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수동성과 규율에 매여 있다고 가정되는 사용자의 작동에 관한 의문에서 탄생했다. 42 사람들은 이 사용자들의 피지배자라는 지위를 소비자라는 조심스러운 이름 아래 감춰버린다. 일상은 수천 가지의 밀렵 방식들과 함께 발명된다. 43

 

브리콜라주 언어학에서 수행능력이 아니다. 말하기 행위는 언어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말하기 행위는 언어학 시스템의 영역 속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화자에 의한 언어의 전유 혹은 재전유를 실행시킨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인 하나의 현재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장소와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타자와 계약을 맺는다. 발화행위의 이 네 가지 특성은 다른 실천들(걷기, 요리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46

 

일상적 창조성의 작동 절차 푸코의 감시의 그물망이 사방으로 확장되고 정교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 사회 전체가 그 그물망으로 환원되지 않는지도 알아내는 것도 그만큼 시급하다./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질서의 폭력이 어떻게 해서 규율의 테크놀로지로 바뀌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감시의 그물에 걸려 있는 그룹 혹은 개인의 산발적, 전술적, 브리콜라주적 창조성의 은밀한 형식들을 되살리는 데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의 이런 작동 절차와 책략은 마침내 반규율의 그물망을 구성한다. 48

 

실천의 형식 기구 속에 침투해 들어가 숨어 있으며, 따라서 고유한 이데올로기나 제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작동들이 규칙에 종속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실천들의 논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는 기예 혹은 실행의 방식이라는 이미 오래된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記述적인 조사: 독서의 실천, 도시 공간의 실천, 일상적 의례화의 사용, 일상적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혹은 허용해주는) ‘권위들을 통한 기억의 재사용 및 기능 등. 과학문헌시리즈: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이며 또한 역사학적인 작업들(어빙 고프먼에서부터 피에르 부르디외까지, 마르셀 모스에서부터 마르셀드디엔까지, 예레미 보이세바인에서 에드워드 로만까지) 은 의례와 브리콜라주의 혼합이면서 공간을 조작하고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실천들에 대한 이론을 공들여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 민속방법론적, 사회언어학적 연구들은, 일상어에 고유한 기대, 타협, 즉흥성의 구조와 관련 있는 일상적 상호작용의 절차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관습철학과 기호학, 시간, 양태부여의 영역 속에서 분석철학으로 확장된 데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는 일상적 발화의 가벼운 움직임과 가소성을 붙잡으려는 둔중한 기구와 같다. 일상적 발화는 논리적 부문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조합된 것으로, 이것의 지배적 요소들은 정황과 정세의 긴급성에 따라 차례로 결정된다. 48-49

 

이 연구들은 시인의 회한을 만나게 되고, 시인처럼 망각에 맞서 싸운다. “ 그리고 나는 정황의 우연, 침착함 혹은 조급함, 햇빛 혹은 추위, 하루의 시작 혹은 끝, 딸기의 맛 혹은 버림받음의 맛, 반쯤 이해된 메시지, 신문의 헤드라인,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더없이 진부한 대화, 익명의 남자 혹은 여자, 말하고 살랑대는 소리를 내고 지나가고 스쳐가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49

 

다수의 주변성 텔레비전 방송 이미지들 앞에 앉아 있는 이주 노동자는 프랑스인 중간급 관리자와 동일한 비판의 공간과 창조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같은 층위에 있는 경우, 정보와 자산, 각종 보험등의 빈약한 수준은 책략과 꿈, 웃음의 증대를 초래한다. 유사한 장치들이라도 불평등한 역학 관계 위에 놓여 있다면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소비자들이 배치된 공간 내부에서 생산물 시스템이 수행하는 작전들을 구별해낼 필요,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주어진 행위의 여지 가운데에서 사용자들이 자신의 기예를 실행하는 경우를 구별해낼 필요가 발생한다. 50

 

실천가의 기술 수집된 자료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문제. 읽기, 말하기, 걷기, 거주하기, 요리하기 등에 대한 묘사. 과학 부문으로 확장하기. 세 가지 방향으로 진로 제시. 51

 

경로, 전술, 수사학 의지와 권력이 주체가 환경과 분리될 수 있는 순간부터 가능해지는 역학관계이 계산을 전략이라고 부른다. 전략을 장소를 전제로 한다. 이와 반대로 자기 고유의 재산에 의지할 수 없고 따라서 타자를 가시적 총체성으로 특징짓는 경계도 고려할 수 없는 계산을 전술이라고 부른다. ‘자기 고유의 재산은 시간에 대한 장소의 승리다. 반대로 전술은 자신의 비장소성으로 인해 시간에 의존하고, 이득을 얻을 가능성을 낚아채기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가령 슈퍼마켓에서 주부는 자기 집 냉장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 자기 집에 올 손님들의 취향과 입맛, 기분, 가장 좋은 가격의 상품, 집에 이미 있는 것들과의 조화 등, 이질적이고 유동적인 정보들에 직면한다. 이는 기회를 붙잡는행위와 방식의 형태를 띤다. 일상적 실천들과 실행의 방식들대부분이 그렇다. 수를 쓰는 기예, ‘사냥꾼의 꾀, 능수능란한 기동성, 다채로운 형태의 위장, 호전적인 만큼 시적이고 즐거운 우연한 만남 등. 52-53

