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합리성 funtional rationality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절차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합리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기능합리성은 오로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반면 실질합리성 substantive rationality은 목적 자체를 고려한다. 19
나는 베버의 갈등이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베버가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의 여러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도 뒤르켐의 주장 중 일부는 사회학이론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와 합리성 그 자체가 비합리적 기초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해주는 그의 주장과, 사회적 의례가 바로 집단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그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23
뒤르켐이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조직의 궁극적인 기반이 계약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대사회에 재산권계약, 사업상의 협정, 고용계약, 보험상품 등 여러 가지 계약이 존재하는 것은 그 계약들 저변에 또는 그보다 앞서서 뭔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겉으로 드러난 첫 번째 계약의 규칙들을 존중하겠다는 암묵적인 두 번째 계약을 사람들이 맺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논리적으로 그 의심과 계산을 멈출 길이 없다. 29
뒤르켐은 계약이 뭔가 비합리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전계약적 유대 precontracual solidarity’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사실상 사회가 ‘신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30
많은 일이 그렇듯이 우리가 받는 실용적인 보상의 객관적인 가치보다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 더 중요하다. 계산을 하더라도 사실 그 계산은 그저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계산하는 것이 좋다는, 계산되지 않은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사회를 유지해주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이처럼 더 심층적인 감정이다. 41
계약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 세상이 변해가는 동안 ‘전계약적 유대’의 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산업혁명에는 종교혁명이 동반되었다. 막스 베버가 한 주장이다.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 말이다. 베버의 주장은 사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이론이지만, 간단히 말해 종교혁명이 오랫동안 경제적 불신에 익숙해 있던 사회에 신뢰의 여지를 만들어놓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신뢰의 여지 덕분에 새로운 계약경제가 만들어져 궁극적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44
사회학자들에게 갈등과 유대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집단은 외부의 적과 맞섰을 때 가장 커다란 유대감을 발휘할 때가 많다. 갈등은 적어도 일부 집단에서 유대감을 이끌어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시기에 따라 집단들의 진용이 달라지는 이유다. 53
집단은 합리적인 계산을 기반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좀더 심오한 것, 즉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주는 도덕감정이 승패를 좌우한다. 이런 도덕감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사회적 의례’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이런 의례가 효과를 발휘해 집단의 유대감이 만들어지면 집단 구성원들의 공동 이익이 새로운 지위를 얻는다. 그 공동 이익이 도덕적 ‘권리’가 돼서 올바름이라는 일종의 상징적 후광에 둘러싸이는 것이다. 55
뒤르켐은 합리적 계산은 이런 신뢰감의 기반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보다 더 심층적인 무의식적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증명했다. 55
뒤르켐은 종교에 관한 뻔하지 않은 이론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서 종교의 핵심 요소는 믿음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의례다. 종교는 사회적 유대감의 열쇠이며 종교적 믿음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집단의 상징으로서 중요하다. 따라서 종교는 비합리적인 현상이 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최고의 사례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종교를 이런 식으로 분석하다 보면 사회적 의례가 도덕감정과 상징적 생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몹시 중요한 일반이론에 도달하게 된다. 62
세상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양분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 믿음이다. 이와 함께 종교의 기본 행동, 즉 ‘의례’가 이뤄진다. 의례는 평범한 행동과 크게 다르다. 거리를 걷거나 일을 하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등 평범하고 실용적인 행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일단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든 달라질 것이 없다. 반면 의례는 아주 엄격하게 정해진 행동이다. 65
우리 삶의 틀이 되는 여러 제도들이 지금까지 축적된 다른 사람들의 행동, 즉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에서 생겨났다. 종교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근본적인 진리다. 신은 사회의 상징이다. 66 사회는 우리 바깥에도 있고 우리 의식의 핵심에도 있다. 종교의 상징체계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표현한다. 그래서 종교적 상징체계에는 사회적 의무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감에 대한 관념들이 통합되어 있으며,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나 영적인 존재뿐 아니라 영혼이라는 관념도 존재한다. 69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워낙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라서 오히려 간과하기 쉽다.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철저히 현실적인 이점이다. 강렬한 사회집단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감정에너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감정 에너지 덕분에 사람들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집단 안에서 해낼 수 있다. 집단은 사람들에게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72
