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로 진출하는 젊은 인원의 감소는 종종 사회적 현상으로 분석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명백하게도 ‘진짜’과학의 까다로운 요구에 자신을 헌신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즉각적인 보상이 있는 직업을 찾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사회적 사실의 무고한 희생자가 된다. 비판자들은 이제 사회가 더 이상 연구자들이 우리 모두를 대표해 수행한 위대한 모험에 경의를 표할 줄 모르며, 심지어 인류의 진정한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47
동원된 군대는 어떤 이유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가?’이며, 황폐화된 들판이나 폐허가 된 마을과 같이 그들이 지나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그들을 지체시키지 않을 것이다. 주저함과 망설임은 반역과 동의어가 된다. 73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은 구글 어스처럼 지구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이 위치한 국가, 도시, 거리, 집을 찾아내는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다.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자신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응답하는 작업 방식에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질문을 제기하는 타인의 존재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그 상황에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들여오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종류이든 형이상학적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상황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77 이상 2장 올바른 자질을 갖춘 연구자들
여전히 연구의 질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학술지 순위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는 별개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은 바로 논문 출판의 횟수를 줄이고, 심사위원들이 논증이 잘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본질적인 관심 없이 약간의 점수를 얻기 위해 서둘러 발표된 부분적인 결과에 불과한지를 시간을 들여 판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모델을 ‘빠른’ 과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에서는 유능한 동료들에게만 전달되는 지식의 누적적 생산과 ‘통속하된’ 형태의 지식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이와 함께, 나는 과학의 속도를 늦출 것을 호소하고 싶다. 이는 정직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동료들에게 공정하게 인정받던 다소 이상화된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과학의 다원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어야 하며, 서로 다른 유형의 연구에 적합한 평가 및 가치화의 방식에 대한 다원적이고 협상적이고 실용적인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87-88
민속지학. 연구자들이 보고한 것은 ‘-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사이의’ 지식이었다. 이는 연구자 자신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는 지식으로, 그가 던진 질문은 사물들, 준재들, 관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방식들에 의해 시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변화가 수반하는 위험이나 위해까지도 동료들 모두에게 관련이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은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유능함이란,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한 동료가 무엇을 배웠는가, 어떤 한계에 맞닥뜨렸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거나 그 의미를 인식했는가 등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둔다는 데 있다. 나아가 연구자가 자신을 어떻게 위치지어야 했는지, 즉 자신의 사유 방식, 청취 방식, 예측 방식 자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에도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그러나 나의 접근 방식은 여기에 비난이나 영웅주의의 의미를 담지 않고 오히려 수련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112
나의 접근법은 결국 충분히 단순한 하나의 가설에 대응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그 가설이란, 근대과학 개념과 관련된 지식 유형은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 논증적이지 않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명제에서 다음 명제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러므로’들로 장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지식은 모든 ‘그러므로’를, 그것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라는 사건과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이는 그 지식의 가치가 미결 상태로 남게 됨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사고실험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즉 지식 구성의 역동적 집단들이 이러한 ‘미결’ 상태를 창조하는 기술을 배우는 수련의 과정으로 함께 모일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117
과학과 기술-산업적 혁신 간의 공생은 이제 직설적인 포획 관계로 뒤바뀌었다. 만약 이러한 가치가 진보와 근대화라는 지배적 담론에 포획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가치화’라는 용어는 ‘문제’와 동의어가 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을 ‘느리게 한다’는 관념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감속에 참여하도록 훈련될 수 있을지의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를 내면화하도록 요구하는 모든 평가와 판단의 방식들에 도전함으로써 말이다. 120