 

전술들은 궤도를 벗어나 방랑한다. 소유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벗어나기에는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는 시스템 속에서, 전술은소비자를 이주자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전술들은 이 시스템 속에 일종의 브라운운동을 끌어들인다. 54

 

수사학은 문체를 기술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조작은 수신자의 의지를 바꾸는 유혹하고 설득하고 사용하는 기회 및 방식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전술의 유형들을 구별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54

 

읽기. 텔레비전에서부터 신문에 이르기까지, 광고에서부터 온갖 상품의 현현에 이르기까지... ...소통을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바꿔버린다. 그것은 눈의 서사시이고 읽기 충동의 서사시다. 기호의 통치로 변형된 경제학은 읽기의 포화를 조장한다. 생산-소비의 이항식은 글쓰기-일기로 대체할 수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훔쳐보는 자의 작격을 부여받은 소비자의 특징이라 할 수동성의 최고 단계인 것처럼 보인다. 55

 

독자는 타자의 텍스트 속에 즐거움과 재전유의 책략들을 슬그머니 끼워넣는다. 그는 거기서 밀렵하고, 거기로 옮겨가고, 신체의 소음처럼 거기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만든다. 책략, 메타포, 결합 등의 생산은 또한 기억의 발명이기도 하다. 이 생산은 단어들을 가지고, 무언의 역사의 출구를 만든다. 56 


읽기는 따라서 수동적이지 않는 기예를 도입한다. 그것은 중세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이론화했던 기예와 유사하다. 중세 시대에 텍스트는, 네 개 혹은 일곱 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론에 둘러싸여 있었다. 57 달변가의 기예. 대화는 상투적인 관념을 다루고 사건들의 불가피성을 능숙하게 다루어서 거주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기예 속에서, 언어 능력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이고 집합적인 결과다. 57


전망과 정치 1. 합리성이 상상적인 것과 맺는 관계들 2. 실천적 조사를 수놓고 있는 시행착오, 실용적 책략 및 연속적 전술들 그리고 최종 생산물로서 수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전략의 표상들 사이에 있는 차이. 58 콜라주는, 담론에 의해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론적 열망들을, 사무실과 실험실의 일상적 작업 속에서 끈덕지게 살아남는 아주 오래된 책략들의 영속성과 나란히 놓는다. 59 


이제 개인에게는 그 틀에 관해 책략을 쓰고 수를 쓰며’, 전자 기술화되고 정보화된 대도시에서 옛날 사냥꾼이나 촌부들이 가졌을 법한 기예를 찾아내는 것만 남았다. 오늘날 사회 조직의 원자화는 주체의 문제에 정치적 관련성을 부여한다. 59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키 나는 언제나 근처에 있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온갖 작은 즐거움에 더욱더 기대햐 했습니다. 당신은 이 작은 사소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만큼 거대해지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일이죠. 60

 

 

 

불확정적인 것들

 

일상적 실천들은 국지적이고 따라서 분류가 가능한 저항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용한 전복, 거의 맹목적이라 할 만한 전복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복의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장소의 편재성그리고 시간 속의 결함이다. 이것은 계층화된 사회 공간은 통제 가능하고 구성 가능한 표층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변화들은 상황에 관련된 생각지 못한 요소를 계산된 시간 속으로 다시 끌어온다. 계층화된 공간의 두께, 행동 속의 책략, 그리고 역사 속의 사건들의 비가독성. 이를 상기시키는 글쓰기는 아이러니하고 또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것으로 그라피티처럼 그려져 있다. 마치 벽에 그려진 자전거가 공통의 이동의 상징으로서 불확정적인 여정을 떠나기 위해 벽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352

 

뭔가를 제조해내는 보편적인 테크놀로지의 글쓰기 아래에는 불투명하고 완고한 장소들이 영속하고 있다. 거기서 역사의 혁명, 경제적 변화, 인구의 혼합 등은 여러 층을 이루고, 관습, 의례, 공간적 실천들 속에 내재하고 있다. 이전에 그것들을 분명하게 표현해준 읽기 쉬운 담론들은 사라졌거나 혹은 언어 속에 오직 단편들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이 장소는 표면상 콜라주처럼 보인다. 이는 두껍게 여러 층들로 이루어진 공간 속 여기저기에 편재하는 것이다. 즉 이질적인 층들의 더미이다. 각각의 층은 책 속의 낡은 페이지처럼, 영토의 통일, 사회경제적 분배, 정치적 갈등, 동일시의 상징화 등에 관한 상이한 방식을 가리킨다. 폐허가 된 전체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동시대적이지 않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집합체는 미묘하고 보상적인 균형에 의해 관리된다. 이 균형은 상보성을 은밀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극미한 움직임, 다양한 형태의 활동들은 전자, 양자, 광자 등이 뒤섞인 걸쭉한 상태, 즉 영속적 상호작용으로 제대로 정의되지 않는 특성을 가진 이 모든 존재들에 상응한다. 353

 

