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의 꿈 - 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 평전
이성재 지음 / 혜안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책 한권 소개하고자 한다. 읽은지는 좀 됐는데, 어쩐 일인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서평을 쓴다. 

이 책은 미천왕, 즉 고구려 초중기에 왕좌에 있었던 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미천왕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전연의 모용씨와 끊임없이 대립했던 인물로 알고 있다(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이는 광개토태왕때보다 미천왕때 고구려의 영토가 더 넓었다고도 했다. 출처는 불분명!). 그러다가 아들인 고국원왕대에 고구려가 전연에게 크게 패하고 그 무덤이 파헤쳐져 죽어서 적국의 볼모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여담이지만, 이때 모용씨는 무덤을 파헤쳐 관을 가져갔을텐데, 그 시신을 전연에 가져가서 어떻게 관리했는지가 의문이다. 다시 땅 속에 묻어놨는지 혹은 그냥 썩은채로 방치했는지...솔직히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시 시신이 뒤바껴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건 여기서 그만).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하자면, 이 책은 일단 연구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개설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연구한 내용이 책 안에 담겨있기는 하지만, 논문이나 전공서적처럼 딱딱하고 재미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순화된(?) 느낌이 난다랄까? 암튼, 그렇다. 그래서 미천왕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부담없이 알아갈 수 있게끔 해 준다. 

책의 첫부분에는 고구려 역대왕계와 모용선비(전연)의 역대왕계가 있고, 미천왕 시절의 고구려 관직 및 관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미천왕 시절의 고구려 영토 및 요동~요서를 둘러싼 고구려 역대 주요 원정을 표시한 지도가 1장씩 실려 있다. 이 당시 고구려가 요하를 기점으로 요동반도를 완벽하게 차지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학계 대부분의 의견도 그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지도를 표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고구려 역대 주요 원정을 표시한 지도는 괜찮았다. 요서~요동을 두고 고구려가 끊임없이 진출하려고 했다는 것이 잘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지도라는 녀석이 어떤 내용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지도가 그러했다. 시기별로 고구려의 원정 진출경로를 표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실제로 고-수, 고-당 전쟁의 경우에는 시기별로 그러한 원정로라든가 주요 전장이 잘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한 지도를 많이 못 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프롤르그 격으로 광개토태왕이 연군을 침략한 내용을 책의 첫머리에 싣고 있는 것도 괜찮았다. 딱딱한 연구서적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구성 때문이었다. 광개토태왕이 갑작스럽게 연군 일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두고 기존에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원정군의 규모에 착오가 있다, 잘못된 기록이다, 어떤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등등. 그런데 이에 대해 지배선 선생님은 광개토태왕이 모용황의 사당을 파괴하려고 했다는 의견을 제시하셨고, 필자 역시 상당히 설득력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모용황의 사당이 훗날 복구되었는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아마도 고구려인이 보기에 그 사건은 이전에 당했던 치욕을 앙갚음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책은 증손자의 복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왜 증손자가 복수를 했는지 말이다. 

여기까지는 다 좋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평전(評傳)이라 하면 기본적으로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 속의 인물들은 남아있는 문헌자료 혹은 금석문이 소략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전을 작성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유독 평전의 형식을 띤 책들은 별로 출간되지 않았다. 그나마 꼽자면 이도학 선생님이 쓰신『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과 김용만 선생님이 쓰신『인물로 보는 고구려사』과『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정도가 있을 것이다. 먼저 이도학 선생님의 저서는 소략한 사료를 갖고 쓴 평전의 한계점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분명 그 적은 사료를 갖고 뭔가 새로운 내용들을 언급해보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힌 책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딱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뭐 책을 쓸 주제가 적절치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고(어느 정도 분량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힘든 주제이니), 뭔가 새로운 접근법으로 그 인물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암튼, 그리고 김용만 선생님의 2권의 저서 중 전자는 엄밀히 말해 인물에 대해서 서술하고는 있지만 평전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후자가 그나마 현재까지 나온 가장 제대로 된 평전이 아닐까 싶다. 특히 기존 학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 놓쳤던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정리한 부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즉, 이 책에서는 사료들을 정리하고, 당시의 상황들을 재구성했다는 면에서 흠잡을 것은 없다. 다만, 인물 평전이기 때문에 인물 자체에 대한 고민이 책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좀 미흡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 인물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 라고 반문한다면야 필자도 할말은 없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책을 쓴 저자가 그 정도 노력의 흔적을 책에 묻어나오게 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다시 생각해볼 부분이 아닐까 싶다. 

또한, 저자는 189~196쪽에 걸쳐 고구려 태왕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수서』에 고국원왕을 두고 '소열제'라고 기록한 것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이 부분은 사료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오기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저자는 그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실제 칭제를 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미천왕 시기부터 고구려가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 태왕이라는 칭호가 황제와 동급으로 쓰였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그러한 사실을 기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고구려의 군주가 황제와 동급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고구려 군주의 지위를 인정해서 황제로 기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군주가 미천왕 이후 꾸준히 태왕호를 사용했고, 그 권위는 광개토태왕-장수태왕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높아지고 공고해졌는데 그 뒤로 고구려 군주에 대해 칭제한 중국측 문헌이 없는 것 또한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특수한 경우 하나가 확인될때 그 특수한 경우에 대해 재고해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싶다. 

뭐 이런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책 내용 자체에 큰 문제는 없다. 또한, 전체적인 논지 전개과정 또한 무리가 없다. 

하지만 뭔가 미천왕에 대해 새롭게 내놓은 내용이 없다는 점, 미천왕에 대한 최초의 평전이라는 기대치에 못 미치는 점, 인물 자체에 대한 고뇌 혹은 고심까지 가지 못 하고 주변 정황만 정리하고 그친 점 등은 필자에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별 3.5개를 주고 싶은데 관련 이모티콘이 없으니 반올림해서 별 4개를 책정했다. 4세기 당시 고구려와 주변 국가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있어 부담스럽지 않게 읽힐 수는 있는 책이지만, 그러한 격동의 4세기에 미천왕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한 인물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 -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
강찬석 지음 / 소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은 간만에 백제사 관련한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최근에 풍납토성에 대하여 인터넷 공간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토론 상대자의 책을 읽어봐야겠다~싶었고, 그래서 구입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도 없고, 전공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토론을 하는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아주 복잡한 녀석이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에 발을 들이기가 싫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의 저자인 강찬석 쌤과 온라인상에서 말을 섞을 기회가 있었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토론이 이뤄지게 되었다. 

2011년 5월 12일 -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닌 이유 by 강찬석 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이다? 아니다? by 여휘

강찬석 쌤이 쓴 글은 책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며(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책에 대한 세부적인 비평은 삼가하도록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뭐야 이거! 자기 귀찮다고 이런 식으로 리뷰를 써!?'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풍납토성에 대해서 최근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링크된 글을 참고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암튼, 다음까페에서 진행된 강찬석 쌤과의 토론은 어느 정도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가는 차원에서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는데 제3자들(풍납토성과 관련된 경제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치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토론은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에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희진 쌤과 이 부분에 대해 재차 토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토론은 진행 중이며, 서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일단, 풍납토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문헌사학(이희진 쌤)과 고고학(필자)의 입장 차이가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서로 어느 정도 이해를 한 상태이지만,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소 평행선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계속 토론을 진행하려고 하는 상태이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인가? 아닌가? by 여휘
2011년 6월 7일 - 시궁창싸움 아닌 진짜 토론을 한번...-풍납토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고고학이냐 문헌사학이냐의 차이일까?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왕궁과 왕성, 도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2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생산적인 논의로 가고 있는 듯...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3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이상이다. 한 일주일간 논의가 진행되었고, 총 21개의 주제에 대해서 이제 한개가 겨우 마무리가 된 듯 싶다. 위에 링크를 건 9개의 글을 다 읽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 필자가 그걸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기에 여기에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왕궁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국의 도성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조건들(거대한 건물지, 제의공간, 다양한 유물, 거대한 성벽 등)이 있기 때문에 현재 고고학계에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이희진 쌤은 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필자 또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제의 도성이 몽촌토성이라고 배웠으니깐. 하지만 몽촌토성의 대안으로 풍납토성이 제시되어 기존 견해가 수정된 것처럼, 지금의 견해가 수정되려면 풍납토성의 대안이 될만한 무언가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눈에 보이는 실물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고고학자가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봤을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약점?)이랄까. 그건 바로 고고학적으로 백제 왕성이라고 주장되는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려면 똑같이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공동 저자 두 분은 건축역사학자이자 문헌사학자이다. 고고학적으로 아직 배우는 입장인 필자보다도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로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법은 상호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책을 쓴 공동저자 중 고고학자가 들어 있다면 책의 목차나 내용이 결코 이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고고학자는 토기 몇점, 초석과 같은 석재 몇점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않는다(아니, 그래서도 안 되고). 또한 전면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추론해서도 안 된다(이런 부분에서 풍납토성 발굴책임자들은 조금 성급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건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문헌사학자라 하더라도 고고학자의 견해를 까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고학자와 같은 마인드로 접근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차라리 문헌에 기초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미 태생부터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현재 중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인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싶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자의 논리를 공파하기 위해 철저하게 고고학적 논리로 무장하지 않은 것은 분명 공동 저자들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럼 전체 목차를 따로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온라인상에서 구체적으로 토론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좀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 또한 이희진 쌤과 강찬석 쌤과 추후 있을 온라인 토론에 적용될 것이며, 서로간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어차피 문헌적인 부분에서는 문헌사학자인 이희진 쌤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니 말이다. 

