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 시달렸다. 8

이 모든 것이 배움의 과정이었다. 여성주의자는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 그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 피해자/운동가/연구자의 차이와 위계를 넘어 ‘당사자 actor’로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나는 이 책을 쓰면서 한 시간 쓰고, 한 시간 울고, 한 시간 자는 상태를 반복했다. 7

나를 포함하여 여성들은 매순간 인간으로서 ‘권리‘와 여성으로서 ‘도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모두 ‘결정 장애‘에 시달린다. 남성 사회는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보다 도리를 아는 여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5

인류는 가족 제도의 응원 속에 한 인간이 ‘아내‘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를 건설해 왔다. 그것을 사소한 문제, 탈정치적 문제로 치부해 왔고 철저히 비가시화했다. 남성 문화는 자기가 ‘정복한 여성‘은 구타해도 된다고 약속했다.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의 섹스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고 소유되는 절차였다. 부부 강간이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다. 가정 폭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폭력이다. 5

볕뉘.

1. 서문을 읽다가 자아, 경험하는 자아와 말하는 자아의 간극에 걸렸다. 그리고 그 다음 당사자와 연구자, 운동가, 피해자라는 말의 농도 차이도 그러했다. 어쩌면 두려움이라는 넘사벽이라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교통사고가 날 수 있고,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 노숙자가 될 수 있는 무수한 경로를 가늠해보는 것이 아니다. 실직자와 장애자, 노숙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자마자 모든 연민을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늘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2. 다행이다.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삶, 생활.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동성애. 나의 자식이 그러하다면? 이런 질문 자체가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 시점이다. 이렇게 생각은 일상의 벽을 두고 넘지 않는다. 변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다.

3. 비단 ‘여성‘이라는 키워드만이 아니라, 사장과 직원, 자본가와 노동자 역시 당사자로서 유격과 일상의 간극은 크고도 멀다.

4. 연구자/운동가/피해자와 ‘당사자‘의 거리는 멀고도 험하다. 울고 불고 바닥과 경계 사이를 넘나드는 실존의 벽이 없다면 늘 무늬만일 것이다. 그 이전의 존재의 연민. 그 상상력과 감정의 곡절을 헤아려보는 연습을 해보지 않는다면 더 요원할 것이다. 스스로 가장 두렵다. 어정쩡하는 모습 말이다.

5. 힙한 생활 혁명이라는 책 목차를 넘기다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부활한 잡지‘ ‘세상의 움직임에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장소를 만든다‘는 두 꼭지를 넘겨본다. 미국 브루클린과 포클랜드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힙스터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장소와 공간, 그 관계의 에너지를 높이는 일들. 그것을 만들게 됨에 따라 그 일상의 자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 실뿌리들을 다시 살펴보면 어떨까. 곁의 관계들이나 일상의 점선들이 어떻게 실선으로 바뀌고 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 일상의 점 하나, 선 하나를 보탠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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