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 한나 아렌트 영화와 책을 같이 새긴다. 그리고 동아시아 오백년을 읽고 저자의 얘기도 같이 마음에 들였다.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다른 것들이 마음으로 밀려온다. 미처 담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한 그릇 생긴다. 똑 같은 역사를 읽어도 문화와 경제와 삶의 관점이 이리 다르다. 하지만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또 다른 걸음과 속도만큼 제 길을 가는 것이기에.

볕뉘.

1. 아렌트의 영화와 인터뷰 책은 흡사하다. 영화가 담는 아우라가 크다. 3장(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으로 두번 째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 싶다. 어쩌면 더 강하게 회자될 인물이기도 한 듯싶다.

2. 현 한반도를 지정학적요충지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지경학적 요충지`로 읽어야하며, 그때문에 120년전 상황과 흡사해지는 것이다. 문화적다원주의보다. 평화와 삶의 관점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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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적 장애모형의 핵심은 마치 성이라는 영역에서 섹스와 젠더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장애의 영역에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이라 할 수 있는 임페어먼트와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태라 할 수 있는 디스어빌리티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자가 생물학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이라면, 후자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억압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7

 

올리버가 1990년에 출간된 장애의 정치에서 던지고 있는 기본적인 질문은 왜 장애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개인화되고 의료화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회 내에서 장애가 이렇게 개인화되고 의료화된 것이 아니라면, 장애인들의 장애의 개인화와 의료화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발생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단초와 열쇠는 무엇인지 해명해야된다고 말합니다. 56

 

헤게모니 이론의 성립에 있어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그람시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그 사회의 구조와 갖는 필연성 내지는 긴밀성의 정도에 따라 유기적 이데올로기자의적 이데올로기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올리버는 이러한 그람시의 구분법을 차용하여 장애와 관련한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핵심 이데올로기주변 이데올로기로 구분하고, 전자의 핵심 이데올로기로서 개인주의를, 후자의 주변 이데올로기로서 정상성에 기초한 의료화를 지목합니다. 87

 

인간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풍요로움에 기여를 하는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 인정받는 사회라면,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사회적으로 더욱 적실한 것이라면, 장애인의 노동은 전혀 다른 지평 위에서 그 가치를 발현하게 될 것입니다. 90

 

애벌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현재 장애인에 대한 노동의 기회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복지 체계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진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격감시키면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연계 복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는 전체 장애인들이 일정한 수준에서나마 해방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복지 체계가 유지되고 향상되며, 무엇보다도 민주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72

 

장애 정치가 어떤 실질적인 힘과 가능성을 지니려면 광범위한 대중의 결합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봅니다. , 단지 현재어떠한 손상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 장애인으로서 정체화된 사람들만을 결집시키는 것을 넘어, 보편적 대중과 접속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 모두가 단지 일시적 비장애인 the temporarily able-bodied'이며 나이가 듦에 따라 대부분 장애인이 된다는 것, 비유하자면 얇은 당의정에 싸인 알약처럼 그 껍질이 녹을 때까지만 소쉬 정상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구체적 사안들을 중심으로 보편성의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늙어서 죽게되지만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장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권자들의 고정된 사고방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이 필요합니다. 198

 

사회운동 정치와 제도권 정치 간의 관계가 자기 폐쇄적인 회로 내에서 순환하지 않고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사고될 수 있으려면, 정치의 이중성 테제의 확장된 적용, 확장된 정치의 이중성 테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확장된 정치의 이중성 테제는 정치의 이중적 속성과 이중적 과제라는 문제 설정이 보편성과 당파성이 라는 대립항만이 아니라, 정치와 관련된 여타의 다른 대립항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음을 표현합니다. , 적어도 좌파의 정치에 있어 파괴의 정치와 구성의 정치는 동시적 과제이며, 과학에 입각한 정치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정치로 전화될 수 있을 때만이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고, 보편성의 정치는 계급성(당파성)의 정치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정치 일반이 관철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8

 

2.