1. 아차산장성에 대한 부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예전에 쓴 글(클릭)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문헌적인 측면에서 왈가왈부 할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장성이라는 존재가 만리장성과 같이 거대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이미 후대 훼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변 일대를 전부 전면 제토해서 발굴조사하지 않는 이상, 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입장에서 이것이 백제 도성과 관련해 해석되는 것은 무리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다만, 필자가 이에 대해서 필자의 논문에서 언급했던 것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141쪽). '아차산장성을 고구려군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별 타당성은 없는 듯하다. 아차산장성이 쌓여 막고 있는 방향은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다. 굳이 자신들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성을 자기들 손으로 쌓을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위에 제시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차산장성은 아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존재하며, 이는 오히려 고구려 보루들의 교통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라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2. 뚝섬 불상에 대한 부분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145~146쪽).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 만약 이 불상이 백제 불상이라면 이 역시 백제 북성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불상이 나온 지역이 바로 아차산 지역과 바로 붙어 있는 뚝섬 지역이기 때문이다.'라고. 과연 그럴까? 

맨 처음 뚝섬 불상이 발견되었을 때 김리나 선생님은 어느 나라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문명대 선생님은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했다(http://blog.naver.com/kw4?Redirect=Log&logNo=10038554541). 그리고 현재에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정확하게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http://arts.search.naver.com/service.naver?where=arts_detail&query=%EB%9A%9D%EC%84%AC+%EA%B8%88%EB%8F%99%EB%B6%88%EC%A2%8C%EC%83%81&os=643298),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떻게 이런 확신에 찬 발언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책 뒤에 적혀 있는 참고문헌을 봐도 뚝섬 불상과 관련된 논고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근거가 궁금했다. 하물며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면, 이 대체로에 들어가는 학자들이 꽤 있다는 소리인데, 이상하다 싶어 논문을 검색해봤다(왜냐하면 필자가 학부생때 배울 때에도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정영호는 고구려의 불교 전래가 372년이므로 4세기 말부터는 중국에서 불상을 가져갔다고 보고 그 한 예로 1959년 확인된 뚝섬 불상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5세기 경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유물은 아니라고도 했다(2001,「고구려불상조각의 특성 연구」『고구려연구』12, 고구려연구회, p.1043). 문명대 선생님(2003,「불상의 전래와 한국 초기 불상 조각, 뚝섬 금동불좌상」『한국의 불상 조각Ⅰ-삼국시대 불교조각사 연구-』, 예경, pp.147~154)과 양은경(2008,「대륙과 해양을 품은 고구려 불교조각」『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p.76)은 이것이 5세기대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리나 · 강우방 선생님은 뚝섬 불상이 한성백제 권역에서 출토되었지만, 그 조형이 북조나 남조에서 바로 건너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즉, 백제 영역 안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백제 불상의 조형으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고 있진 않았다(1993,「백제초기 불상양식의 성립과 중국불상」『백제연구총서』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pp.233~236). 반면, 이를 백제의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연구성과는 찾지 못 했다. 즉,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모른다는 견해와 고구려 것이라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지, 대체로 백제 불상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즉,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불상이 백제의 것이라는 전제 아래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전제 자체가 재고의 여지가 있다면 저자들의 논지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이 백제의 북성이고, 그 주변에서 백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논지는 일단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고고학적으로 공인된 '풍납토성=왕성' 설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썼고, 그렇게 제시된 고고자료 중 하나가 이 불상이라는 점을 봤을때 이는 상당히 무리수가 있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고고학계에서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유물은 그 유물이 아무리 완형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불상을 제시했으며, 이를 또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보고 있다는 다소 근거없는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필자처럼 일일히 확인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독자에게는 거짓을 말한 셈이 되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웅진도성 문제

저자들은 158쪽에서 일제시대 조사된 석성을 기준으로 공산성이 총 길이 2,660m의 도성으로 소개하고 있다(그런데 이 책 19쪽에서는 웅진성의 왕성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고 적고 있다. 이건 무슨 근거인가? 이는 약 6,612,000㎡에 해당하는 엄청난 면적이다. 공산성이 정사각형의 도성이라 치면 한변의 길이는 665m가 된다. 그리고 내부 면적을 곱하면 442,225㎡, 약 133,800평이 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웅진성의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pp.83~85)을 보면 내부에서 확인된 것은 임류각지와 추정왕궁지 등이다. 그런데 추정왕궁지에서 나온 것이라곤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 굴건식건물지2동, 지당지 1기, 목곽고지 1기 등이다. 이 중 왕궁터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공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웅진도성이 저자들이 말하는 왕궁터에 걸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저자들은 이미 앞부분에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왕궁과 왕성의 넓이가 넓은데 반해 풍납토성에는 그럴만한 왕궁이 없고, 그런 왕성도 아니라는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18~20쪽). 즉, 일국의 왕성이라면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성에서 확인되는 왕궁터는 전체 면적 6,800㎡ 정도, 즉 2,057평 정도밖에 안 된다. 또한 사비도성은 어떠한가? 내부에서 제대로 된 왕궁터라도 나왔는가? 필자가 알기로 없다. 

한국 고고학계의 최신 개설서라고 할 수 있는『한국 고고학 강의(개정 신판)』(한국고고학회, 2010, pp.268~272)을 보면 백제 도성에 대한 현 학계의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단 풍납토성 내부에서 뚜렷하게 왕궁터가 확인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성 내부에서 의례용 건물과 제의유구, 대형 수혈주거지, 성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3중 환호 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다. 또한 웅진성은 공산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산성 내부설과 외부설이 있다. 내부설에서 왕궁터라고 주장되는 건물지는 규모나 시기에 문제가 있으나, 공산성 외부에서 왕궁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고 있다. 더불어 사비도성의 경우에서도 내부에서 왕궁터가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도로 유구와 부소산성, 동남리유적, 관북리유적, 군수리사지, 나성 등을 통해 계획된 도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즉, 저자들은 풍납토성과 공산성, 사비도성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자들은 책 앞에서 주변 국가의 왕궁과 왕성 면적을 제시하면서 풍납토성은 왕궁도 없고, 주변 국가만한 왕궁이 나올만한 땅도 없으니깐 왕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공산성에서 나온 왕궁터 얘기는 뒤에 하나도 없다. 면적이 분명 적다면 이는 왕성이라 보기 힘든 것 아닌가? 또한 사비도성에서는 왕궁터라고 볼만한 유적보다 대형 건물지가 나온 유적만이 나왔을 뿐인데도 역시 이에 대해서 별말이 없다. 즉, 왕궁만 갖고 왕성 여부를 따지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돼니깐 저자들이 제시한 주변 국가들의 면적도 의심스러워졌다. 무슨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일단 중국 도성에 대한 면적을 살펴보고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5년에 발간한『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를 펼쳐봤다. 저자들은 후한 낙양성의 왕궁을 30만 평, 왕성은 300만 평으로 봤다. 보고서를 보니, 한진 시기의 낙양성은 북위 시기의 내성이라 한다. 그리고 동벽의 3,895m, 북벽 2,820m, 서벽 3,510m, 남벽 2,460m로 유실된 부분까지 합치면 총 14㎞ 정도라고 한다. 그럼 이 또한 정사각형이라 가정하면 한쪽 벽의 길이는 3.5㎞가 나온다. 그리고 왕성의 넓이는 12,250,000㎡, 약 370만 평에 달한다. 또한 도면의 축적대로 왕궁터의 면적을 곱해보니 1,375m×625m 해서 총 859,375㎡, 약 26만평이 나왔다. 즉, 후한 낙양성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왜 정확한 수치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논지 흐름상 큰 상관은 없으니). 또한 저자들은 수 · 당 장안성은 왕성이 2,560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보고서를 보니 수 · 당 장안성의 외곽은 거대하여 면적은 83㎢, 즉 2510만평에 달하며, 황성(왕궁)은 사방이 9.2㎞에 면적 5.2㎢, 약 157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일단 중국 도성은 얼추 비슷한 수치가 나오고 있으며, 그밖에 고구려 도성이나 신라 도성의 면적 역시 비슷한 수치가 추산됐다. 

그런데 왜 유독 백제 웅진성에서만 저런 오차가 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혹시 풍납토성의 면적이 제일 작다고 강조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닐까? 하는 음모론까지 떠올렸다. -.-; 왜냐하면 저자들은 국내성의 왕궁 넓이는 알 수 있지만, 왕성 넓이는 알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왕궁의 넓이는 약 17만평으로 적었다. 국내성의 총 둘레는 2,686m이다. 역시 정사각형이라고 생각하면 한변의 길이는 671.5m, 해서 672m로 잡겠다. 그럼 성내 면적은 451,584㎡, 즉 13만 7천평 정도가 나온다(역시 수치가 틀린 것쯤 무시하겠다. 어차피 개설서고 논지 전개상 큰 문제가 없으니).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자들은 분명 구분하기를 '왕궁은 순수 궁전, 왕성은 왕궁을 포함한 민가들'의 개념으로 쓰고 있었다. 그렇게 봤을때 현재 확인된 국내성을 순수 왕궁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게 더 의문이었다. 그런데 왕성이라고 해서 그 면적을 17만평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약 25만평 가량인 풍납토성보다 작아지게 되니깐 이렇게 정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풍납토성이 주변 국가의 왕성 중 가장 작아야만 논지가 전개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왕궁과 왕성의 구분, 단순히 면적만 갖고 도성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저자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취약점이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일국의 도성이면 규모가 커야 한다는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필자도 딱히 그것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면적만 갖고 다른 나라의 도성과 비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 마치 보루의 규모만 갖고 산성인지, 보루인지를 구분하는 기존 학계의 입장처럼 말이다(필자는 그게 싫어서 보루와 산성 내부의 구조 및 성벽의 유무 등으로 따져서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풍납토성의 조사-연구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백제 초기도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중요한 단서만을 찾아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풍납토성 내외가 급속한 개발로 인하여 체계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아 여러 면에서 매우 부담스런 상태라 하겠다.'라고 밝힌 심정보 선생님의 입장(2005,「풍납토성과 중국 고대도성과의 비교연구」『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p.215)처럼 아직 풍납토성은 정답이 아니라 최선일 뿐이며, 현재진행형이라는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4. 백제 기와만의 특징 모골흔의 해석

