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감과 죄책감과 분노라는 이 뜨거운 정동 트라이앵글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극히 일부 본격좌파들 외에는 '민주 회복'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반군부독재 세력의 의식 수준은 극적인 수준으로 급진화되었다. 346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리얼리즘들'의 배경에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전제로 1930년대 소련에서 수립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불변의 교리, 즉 자본주의 사회는 필멸이며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 필멸의 역사 과정을 예견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농민, 소시민 등 다른 피지배계급과 연대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는 낭만적 확신을 전형적 인물과 전형적 상황 속에서 형상화하는 유일의 문예미학이자 창작 방법론이라는 교리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359
성민엽은 <전환기의 문학과 사회>에서 "상품의 물신숭배와 의식의 사물화가 더욱 진전되어 공식화된 문화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소시민계급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트까지 혁명적 의식화의 가능성이 사물화된 의식의 변질"될수 있다고 보았다. 정과리는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민중문학론이란 "(민중의) 의식, 무의식, 문화를 민중의 이름하게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하나의 이념적 담론"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은 민중의 구체적 삶과는 처음부터 분리된 것이며 새로운 상징적 위계질서를 수립하려는 간교한 "소시민적 엘리티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363
보통 시민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충만한 개별자로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혁명가로 산다는 것은 낭만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나면 사실은 어떤 급박한 정세 속에서 매우 경직된 교조적 구속을 받아들이고 그 논리 속에 자기 자신을 분해해서 조힙해 넣는 탈주체화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그러한 교조적 조건과 집단의 속박 속에서 지도자건 기수건 나팔수건 혹은 전위건 하나의 나사, 혹은 톱니로서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서 다른 주체들과 자유롭게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외부에서 연료를 얻는 불쏘시개나 장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나오듯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홀로 있어도 끝없이 타올라 빛나는 무한 에너지원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충만한 개별자로 살 수 있을 때, 그는 누군가에 의해서 동원되는 소외된 존재로서 어떤 위계질서 속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단독자들의 수평적 연대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게 되는 것이다. 477-478
볕뉘
1.
사람은 사람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한다. 딱히 무엇이다라고 짚어낼 수는 없지만,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자기원인이 있기때문이다. 코나투스. 변치 않는 무엇이 있기에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도 그 색깔은 묘하게 겹쳐있다.
2.
누군가 이야기한다. 사르트르가 최후의 인간주의자라고 말이다. 인간이 그럴 수 있냐고 그러면 안된다고 깃발을 휘둘렀지만, 더 이상 그런 인간은 없게 되었다. 자아는 없다. 원자화된 개인은 더 이상 없다. 자유의지도 없다.
3.
이상하다. 사람은 인간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니 말이다. 운동권인 집단화된 실체는 있는 것일까? 과잉대표된 운동권들과 정치인들은 있어도 미안함과 부채로 그 여백과 허전함을 채웠던 일상인들인 운동권세대는 과연 있는가 없는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나타나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개인은 있는가 없는가? 그 개인들 사이 사이 연결된 부채감과 상실감, 한 시기를 들끓었던 분노라는 것이 서로를 이어주기도 하니 개인과 집단을 폄훼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잘 살펴보는 것도 큰 일이다.
4.
새로운 앎. 새로운 지식. 새로운 깨달음은 지난, 스친 과거들을 새롭게 세운다. 때론 그 경험이 새로운 지평들로 열리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과거로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저자가 고백하는 것처럼 혁명가는 운동권이라고 하는 자는 엘리트의식과 계몽의식에 절어있는 존재였다. 소련의 비밀혁명가가 모델이었다니. 따르고 쫓던 비밀혁명가들의 롤모델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5.
1980년대를 돌아보는 책들은 많지는 않으나 틈틈히 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히 진중하게 논의된 바도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느냐는 늘 현재 진행형이자 그룹의 우월감은 그림자보다 빠르게 일어서서 과거를 지우려한 것은 아닐까? 과거를 제대로 본다거나 새로운 시선으로 살핀다는 것은 접힌 미래를 새롭게 펼친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1991년을 살펴보는 건 뒤늦었지만 중요한 포인트다.
6.
곡절이라는 걸 겪고 또 다른 지반이 세워진 때다. 자기중심성을 갖는 개인들의 연합을 지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나도 피고 너도 피고, 함께 꽃피우는 세상이 되길 소망하는 저자의 간절함이 읽힌다.
7.
어쩌면 만들어진 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걸 발견하고 체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지향하는 열린 나들이 세상을 좀더 시원하게 할 수 있진 않을까? 사이, 사이를 채워나갈 수 있는 우리들이라면, 목적론에 취한 인간 밖을 살아갈 수 있는 코스모폴리틱한 세상을 보며 바꿀 수 있는 힘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0.
저자가 황해문화 편집주간으로 계실 때, 글들을 마음 깊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또한 시대를 읽어내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