변화무쌍한 시간은 단지 생산 속에 사고와 결함을 일으키는 밤처럼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시스템의 오류이고, 시스템의 악랄한 반대자이다. 역사 서술이 타자의 이런 부조화를 과학적 명료함의 투명한 유기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쫓아내려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미래 예측이 하지 못하는 것을 역사 서술자가 보장해준다. (가공의) ‘이성을 생산해냄으로써 불확정적인 것의 외설을 라리고자 하는 동일한(근본적) 요구에 복종하면서 355

 

이성의 결함 혹은 실패는 분명히, 이성을 또다른 차원, 즉 사유의 차원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맹점이다. 이 사유는 파악할 수 없는 필연성처럼 다른 것 위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상징적인 것은 실패와 분리 불가능하다. 기회와 맺은 관계 위에, 즉 변화무쌍한 시간 위에 근거하고 있는 일상적 실천들은 따라서 사유의 행위들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계속 분산될 것이다. 이는 사유의 영속적 몸짓들이다. 355


볕뉘


1.


이론과 실천이라는 흑과 백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칼날로 세상을 자른 뒤에 세상은 얼마나 잘나갔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파랑과 빨강으로 우리는 무엇을 그려낼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거나 느낄 수 없게 된 것일까? 이론과 실천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우리를 갑갑하게 만들었을까?


2.


이성과 감성이라는 분류처럼, 사이사이 널 뛰고 끓어넘치는 팔팔한 것들을 숨죽이면서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무뎌진 것일까? 그것을 버무려 살아있는 반죽처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앙꼬가 빠뜨려 얼마나 무미한 일상을 살아왔던 것일까? 따로 따로 떨어진 낱개로 만들어 고체로 만들어버린 그 분류법에는 뭔가 넘치는 것이 없다. 흐물흐물하여 움직이거나 날라가는 향기조차 없다. 실험실이란 밀폐된 공간에 제작해내는 포름알데히드에 갇히 병속의 생물이다.


3.


이론과 실천이 사이에는 끊임없이 그 갑갑함을 메우고 만드는 다른 세계, '딴짓'이 있다. 그 사이는 공예가 있고, 서커스가 있고, 마술이 있고, 예술이 있다. 그 세련된 손맛 입맛 발맛이 서식하는 세계다. 거기에는 작명하거나 찍어눌른 이름의 압제에서 찢고 나오는 것들고 충만하다. 자본주의라니. 그런 고체화된 명폐라니, 어설프기 짝이 없구나. 신자유주의라니. 정동자본주의라니 금융자본주의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4.


여기는 꿈틀거리거나 그 흐름 플럭스, 벡터만이 있다. 생동하는 맛, 느낌, 일상의 꿀. 여기는 삶이 끼어들 수 있는 세상이다. 이성과 감성이란 이분의 시각은 몰상식하다. 욕망-기쁨-슬픔이란 정동이란 색깔은 모든 변화하거나 꿈틀거리는 것들의 색을 조제해낼 수 있다. 여기에 가느다란 분출하는 일상의 샘이 있다.


5.


둘로 나누다보면 닮지만, 이렇게 셋으로 넷으로 다섯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거나 만질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곳. 응시하다 물끄러미보다 하고싶더 만지작하다보면 어느새 내 몸은 파랑 빨강 노랑 온몸으로 칠할 수 있는 붓이된다. 나는 이제 온전히 삶 속으로 다가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보는 눈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 만드는 손, 점선을 실선으로 만드는 발. 천연색 실뭉치다.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나오자 마자 물들일 수 있는 색의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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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과 죄책감과 분노라는 이 뜨거운 정동 트라이앵글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극히 일부 본격좌파들 외에는 '민주 회복'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반군부독재 세력의 의식 수준은 극적인 수준으로 급진화되었다. 346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리얼리즘들'의 배경에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전제로 1930년대 소련에서 수립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불변의 교리, 즉 자본주의 사회는 필멸이며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 필멸의 역사 과정을 예견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농민, 소시민 등 다른 피지배계급과 연대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는 낭만적 확신을 전형적 인물과 전형적 상황 속에서 형상화하는 유일의 문예미학이자 창작 방법론이라는 교리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359


성민엽은 <전환기의 문학과 사회>에서 "상품의 물신숭배와 의식의 사물화가 더욱 진전되어 공식화된 문화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소시민계급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트까지 혁명적 의식화의 가능성이 사물화된 의식의 변질"될수 있다고 보았다. 정과리는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민중문학론이란 "(민중의) 의식, 무의식, 문화를 민중의 이름하게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하나의 이념적 담론"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은 민중의 구체적 삶과는 처음부터 분리된 것이며 새로운 상징적 위계질서를 수립하려는 간교한 "소시민적 엘리티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363


보통 시민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충만한 개별자로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혁명가로 산다는 것은 낭만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나면 사실은 어떤 급박한 정세 속에서 매우 경직된 교조적 구속을 받아들이고 그 논리 속에 자기 자신을 분해해서 조힙해 넣는 탈주체화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그러한 교조적 조건과 집단의 속박 속에서 지도자건 기수건 나팔수건 혹은 전위건 하나의 나사, 혹은 톱니로서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서 다른 주체들과 자유롭게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외부에서 연료를 얻는 불쏘시개나 장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나오듯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홀로 있어도 끝없이 타올라 빛나는 무한 에너지원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충만한 개별자로 살 수 있을 때, 그는 누군가에 의해서 동원되는 소외된 존재로서 어떤 위계질서 속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단독자들의 수평적 연대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게 되는 것이다. 477-478


볕뉘


1.