저자들은『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천왕사 터에서 의미심장한 기와가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백제는 신라와 전혀 다른 제작 기법으로 기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모골흔'이라고 해서 흔히 보는 신라 계통의 기와처럼 둥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이 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백제 와당의 제작 방식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강하게 영향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결론 부분에 대해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다고 그렇게 해석해서 되겠냐? 오히려 백제 문화의 영향이 오래도록 남았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라는 식의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198~199쪽).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모골흔이라는 것은 흔히 모골와통을 쓰면 나타나는 흔적이다. 쉽게 얘기해서 기와를 만들때 곡선의 형태로 만들기 위한 원통형의 통이 필요하다(이를 와통이라 한다). 그때 나무편이나 대나무를 발처럼 세로로 길게 엮어 '모골와통'을 만들거나(중국 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나무 책을 동그랗게 말은 형태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아예 통나무를 파내거나 넓은 판자를 이어만든 '원통와통'을 만들어 쓸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는 모두 모골와통을 사용해서 기와를 만들었지만 신라는 대부분 원통와통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백제 기와의 흔적인 모골흔이 나왔음에 주목한 것이다(즉, 198쪽 위에 실린 기와의 탁본 중 오른쪽에 나타나는 것이 모골흔과 포목흔이다. 왼쪽은 외형을 만들기 위한 성형타날의 흔적이고. 혹시 책을 읽을 독자 중 모르는 분이 계실까봐 자세히 기재한다). 

자아~그럼 모골흔에 대해 설명이 끝났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01년, 2002년에 발간한『하남 천왕사지 시굴조사 보고서』및『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저자들이 봤던 그 책)를 보면, 천왕사지를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이 유적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백제 기와제작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모골와통으로 만든 기와가 나왔음에도 이를 백제 유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일까? 간단하다.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다. 필자가 누누히 얘기하지만, 유적에서 유물의 출토 양상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고려시대 유물이 즐비하게 나오는 유적 안에서 별다른 토층상의 상하관계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기와가 나왔다고 해보자. 그럼 그걸 백제시대부터 주욱 사용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백제계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하는가? 여기에서 고고학적 훈련이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단순히 기와 몇점만 갖고 그 유적을 해석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유적에 대한 편년 및 고찰을 작성할때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유물 및 유적을 모두 살펴본다. 그리고 상대편년도 시도하고, 문헌도 찾아보고, 유물 출토양상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봤을때 천왕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몇점은 백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의아한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단다. 이 무슨 이현령 비현령식 해석이란 말인가. 그럼 사비기 백제토기 양식에 고구려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니, 사비는 고구려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는가? 앞뒤 정황을 봐 가면서 해석을 내려야지, 이 무슨 억지논리란 말인가.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봐도 이 정도인데, 교수님들이나 필자보다 오래 고고학을 공부한 선배들이 봤다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릴지 안 봐도 뻔하다. 이처럼 이 책의 저자들이 문헌사적으로는 얼마나 잘 살펴봤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취약점이 여기저기 빵빵 뚫린 것처럼 확인되고 있었다.


5.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의 해석

이 부분은 강찬석 쌤이 필자와 다음까페에서 벌인 논쟁 이외에도 끊임없이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한번 펼쳐봤다. 책 200쪽에 실린 이성산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 파편 3점의 사진은『이성산성(제8차 발굴조사 보고서)』(한양대학교 박물관 · 하남시, 2000, p.44)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했다(그런데 스캔이 잘못 됐는지 책에 실린 사진은 상당히 흐려서 백제토기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갖고 다른 분과 강찬석 쌤 사이에 언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암튼, 필자는 보고서에 실린 원판을 봤으니 이에 대해 얘기하겠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당시 한양대 발굴팀장이었던 유태용은 2000년에 발간된 ,이성사성 8차 발굴보고서>에서 "이성산성 출토 토기 기종 가운데 태토, 문양, 기형, 색조, 제작 수법 등에서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가 발굴되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201쪽).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보고서의 문구가 곧바로 백제 토기 발굴과 연결될 수가 있단 말인가? 보고서에는 분명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보고서를 열어보니 44쪽에 그와 같은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바로 뒷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이들 토기들은 잠정적으로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하였다.'라고. 응? 이상했다. 왜 잠정적이라고 했지? 전기 토기면 토기지, 왜 잠정적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그 부분의 앞뒤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그나저나 문장을 전부 옮기지 않으니 보고서를 따로 보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하나? ^^;). 

그랬더니 금방 답을 알 수 있었다. 8차 조사에서 발굴단은 초축성벽을 절개해서 단면을 조사하고, 또한 1차 저수지를 조사했다. 1차 저수지는 2차 발굴시 규모가 대강 밝혀졌고, 3차 조사시 33개의 퇴적 층위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8차 보고서에서는 29개층의 퇴적 층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중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된 토기 3점이 10층에서 2점, 11층에서 1점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초축성벽 앞의 무너진 할석을 치우는 과정에서 2점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일단 저자들이 저수지 출토 토기 3점에 대해 언급했으니 뒤의 2점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일단, 토기편은 구연부편 1점, 동체부편 1점, 저부편 1점이다. 대개 구연부편은 기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속성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단순히 동체부편이나 저부편만 있다면 어떤 기종의 것인지 알 수가 어렵다. 기종을 모르면 당연히 전체적인 기형(형태)도 모를테고 그 말은 곧 형식분류가 중요시되는 고고학 연구상 시기를 편년할 수 없다는 소리와 상통한다. 즉, 구연부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편년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소리다. 그런데 왜 발굴단은 이를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으로 봤을까?

뒷장을 들춰봤다. 아하! 고구려계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 토기(이때에는 고구려系라는 표현을 썼으나, 한강유역에서 고구려 보루가 연이어 발굴되면서 이제 그 지역의 토기군은 고구려 토기로 명명해도 무방하니, 필자 역시 시대성을 무시하고 정확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고구려 토기로 지칭하겠다)보다 기술적으로 발전된 형태라고 하니 시기적으로 6세기를 넘어가는 것들일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구려 토기들이 한결같이 저수지의 21층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려 15점이나. 기종도 다양하다. 확실히 저수지 21층 시기에 고구려가 이 곳을 점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재밌는 것이 바로 위에 퇴적된 22층부터 이제 통일신라시대 토기(고신라식, 즉 삼국시대 신라토기는 없었다고 한다)가 수두룩하게 출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갔다. 21층보다 낮은 10~11층에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편년이 가능한 것은 호의 구연부편 1점 밖에 없다. 그런데 21층은 최소한 6세기를 넘어서는 고구려 문화층이다. 22층부터는 통일신라 문화층이고. 그럼 10~11층은 6세기 고구려 문화층보다 앞선 문화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인지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경호 구연부 1점으로는 편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구연부편의 태토가 적갈색 연질태토에 격자타날문이 흐릿하게 확인되고 있으니, 일단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듯 싶다(필자라도 저 상태에서라면 딱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을 듯 싶다). 토기의 기형을 만드는 성형작업시 타날성형은 기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물레성형은 아주아주 뒷시기의 일이고, 조선시대까지도 일부 기종은 타날성형, 즉 뭔가로 두들겨서 둥그렇게 모양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뭐가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삼국시대 전기 후반 토기라고 볼만한 녀석들이 출토된 10~11층 위에 퇴적된 14층에서 '戌辰'명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그 제작수법이나 서체가 C지구 저수지 5층에서 출토된 고구려 목간과 동일했다고 한다(해당 보고서 78쪽). 거기다가 고구려 목간과 함께 고구려척도 출토됐었고. 자아~만약 내가 이성산성 8차 발굴단의 책임자라고 해보자. 여기에서 어떻게 했을까? 단순히 고구려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토기이고, 고신라식 토기가 없으니 백제토기다! 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이 책의 저자들처럼) 아니다. 절대로! 각 층위의 절대연대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결정은 아주아주 위험하다. 특히나 고구려것이 분명한 목간과 척과 동일한 목간이 바로 14층에서 나왔는데, 11~14층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퇴적 양상과 상대적인 시기차를 알 수 있지만 그 층위 양상에서 절대연대를 뽑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시기차가 크지 않아서 그 토기들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과거에는 고구려 토기에 타날기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마 2000년 보고서이므로 고구려 토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라도 당연히 백제토기라는 확답을 내리기보다는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분류했을 것이다. 불명확한 상태에서 일반에게 공개되는 보고서에 개인적인 의지나 견해를 넣을 수는 없지.

보고서를 직접 보니 이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필자가 그런 의도로 이 책을 썼더라면 차라리 5차 발굴조사 보고서(1998년) 92쪽 사진 145번의 종방향의 승문타날문이 찍힌 호 구연부편이라든가(물론 대부분의 토기는 통일신라시대 토기였다)나 10차 발굴조사 보고서(2003)의 타날문이 찍힌 호를 언급했을 것이다. 그게 차라리 더 백제토기 스러우니깐. 하지만 그마저도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0차 발굴조사 보고서 172쪽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거다.