 

인간은 사회의 모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에 따라 그 대상에 행동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토머스는 인간이 어떤 상황을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것들은 그 결과 속에서도 실제적인 것이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맥나이트는 부주의한 사회The careless society라는 저서에서 문제로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라고 말하지요....장애에 대한 정의는 하나의 출발점이자 매우 핵심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7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한 개인은 대개 하나의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노동의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수행했으므로, 이러한 노동에 대해 자신만의 통제권을 일정하게 실현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형태 속에서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 즉 사지의 일부가 불완전하거나 청력 또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였던 사람들 역시 가족 공동체또는 장원 공동체라는 집단적 노동력의 일부로 통합되어, 나름의 속도와 방식으로 농업과 가내공업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76

 

노동력의 상품화에 따른 개인주의와 연동되어 자연스럽게 구축되어 있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의존성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존성 이데올로기가 일반화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사회정책들은 기본적으로 장애인을 의존적인 대상으로서 바라 보며, 대개는 이러한 장애인의 위상을 고착시키고 더욱 강화시켜 내게 됩니다. 88

 

자본주의 전환기를 기점으로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이 광범위하게 발생합니다. 따라서 근대적 권력은 이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고, 살게 만들 때 능동적 권력 행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요. ...멜더스가 인간은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사회 전체의 증대를 이끌 수 있다라고 주장한 것도 근대적 생명 권력의 한 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죽게 내버려 두는 것과 더불어 살게 만드는근대적 권력의 속성이 각인되어 있는 위생이란 단어는, 그 말뜻 자체가 생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의 생명이란 어떤 개개인이나 죽음의 위기에 처해 보호가 필요한 구체적인 사람들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내지는 인구 전체의 생명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97-98

 

사회적 장애모형의 성립은 장애 정의로부터 출발합니다. 기존의 장애 정의가 손상과 장애를 하나의 연쇄 관계 내지는 인과관계로 바라본다면, 사회적 장애모형의 장애 정의는 손상과 장애를 분리시켜 각기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러한 손상과 장애의 구분을 통해 사회적 장애모형은 장애를 사회적 억압으로 개념화할 수 있었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여러 이론적 흐름들로부터 다양한 비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손상과 쟁애이 관계는 사회적 장애모형의 성립에 있어 핵심적인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첨예한 논쟁의 지점인 것이지요. 102

 

장애의 존재로적 본질은 신체적·정신적 손상이다라는 의료적 모형의 장애 개념이 하나의 명제라면, ’장애는 손상된 몸을 지닌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장벽이라는 사회적 모형의 장애 개념은 이에 대한 일종의 반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합명제는 손상은 사회적인 것이고, 장애는 신체화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휴즈는 표현합니다....몸의 사회학 입장에서 현대사회는 주요한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이 몸을 매개로 형성되고 표현되는 소위 신체사회의 성격이 점차 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거식증, 히스테리...생명청치 역시 점점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됩니다.) 106-107

 

올리버는 민영화와 시장화된 서비스 제공과 소비자주의 결합이 일종의 슈퍼마켓 모형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슈퍼마켓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도, 장애인을 고려한 물건의 적절한 배치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는 슈퍼마켓의 선반에 어떤 물건이 놓이는지도 소비자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권과 통제권이 전혀 실현될 수 없다고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149

 

 

3.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뿐 아니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것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배우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심지어 산소를 생산하는 나무들의 활동까지도 노동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정서적 삶에 가치 있는 것모두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기에 대가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166

 

애벌리는 복지의 본질을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간의 투쟁에 의한 모순적 결과물이라고, 폴라니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중적 운동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즉 복지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사회관계의 체현이지, 지배계급에 의해 일방적으로 장악되어 잇는 수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투쟁만이 아니라, 분배와 복지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 역시 일정한 이행의 효과를 지니는 것으로 봅니다. 다시 폴라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튀어나온(발라낸) 경제를 사회정치적관계 속으로 묻어들어가게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지요. 171

 

애벌리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장애인의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어떤 종류의 탈노동의 정치 또는 비노동의 정치로 나아갑니다. 그가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대안의 방향을 그대로 옮겨보면, 노동을 원하고 노동의 과정에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노동을 촉진하고, 손상된 몸을 지닌 사람들을 포함하여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노동적인 삶을 보편적으로 안정화시키자라는 이중 전략의 실행입니다. 176