 사람은 사람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한다. 딱히 무엇이다라고 짚어낼 수는 없지만,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자기원인이 있기때문이다. 코나투스. 변치 않는 무엇이 있기에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도 그 색깔은 묘하게 겹쳐있다. 





2. 

누군가 이야기한다. 사르트르가 최후의 인간주의자라고 말이다. 인간이 그럴 수 있냐고 그러면 안된다고 깃발을 휘둘렀지만, 더 이상 그런 인간은 없게 되었다. 자아는 없다. 원자화된 개인은 더 이상 없다. 자유의지도 없다.




3.


이상하다. 사람은 인간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니 말이다. 운동권인 집단화된 실체는 있는 것일까? 과잉대표된 운동권들과 정치인들은 있어도 미안함과 부채로 그 여백과 허전함을 채웠던 일상인들인 운동권세대는 과연 있는가 없는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나타나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개인은 있는가 없는가? 그 개인들 사이 사이 연결된 부채감과 상실감, 한 시기를 들끓었던 분노라는 것이 서로를 이어주기도 하니 개인과 집단을 폄훼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잘 살펴보는 것도 큰 일이다.


4.


새로운 앎. 새로운 지식. 새로운 깨달음은 지난, 스친 과거들을 새롭게 세운다. 때론 그 경험이 새로운 지평들로 열리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과거로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저자가 고백하는 것처럼 혁명가는 운동권이라고 하는 자는 엘리트의식과 계몽의식에 절어있는 존재였다. 소련의 비밀혁명가가 모델이었다니. 따르고 쫓던 비밀혁명가들의 롤모델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5.


1980년대를 돌아보는 책들은 많지는 않으나 틈틈히 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히 진중하게 논의된 바도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느냐는 늘 현재 진행형이자 그룹의 우월감은 그림자보다 빠르게 일어서서 과거를 지우려한 것은 아닐까? 과거를 제대로 본다거나 새로운 시선으로 살핀다는 것은 접힌 미래를 새롭게 펼친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1991년을 살펴보는 건 뒤늦었지만 중요한 포인트다.


6.


곡절이라는 걸 겪고 또 다른 지반이 세워진 때다.  자기중심성을 갖는 개인들의 연합을 지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나도 피고 너도 피고, 함께 꽃피우는 세상이 되길 소망하는 저자의 간절함이 읽힌다. 


7.


어쩌면 만들어진 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걸 발견하고 체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지향하는 열린 나들이 세상을 좀더 시원하게 할 수 있진 않을까? 사이, 사이를 채워나갈 수 있는 우리들이라면, 목적론에 취한 인간 밖을 살아갈 수 있는 코스모폴리틱한 세상을 보며 바꿀 수 있는 힘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0.


 저자가 황해문화 편집주간으로 계실 때, 글들을 마음 깊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또한 시대를 읽어내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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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로 진출하는 젊은 인원의 감소는 종종 사회적 현상으로 분석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명백하게도 진짜과학의 까다로운 요구에 자신을 헌신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즉각적인 보상이 있는 직업을 찾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사회적 사실의 무고한 희생자가 된다. 비판자들은 이제 사회가 더 이상 연구자들이 우리 모두를 대표해 수행한 위대한 모험에 경의를 표할 줄 모르며, 심지어 인류의 진정한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47

 

동원된 군대는 어떤 이유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가?’이며, 황폐화된 들판이나 폐허가 된 마을과 같이 그들이 지나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그들을 지체시키지 않을 것이다. 주저함과 망설임은 반역과 동의어가 된다. 73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은 구글 어스처럼 지구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이 위치한 국가, 도시, 거리, 집을 찾아내는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다.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자신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응답하는 작업 방식에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질문을 제기하는 타인의 존재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그 상황에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들여오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종류이든 형이상학적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상황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77 이상 2장 올바른 자질을 갖춘 연구자들

 

여전히 연구의 질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학술지 순위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는 별개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은 바로 논문 출판의 횟수를 줄이고, 심사위원들이 논증이 잘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본질적인 관심 없이 약간의 점수를 얻기 위해 서둘러 발표된 부분적인 결과에 불과한지를 시간을 들여 판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모델을 빠른과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에서는 유능한 동료들에게만 전달되는 지식의 누적적 생산과 통속하된형태의 지식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이와 함께, 나는 과학의 속도를 늦출 것을 호소하고 싶다. 이는 정직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동료들에게 공정하게 인정받던 다소 이상화된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과학의 다원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며, 서로 다른 유형의 연구에 적합한 평가 및 가치화의 방식에 대한 다원적이고 협상적이고 실용적인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87-88

 