'평탄면의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회절하는 지점의 지표에서 수습된 완형의 호는 특기할 만하다. 이 호는 지표에 구연 부분이 노출되어 수습한 것으로, 호가 위치한 지점은 평소 시민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던 지점이다. 이 호는 회백색의 연질로 복합적인 기형을 띠고 있다. 평저에 동체부엔 중앙에 횡침선이 한줄 돌아가고 있고, 구연부는 직각으로 외반구연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된 위치가 안정된 층위가 아니라 거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유물과의 직접적인 비교가 곤란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토기의 요소가 고루 융합되어 나타나는 예가 될 수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자아~이렇다. 이게 일반적인 고고학자의 유물 해석이다. 유물의 기형도 중요하고, 완형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물의 출토 양상이다. 앞서 저자들이 제시한 토기 3점도 유물의 출토 양상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보고서에 왜 그렇게 기재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저자들은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삼국시대 전기 토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백제토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이래서 고고자료는 고고학적으로 훈련이나 연습이 된 사람이 다룰때랑 안 그럴때랑 천지차이인 것이다. 이 책을 그냥 읽을 사람들이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읽느냐, 안 하고 그냥 읽느냐의 차이는 이처럼 큰데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이 알면서도 독자들은 현혹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문헌사학계나 건축학계에서 뛰어난 분이라 하더라도, 고고학적으로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것으로 넘어가보자.


6. 그밖의 고고학적 근거들(하남시 일대의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

저자들은 207~211쪽에 걸쳐 하남시 일대에서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 하나가 광암동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과 백제 단경호, 그리고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나온 백제문화층, 하남시 동사지의 한성백제식 기와와 토기들 이렇게 3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세종대학교박물관, 2005,『하남 덕풍-감북간 도로확포장공사 4차구간 발굴조사 약보고서』를 보면 광암동에서 백제 석실분 2기가 확인된 것이 맞다. 이밖에 기전문화재연구원, 2003,『하남 시가지우회도로 확 · 포장공사구간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덕풍동 수리골 유적에서는 백제 토광묘에서 원저단경호 1점과 심발형 토기 1점, 철도자 1점이 출토되기도 했고. 자아! 그런데? 이게 다다. 고분 3기 갖고, 이 지역에 백제의 중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저자들도 알지 않을까? 그나마 토광묘는 필자가 제시한 사례이고. 소위 고분群이라고 말하려면 상당히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석촌동이나 방이동 고분군 정도는 되어야 비교 대상으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다음은 남한산성 행궁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군, 1999,『남한산성 행궁지 시굴(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 및 기와편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대형토기 호와 기와편, 17~18세기의 조선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단다. 또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 2001,『남한행궁지 제3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편 등과 회색 연질,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을 비롯해서 12~20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자기편들이 확인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도, 2002,『남한산성』이나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시, 2003,『남한행궁지 제4~5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봐도 고려시대보다 올라가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경기문화재단 · 한양대학교박물관, 2005,『남한산성 행궁권역 내 건축물 이축지 시 · 발굴조사 보고서』나  기호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2009,『남한산성 인화관 및 침괘정 주변지역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등을 보면 조선시대 유물 및 유적이 확인됨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행궁지 8차 발굴조사 제3차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지와 대형기와 등이 나와서 한때 이슈화됐으며, 중원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 암문(4) · 수구지 일대 발굴조사』를 보면 체성에 대해 고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지금 필자가 확인 못한 보고서가 2002년에 발간된 남한행궁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인데 거기에는 백제 문화층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왜 이거만 없지? 흐음). 왜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냐면, 강찬석 쌤이 직접 가서 백제토기를 봤다고 하는 그 발굴현장에 필자도 가서 직접 백제토기가 출토된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필자가 보기에도 그것은 조선시대 도기류 혹은 토기와는 확연히 달랐었다. 필자도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화층이 전체 유적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수량도 중요하고, 출토양상도 중요하며, 유구와의 상관관계도 꼼꼼히 따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백제토기들이 다수 나왔다고 해서 능사는 아닌 것이다. 늘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출토양상이니깐. 이 부분은 추후 필자가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동사지에 대한 부분. 저자들은 문명대 쌤의 발언을 주 근거로 삼았다. 

'제2사지에서는 고식기와와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만약 백제 때의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면 이 사찰의 시창은 백제 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어쩌면 백제 최초의 사원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3사지의 마애불까지 포함하여 앞으로 발굴에서 역점을 두어야 할 문제라 하겠다.'

그러면서 '그 당시 발굴자로서는 한성기 백제기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옛날 식의 기와가 출토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역시 하남시 지역과 한성백제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다(211쪽). 충북대박물관, 1988,『판교-구리 · 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동사지(사적 제352호)는 분명 삼국~고려시대까지로 편년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각종 명문기와와 귀면기와, 쌍조문 수막새, 금동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오랜 시간 존속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성백제 시절 동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곧 한성백제 도성이 이 근처에 있다~라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필자는 그게 더 궁금하다. 그저 하남시에 있는 유적들을 다 그러모아 이런 것들이 있으니 여기는 당시 백제 도성지였다~라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 도출인건가? 싶다.

이상으로 앞부분 중 저자들과의 토론에서 빠진 내용과 이 책의 <5장. 백제 첫 도읍지의 흔적들>에 나오는 고고자료에 대해 다 살펴봤고, 전부 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필자의 생각을 정리했다(아! 혹시 천왕사지에서 나온 목탑 심초석에 대해 반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왕사의 유적 및 유물 조합상에서 이미 통일신라~고려시대 절터로 판명난 이상 심초석 하나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백제시대와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심초석 하나만 갖고는 힘들다. 심초석과 연결된 문화층이 통일신라시대 문화층 아래에서 충분히 확인되어야만 이건 성립이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보고서 상에 그런 내용은 없기에 따로 언급조차 안 했다). 

그럼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필자는 딱 3지만 더 언급하도록 하겠다(물론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그와 관련된 것만! 민속학이라든가, 역사학 관련된 것까지 굳이 언급할 것도 없고).



1. 하남시의 고고자료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판단한 저자들은 108쪽에 백제 왕성의 개념도를, 122쪽에 개로왕때 쌓은 제방과 당시 지형복원도를 실어놓았다. 자아~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 대신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볼만한 고고자료가 무엇이냐 이거다. 위에서 제시한 저자들의 고고자료는 이미 필자가 보기에 근거가 취약함을 밝혔다. 그 다음에, 하남시 일대에는 풍납토성에서 안 나왔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왕성이 될 수 없다는 왕궁도 안 나왔다. 그렇다고 하남시 일대를 둘러싼 나성이나 그 일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취락지도 없고. 확인된 것은 2기의 횡혈식 석실묘와 백제때부터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동사지(절터) 1개소, 이성산성을 초축했을 것이라는 흔적들 정도이다. 이것과 풍납토성의 고고자료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판정승을 거둘지는 뻔한 일이다. 

물론 하남시 일대에도 과거부터 백제의 도성일 것이라는 얘기와 함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필자가 그 연구사를 가볍게 정리해보겠다(괄호 안은 발굴조사기관과 보고서 발간년도)

1. 동사지 - 삼국~고려시대(충북대박물관 1988)
2. 교산동 일대 지표조사 - 삼국~조선시대(세종연구원 1996)
3.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Ⅰ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4.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1)
5.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Ⅲ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2)
6. 천왕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1, 2002)
7. 광주향교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3, 2005)
8. 교산동 건물지 종합보고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4)
9. 춘궁동 245-2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0. 교산동 유적1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4)
11. 춘궁동 401-8번지 유적 - 통일신라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2. 춘궁동 산 39-1번지 유적 - 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5)
13. 서부농협창고부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6)
14. 교산동 주택이축부지 내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수원대박물관 2006)
15. 법화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7)
16. 약정사지 - 통일신라~조선시대(세종대박물관 및 하남역사박물관 여러차례 조사)
17. 춘궁동 243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09)
18. 춘궁동 242-6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서해문화재연구원 2009)
19, 춘궁동 393-5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0. 항동 121-3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1. 춘궁동 271-11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2. 하사창동 341-4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자아~어떻게 생각하는가? 설마 이 많은 조사기관이 이렇게 많이 조사를 했는데, 의도적으로 백제 유적지를 은폐했다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할 수 없고, 필자도 이에 대해 더 할 얘기도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정도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통일신라 이전의 유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상황이 이 모양인데, 이걸로 어떻게 풍납토성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그러니 고고학적 연구가 더 진행될 때까지 더 기다렸다가 이런 주장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풍납토성의 C14 연대측정

저자들은 260~261쪽에 걸쳐 풍납토성 발굴보고서 Ⅴ권의 연대측정 결과를 예로 들면서, 연대치의 오차가 크게는 200년 가까이 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오차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보장해 줄 수 없어 근거로 못 믿겠다는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풍납토성의 유물을 두고 연대측정을 한 당사자가 가장 억울해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 만약 자신이 연대측정을 잘못했다면 표본마다 완전히 다르게 나와야지 어떻게 비슷한 수치가 나오겠느냐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부분도 이 책에서 잘못된 점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당시 풍납토성의 연대측정을 어느 기관에서 누가 했는지 알고 있다(그렇다고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연대측정을 하는 일반적인 기관의 입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온라인상에 공론화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왜 이 글에서 주욱 보고서면 논문이며 나열했는지 알 것이다. 바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책에 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얼마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이미 강찬석 쌤은 온라인 상에서 여러차례 이 부분때문에 다른 분들과 마찰이 있어왔다. 마치 내가 말은 못 하지만 학계의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있다. 모르면 가만 있어라~라는 식의 태토 때문이랄까).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목탄 시료는 반드시 불에 타야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석탄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유기질은 불에 타서 그렇게 됐는가? 아니다. 땅 속에서 오래도록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변질될 수 있다. 땅 속에서 수백년, 수천년간 벌어지는 지질현상은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불에 탔네 마네를 따질 필요는 없다. 또 하나, 목재의 경우, 오래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자란지 얼마 안 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대측정치가 나무를 베어서 사용했을 때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나무가 폐기된 상태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분할 필요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개의 연대치만 갖고 그 유적의 절대연대가 나왔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며, 다른 유물과 유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연대측정 상의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원로고고학자 혹은 중견고고학자들은 이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수년전 일본 학계에서 AMS 연대치로 야요이시대 개시기가 상한된다고 난리쳤다가, 그 이후로 잠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 우진육각형 주거지와 석촌동 고분군

262~263쪽에 걸쳐 저자들은 우진육각형 주거지가 금강 이남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문화상 아주 특수한 경우로 이 고분군이 가까이 있다고 근처인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필자가 저 위의 글에서도 썼듯이 호서지역에서 13기의 凸자형 혹은 呂자형 주거지가 확인된 것을. 앞으로도 더 확인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역시 고고학계의 최신 경향(이 책이 나올 시점에 이미 그런 얘기들이 있었다)을 반영하지 않고 성급하게 책을 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이다. 兵家에서 말하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단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쓴 저자들은 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 했고, 나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상태에서 섣불리 싸움을 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처럼 이제 막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근거의 취약성을 지적받을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만한 고고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덤볐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 헛점이 너무 많았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가장 아쉬웠다. 허나,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필자 역시도 풍납토성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으려고 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다. 