 

노동권의 개념을 자본주의적인 임노동에 편입될 권리 및 이것과 연동된 노동 3, 즉 노동의 권리로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권 내지는 소유권, 즉 노동에 대한 권리 그 자체로 확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에 각인되어 있는 강제성을 탈각하고 노동 자체를 재구성해 냄으로써, 즉 새로운 노동의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보다 완결된 조건을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7 노동의 가치가 이윤의 창출을 준거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 정신적 정서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 자체로서 평가될 수 있다면, 노동 활동이 자본제적 노예 노동을 넘어 능동적 정치 활동과 융합되고 여가 활동과의 경계가 완화될 수 있다면, 어떤 장애인의 삶을 비노동적인 삶이라고 규정해야할 필연성은 제거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사고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방향이 될 수 있겠지요. 178

 

소득 보장, 주거권, 활동보조 서비스 등의 문제도 장애인 연금, 장애인 주거권, 장애인의 활동보조서비스라는 형태로 제기하기보다는 기초연금, 주거 빈곤층의 주거권, 전 국민의 보편적인 장기요양 서비스라는 보편적 의제의 형태로 제출하고 이를 통해 연합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체성의 정치보다 적절한 정치 전략이라는 것이죠. 199

 

영향력의 정치는 시민사회에서의 사회운동의 정치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화된 정치의 영역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또한 가족 종교 미디어와 같이 시민사회에 위치한다고 사고되는 여러 제도들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나듯이, 시민사회가 국가와 어떤 경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국가 외부에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내재한 외부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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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전에 고등학교 때 한참 정치에 꿈이 부풀어 있을 때, 국회의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학 갓 들어가 예술이니 사상이니 미쳐 있을 때, 유명화가의 전시회에서 심오한 질문을 해댔다. 화가는 한참 쳐다보더니 쌩까버렸다. 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는 여류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는 것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 내내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을 흔들었네.

이제 진실 속으로 시들 수 있으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옥수수에 기생하는 스트라이거 균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스트라이거 균은 박멸할 수 없다. 강한 약 기운에 숨어 있다가 더 큰 내성으로 되살아나는 것.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다. 늙기 전부터 지혜는 어리석음과 함께 있었던 것. 지혜의 나무 무성한 잎새를 보려거든, 땅 속 어리석음의 뿌리에도 자주 물을 줄 것. 잘 자란 나무에 꽃이 피면, 진실이니 거짓이니 그런 시비는 벌이지 마라, 지혜롭지 못한 것.

   

 

 

한 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하루 만에 다 자랐다. 방 안에 들여놓은 호랑가시나무 화분에 흰 버섯 하나. 나도 아내도 눈 동그랗게 뜨고, 딸아이는 손뼉까지 쳤다. 언제 누가 오지 말란 적 없지만, 언제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흰 우산 받쳐들고, 오래전에 우리도 그렇게 왔을 것이다. 아내와 나 사이 딸아이가 찾아왔듯이. 언젠가 목이 메는 딸아이 앞에서 우리도 그렇게 떠날 것이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살 없는 우산을 접고, 언젠가 한 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고통의 경계를 표시하려는 것처럼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형식적인 느낌이 오네 -

마치 무덤처럼, 신경들은 엄숙히 가라앉고 -

- 에밀리 디킨슨,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셀 수 없는 다리처럼 바지런한 고통이 있고, 탱크의 캐터필러처럼 뚜렷한 자국을 파는 고통이 있다. 고통 속에는 누군가 타고 앉아 핸들을 잡고 있다. 그가 힘껏 페달을 밟으며 너털 웃음 터뜨리면, 웃음소리에 맞춰 새로 해 박은 당신의 어금니가 흔들리고, 멀쩡한 다리는 석유 시추공처럼 내려 박힌다, 예정된 속도와 정확한 각도로. 이윽고 고통이 멎으면, 당신은 또 한쪽 다리를 들고 뜨거운 오줌을 찔길 것이다. 그 와중에도 오직 당신의 것인, 고통의 경계를 표시하려는 것처럼.