민속지학. 연구자들이 보고한 것은 ‘-에 대한지식이라기보다는 ‘-사이의지식이었다. 이는 연구자 자신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는 지식으로, 그가 던진 질문은 사물들, 준재들, 관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방식들에 의해 시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변화가 수반하는 위험이나 위해까지도 동료들 모두에게 관련이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은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유능함이란,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한 동료가 무엇을 배웠는가, 어떤 한계에 맞닥뜨렸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거나 그 의미를 인식했는가 등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둔다는 데 있다. 나아가 연구자가 자신을 어떻게 위치지어야 했는지, 즉 자신의 사유 방식, 청취 방식, 예측 방식 자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에도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그러나 나의 접근 방식은 여기에 비난이나 영웅주의의 의미를 담지 않고 오히려 수련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112


나의 접근법은 결국 충분히 단순한 하나의 가설에 대응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그 가설이란, 근대과학 개념과 관련된 지식 유형은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 논증적이지 않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명제에서 다음 명제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러므로들로 장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지식은 모든 그러므로, 그것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라는 사건과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이는 그 지식의 가치가 미결 상태로 남게 됨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사고실험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즉 지식 구성의 역동적 집단들이 이러한 미결상태를 창조하는 기술을 배우는 수련의 과정으로 함께 모일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117

 

과학과 기술-산업적 혁신 간의 공생은 이제 직설적인 포획 관계로 뒤바뀌었다. 만약 이러한 가치가 진보와 근대화라는 지배적 담론에 포획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가치화라는 용어는 문제와 동의어가 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을 느리게 한다는 관념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감속에 참여하도록 훈련될 수 있을지의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를 내면화하도록 요구하는 모든 평가와 판단의 방식들에 도전함으로써 말이다. 120

 

대상자는 자신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연구자를 포획하여 그들의 대변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포함된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공생적 상호연결을 이룬다. ‘방문하는연구자와 그를 맞이하는 사람 모두 서로를 포획하지 않기로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배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사회과학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120-121

 

누구도 정말로 중요한 것을 일반적으로 정의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도덕적 금지가 아니라 공생적 문화의 조건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각 주체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각자가 타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타자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해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질문의 가치는 당연히 연관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질문이 일방적으로 강요되지 않아야 하고 답변이 강제로 얻어진 것이 아니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바로 연관성이라는 기준이야말로 타자가 무엇을 믿고있든 간에 정말로 중요한것을 추출해내려는 꿈을 몰아낸다. 126-127

 

파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미국 활동가들이 되찾기 reclaiming’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저항, 즉 회복하고 치유하고 우리가 단절되었던 것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복의 과정은 우리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으며 너무 오랫동안 그랬던 나머지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병과 그것을 유지하는 모든 것을 정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129 이상 3장 어떻게 하면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이처럼 쿤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을 보다 포괄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하는 왕도가 되었고, 보편주의적이라는 과학의 지위를 강등시켰다. 물리학처럼 보편성을 주장해 온 과학조차 모든 이성적 인간에게 합의를 종용할 수 있는 실재에 접근할 특권이 없다면, 이는 모든 지식이 사회적 구성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37 오리-토끼 텍스트 . 토끼를 보는 이들은 축적성을 띠는 정상과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퍼즐로 간주하고, 그 해법이 패러다임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겐 패러다임의 공약불가능성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콰학자들은 쿤이 퍼즐이라고 부른 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이를 성공적으로 풀어내기까지의 과정, 즉 패러다임이 예측한 것이 실제로 검증되기까지가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139

 

플렉을 다시 읽으면서 주제를 파악하는 불안정한 방식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는 퍼즐이 없기 때문에 어떤 패러다임도 없다. 파스퇴르와 코흐의 경직된 사고 방식을 다루는 플렉의 온화한 유머가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쿤이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을 수립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각각의 질병, 각각의 미생물, 각각의 문화가 각기 예측 불가능한 질문을 계속해서 제기하며, 퍼즐 풀이자의 자신감보다는 냉철한 주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플렉의 질문은 해당 분야에서 다루는 대상의 내재적이고 복잡하게 얽힌 가변성으로 인해 대체로 사실이 단일한 해석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질 수 없는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바서만 검사에 다다르기까지 집단 구성원들 간의 지속적인 협력과 상호작용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만약 매독이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면, 이 물은 수천 개의 개울로 흩어진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매독 유행이 촉발한 이 아우성이 중력장이었다. 기존 사유의 흐름과 새로운 사유의 흐름이 발전하고 서로 얽히며, 서로를 수정하고 합류하고, 마침내 진정한 발견으로 인정받게 될 것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중력장은 바로 이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고 지배적인 지향점을 제공한다. 148-150

 

공통의 관심사가 걸린 문제를 둘러싸고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들과 조우하는 시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집단적 학습의 문제이다. 이러한 수련 과정은 근대 집단에게 내가 문명화되기로 규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과학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을 문명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명화란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에게 모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즉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158

 