다소 글이 길어졌지만, 토론의 자료로도 활용할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므로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럼 이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麗輝 2011-06-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실수 하나 있습니다. 책 마지막 문단에 보면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에서 '석촌동'이 아니라 '방이동'이었습니다. 허어~왜 이런 실수를 -.-;; 방이동의 횡혈식석실묘 계통을 백제가 아니라 신라 것으로 보는 입장이 최근에는 더 많이 늘어나도 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책의 논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책에서는 풍납토성과 같은 유물이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왔으니 양자는 같은 집단일테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죠. 허나 오히려 백제 것으로 볼 수 있는 방이동 고분군이 최근에는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재고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만약 방이동 고분군도, 석촌동 고분군도 백제 것이 아니라면, 한강 유역에는 백제 고분군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될테니깐요. 하남시에서 나오는 횡혈식 석실묘 2기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요.

암튼, 내용 수정 참고바랍니다.
 
한국 고고학 강의
한국고고학회 엮음 / 사회평론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07년 8월 15일에 초판을 읽고 난 후(클릭), 대략 4년여가 지난 후에 개정 신판을 읽고 난 서평을 쓰게 됐다(원래 이게 1년 전쯤 나온 책인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쓴다. 쿨럭 -.-;).
 
지금 초판에 대한 서평을 다시 보니, 그때에는 내용 면에서 크게 세부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개정 신판에 대해 쓰는 것이니깐, 세부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을 듯싶다. 그래서 일단 전체적인 책의 내용에서부터 목차와 각 장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좀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일단, 전체적인 책의 표지부터 살펴보면 책에 표지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백제 금동대향로 상면을 소재로 삼았으니깐. 다만 초판의 사진이 보다 세부 사진이라는 점 정도만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초판이 하드커버였다면, 개정 신판은 소프트 커버다. 책의 가격은 개정 신판이 4,000원 더 비싸졌지만 책의 분량이 90쪽 가량 늘어난 데다가 판형이 더 늘어났기 때문에 커버를 소프트로 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소프트 커버도 뭐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책의 첫 표지를 펼치면 편집위원회에 약간 변화가 있다. 편집 위원을 맡으신 김무중 선생님이 소속 연구원들을 편집지원 및 편집보조로 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김무중 선생님이 집필자로 새로 추가된 것 정도?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저자나 편집위원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의 큰 틀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추후 이 책의 개정판이 지속적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드는 노파심이지만, 나중에는 해당 분야의 저자가 꾸준히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물론 이 책의 공동저자들이 모두 나이가 많은 원로는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연구 성과와 수준이 계속 바뀌는 고고학의 특성상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동일한 저자가 해당 분야에 대한 집필을 꾸준히 맡는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암튼 어디까지나 노파심이니 이만~).
 
그리고 앞쪽의 컬러도판을 보면, 과거에는 유적 위주의 사진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유물 위주로 사진이 실렸다. 개인적으로는 더 많은 도판이 실렸으면 좋았겠다~싶었지만 그건 금전적인 부분에서 힘들다 치자. 그런데 초판과 동일한 사진이 중간에 보여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판과 동일한 사진을 첨부할꺼면 그만큼 새로운 사진을 더 추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쪽수를 맞추기 위해서 도판을 실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아무래도 눈으로 보이는 실견자료를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컬러도판은 중요할 텐데, 왠지 이 책에서 천대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암튼, 그렇게 목차로 넘어가보자.  



초판


개정 신판


 


 


머리말


머리말


 


 


총설 - 이선복


총설


. 한국 고고학의 성립과 발전


. 한국 고고학의 성립과 발전


. 한국 고고학의 연구공간과 시대구분


. 한반도와 한국문화


. 한국 고고학의 연구현황


. 한국 고고학의 연구공간과 시대구분


. 한국 고고학의 전망


. 한구 고고학의 연구현황


 


. 한국 고고학의 전망


 


 


1. 구석기시대 - 성춘택


구석기시대


. 시대 개관


. 시대 개관


.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연구현황


. 연구현황


. 시기 구분


. 시기 구분과 연대 측정


. 연대측정과 유적형성과정의 해석


. 석기와 유물군 구성 및 변화


. 석기와 유물군 구성 및 변화


. 생계경제와 주거


. 생계경제와 주거


. 구석기시대의 마지막


. 구석기시대의 마지막


 


 


 


2. 신석기시대 - 임상택


신석기시대


. 시대 개관


. 시대 개관


. 신석기문화의 시공적 위치


. 지역구분과 편년


. 주요 연구경향과 쟁점


.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와의 관계


. 유적과 유물


. 초기농경


 


. 유적


 


. 유물


 


 


3. 청동기시대 - 김장석


청동기시대


. 시대 개관


. 시대 개관


. 청동기시대의 시작과 전기 청동기시대


. 편년과 시기구분


. 송국리 유형의 형성과 확산


. 유적


. 묘제


. 유물


. 석기


 


. 청동기


 


. 암각화


 


 


 


4. 초기철기시대 - 이청규


초기철기시대


. 시대 개관


. 시대 개관


. 문화유형과 토기의 분포


. 초기철기문화의 전개


. 집자리와 무덤


. 유적


. 금속기의 제작과 보급


. 유물


. 각 지역 문화유형의 전개


 


 


 


5. 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


시대개관 - 최병현


시대개관


1. 북부지역 - 정인성


북부지역


. 개관


. 개관


. 낙랑연구사


. 중국 동북지역 일대의 정치체


. 낙랑 · 대방 유적


. 낙랑과 대방


. 낙랑 · 대방 유물


 


. 낙랑과 주변 지역의 교섭


 


2. 중부 및 서남부지역 - 송만영


중부 및 서남부지역


. 개관


. 개관


. 편년과 시기 구분


. 유적


. 유적


. 유물


. 유물


 


3. 동남부지역 - 이재현


동남부지역


. 개관


. 개관


. 각론 및 논점


. 유적


. 유적


. 유물


. 유물


 


 


 


6. 삼국시대


삼국시대


시대 개관 - 권오영


시대 개관


1. 강현숙


고구려


. 개관


. 개관


. 유적


. 유적


. 유물


. 유물


2. 백제 성정용 · 서현주


백제


. 개관


. 개관


. 시기별 영역 변화


. 유적


. 유적


. 유물


. 유물


영산강 유역


. 영산강 유역


 


3. 신라 - 김용성


신라


. 개관


. 개관


. 신라문화의 시공적 분포


. 유적


. 연구의 쟁점


. 유물


. 유적


 


. 유물


 


4. 가야 - 박천수


가야


. 개관


. 개관


. 주요 논점


. 유적


. 권역


. 유물


. 유적


 


. 유물


 


 


 


7. 통일신라와 발해


통일신라와 발해


1. 통일신라 - 홍보식


통일신라


. 시대 개관


. 시대 개관


. 연구경향


. 유적


. 유적


. 유물


. 유물


 


. 대외교류


 


.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2. 발해 -송기호


발해


. 시대 개관


. 개관


. 영토와 문화


. 연구 경향과 쟁점


. 연구경향과 쟁점


. 유적


. 유적


. 유물


 


 


 


부록


 


중근세 고고학의 현황과 전망


 


. 서론


 


. 고려


 


. 조선


 


.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일단 목차에서 저자의 이름이 싹 빠졌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각 장과 절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세분화되어 있던 목차를 간단하게 정리한 흔적이 엿보인다. 신석기시대만 목차가 늘어났는데, 뭐 초판에서 워낙 목차가 적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밖에는 거의 동일한 양식으로 통일했으며, 과거 백제 안에 목차가 들어있던 영산강 유역이 이번에는 다소 반독립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점, 그리고 고려~조선의 중근세 고고학에 대한 부록이 실린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영산강 유역이 특정 시기 반독립적인 정치체로서 존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백제에 통합된 역사를 따져봤을 때 금번 개정 신판의 목차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동안 고고학적으로 주된 연구 분야가 아니라고 여겨졌던 고려~조선에 대해서도 이번에 따로 공간을 마련한 것 역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문헌사료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땅 속에서 나온 모든 고고자료는 동일하게 취급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봤을 때 아무리 현재와 가까운 시대의 역사라 하더라도, 고려~조선의 역사 역시 고고학의 한 분야로서 연구되고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암튼, 목차만 보더라도 편집 및 구성상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확인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럼 이제는 각 장별로 변화된 양상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총설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소제목으로 <한반도와 한국문화>라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지리적 정보를 기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왜 이 내용이 초판에는 빠졌나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 고고학의 연구 현황>이라는 부분에서도 이전에 비해 약간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 부분은 따로 언급할 내용이 없지만, 최근 필자에게 고고학의 상대편년에 대한 질문도 들어오고, 일반인들이 고고학에서 편년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관련된 내용을 일부 발췌해 옮기도록 하겠다.

