있다. 

 

2. 맑스주의와 형식의 마지막 장인 변증법적 비평을 위하여는 4장까지의 내용을 다시 구도를 잡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씨줄과 날줄을 직조하고, 손끝을 따라가는 이들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열어둔다. 적막 또는 숨표, 다시 앞에서 보여준 카드를 보여주며, 이건 몰랐을 것이다라는 놀라움을 주면서 어느 새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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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낮잠

 

 

 

 볕뉘. 강연을 준비하고 있다. 여름에 여름을 열음을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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