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수동성과 규율에 매여 있다고 가정되는 사용자의 작동에 관한 의문에서 탄생했다. 42 사람들은 이 사용자들의 피지배자라는 지위를 소비자라는 조심스러운 이름 아래 감춰버린다. 일상은 수천 가지의 밀렵 방식들과 함께 발명된다. 43
브리콜라주 언어학에서 ‘수행’은 ‘능력’이 아니다. 말하기 행위는 언어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말하기 행위는 언어학 시스템의 영역 속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화자에 의한 언어의 전유 혹은 재전유를 실행시킨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인 하나의 현재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장소와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타자와 계약을 맺는다. 발화행위의 이 네 가지 특성은 다른 실천들(걷기, 요리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46
일상적 창조성의 작동 절차 푸코의 ‘감시’의 그물망이 사방으로 확장되고 정교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 사회 전체가 그 그물망으로 환원되지 않는지도 알아내는 것도 그만큼 시급하다./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질서의 폭력이 어떻게 해서 규율의 테크놀로지로 바뀌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감시’의 그물에 걸려 있는 그룹 혹은 개인의 산발적, 전술적, 브리콜라주적 창조성의 은밀한 형식들을 되살리는 데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의 이런 작동 절차와 책략은 마침내 반규율의 그물망을 구성한다. 48
실천의 형식 기구 속에 침투해 들어가 숨어 있으며, 따라서 고유한 이데올로기나 제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작동들이 규칙에 종속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실천들의 논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는 기예 혹은 ‘실행의 방식’ 이라는 이미 오래된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記述적인 조사: 독서의 실천, 도시 공간의 실천, 일상적 의례화의 사용, 일상적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혹은 허용해주는) ‘권위들’을 통한 기억의 재사용 및 기능 등. 과학문헌시리즈: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이며 또한 역사학적인 작업들(어빙 고프먼에서부터 피에르 부르디외까지, 마르셀 모스에서부터 마르셀드디엔까지, 예레미 보이세바인에서 에드워드 로만까지) 은 의례와 브리콜라주의 혼합이면서 공간을 조작하고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실천들에 대한 이론을 공들여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 민속방법론적, 사회언어학적 연구들은, 일상어에 고유한 기대, 타협, 즉흥성의 구조와 관련 있는 일상적 상호작용의 절차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관습’ 철학과 기호학, 시간, 양태부여의 영역 속에서 분석철학으로 확장된 데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는 일상적 발화의 가벼운 움직임과 가소성을 붙잡으려는 둔중한 기구와 같다. 일상적 발화는 논리적 부문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조합된 것으로, 이것의 지배적 요소들은 정황과 정세의 긴급성에 따라 차례로 결정된다. 48-49
이 연구들은 시인의 회한을 만나게 되고, 시인처럼 망각에 맞서 싸운다. “ 그리고 나는 정황의 우연, 침착함 혹은 조급함, 햇빛 혹은 추위, 하루의 시작 혹은 끝, 딸기의 맛 혹은 버림받음의 맛, 반쯤 이해된 메시지, 신문의 헤드라인,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더없이 진부한 대화, 익명의 남자 혹은 여자, 말하고 살랑대는 소리를 내고 지나가고 스쳐가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49
다수의 주변성 텔레비전 방송 이미지들 앞에 앉아 있는 이주 노동자는 프랑스인 중간급 관리자와 동일한 비판의 공간과 창조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같은 층위에 있는 경우, 정보와 자산, 각종 ‘보험’ 등의 빈약한 수준은 책략과 꿈, 웃음의 증대를 초래한다. 유사한 장치들이라도 불평등한 역학 관계 위에 놓여 있다면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소비자들이 배치된 공간 내부에서 생산물 시스템이 수행하는 ‘작전들’을 구별해낼 필요,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주어진 행위의 여지 가운데에서 사용자들이 자신의 ‘기예’를 실행하는 경우를 구별해낼 필요가 발생한다. 50
실천가의 기술 수집된 자료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문제. 읽기, 말하기, 걷기, 거주하기, 요리하기 등에 대한 묘사. 과학 부문으로 확장하기. 세 가지 방향으로 진로 제시. 51