모든 고고학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자료의 연대평가와 관련해, 비록 절대연대측정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각종 연대측정법의 기본원리나 적용상의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방사성탄소연대를 의뢰하기 전, 연구자는 우선 통계치로서의 탄소연대의 의미와 연대보정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나아가 연대측정은 알고자 하는 고고학적 사건과 시료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정의한 바탕 위에서 전략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유적 형성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채취한 시료에서 얻은 측정치는 유적이나 유물의 정확한 연대해석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한편,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가며 고고 자료의 연대평가는 주로 유물, 특히 토기와 금속기의 형식학적 특징에 의존하고 있다. 고대국가가 등장하는 등, 복잡한 문화현상이 있던 시기의 자료에서 수십 년 정도의 시간적 단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표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연구자 다수가 동의하는 편년은 쉽게 나오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안정된 편년에 기초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후속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연대평가와 자료의 편년이란 기계적이며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방법론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고학 교육의 내실화와 관계되는 문제로서, 학문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는 고고학 개론과 연구방법론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단위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다는 점은 고고학 발전을 제약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2. 구석기시대

큰 차이는 없으며, 중간에 동아시아 구석기 유적에 대해서 소개한 부분이 추가되었다. 기존에는 한국의 구석기유적만 지도에 표시해 놨는데,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지도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추가되어 거시적인 안목에서 한국의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보다 도움이 되고 있다. 그밖에 <시기 구분과 연대 측정> 하나의 장에 내용을 같이 서술하고 있어, 오히려 이전 책에 비해 구석기 유적 및 절대연대측정에 대한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과 같은 형식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따로 공간을 마련해 설명한 편집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 외에 전체적인 내용의 변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동안 확인된 구석기유적의 수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일 텐데 개인적으로 구석기유적이 보다 많이 확인되어 관련 분야의 연구가 많이 진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필자 주변에 알고 있는 구석기 전공자도 그리 많지 않다).


3. 신석기시대

이 역시 내용의 변화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초판에서 <신석기문화의 시공적 위치> 안에 포함된 소주제 2개를 따로 떼어내 <지역구분과 편년>,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와의 관계>로 구성한 것이 눈에 띄었다. 초판에서는 한영희의 지역구분 도면을 그대로 썼지만, 개정 신판에서는 이를 수정하여 보다 깔끔한 도면으로 만든 것이 눈에 띄었으며, 집필자의 의도에 맞게 지도를 일부 수정한 것도 눈에 띄었다. 특히 각 지역별로 신석기시대 토기의 형식과 특징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앞으로 옮기고, 뒷부분의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정보 획득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변화가 엿보였다. 그밖에 뒷부분에서도 초판의 내용과 개정 신판의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더 깔끔하게 편집을 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4. 청동기시대

크게 신 자료의 수록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물론 일부는 있지만). 한해에 발굴조사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의 수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확보된 신 자료가 많이 없다는 점은 아무래도 청동기시대 연구의 큰 틀이 대략적이나마 어느 정도 잡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단순히 유적이 많이 확인되지 않는 구석기~신석기시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의 견해를 뒤엎을만한 신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그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선배들 중에도 청동기시대 전공자가 다수 있는데, 개중에는 농담으로나마 ‘이제 청동기는 할 게 없다~’라는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즉, 아무리 새로운 모델과 이론 및 방법론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청동기시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나왔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새로운 유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하나의 사례가 증가할 뿐이지, 그것이 기존 견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봤을 때 개정 신판에서 새로운 내용을 원하는 독자들은 다소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판에 비해 분량 면에서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에, 자료 획득이라는 측면에서는 환영해도 괜찮을 것이다.


5. 초기철기시대

초기철기시대라는 시대 개념은 상당히 애매한데, 일단 고고학계에서는 B.C 300~100년까지를 초기철기시대로 보고, 그 이후 A.D 3세기 중엽까지를 원삼국시대로 구분한다. 하지만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철기가 확인되고 있으며, 일본의 초기 철기문화도 B.C 4~3세기경으로 소급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초기철기시대 상한도 보다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관련 연구자들도 그렇고, 필자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이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고대 삼국이 성립된다는 B.C 1세기(문헌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후와 이전의 문화 양상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당연히 철기시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이미 정치체가 등장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라 하지만 그 이전에는 정치체가 없으니 그냥 철기시대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초기’라는 말을 붙였지만, 확인되는 유물 양상은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가 더 많다. 아마 역사적으로 위만조선의 존속기와 맞물릴 텐데,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치상황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 성과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은 일단 책장을 넘기면 지도가 훨씬 깔끔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시기별로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양상을 개관한 내용을 뒤에서 앞으로 옮긴 점이 눈에 띈다. 거시적인 면부터 살펴보고 미시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초판에 비해 적절한 편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으며,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연구 경향과 같은 부분) 새로운 견해들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6. 원삼국시대

먼저 북부지역을 살펴보면 목차는 줄었지만, 세부내용은 더 늘어났다. 특히 낙랑과 대방의 각 챕터별로 내용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낙랑 · 대방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고고학에서 낙랑의 위상>이라는 내용의 이 실려 있어서 한국 고고학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저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있게 해 놨다. 특히 초판 이후 진행된 저자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어 내용 면에 있어서는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부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중부 및 서남부지역은 북부지역에 비해 새로운 내용이 많이 추가돼지 않았지만, 신 자료에 대한 도판이 많이 추가된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오히려 초판에 실려 있던 도면 중에 빠진 것들도 있어서(철광석 산지 및 철기 생산 유적, 적석분구묘의 분포도면 등) 이 부분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기존에는 많이 언급하지 않았던 주구토광묘에 대한 언급이 많이 삽입된 점도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부분 중, 가장 많은 도면과 도판이 실린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전에 비해 전체적인 편집과 구성이 많이 깔끔해져서 한결 살펴보기가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동남부 지역의 경우, 초판에서는 편년 혹은 와질토기론, 도질토기 기원론 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동남부지역 원삼국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개정 신판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싹 다 뺐다(초판에 이미 썼으니, 여기에서는 재삼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는 모르지만 -.-;). 그밖에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전체적으로 도면과 도판 편집에서 더 깔끔해졌다.


7. 삼국시대

일단 고구려는 도판이 몇 개 더 추가되었지만,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아마 가장 적은 변화상이 보이지 않나 싶다. 그만큼 새로 추가된 고구려 유적이 많지 않았다는 반증도 될 것이고).

하지만 백제는 그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근 한국 고고학계에서 원삼국~백제시대 유적이 대거 확인되고 있는데(아마 세종시 건설과 관련한 발굴조사의 양적 · 질적 증가가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도 한몫 담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최신 연구 성과가 개정 신판에 많이 녹아들어 있었다. 각 시기의 도성에 대한 자료도 증가했으며, 각 시기의 고분 및 생활유적 등에 대한 서술도 증대됐다. 특히 새로 편집된 구성이 각 시기별, 백제의 정치체제와 문화 양상, 지방 세력에 대해 잘 이해하게끔 되어 있어서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또한 영산강 유역에 대한 서술도 독립적인 장을 마련하고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전체적으로 큰 변화는 없지만 그간 새로 확인된 유적 및 유물에 대한 소개를 꼼꼼하게 하고 있어 이 역시 자료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만족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신라의 경우, 앞부분은 초판이나 개정 신판이나 큰 차이가 없지만, 새로 확인된 경주 황오동 C10호분에서 출토된 완전한 형태의 마갑과 찰갑, 함안 성산산성의 목간과 같은 신 자료도 빠짐없이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초판과 개정 신판의 편집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기존과 주제는 동일하지만 세부 내용에 있어서 분량이 증가하였다.

가야는 기존에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으로 나눠서 개관을 정리한 다음에 개별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 소개했는데, 개정 신판에서는 가야 권역별로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유적과 유물이라는 주제에 맞춰서 각 가야에 대해 일괄 기술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가야가 다른 3국과 정치적으로 다른 상황이었고, 실제 고고자료 역시도 다르게 확인되는 만큼, 보다 합리적인 서술방식을 도입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삼국시대의 전체적인 목차에 맞춰 내용을 앞뒤로 편집하다보니 개정 신판에서는 보다 불편하게 서술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암튼, 전체적으로 내용 면에서 큰 변화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8. 통일신라와 발해

통일신라에서 전체적으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초판에서는 신라 왕경 복원도를 윤무병 선생님의 것을 인용했다가 개정 신판에서는 이은석 선생님의 것을 인용한 것이 눈에 띄었다(저자가 생각하기에 후자의 연구 성과가 더 합리적이라고 느꼈나 보다). 그밖에 경주 황룡사지 동편 유적과 상주 복룡동 유적, 광주 남한산성의 대형 건물지 및 대형기와 등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고 있어 통일신라 관련 유적이 그간 꾸준히 조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초판에서는 녹유신장상 전돌의 파편과 복원도만 소개했는데, 개정 신판에서는 보다 많이 복원된 실물자료와 컴퓨터로 복원한 복원도를 싣고 있는 점도 독특했다). 그밖에 <나말여초기의 고고학>에 대해 소개한 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발해의 경우, 개정 신판에서도 발해의 영역에 요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밖에 초판 이후 조사가 진행된 유적들에 대한 내용이 일부 소개되고 있어 최근 연해주 등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기본적인 내용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고고학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이미 김원룡 선생님의『한국고고학개설』때부터 고려와 조선(그때는 심지어 발해까지 빠졌다)은 한국 고고학의 연구 분야에서 제외되어왔고, 초판 때도 그러한 경향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아마도 한국 고고학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며, 연구영역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 이제 총평을 하고 마무리 짓겠다.