1929년 플렉이 자연과학에 대해 민주적 실재를 형성하고 그 실재에 의해 연출되며, 따라서 그 실재에 의해 재형성되는 기예라고 했을 때, 그는 아마도 어떤 초월적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연적실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민주적 사고 방식장인, 뱃사람, 이발사, 가죽 세공업자와 안장제작자, 정원사, 그리고 아마도 놀이에 몰두한 아이들 사이에서 처음 발달했다고 기술했다. 그는 이어서 진지하거나 재미있거나에 관계없이 여러 사람이 해당 작업에 참여할 때, 공통되건 상반되건 이해관계들이 반복적으로 만날 대, 이러한 독특한 민주적 사고방식은 필수적이었다고 썼다. 163 이상 4장 루드비크 플렉, 토머스 쿤 그리고 과학을 느리게 하는 과제

 

이것이 느린 과학이 응답해야 할 도전일지도 모른다. 과학자들로 하여금 혼란스러운 것은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그와 함께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말이다. 빠른 과학과 산업의 공생은 이 세상의 혼란스러운 복잡성으로부터 추상화하는 단절의 전략과 단절된 지식에 특권을 부여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혼란을 무시하고 근절하기를 꿈꾸는 가운데 세상을 망쳐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느린 과학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혼란스럽다고 여기는 것, 즉 소위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다루고 그로부터 배우는 기예를 되찾는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말이다. 187

 

되찾기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과학 연구를 되찾는다는 것이 과학을 혼란스러운 세상에 다시 뿌리내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세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새롭게 발생하는 가치들과 총체적 상호작용 속에서 개별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습관을 육성하고 강화하는 법을 배우는 문제이다. 이것은 이미 강조했듯이, 전문화와 추상화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데, 이 둘은 분명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식이란, 단지 우리의 추상화가 도출된 어떤 원본을 잔여물로 취급하지 않거나, 그것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하다. 189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들을 정의하는 방법이 아니라 육성하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지속시키는지, 무엇이 그것들을 방해하거나 해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합리화된산업 농업의 빠른 지식 대신에 정원사의 느린 지식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실제로 극단적으로 균형을 상실한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되찾기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병들었기에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191

 

우리는 또한 화이트헤드의 정의에 나오는 미지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되찾은 것이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해 살 만한 미래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른 투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찰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는 오히려 내가 부분적인 연결들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곧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것, 배운 것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경험에 대해 우리가 빚진 바를 인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경험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화의 효과를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탐구할 때 말이다. 195-196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이동민족. 윌리엄 제임스의 다중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 마리오 블레이저 Mario Blaser의 용어로는 언제나 하나보다는 많고 다수보다는 적은 것을 엮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로 하여금 느끼고 사고하게 만드는 사상들이 현실에 무언가를 더할수 있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시험될 것이다. 전달은 결코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윌리엄 제임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다중세계와 관련된 위대한 질문이라고 정의한 것과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한 것을 포함하여 전달하는 것이 가치를 높이는가 아니면 떨어뜨리는가? 우리가 더한 것은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196-197 이상 5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을 위한 호소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따른다. 그는 관계 맺기에 원초적 중요성을 부여했고, 그가 다중세계라고 불렀을 것을 구성하는 일을 중시했으며, 관계맺기 능력 그 자체를 문명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225

 

도너 해러웨이가 강조했듯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살해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중요한 점은 일부 동물만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정의하며, ‘살생하지 마라는 계율의 보호를 그들과 공유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들 중 누구의 희생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니라’. 여기서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거 가능한 존재로 규정하지 말지니라’. 이상 6장 코스모폴리틱스: 근대적 실천을 문명화하기


볕뉘


1. 


느린 과학이란 단어를 얼핏보고 적정기술이나 중간기술이란 개념은 아닐까? 늘 하던대로 시민과학의 맥락을 갖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읽는 초기에 어 뭐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자마자 빠른 과학이란 개념이 왔다. 아 그렇구나. 방법에 대한 이야기면서도, 좀 더 읽자 근본에 관한 이야기구나 한다. 2010년의 느린 과학의 선언문까지. 참 맥락을 잘 짚었구나했다. 


2.


책방 사장님과 4장까지 훑어보고 얘기나누다가 5,6장이 본격적이라고 해서 퇴근해서 마저 읽다.  미래세대가 대체 당신은 뭘했느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있느냐구 다그친다. 뭘 열심히 했냐구 말이다. 마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다. 라투르의 이야기도 많이 겹치고, 이분법 구조에 벗어나는 미생물의 사례, 플렉을 쿤과 대비시키는 지점에서 탁월함을 느끼게 된다.


3.


코스모폴리틱스. 


4.


일원론. 과정으로서 활동. 경로적분. 일상의 미분. 으로 사물과 흐름들을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인다. 보살핌, 살림, 돌봄에 충만함이 어떻게 연결되고 퍼지거나 번지는지 목격할 수 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목에 늘어뜨니고 나누고 살피고 자라게 하는 것이 점선에서 실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벙어리처럼, 시각장애처럼 뜬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손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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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25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개인적으로 의대생 2천명 정원증가는 해당 학생들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대한민국이 망하는 지름길을 탓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ㅡ.ㅡ
 

1. 생명


만일 생명이 물체적 사물들에도 귀속된다면 어떤 것도 생명을 결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생명이 신체와 영혼이 통일된 사물들에게만 귀속된다면, 생명은 오직 인간들에게만 귀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마도 동물들에게도 귀속되겠지만 정신들이나 신에게는 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명이라는 단어는 보통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정신들과 결합하지 않은 물체적 사물들에도 그리고 신체와 분리되어 있는 정신들에도 귀속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260-261