    

 

 

애인아, 우리 화해하자

 

나 그것을 보고 싶지 않네!

내 추억이 불타오르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뿌려진 피

 

내 미친 짓을 보고 싶지 않다고? 넌 누구냐? 네가 널 모른다면 차라리 내 얘기를 해줄까? 난 나무꾼과 선녀다. 난 장화홍련이다. 줏대 없는 네 아버지고 의심 많은 네 계모다. 차라리 네가 읽은 동화책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넌 내 동화책의 음화거나 혼성모방. 넌 나무꾼의 날개옷 훔치는 선녀이고, 계모를 독살하는 장화 홍련이다. 내가 아는 건 그뿐, 내가 막힌 배수구로 흘러드는 생활하수라면, 넌 터진 정화조에서 새어 나오는 오물의 일부, 혹은 그 반대일 뿐. 애인아, 이제 흐르면서 우리 화해하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가 보아온 이성복 시인의 일관된 열망 중의 하나는 삶과 화해하고자 하는, 이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과 화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화해하고자 하는 그 열망의 밀도에 따라서, 뒤집어 말하면 불화의 강도에 따라서, 시의 리듬은 고통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분출하는 듯한 속도로 거칠어지기도 하고, 연민의 물결에 실려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잠언의 비극적인 침묵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였다.....시인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는가?....시인이 본 세상의 풍경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물러터지고, 균열이 가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있다......문제는 결국 끊임없이 다른 뚝배기 속에 생을 다시 끓여내는 일이다....시인은 이제 의 모든 선입견과 집착을 내려놓고 마치 처음인 듯, 삶의 풍경 하나 하나, 시간의 마디 하나 하나를 있는 그대로다시 바라보고자 시도 한다....그 사유방식은 선 수행의 화두 잡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적인 세계관이기 보다는 선 수행의 방법론이랄 수 있는 철저한 부정의 정신이다...그 시들은 시의 건강을 염려하는 시인의 사유의 요가에 가깝다. 삶의 일정한 사태 앞에서 말의 뼈다귀를 박아 넣는다.....그러나 그 부정의 변증법은 결코 합에 이르지 못하는 변증법이다....“길 없음의 삶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이 시집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는 알록달록한허기들, 삶의 풍경들을 만들어나가는 허기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11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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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내려앉은 건 한쪽 다리가

펴지지 않아서였던가

아직 잎새 돋지 않은 살의

한쪽 모롱이가 열리면서

나는 네 전신을 받았다

살붙이여, 잦은 흔들림 외에

다른 살이 없을 때 소금쟁이

떠 있는 수면의 안간힘으로

너를 견뎠다, 피붙이여 23

 

음이월의 밤들

 

음이월의 밤들은 저마다

꽃핀 동백 가지 입에 물었다

종일 흐리다 환한 밤에는

진눈깨비 다녀가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운 다음날 아침엔

사랑이 지나갔다, 발자국도 없이 43

 

벌레 먹힌 꽃나무에게

 

나도 너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

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 한구석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다

 

, 너도 나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거다

양말 한구석에 튀어나온 발가락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을 거다 64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71

 

국밥집 담벽 아래

 

겨울 오후 국밥집 먼지 앉은

비닐 장판에 미끄러져 들어온

햇빛, 선팅한 유리 창살 격자를

죽은 듯이 눕혀놓는다 아침부터

테니스 치고 땀에 쩔어 들어온

국밥집, 오늘 하루도 벌건 국밥에

썰어 넣은 대파같이 잘도 익었구나

소주 한 병에 여섯이 달라붙어,

구이집 마담의 무성한 거웃이나

재혼한 친구 마누라 탱탱한 궁뎅이

감탄하닥, 비틀거리며 국밥집

나올 때면 부끄러워라 국밥집 담벽

아래 바르르 떠는 참대나무 앞에서

그만, 얼굴 폭 가리고 울고 싶어라 134

 

멍텅구리 배 안에선

 