자신감과 에너지를 얻는 몹시 강력한 방법은 집단 구성원들이 강렬하게 어우러지는 상황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뿌리가 같다. 특히 종교지도자나 정치웅변가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서 커다란 개인적 에너지를 얻는 경향이 있다. 군중의 관심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고 청중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지도자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득 받아들일 수 있다. 집단이 충분히 흥분하면 지도자도 영감을 얻어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는다. 74
집회는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기계다. 개인은 집단에 플러그를 꽂아 넣음으로써 자신을 더 강하고 과단성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숨겨진 보상이 있기 때문에 종교는 물론이고 종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세속 단체들도 매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75
뒤르켐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막스 베버는 현대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등장은 종교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초기 저작에서 그는 특히 개신교 특정종파의 등장을 지적했다. 그리고 다ᅟᅳᆫ 글에서는 현대사회의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이 모두 기독교와 고대 유대교의 특징에서 자라 나왔다고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가 지배계급의 권력과 그 기반이 된 재산권을 강화해주는 사회구조 속에서 자라 나온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조와 종교구조가 합쳐져서 전체를 이룬다고 본다. 둘 중 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무엇을 야기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대신 전체를 구성하는 구조 속의 기본 요소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88
뒤르켐은 산업사회에서 노동분업의 범위가 워낙 넓어졌기 때문에 신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자체가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이라는 개념이 박애라는 일반 개념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도덕적 경계선은 신의 개념이 좀더 포괄적인 것으로 변해갈 때마다 넓어졌다. ...종교의 일반화와 추상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종교는 정치이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현대의 정치신조들이 신앙 감소라는 배경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사회가 점점 크고 복잡하게 변하면 그 사회 속의 개인은 점점 다른 사람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존재가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부족사회에서는 개인의 성격도 서로 닮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복잡한 산업사회에 사는 우리는 부족사회의 정반대 지점에 가까이 닿아 있다. 개인의 성격이 자기만의 세상에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를 멀고 추상적인 것으로 만든 사회변화들이 사람들 또한 좀더 개인주의적으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90-91
어빙 고프먼은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종교적 의례와 신앙은 현대사회에 워낙 일반적이고 소원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는 사실상 자취를 감춘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식, 기도, 식전 감사기도 등 예전의 일상 속에서 거의 매 시간을 표시해주던 행사들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난 것은 워낙 흔해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의례들이다. 고프먼은 이것을 ‘상호 작용 의례 interaction ritual’라고 부른다. 91
우리의 이름, 자아 이미지, 의식,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이자 타인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부족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씨족의 일부로 본다. 각자가 지닌 특별한 기술이나 에너지는 대개 모두 마법이나 토템의 힘 같은 외부의 힘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영적인 힘들의 존재는 사회의 영향력이 밖에서부터 사람을 압박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상징한다. 부족사회보다 복잡한 구조를 지닌 농경사회에서 종교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수준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이례적인 능력을 보이면 여전히 신이나 운명 같은 영적인 힘이 개입한 탓이라고 여겨진다...사람들은 가족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면서 엄격한 사회적 서열에 얽매이는 경향을 보인다.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자아의 개념이 제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현대의 도사회는 개인에게 내적인 자아가 있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존재라고 할 만하다. 법원의 판결을 좌우하는 요소도 직접 한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다. 이 판결기준은 이제 사람들이 생각과 의사결정이 가능한 주관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존재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이 요구된다....개인주의 자체가 종교가 되었다. 93-94
대화는 자아숭배를 지탱해주는 작은 의례들이 연달아 이어진 것이다. 대화가 특히 사회적인 측면에서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각자가 자기중심적인 자기만의 세계관을 인정받기 위해 친구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우리 각자가 내면에 이 모든 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한 사회 덕분이다. 우리의 내면이 이토록 복잡성을 띠게 된 것은 우리가 다양한 집단 상황들 속에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자, 각각의 상황들마다에서 이상적인 자아를 제시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기 때문이다...사람이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자아도 한 층 더 생겨난다. 전 사회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한 개인의 자아는 오로지 복잡한 형태의 사회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96-97
고프먼이 지적했듯이 사람은 단순히 개인이 되기를 허락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개인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이런 형태를 띠면 우리는 자신에게 부과된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무심하고 쿨하고 냉정한 개인이라는 현대적 이상은 사회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사회적 이상들의 거푸집 자체다. 99
볕뉘. 랜들콜린스의 이론의 근거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