 

우리 편에서 이해하는 생명은 사물들이 그것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도록 하는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사물들 자체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 자체는 생명을 가진다고 적절하게 말한다. 그러나 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힘은 다름 아닌 그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하게 말하는 것이다. 261 이상 <신의 생명에 대해서>

 

2. 일원론


원이나 삼각형의 본질은 그것이 영원한 진리인 한 아무도 그 진리가 아담의 시대보다 더 오래 계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지속>은 더 길거나 짧은 것으로 또는 부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어떤 지속도 신에게 귀속될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신의 존재는 영원하므로, 곧 신의 존재 안에는 어떤 이전이나 이후도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지속을 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 239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의욕하게 하는 신의 의지는 그의 무한한 지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들이, 말하자면 신의 본질과 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신의 지성과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의욕하는 신의 의지가 서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우리는 파악할 수 없다. 269

 


3. 데카르트의 오류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주의자들과 아울러 회의론자들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자명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한다. 중세 스콜라철학은 보편논쟁에 치중했으므로 공리공담에 몰두했고 다라서 중세는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 있게 탐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암흑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1. ‘보편은 실재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에 선행한다 실념론 2. ’보편은 실재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 안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온건 실념론 3. ’보편은 명칭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유명론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보기에 스콜라철학자들은 실체를 연장으로부터 구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념들을 혼란스럽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사용하는 실체 관념마저 혼란스러운 관념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기초로 삼아 탐구된 관념이야말로 명석판명한 관념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그가 <<방법론>>에서 회고하고 있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그가 배운 수학, 특히 기하학과 대수학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철학자들의 보편논쟁만 보더라고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추상적인 논쟁이므로, 수학을 보편적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생각한 데카르트에게 보편논쟁은 혼란스러운 관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기본 원리를 형이상학으로 보느데 형이상학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옳게 사용할 필요가 있고, 이성을 옳게 사용하는 학문은 다름 아닌 논리학이다. 데카르트는 기초 학문으로서의 수학이나 논리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보편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으로서 수학과 논리학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314-315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과 같이 데카르트도 서구적 역사와 문화의 한계 안에서 방법론적 회의의 결과 제1원리인 나는 생각한다의 주인공인 정신적 자아를 찾아내고도 이 명석판명한 자아 관념을 보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원적 토대로서의 신 존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자기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떤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이지만 그것들은 신을 제외한 이차적 실체라는 것이다. 신은 일차적 실체이고 정신과 물질은 부차적 실체이다. 319


볕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처음이다. 선선하다. 이 단어는 달릴 수 있다거나 달려도 괜찮다로 이어진다. 27도만 넘으면 이내 시들해지는 몸을 챙기기가 쉽지 않다. 나름대로 달림 전술이 생긴 셈이다. 어제 낮짬을 이용해 무척이나 서서히 달리는데도 심박이 높다. 중간중간 쉬는데도 높아, 기기가 이상한가하다가 절반이 지난 뒤에야 잔잔해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몸을 살피지 못한 연유가 아닌가 싶다. 짬짬이 달려준 하루. 일찍 잠들어  한밤 중에 일어나 책을 마저 읽다.


친절하게도 해설편에 데카르트 저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어 한결 수월하다. 자연이란 실체는 자기원인을 갖는 하나다. 둘이 아니라 하나다. 스피노자의 증명은 스스로 말하는 정의나 공리를 청자의 눈높이에서 시작한다. 만약에 둘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된다. 이렇게 반대편에서 서서 주장과 간극을 좁혀들어간다. 그 사이에 단차는 거의 없다. 완만하게 물이 차오르듯 채운다. 이제서야 중동태 책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스피노자의 저작서술을 언급한 이유가 들어오는 듯싶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은 아마 둘이 아니라 하나다. 라는 일원론이 갖는 매력같기도 하다. 이런 방법론은 자본론 저작의 마르크스가 쓰는 탐정술과 닮아있기도 한 듯싶다. 간극이나 빗나간 생각들로 단정짓거나 확정하지 않은 기술. 그렇게 봐야하지 않을까. 아니 일원론의 시각을 갖는다면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단순명쾌하다. 유물론은 갈지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경로를 짚는 듯한 느낌. 맞다. 이런 것이 상쾌함은 아닐까 싶다.


생명을 중세처럼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서로 위계를 두지도 않는다.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도록 하는 힘이다. 얼마나 짜릿하다. 양자역학이나 우주의 빅뱅론. 영원히 되찾게 만드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상가 누구라도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가보다. 계속 읽다보면 패턴과 글쓰기가 느껴진다. (조금만 더 힘내시길)


안타깝기도 하지만 데카르트의 대전제, 그 실패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그 덕에 많은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심신 상호작용설, 자유의지라는 족쇄에 매여, 더 나은 사유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니. 아니 그렇게 살아가다니. 그렇게 살아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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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에 있으며 흔히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긴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처럼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241

 

사람은 똑같은 종류의 물체에 대하여 형성한 보편 관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완전하다고 하며, 이와 반대로 비록 전적으로 제작자의 견해에 따라 완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유형의 개념과 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242