밤의 별들은 남지나해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 같다 지금도 신안 앞바다

어디쯤 새우잡이 배를 타고 있을 젊은이

몇이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있을지 모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 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밤의 별들 몸 던지는 유원지 못가에 낚시꾼들

갖은 미끼로 물고기를 괴롭히고, 우거진 덤불

숲 황금 거미 한 마리 홀로, 거룩히 빛나신다. 136

 

이성복은 삶과 죽음의 협곡에서 또 다른 육체로 현현된 자신을 발견하며 스스로는 스스로를 부를 수 없다는 성찰을 이끌어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를 때,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것, 3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물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 그것을 듣()는 사람을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겹쳐진 존재의 여러 가지 얼굴 속에 숨겨버리고 만다. 그 순간, 나는 없다. 오로지 나라 불리는, 무언가 나 아닌 것들이 존재의 허방을 메우면서 세상 풍경을 불가사의한어떤 것으로 바꿀 뿐이다. 162

 

마라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이미 마라의 목소리로 시를 낳으며 죽음 이편의 공간에서 또 다른 축생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것은 생멸하는 모든 존재의 내부에서 피와 바람을 몰고 수시로 솟구치고 토하는, ‘마라의 한시적 현존 양태가 된다. 늘 같지만,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하면서변화하는 햇빛 한 덩어리가 자신의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그것이 바로 . 시인은 비참의 가상임신형태로 현재의 삶을 기만하는 행복에게, 그리고 그것이 가상 임신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굴복하고야 마는 스스로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태껏, 더디디더딘 발걸음과 스스로에 대한 악착같은 뒤집기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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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14

 

눈물

 

너의 눈에 흐르는 눈물 아주 투명해 살갗까지 비치는

눈물 너의 얼굴, 너의 몸 속까지 환히 비치는 눈물 너의

몸 전체를 고요한 나무의 투명한 물관으로 만드는 눈물

어떤 몸부림도, 어떤 아우성도 멎은 곳에서 흐르는 눈물

어떤 몸부림도, 어떤 아우성도 고요한 나라의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흐르는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은 눈물......이제 막 숨거두는 빛

처럼 나는 네 눈물 속에 녹는다 95

 

2

 

한 발을 디딜 때마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지막 발자국이 이어져 길이 되었다 재 속에서 태어난 길,

죽음을 딛고 선 길이 고운 당신의 발 아래 놓여 있다

 

당신은 나의 길을 밟고 멀어져가신다 99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117

 

요즈음 나는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앞에서 있다. ‘당신앞에서 나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갖는다. 처음으로 나는 당신과 연애한다. ‘당신은 내가 찾아헤매던 숨은 그림이고,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비할 바 없이 깊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단순함은 바로 당신의 깊이다 126

 

나는 지금 이성복이 자신의 시라는 그릇을 통하여 내게 들려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사람 노래들의 악보를 뒤적거리고 있다. 고통에서 치욕으로, 치욕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 이 미완성의 기록들에 어떤 새로운 악보가 덧붙여질 것인가. 우리가 가지 못한 길이 저렇게 끝없이 계속되고 있듯이 이 미완성의 악보 또한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완성을 향하여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139

 

나와 세계,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어려운 작업을, 만남과 헤어짐, 끊어짐과 이어짐의 변증을 통하여 동시에 수행해나가는 이 뛰어난 역설의 시편들은 전통의 계승과 변모라는 차원에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 있다. 시와 삶의 팽팽한 대립과 긴장으로부터 시와 삶의 일치를 통한 삶의 비밀에 관한 통찰로 움직여간 그의 시세계가, 자신이 이미 표명했던 이미지의 결여라는 필연적인 한계를 당신의 깊이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심화하며, ‘당신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확대할 때, 우리는 그 가능성이 구체화된 아주 크고 넓은 그릇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38

 

사랑의 체험은 남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하고 고통의 체험은 그 말의 깊이를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 음악이 우리의 가슴 안에 울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울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울림은 빈 공간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고통의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빈 공간이 없고 빈 공간이 없이는 울림이 불가능하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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