대상자는 자신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연구자를 ‘포획’하여 그들의 대변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포함된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공생적 상호연결을 이룬다. ‘방문하는’ 연구자와 그를 맞이하는 사람 모두 서로를 포획하지 않기로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배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사회과학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120-121
누구도 ‘정말로 중요한 것’을 일반적으로 정의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도덕적 금지가 아니라 공생적 문화의 조건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각 주체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각자가 타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타자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해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질문의 가치는 당연히 연관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질문이 일방적으로 강요되지 않아야 하고 답변이 강제로 얻어진 것이 아니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바로 연관성이라는 기준이야말로 타자가 무엇을 ‘믿고’있든 간에 ‘정말로 중요한’ 것을 추출해내려는 꿈을 몰아낸다. 126-127
파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미국 활동가들이 ‘되찾기 reclaiming’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저항, 즉 회복하고 치유하고 우리가 단절되었던 것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복’의 과정은 우리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으며 너무 오랫동안 그랬던 나머지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병과 그것을 유지하는 모든 것을 ‘정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129 이상 3장 어떻게 하면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이처럼 쿤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을 보다 포괄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하는 왕도가 되었고, 보편주의적이라는 과학의 지위를 강등시켰다. 물리학처럼 보편성을 주장해 온 과학조차 모든 이성적 인간에게 합의를 종용할 수 있는 실재에 접근할 특권이 없다면, 이는 모든 지식이 사회적 구성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37 오리-토끼 텍스트 . 토끼를 보는 이들은 축적성을 띠는 ‘정상’ 과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퍼즐로 간주하고, 그 해법이 패러다임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겐 패러다임의 공약불가능성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콰학자들은 쿤이 퍼즐이라고 부른 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이를 성공적으로 풀어내기까지의 과정, 즉 패러다임이 예측한 것이 실제로 검증되기까지가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139
플렉을 다시 읽으면서 주제를 파악하는 불안정한 방식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는 퍼즐이 없기 때문에 어떤 패러다임도 없다. 파스퇴르와 코흐의 경직된 사고 방식을 다루는 플렉의 온화한 유머가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쿤이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을 수립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각각의 질병, 각각의 미생물, 각각의 문화가 각기 예측 불가능한 질문을 계속해서 제기하며, 퍼즐 풀이자의 자신감보다는 냉철한 주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플렉의 질문은 해당 분야에서 다루는 대상의 내재적이고 복잡하게 얽힌 가변성으로 인해 대체로 사실이 단일한 해석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질 수 없는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바서만 검사에 다다르기까지 집단 구성원들 간의 지속적인 협력과 상호작용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만약 매독이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면, 이 물은 수천 개의 개울로 흩어진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매독 유행이 촉발한 이 아우성이 중력장이었다. 기존 사유의 흐름과 새로운 사유의 흐름이 발전하고 서로 얽히며, 서로를 수정하고 합류하고, 마침내 ‘진정한 발견’으로 인정받게 될 것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중력장은 바로 이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고 지배적인 지향점을 제공한다. 148-150
공통의 관심사가 걸린 문제를 둘러싸고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들과 조우하는 시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집단적 학습의 문제이다. 이러한 수련 과정은 근대 집단에게 내가 ‘문명화되기’로 규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과학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을 문명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명화란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에게 모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즉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158
1929년 플렉이 자연과학에 대해 ‘민주적 실재를 형성하고 그 실재에 의해 연출되며, 따라서 그 실재에 의해 재형성되는 기예’라고 했을 때, 그는 아마도 어떤 초월적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연적’실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민주적 사고 방식’이 ‘장인, 뱃사람, 이발사, 가죽 세공업자와 안장제작자, 정원사, 그리고 아마도 놀이에 몰두한 아이들 사이’에서 처음 발달했다고 기술했다. 그는 이어서 “진지하거나 재미있거나에 관계없이 여러 사람이 해당 작업에 참여할 때, 공통되건 상반되건 이해관계들이 반복적으로 만날 대, 이러한 독특한 민주적 사고방식은 필수적이었다고 썼다. 163 이상 4장 루드비크 플렉, 토머스 쿤 그리고 과학을 느리게 하는 과제
이것이 느린 과학이 응답해야 할 도전일지도 모른다. 과학자들로 하여금 혼란스러운 것은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그와 함께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말이다. 빠른 과학과 산업의 공생은 이 세상의 혼란스러운 복잡성으로부터 추상화하는 단절의 전략과 단절된 지식에 특권을 부여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혼란을 무시하고 근절하기를 꿈꾸는 가운데 세상을 망쳐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느린 과학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혼란스럽다고 여기는 것, 즉 소위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다루고 그로부터 배우는 기예를 되찾는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말이다. 187