전체적으로 기존의 도면을 보다 깔끔하게 만지고, 추가된 새로운 도면 및 도판을 넣은 것은 개정 신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밖에 새로 추가된 내용을 더 집어넣는 것도. 하지만 무리하게 목차를 맞추려고 하다 보니깐 초판보다 오히려 읽는데 불편함을 겪은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글자 크기를 줄여 더 많은 내용을 실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으며(물론 판형도 커지고, 분량도 늘긴 했지만), 초판에 비해 여러 부분에서 한국 고고학이 그간 발전했구나~를 느낄 수 있게 했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개정 신판만 읽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초판과 맞물리지 않는 부분도 있으며, 각 저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변화를 겪은 부분도 분명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국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할 필수 개설서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고고학 개설 - 제3판
김원룡 지음 / 일지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은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법한, 아니 읽어야만 하는『한국고고학개설』을 소개할까 한다. 사실 나름 고고학도라고 자칭하는 필자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여지껏 단 한차례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후배들에게는 늘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유(?)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는 이 책에 대한 어떠한 피드백도 하지 않았다니...암튼, 오늘은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몇자 적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먼저 이 책에 대한 몇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저자 이름을 무심코 '김원룡?' 이라고 읽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선배 한분이 '야! 김원용이지, 어떻게 룡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맞다. 그런데도 아직껏 필자의 입에는 '김원룡 선생님'이라는게 더 익어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한 번은 수업시간에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에 대해 배우면서 김원룡 선생님때 문에 이런 용어가 생겼구만~하면서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막 역사를 공부하는 그 시점에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정말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물론 책을 읽으면서 그런 애초의 생각은 바뀌었지만 말이다). 암튼, 이 책은 대학교 1학년때부터 정말 꾸준히, 심심할 때마다 펴보는 책인데, 그때마다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다른 것 같다.  

그럼 책에 대해서 간단하게 몇자 적어보자(이 책에 대한 리뷰가 인터넷상에 거의 올라오지 않았더라. 아마도 이 책이 학술서적이라기보다는 개설서로서 학교에서 수업 교재로 많이 쓰이다보니 리뷰가 올라올 일이 별로 없을 뿐더러, 일반인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재밌는 책이 아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책의 목차를 보면 크게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
제2장. 구석기문화
제3장. 신석기문화
제4장. 청동기문화
제5장. 초기철기문화
제6장. 낙랑군의 문화
제7장. 원삼국문화
제8장. 삼국시대 묘제 및 부장품
제9장. 통일신라시대

부록 1. 근대한국고고학연표

어떤가? 약간 독특하다. 아마 책을 읽는 여러 독자들도 느꼈겠지만, 뭐가 독특하지?? 하고 넘어갈 법도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짚어보겠다.

1. 우리가 흔히 쓰는 '시대'라는 용어 대신에 '문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시대'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어떤 표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이라는 의미인데,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확인된 고고자료를 갖고 시대라는 용어를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고고학에서 문화라고 한다면 단순히 유물복합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사람들의 행위와 의식까지도 언급하는데(http://cafe.daum.net/yeohwicenter/5s83/18), 엄밀히 말하면 시대라는 용어와는 다소 다르게 사용되긴 한다. 그리고 현재의 고고자료는 충분히 문화에 대해서 언급해주고, 그것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는 최근에 나온 고고학 개설서인『한국 고고학 강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초기철기시대(편의상 필자는 요즘 쓰는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와 원삼국시대는 요즘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시기적으로 초기철기시대가 더 먼저 온 것으로 이해하고 다른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요즘으로 치면,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점토대토기 시대로 이어지는 그 기간에 해당하는 문화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 스스로 원삼국시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분한 것이라 생각한다(저자의 원삼국시대에 대한 생각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3. 삼국시대 문화라고 하지 않고, 딱 묘제와 부장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생활유적이나 관방유적과 같은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제대로 발굴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야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경작유구와 제철유적과 같은 생산유적, 각종 주거지 및 건물지가 포함된 생활유적 등이 많이 조사되었지만 과거에는 확실히 그런 자료들이 별로 없었다. 이 책에서도 상당 부분의 내용이 '고신라 및 가야' 묘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런 상황을 여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 통일신라시대가 목차의 마지막이다.『한국 고고학 강의』(초판)에서 처음으로 통일신라시대와 동시대에 있던 발해를 목차에 집어넣고,『한국 고고학 강의』(개정 신판)에서 부록으로 '중근세 고고학의 현항과 전망'이라 하여 고려~조선까지를 연구범위로 고려해서 넣은 것과 비교하면 참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고고자료가 자꾸자꾸 많이 나옴으로써 고고자료만으로도 시대 구분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구나, 라는 것과 함께 앞으로 더 많은 고고자료가 확인됨으로써 기존의 역사연구에 더 많은 활기가 불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뭐 목차를 얘기하다 보니깐 벌써 많이 흘렀다. 솔직히 이 책은 개설서인데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책이기 때문에 내용 자체에 대해 잘잘못을 짚어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자 또한 그 점에 착안해서 몇몇 부분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겠다.


첫째, 이 책은 앞으로는 다시 나오기 힘든 책이다. 왜냐하면 고고자료가 하루 하루 엄청나게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학자 1명이 한국 고고학을 전부 다 기술하기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시대와 전공을 넘나든 고고학계의 대석학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이 책이 옛날에 나왔고, 내용이 많지 않은 데다가 여러 자료들을 단순히 나열한 것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아니다. 오히려 중간중간 저자가 개인적인 사견을 집어넣은 부분이 많이 있고, 그런 내용들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저자 1명이 책을 쓰게 되면 일관된 편집원칙 및 주관에 의해 논지를 전개하는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까 얘기했지만, 이런 책은 다시 나오기 힘들 듯 싶다. 또 김원룡 선생님같은 분이 나오지 않는 이상...

둘째, 서론을 보면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1~3쪽).

고고학은 사람의 행동이 남긴 물질적 흔적(유적과 인공 및 자연 유물)을 통해서 그것을 남긴 사람들의 문화 · 역사를 밝히는 학문이다. 고고학이 역사학의 한 분과이면서 독립적 ·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료의 특수성에 의한 것이며, 같은 역사과학이면서 기록만을 자료로 하는 좁은 의미의 역사학과는 그 연구 방법이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소위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이라 하여 유적 · 유물을 단순히 역사적 · 문화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화조직체로서 파악하고, 그것을 움직이고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인간행동 · 문화변동의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는 새 학풍이 일어나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고고학 자료의 성격상 고고학의 능력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어서 그러한 학풍은 미국 인디안문화 연구에서처럼 민속학적 傍證이 가능한 지역에서 생길 수 있는 문화인류학적 고고학이며, 우리나라처럼 고대와 현대가 거의 단절되다시피한 오랜 역사의 나라나 지역에서는 고고학이란 역시 역사과학이고, 고고학의 궁극 목적은 문화변동 법칙의 발견이 아니라 역사의 복원과 설명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화내용의 서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면서 시간성이 요구되는 것이며 … (후략)
 

한국 고고학계의 특수성에 대해 잘 표현한 것 같다. 확실히 신고고학이 발원한 미국과 우리나라는 학풍이 다를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하지만, 고고학이 단순히 역사학의 한 분과라고 보는 것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역사고고학 분야에 있어서도, 문헌에 남아있지 않는 고고자료들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이라는 것이 위정자가 남긴 것이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더더욱 고고자료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전통고고학적인 학풍이 강해 과거사의 복원과 설명이 우선시되고 있지만, 더 많은 고고자료가 축적되고, 더 많은 방법론이 개발되다 보면 신고고학에서 말하는 그러한 목적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것만 봐도 한국 고고학 초창기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셋째, 낙랑군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과거의 인식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고정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생각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단순히 옛날 연구성과라고 보기에는 낙랑군을 인식하는 접근법 자체가 필자가 생각하는 바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저자는 낙랑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운을 떼고 있다(119쪽).

낙랑군은 漢의 식민지로서 그 묘제, 문물은 거의 모두 중국 한대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우리나라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고고학이나 미술사에서는 제외하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낙랑군의 문화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초기 철기시대나 원삼국 문화는 물론 그 뒤의 삼국시대 문화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낙랑문화의 이해 · 지식없이는 우리 고고학의 올바른 이해는 바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고대 문화와의 관련에 주안점을 두면서 낙랑문화의 개관을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요즘은 낙랑군을 단순히 漢의 식민지로만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김원룡 선생님의 인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는 고고자료가 양적 · 질적으로 많이 늘어난 데다가 그와 관련된 연구성과도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중국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안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 할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프랑스나 독일, 영국, 스페인, 이집트 역사에서 로마의 역사는 제외해야 할 것인가? 로마사는 오직 이탈리아의 역사란 말인가? 더군다나 낙랑군은 모두 중국의 것이며, 그 영향을 받아 한국 고대사가 크게 발전했다는 인식 또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식민사관 혹은 타율성론 등과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고고학계 초창기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지금의 고고학도들은 無에서 有를 만들어내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런 선학들의 연구성과를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싶다.

넷째, 논란이 되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좀 정리해보자(128~129쪽).

원삼국시대라는 것은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를 말하며, 이 시기는 국사에서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시대, 성읍국가시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왔고, 고고학에서는 김해시대, 웅천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 등 이름으로 불리는 시기이다.