 

우리는 사람들이 사물의 참다운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편견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자연물을 완전하다든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자연은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지 않는다/신이 어떤 목적인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목적인을 위해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용에서도 아무런 원리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오직 사유의 양태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이 동일한 종이나 유에 속하는 개체를 비교함으로써 습관적으로 형성하는 개념이다. 243

 

한계, 종말, 무능력 등과 같은 부정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 우리들은 그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만큼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선과 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 또한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할 경우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나 우리가 사물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244

 

선이란 우리가 형성하는 인간의 본성의 전형에 점차로 접근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들이 인지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이해한다. 그러나 악이란 그 전형에 유사하게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아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인간이 이 전형에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접근하는 경우 인간을 더 완전하다거나 더 불완전하다고 할 것이다./어떤 사람의 본성이 활동 능력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의 활동 능력이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245

 

표상은 참다운 것이 참다운 한에서 참다운 것의 현재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의 현재의 존재를 배제하는 더 강한 다른 표상이 나타남으로써 소멸된다. 249

 

인간은 항상 열정에 필연적으로 예속하며, 또한 자연의 공통된 질서를 따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 만큼 그것에 적응한다. 251

 

인간은 자기의 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정신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마치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의 유의 유지에 노력하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 262

 

어떤 것들이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능력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무능력이나 부정에서, 또는 열정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열정에 복종하는 한 그들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271

 

각 인간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며, 또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덕을 갖게 되며,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능력,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크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할 때 본성상 가장 많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들은 서로 간에 가장 유익할 것이다. 275

 

4부 정리 38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인간의 신체로 하여금 외부의 물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하는 데 알맞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는 것과 다른 물체를 자극한 데 더 알맞으면 알맞을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이와 반대로 신체를 이것에 덜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해롭다. 282

 

오만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만의 반대인 소심함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슬픔으로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오만한 자는 반드시 질투하며, 덕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칭찬받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미워라며, 그들에 대한 그의 미움은 사랑이나 친절에 의하여 쉽게 정복되지 않고, 또한 그의 무능한 정신에 비위를 맞추고 그를 어리석은 자에서 미치광이로 만드는 그러한 자들의 현존만을 기뻐한다. 소심함은 비록 오만과 반대되지만, 소심한 자는 오만한 자와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은 그가 자신의 무능력을 타인의 능력이나 덕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생기므로, 만일 그의 표상이 타인의 결점을 고찰하는 데 집중된다면 그의 슬픔은 가벼워지고 그는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나온다. 불행한 자의 위안은 나쁜 동료를 갖는 것이다. 298

 

4부 정리67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08 신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인식할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먹자마자 살기를 욕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309

 

5부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정리 36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에서 고찰된 인간 정신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 자체이다. 즉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359

 

정리 38 정신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정서의 작용을 덜 받으며,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361

 

정리 42 지복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들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366
















볕뉘


1.


여러 번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다시 읽으면서 추려낸 이들은 왜 방점을 서로 다른 곳에 찍게 되는 것일까? 왜 변함없이 주요한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재사유하게 되는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접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알튀세르 부터, 마르크스 노트 마저 최근에야 번역이 진행중인 연유도 있지만, 인식론의 단절(우연, 마주침, 확율 등) 인과와 목적을 사유의 전제로 두는 방법론의 문제가 우선이라 할 수 있겠다 싶다. 


3.


인간중심주의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유가 없다. 목적도 작용도 없다. 있는 그대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론이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냉정하게 따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예속>이란 정의.  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서란 무엇인가? 정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무수한 논의를 보아왔지만 윤리-정치-사회라는 동시에 울림이 있는 사유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게하는 힘이 있다. 


5.


무신론이거나 범신론이거나 신은 저기에 있거나 여기에 있거나, 신에 대한 개념과 관념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있던 게다. 현실과 맞지 않은 이야기. 신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스피노자가 사유한 전체성을 읽지 못하거나 총체성을 읽어내지 못하면, 지금의 사유에서 뱅뱅 맴돌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이나 그 와류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던 것이 문제였을 수 있다.


6.


그의 사유를 가져오면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구차하게 많은 사상가들이 이 점을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바로 지점에서 데카르트에게 거꾸로 걸려드는 것이다. 쉽다. 임신한 엄마. 공동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만의 행복. 그것만 사유할 수 없는 존재가 나다. 이런 배경설명에는 사회적인 나, 서사로서의 나 등등 모든 것들이 말 위의 말일뿐이다.


7.


신체와 정신, 몸과 영혼은 죽으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것이 정신의 지적 사랑이다.  이 3종 인식은 지금까지 온 것의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하다. 깨우침과 통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모든 것들을 또 다른 시선아래 살 게 만들기도 한다.


8.


쇼펜하우어가 부와 명예, 욕정, 아니 삶을 다루는, 인류에게 절제란 무엇인가?란 가르침을 준 첫 사상가로 소개한 <<지성개선론>> 또는 <<지성교정론>>에서 반복하는 것들은 되짚을 이유가 충분히 있다. 



0.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이 오십이 아니라 육십에 컹컹 개처럼 짓기만 했다는 걸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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