되찾기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과학 연구를 되찾는다는 것이 과학을 혼란스러운 세상에 다시 뿌리내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세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새롭게 발생하는 가치들과 총체적 상호작용 속에서 개별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습관“을 육성하고 강화하는 법을 배우는 문제이다. 이것은 이미 강조했듯이, 전문화와 추상화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데, 이 둘은 분명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식이란, 단지 우리의 추상화가 도출된 어떤 원본을 잔여물로 취급하지 않거나, 그것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하다. 189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들을 정의하는 방법이 아니라 육성하는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지속시키는지, 무엇이 그것들을 방해하거나 해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합리화된’ 산업 농업의 빠른 지식 대신에 정원사의 느린 지식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대학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실제로 극단적으로 균형을 상실한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되찾기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병들었기에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191
우리는 또한 화이트헤드의 정의에 나오는 미지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되찾은 것이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해 살 만한 미래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른 투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찰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는 오히려 내가 ‘부분적인 연결들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곧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것, 배운 것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경험에 대해 우리가 빚진 바를 인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경험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화의 효과를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탐구할 때 말이다. 195-196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이동민족. 윌리엄 제임스의 다중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 마리오 블레이저 Mario Blaser의 용어로는 언제나 하나보다는 많고 다수보다는 적은 것을 엮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로 하여금 느끼고 사고하게 만드는 사상들이 현실에 무언가를 ‘더할’수 있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시험될 것이다. 전달은 결코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윌리엄 제임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다중세계와 관련된 ‘위대한 질문’이라고 정의한 것과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한 것을 포함하여 전달하는 것이 가치를 높이는가 아니면 떨어뜨리는가? 우리가 더한 것은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196-197 이상 5장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을 위한 호소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따른다. 그는 관계 맺기에 원초적 중요성을 부여했고, 그가 다중세계라고 불렀을 것을 구성하는 일을 중시했으며, 관계맺기 능력 그 자체를 문명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225
도너 해러웨이가 강조했듯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살해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중요한 점은 일부 동물만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정의하며, ‘살생하지 마라’는 계율의 보호를 그들과 공유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들 중 누구의 희생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니라’. 여기서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거 가능한 존재로 규정하지 말지니라’. 이상 6장 코스모폴리틱스: 근대적 실천을 문명화하기
볕뉘
1.
느린 과학이란 단어를 얼핏보고 적정기술이나 중간기술이란 개념은 아닐까? 늘 하던대로 시민과학의 맥락을 갖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읽는 초기에 어 뭐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자마자 빠른 과학이란 개념이 왔다. 아 그렇구나. 방법에 대한 이야기면서도, 좀 더 읽자 근본에 관한 이야기구나 한다. 2010년의 느린 과학의 선언문까지. 참 맥락을 잘 짚었구나했다.
2.
책방 사장님과 4장까지 훑어보고 얘기나누다가 5,6장이 본격적이라고 해서 퇴근해서 마저 읽다. 미래세대가 대체 당신은 뭘했느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있느냐구 다그친다. 뭘 열심히 했냐구 말이다. 마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다. 라투르의 이야기도 많이 겹치고, 이분법 구조에 벗어나는 미생물의 사례, 플렉을 쿤과 대비시키는 지점에서 탁월함을 느끼게 된다.
3.
코스모폴리틱스.
4.
일원론. 과정으로서 활동. 경로적분. 일상의 미분. 으로 사물과 흐름들을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인다. 보살핌, 살림, 돌봄에 충만함이 어떻게 연결되고 퍼지거나 번지는지 목격할 수 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목에 늘어뜨니고 나누고 살피고 자라게 하는 것이 점선에서 실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벙어리처럼, 시각장애처럼 뜬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손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