그러나,『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는 엄연한 삼국시대이며 실지로 삼국시대라면 누구나 삼국사기의 편년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위에 든 것 같은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라고 해 놓고 다시 그것을 삼국시대에서 제외하는 것은 근본적인 모순이고, 또 북쪽에는 엄연히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삼한시대라는 남한 중심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적당치 않다. 한편, 부족국가라는 말은 이제는 사용되지는 않으나 처음부터 부족이라는 개념을 잘못 파악한 것으로서 문제가 되지 않으며, 성읍국가시대라는 용어도 국가의 성격을 뜻하는 설명어로는 괜찮으나 삼국시대라는 왕조 기준 시대구분과는 설정기준이 맞지 않는다. 또, 고고학에서 말하는 김해기는 지금까지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 문화단계를 따르다가 갑자기 유적 이름으로 바뀌어 역시 설정 기준에 통일성이 없을 뿐 아니라 문화사에서 엄밀히 삼국시대로 넣고 있는 시기를 고고학적 시대명으로 二重 명명하는 것도 잘못이라 하겠다. 또, 그런 뜻에서 이 시기를 초기 철기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잘못이거니와 완전 철기 단계인 이 시기를 초기 철기시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착오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삼국시대의 原初期, 또는 原史 단계의 삼국시대라는 뜻으로 원삼국시대(Proto-Three Kingdom Period)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주장하여 온 것이며, 이것은 문화사, 고고학에서 모두 함께 쓸 수 있는 합리적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김원룡 선생님은 원삼국시대를 삼국시대의 이른 시기를 구분하는 용어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고대 국가의 시작을 서기 300년 경으로 봤기 때문이다. 국사학에서 인식하는 실질적인 삼국시대의 시작도 서기 300년이요, 고고학에서의 신라토기의 발생, 高塚의 출현의 편년과도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에 서기 300년을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획기로 나눈 것인데, 이것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대 국가 형성의 필요조건으로 위의 것들이 문제가 된다면, 이제는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물론 고대 국가 형성에 필요한 요구조건에 대해서 현 학계의 생각에 꼭 동의하지는 않는다. 또한, 과거에 비해 요구조건에 충족될만한 고고자료가 더 많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만약 김원룡 선생님도 저 당시에 고고자료가 충분히 갖춰졌다면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을까? 아니면, 그 시기를 서기 300년으로 잡았을까? 싶다.

다섯째, 삼국시대 묘제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고신라 및 가야에 대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최근 나온『한국 고고학 강의』를 보면 백제 묘제 관련된 新자료들이 많이 서술되어 있다. 그만큼 과거에 비해 고고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증가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개인적으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백제사가 제대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한국 고고학 초창기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인데, 연구사 정리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이다.

아마 예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면,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몇년간 이 책을 읽고, 다른 연구성과들을 접하다보니 이런 글이 나온 것일 것이다. 하지만 몇년 뒤에라도 또 서평을 쓰면 이 글과는 또 다른 내용의 서평이 쓰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은 고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부분에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 책이 시대를 초월할 정도로 잘 쓰였고, 꼭 읽혀야만 하는 책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고학을 이해하고 싶고, 고고학을 막 공부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다시 한번 추천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룡 :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
장 기 마샤르 지음 / 시공사 / 1995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Le monde perdu des dinosaures', 이 책의 제목이다. 불어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야후 바벨피쉬로 검색해보니 영어로는 'The lost world of the dinosaurs' 정도 되는 것 같다. '공룡들의 잃어버린 세계' 정도로 보면 적당하려나? 그렇게 놓고 보니깐, 저 위에 붙은 제목이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왠지 공룡에 대해 더 신비감을 조장(?)하는 듯한 제목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책 제목에서부터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책 표지를 넘겼는데, '으잉? 이건 뭐임?' 필자의 나이가 많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닌데 필자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시절)때 봤던 공룡 관련 책에서나 볼 법한 삽화들은 필자의 미간을 절로 찌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책의 전반부는 그저 그런 내용들이 이어졌다. 공룡이라는 녀석들이 어떤 녀석이라는 식의 개설적인 내용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 책의 저자가 콤프소그나투스(Compsognathus)라는 몸길이가 1m도 넘지 않으며, 수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닌 아주 소형의 공룡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통해 육식공룡의 진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니 상당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죽 봐왔던 공룡 관련 고생물학자들의 주된 관심분야는 대개 대형 공룡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예전에 시조새를 연구하는 학자의 인터뷰를 한번 본 적이 있긴 하다). 더군다나 크기가 작은 공룡의 경우, 그 골격이 온전히 남아있기 힘들텐데(실제 14쪽을 보면, 지층의 퇴적물 입자가 매우 고운 덕택에 1861년, 콤프소그나투스의 완전한 골격이 확인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런 대상을 연구 주제로 잡았다는 점이 독특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저자의 중심 연구주제에 대한 내용이 책 전반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며(개인적으로 이 작은 녀석을 통해 어떻게 육식공룡의 진화 과정을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 나왔으면 했었다), 공룡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다른 공룡 연구자들도 충분히 쓸 수 있는)들만 나열되어 있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2장으로 넘어가면서 공룡의 연구史를 간략하게 적고 있다. 역시 이구아노돈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며, 메갈로사우르스라든가, 디노사우리아와 같은 명칭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만, 흥미로웠던 점은 북아메리카에서 '오스닐 찰스 마시'와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라는 2명의 학자가 서로 경쟁적으로 공룡 화석 발굴에 매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연구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경쟁자로 인식했으며, 전 재산을 투자해 서로 탐색대와 정보조직을 만들고, 발굴대를 갖춰 발굴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북아메리카 서부의 여러 주에서 훌륭한 공룡 화석 표본을 수집할 수 있었고, 130종 이상의 공룡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코프의 조수였던 '찰스 해즐리어스 스턴버그'와 세 아들과 같은 이들이 계속적으로 공룡 화석을 발굴하면서 공룡 연구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유적이 주로 강을 따라 분포했던 탓인지, 숙소 겸 연구소로 이용하는 너벅선이 실린 사진이 재밌었다. 저런 식의 발굴도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들 정도로). 그렇게 초기 유럽과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연구는 훗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확장되었는데, 간간히 한반도에서도 확인되는 공룡 화석에 대한 소식이 절로 떠올랐다(EBS에서 제작한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다큐를 정말 재밌게 봤던 기억도 같이. 주인공이 점박이였던가?).

그 뒤에 조금 흥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3장의 '공룡은 어떤 동물인가' 부분에서 공룡이 '도마뱀의 골반을 갖는 용반목'과 '조류의 골반을 갖는 조반목'으로 나뉜다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이분법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책 맨 뒤(136쪽)에도 나오지만 용반목은 다시 수각아목과 용각아목으로, 조반목은 조각류, 각룡류, 검룡류, 곡룡류 등으로 나뉜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에 몰랐던 부분이어서 상당히 신선했고, 또 흥미롭기까지 하였다. 같은 파충류인데 용반목과 조반목이라니. 조반목이라고 하면 시조새 정도만 생각했던 필자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공룡과 관련된 여러가지 분야의 학설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공룡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좋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전부터 널리 알려진 것들이어서 상식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몰랐던 부분들이 있어서 적잖은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러면서 저자는 공룡의 집단소멸에 대해서 현재 60가지 이상의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고 하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솔직히 60가지 이상의 학설이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만 저자는 다시 그 여러가지 학설을 크게 7가지로 재분류하였다. 첫째는 먹이사슬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 둘째는 공룡 자체의 종족의 노화, 신진대사의 이상 등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 셋째는 전염병, 기생충, 육식공룡의 과도한 사냥, 포유류의 등장과 같이 다른 종의 등장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 넷째는 기후의 변화에서 원인을 구하는 견해, 다섯째는 지질이나 대기의 변화(화산재, 유독가스, 지구 자전축의 이동 등)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 여섯째는 천문학적인 사건(유성 충돌 등)에서 원인을 구하는 견해, 일곱째는 노아의 방주 혹은 우주인의 파괴, 신의 의지 등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 등이 있다고 한다(물론 현재에는 이 중에서 3가지 이론만이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대체로 기후 혹은 천문학적인 현상과 연결된 것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어릴때 봤던 공룡 관련 책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인데, 지금 서른이 넘은 시점에서도 똑같이 언급되고 있다고 하니 세월이 흐르고 공룡에 대한 연구가 아무리 많이 진행되었어도 변함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또한 중간에 공룡형인간(Dinosauroid)에 대한 내용이 조금 흥미로웠지만(예전에 국내 만화 중에서 인간의 조상이 포유류가 아닌 파충류다~라는 식의 내용이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가쉽거리처럼 쉽게 받아들여질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본문 마지막에 저자가 적은 문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공룡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아아~그렇지. 공룡은 지금껏 지구 상에 살았던 생물 중 어떻게 보면 가장 오랫동안(1억 5천만년) 번성했던 생물군이었다. 지금의 인류보다도, 인류와 같이 공존하는 여러 생물보다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공룡이 왜 멸망했는지에는 큰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룡이 어떻게 긴 시간동안 잘 살아남으면서 번성하고, 진화했는지는 큰 관심을 안 가진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순간 한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영화 <쥬라기 공원> 1~3편 시리즈가 떠올랐다. 공룡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떤 식으로 번성했는지에 대해서 잘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니깐, 책의 제목을 왜 저렇게 '의역'했는지에 대해서 일견 수긍이 갔다. 그 제목이 책의 내용을 보다 독자에게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의 말미에 한반도에서 발견된 공룡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어서 뭔가 공룡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잘 갈무리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확실히 책을 다 읽고 나니깐,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개인적으로 이렇게 책에 대한 인식이 부정 → 긍정으로 변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처음에 별 3개를 책정했다가, 4개를 책정하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분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읽어나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 싶다. 공룡에 대해 어릴적 갖고 있던 막연한 환상과 인식이 아직 남아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기에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11-06-2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방문해서 좋은 책 추천 많이 받고 갑니다. 늘 감사드려요^^

麗輝 2011-07-26 13:15   좋아요 0 | URL
와아~marine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요즘 날씨가 궂은데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