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는, 역사적 실재이든 사회적 실재이든 개별적 실재이든, 반립적 역동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반립하지만 서로를 반대방향으로 나가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존재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자신에게로 환원시킨다든지 양자를 통일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미 실재와 거리가 먼 설명이 되고 만다. 마치 ‘막대 자석’ 같다고 할까? 양극이 음극을, 또는 그 반대로 음극이 양극을 자신에게로 통합시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석’이 아닐 것이다. 한낱 쇠막대기일 뿐이다. 같은 논리는 세속주의적 정치적 극단과 메시아주의적 종교적 극단의 관계에서도 주장된다. 양자는 “역설적 전도”의 관계에 있다. 12
“인간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의 절망적 삶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침몰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물의 근저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인문주의의 유럽 대륙을 떠나 “절대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고 역사의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그 배는, 애태우는 천사의 암묵적 의도의 명시적 시행이기라도 한 듯이, 인문주의의 유럽 대륙을 떠나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향해 재난을 넘으며 지그재그이 항해술을 발휘해야 하는 이 “빈곤호”의 진행 방식은 부정의 부정을 연속해야 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형상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사의 발 앞에 쌓이는 재난의 파편더미들과 함께 “빈곤호”의 앞길에 놓인 재난들은 치유를 기다리는 과거의 한과 원망들인 것이다. 16
로티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의 맥락 연관을 뛰어넘는 일은 전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사리가 이러한 한, 자신의 맥락 연관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의 맥락 연관을 자신의 것보다 열등하지 않은 것으로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학문과 문명의 표상들을, 이들 간의 어떤 위계 질서를 만들려는 강박감을 느끼지 않고, 단지 인간 조건의 상이한 기술들로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심지어 학문과 철학이 진리의 문제에 직면하여 어떤 특권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회화와 시작에 못지 않게 음악에도 진리가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철학에는 진리가 있지 않다. 155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지식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기본적 사유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계몽, 관념론, 마르크시즘 등의 “대서사”이다. 이들에 담겨 있는 정치적 억압, 무지, 빈곤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의도는 실제에 있어 실천적으로 더 많은 테러를 되풀이하여 유발시켜 왔다. 156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한계에 대한 불쾌감은 동시에 우리가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한 쾌감을 동반한다. 리요타르는 독특하게 인간의 자아 실현을 이러한 비주관적 차원에서 찾는다. 이런 까닭에, 더 나아가 그는 의사 소통이 도덕적 행위의 전제라고 주장하는 로티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개별적으로 격리되어 있다...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능동적으로 우리의 통제 아래 두고 있다는 생각과, 우리가 특정 규범의 타당성에 관하여 타인과의 논증적 담론을 통해 의견 일치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행위는 성공할 수 있게 된다. 158
벤야민은 “언어”를 일차적으로 어떤 의사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세계의 길항적 본성을 말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용어로 본다. 이것은 현재의 현상들을 그들의 과거에 입각하여 탐구할 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대도시, 파리의 회랑 상가, 바로크 시대의 독일 비극, 그리고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서 울리고 있는 전화,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선사의 고전적 시대로부터 들려오는 원형 현상을 가리키는 구체적 전거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세계를 텍스트화함으로써 “일찍이 씌어진 것이 없는 것을 독해한다”라는 도전적 프로그램의 차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 다가가는 것은 곧 그 대상 못지 않게 길항적 성격을 지닌 방법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통해 뭔가를 전달하는 한편 이름을 통해 자기 자신 즉 “영적 본질”을 전달하는 언어의 모호성은 세계를 가로지르는 틈새이다. 이 근본적 가설이 벤야민의 방법론을 규정하고 있다. 160
볕뉘. 몇권을 같이 읽고 있다. 비가 오늘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