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


만일 생명이 물체적 사물들에도 귀속된다면 어떤 것도 생명을 결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생명이 신체와 영혼이 통일된 사물들에게만 귀속된다면, 생명은 오직 인간들에게만 귀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마도 동물들에게도 귀속되겠지만 정신들이나 신에게는 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명이라는 단어는 보통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정신들과 결합하지 않은 물체적 사물들에도 그리고 신체와 분리되어 있는 정신들에도 귀속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260-261

 

우리 편에서 이해하는 생명은 사물들이 그것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도록 하는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사물들 자체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 자체는 생명을 가진다고 적절하게 말한다. 그러나 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힘은 다름 아닌 그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하게 말하는 것이다. 261 이상 <신의 생명에 대해서>

 

2. 일원론


원이나 삼각형의 본질은 그것이 영원한 진리인 한 아무도 그 진리가 아담의 시대보다 더 오래 계속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지속>은 더 길거나 짧은 것으로 또는 부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어떤 지속도 신에게 귀속될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신의 존재는 영원하므로, 곧 신의 존재 안에는 어떤 이전이나 이후도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지속을 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 239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의욕하게 하는 신의 의지는 그의 무한한 지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들이, 말하자면 신의 본질과 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신의 지성과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의욕하는 신의 의지가 서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우리는 파악할 수 없다. 269

 


3. 데카르트의 오류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주의자들과 아울러 회의론자들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자명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한다. 중세 스콜라철학은 보편논쟁에 치중했으므로 공리공담에 몰두했고 다라서 중세는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 있게 탐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암흑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1. ‘보편은 실재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에 선행한다 실념론 2. ’보편은 실재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 안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온건 실념론 3. ’보편은 명칭이며, 보편은 개별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유명론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보기에 스콜라철학자들은 실체를 연장으로부터 구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념들을 혼란스럽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사용하는 실체 관념마저 혼란스러운 관념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기초로 삼아 탐구된 관념이야말로 명석판명한 관념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그가 <<방법론>>에서 회고하고 있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그가 배운 수학, 특히 기하학과 대수학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철학자들의 보편논쟁만 보더라고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추상적인 논쟁이므로, 수학을 보편적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생각한 데카르트에게 보편논쟁은 혼란스러운 관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기본 원리를 형이상학으로 보느데 형이상학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옳게 사용할 필요가 있고, 이성을 옳게 사용하는 학문은 다름 아닌 논리학이다. 데카르트는 기초 학문으로서의 수학이나 논리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보편 학문의 보편적 방법론으로서 수학과 논리학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314-315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과 같이 데카르트도 서구적 역사와 문화의 한계 안에서 방법론적 회의의 결과 제1원리인 나는 생각한다의 주인공인 정신적 자아를 찾아내고도 이 명석판명한 자아 관념을 보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원적 토대로서의 신 존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자기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떤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이지만 그것들은 신을 제외한 이차적 실체라는 것이다. 신은 일차적 실체이고 정신과 물질은 부차적 실체이다. 319


볕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처음이다. 선선하다. 이 단어는 달릴 수 있다거나 달려도 괜찮다로 이어진다. 27도만 넘으면 이내 시들해지는 몸을 챙기기가 쉽지 않다. 나름대로 달림 전술이 생긴 셈이다. 어제 낮짬을 이용해 무척이나 서서히 달리는데도 심박이 높다. 중간중간 쉬는데도 높아, 기기가 이상한가하다가 절반이 지난 뒤에야 잔잔해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몸을 살피지 못한 연유가 아닌가 싶다. 짬짬이 달려준 하루. 일찍 잠들어  한밤 중에 일어나 책을 마저 읽다.


친절하게도 해설편에 데카르트 저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어 한결 수월하다. 자연이란 실체는 자기원인을 갖는 하나다. 둘이 아니라 하나다. 스피노자의 증명은 스스로 말하는 정의나 공리를 청자의 눈높이에서 시작한다. 만약에 둘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된다. 이렇게 반대편에서 서서 주장과 간극을 좁혀들어간다. 그 사이에 단차는 거의 없다. 완만하게 물이 차오르듯 채운다. 이제서야 중동태 책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스피노자의 저작서술을 언급한 이유가 들어오는 듯싶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은 아마 둘이 아니라 하나다. 라는 일원론이 갖는 매력같기도 하다. 이런 방법론은 자본론 저작의 마르크스가 쓰는 탐정술과 닮아있기도 한 듯싶다. 간극이나 빗나간 생각들로 단정짓거나 확정하지 않은 기술. 그렇게 봐야하지 않을까. 아니 일원론의 시각을 갖는다면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단순명쾌하다. 유물론은 갈지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경로를 짚는 듯한 느낌. 맞다. 이런 것이 상쾌함은 아닐까 싶다.


생명을 중세처럼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서로 위계를 두지도 않는다.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도록 하는 힘이다. 얼마나 짜릿하다. 양자역학이나 우주의 빅뱅론. 영원히 되찾게 만드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상가 누구라도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가보다. 계속 읽다보면 패턴과 글쓰기가 느껴진다. (조금만 더 힘내시길)


안타깝기도 하지만 데카르트의 대전제, 그 실패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그 덕에 많은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심신 상호작용설, 자유의지라는 족쇄에 매여, 더 나은 사유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니. 아니 그렇게 살아가다니. 그렇게 살아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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