경로, 전술, 수사학 의지와 권력이 주체가 ‘환경’과 분리될 수 있는 순간부터 가능해지는 역학관계이 계산을 ‘전략’이라고 부른다. 전략을 장소를 전제로 한다. 이와 반대로 자기 고유의 재산에 의지할 수 없고 따라서 타자를 가시적 총체성으로 특징짓는 경계도 고려할 수 없는 계산을 ‘전술’이라고 부른다. ‘자기 고유의 재산’은 시간에 대한 장소의 승리다. 반대로 전술은 자신의 비장소성으로 인해 시간에 의존하고, 이득을 얻을 가능성을 ‘낚아채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가령 슈퍼마켓에서 주부는 자기 집 냉장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 자기 집에 올 손님들의 취향과 입맛, 기분, 가장 좋은 가격의 상품, 집에 이미 있는 것들과의 조화 등, 이질적이고 유동적인 정보들에 직면한다. 이는 기회를 ‘붙잡는’행위와 방식의 형태를 띤다. 일상적 실천들과 ‘실행의 방식들’ 대부분이 그렇다. 수를 쓰는 기예, ‘사냥꾼’의 꾀, 능수능란한 기동성, 다채로운 형태의 위장, 호전적인 만큼 시적이고 즐거운 우연한 만남 등. 52-53
전술들은 궤도를 벗어나 방랑한다. 소유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벗어나기에는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는 시스템 속에서, 전술은소비자를 이주자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전술들은 이 시스템 속에 일종의 브라운운동을 끌어들인다. 54
수사학은 ‘문체’를 기술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조작은 수신자의 의지를 바꾸는 유혹하고 설득하고 사용하는 기회 및 방식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전술의 유형들을 구별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54
읽기. 텔레비전에서부터 신문에 이르기까지, 광고에서부터 온갖 상품의 현현에 이르기까지... ...소통을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바꿔버린다. 그것은 눈의 서사시이고 읽기 충동의 서사시다. 기호의 통치로 변형된 경제학은 읽기의 포화를 조장한다. 생산-소비의 이항식은 글쓰기-일기로 대체할 수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훔쳐보는 자의 작격을 부여받은 소비자의 특징이라 할 수동성의 최고 단계인 것처럼 보인다. 55
독자는 타자의 텍스트 속에 즐거움과 재전유의 책략들을 슬그머니 끼워넣는다. 그는 거기서 밀렵하고, 거기로 옮겨가고, 신체의 소음처럼 거기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만든다. 책략, 메타포, 결합 등의 생산은 또한 기억의 ‘발명’이기도 하다. 이 생산은 단어들을 가지고, 무언의 역사의 출구를 만든다. 56
읽기는 따라서 수동적이지 않는 ‘기예’를 도입한다. 그것은 중세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이론화했던 기예와 유사하다. 중세 시대에 텍스트는, 네 개 혹은 일곱 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론에 둘러싸여 있었다. 57 달변가의 기예. 대화는 ‘상투적인 관념’을 다루고 사건들의 불가피성을 능숙하게 다루어서 ‘거주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기예 속에서, 언어 능력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이고 집합적인 결과다. 57
전망과 정치 1. 합리성이 상상적인 것과 맺는 관계들 2. 실천적 조사를 수놓고 있는 시행착오, 실용적 책략 및 연속적 전술들 그리고 최종 생산물로서 수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전략의 표상들 사이에 있는 차이. 58 콜라주는, 담론에 의해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론적 열망들을, 사무실과 실험실의 일상적 작업 속에서 끈덕지게 살아남는 아주 오래된 책략들의 영속성과 나란히 놓는다. 59
이제 개인에게는 그 틀에 관해 책략을 쓰고 ‘수를 쓰며’, 전자 기술화되고 정보화된 대도시에서 옛날 사냥꾼이나 촌부들이 가졌을 법한 ‘기예’를 찾아내는 것만 남았다. 오늘날 사회 조직의 원자화는 주체의 문제에 정치적 관련성을 부여한다. 59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키 나는 언제나 근처에 있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온갖 작은 즐거움에 더욱더 기대햐 했습니다. 당신은 이 작은 사소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만큼 거대해지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일이죠. 60
불확정적인 것들
일상적 실천들은 국지적이고 따라서 분류가 가능한 저항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용한 전복, 거의 맹목적이라 할 만한 전복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복의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장소의 ‘편재성’ 그리고 시간 속의 결함이다. 이것은 계층화된 사회 공간은 통제 가능하고 구성 가능한 표층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변화들은 상황에 관련된 생각지 못한 요소를 계산된 시간 속으로 다시 끌어온다. 계층화된 공간의 두께, 행동 속의 책략, 그리고 역사 속의 사건들의 비가독성. 이를 상기시키는 글쓰기는 아이러니하고 또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것으로 그라피티처럼 그려져 있다. 마치 벽에 그려진 자전거가 공통의 이동의 상징으로서 불확정적인 여정을 떠나기 위해 벽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352
뭔가를 제조해내는 보편적인 테크놀로지의 글쓰기 아래에는 불투명하고 완고한 장소들이 영속하고 있다. 거기서 역사의 혁명, 경제적 변화, 인구의 혼합 등은 여러 층을 이루고, 관습, 의례, 공간적 실천들 속에 내재하고 있다. 이전에 그것들을 분명하게 표현해준 읽기 쉬운 담론들은 사라졌거나 혹은 언어 속에 오직 단편들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이 장소는 표면상 콜라주처럼 보인다. 이는 두껍게 여러 층들로 이루어진 공간 속 여기저기에 편재하는 것이다. 즉 이질적인 층들의 더미이다. 각각의 층은 책 속의 낡은 페이지처럼, 영토의 통일, 사회경제적 분배, 정치적 갈등, 동일시의 상징화 등에 관한 상이한 방식을 가리킨다. 폐허가 된 전체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동시대적이지 않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집합체는 미묘하고 보상적인 균형에 의해 관리된다. 이 균형은 상보성을 은밀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극미한 움직임, 다양한 형태의 활동들은 “전자, 양자, 광자 등이 뒤섞인 걸쭉한 상태, 즉 영속적 상호작용으로 제대로 정의되지 않는 특성을 가진 이 모든 존재들”에 상응한다. 353
변화무쌍한 시간은 단지 생산 속에 ‘사고’와 결함을 일으키는 밤처럼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시스템의 오류이고, 시스템의 악랄한 반대자이다. 역사 서술이 타자의 이런 부조화를 과학적 명료함의 투명한 유기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쫓아내려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미래 예측이 하지 못하는 것을 역사 서술자가 보장해준다. (가공의) ‘이성’을 생산해냄으로써 불확정적인 것의 외설을 라리고자 하는 동일한(근본적) 요구에 복종하면서 355
이성의 결함 혹은 실패는 분명히, 이성을 또다른 차원, 즉 사유의 차원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맹점이다. 이 사유는 파악할 수 없는 필연성처럼 다른 것 위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상징적인 것은 실패와 분리 불가능하다. 기회와 맺은 관계 위에, 즉 변화무쌍한 시간 위에 근거하고 있는 일상적 실천들은 따라서 사유의 행위들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계속 분산될 것이다. 이는 사유의 영속적 몸짓들이다. 355
볕뉘
1.
이론과 실천이라는 흑과 백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칼날로 세상을 자른 뒤에 세상은 얼마나 잘나갔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파랑과 빨강으로 우리는 무엇을 그려낼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거나 느낄 수 없게 된 것일까? 이론과 실천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우리를 갑갑하게 만들었을까?
2.
이성과 감성이라는 분류처럼, 사이사이 널 뛰고 끓어넘치는 팔팔한 것들을 숨죽이면서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무뎌진 것일까? 그것을 버무려 살아있는 반죽처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앙꼬가 빠뜨려 얼마나 무미한 일상을 살아왔던 것일까? 따로 따로 떨어진 낱개로 만들어 고체로 만들어버린 그 분류법에는 뭔가 넘치는 것이 없다. 흐물흐물하여 움직이거나 날라가는 향기조차 없다. 실험실이란 밀폐된 공간에 제작해내는 포름알데히드에 갇히 병속의 생물이다.
3.
이론과 실천이 사이에는 끊임없이 그 갑갑함을 메우고 만드는 다른 세계, '딴짓'이 있다. 그 사이는 공예가 있고, 서커스가 있고, 마술이 있고, 예술이 있다. 그 세련된 손맛 입맛 발맛이 서식하는 세계다. 거기에는 작명하거나 찍어눌른 이름의 압제에서 찢고 나오는 것들고 충만하다. 자본주의라니. 그런 고체화된 명폐라니, 어설프기 짝이 없구나. 신자유주의라니. 정동자본주의라니 금융자본주의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4.
여기는 꿈틀거리거나 그 흐름 플럭스, 벡터만이 있다. 생동하는 맛, 느낌, 일상의 꿀. 여기는 삶이 끼어들 수 있는 세상이다. 이성과 감성이란 이분의 시각은 몰상식하다. 욕망-기쁨-슬픔이란 정동이란 색깔은 모든 변화하거나 꿈틀거리는 것들의 색을 조제해낼 수 있다. 여기에 가느다란 분출하는 일상의 샘이 있다.
5.
둘로 나누다보면 닮지만, 이렇게 셋으로 넷으로 다섯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거나 만질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곳. 응시하다 물끄러미보다 하고싶더 만지작하다보면 어느새 내 몸은 파랑 빨강 노랑 온몸으로 칠할 수 있는 붓이된다. 나는 이제 온전히 삶 속으로 다가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보는 눈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 만드는 손, 점선을 실선으로 만드는 발. 천연색 실뭉치다.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나오자 마자 물들일 수 있는 색의 찬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