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 -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
강찬석 지음 / 소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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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만에 백제사 관련한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최근에 풍납토성에 대하여 인터넷 공간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토론 상대자의 책을 읽어봐야겠다~싶었고, 그래서 구입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도 없고, 전공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토론을 하는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아주 복잡한 녀석이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에 발을 들이기가 싫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의 저자인 강찬석 쌤과 온라인상에서 말을 섞을 기회가 있었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토론이 이뤄지게 되었다. 

2011년 5월 12일 -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닌 이유 by 강찬석 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이다? 아니다? by 여휘

강찬석 쌤이 쓴 글은 책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며(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책에 대한 세부적인 비평은 삼가하도록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뭐야 이거! 자기 귀찮다고 이런 식으로 리뷰를 써!?'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풍납토성에 대해서 최근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링크된 글을 참고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암튼, 다음까페에서 진행된 강찬석 쌤과의 토론은 어느 정도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가는 차원에서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는데 제3자들(풍납토성과 관련된 경제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치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토론은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에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희진 쌤과 이 부분에 대해 재차 토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토론은 진행 중이며, 서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일단, 풍납토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문헌사학(이희진 쌤)과 고고학(필자)의 입장 차이가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서로 어느 정도 이해를 한 상태이지만,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소 평행선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계속 토론을 진행하려고 하는 상태이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인가? 아닌가? by 여휘
2011년 6월 7일 - 시궁창싸움 아닌 진짜 토론을 한번...-풍납토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고고학이냐 문헌사학이냐의 차이일까?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왕궁과 왕성, 도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2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생산적인 논의로 가고 있는 듯...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3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이상이다. 한 일주일간 논의가 진행되었고, 총 21개의 주제에 대해서 이제 한개가 겨우 마무리가 된 듯 싶다. 위에 링크를 건 9개의 글을 다 읽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 필자가 그걸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기에 여기에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왕궁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국의 도성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조건들(거대한 건물지, 제의공간, 다양한 유물, 거대한 성벽 등)이 있기 때문에 현재 고고학계에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이희진 쌤은 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필자 또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제의 도성이 몽촌토성이라고 배웠으니깐. 하지만 몽촌토성의 대안으로 풍납토성이 제시되어 기존 견해가 수정된 것처럼, 지금의 견해가 수정되려면 풍납토성의 대안이 될만한 무언가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눈에 보이는 실물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고고학자가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봤을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약점?)이랄까. 그건 바로 고고학적으로 백제 왕성이라고 주장되는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려면 똑같이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공동 저자 두 분은 건축역사학자이자 문헌사학자이다. 고고학적으로 아직 배우는 입장인 필자보다도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로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법은 상호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책을 쓴 공동저자 중 고고학자가 들어 있다면 책의 목차나 내용이 결코 이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고고학자는 토기 몇점, 초석과 같은 석재 몇점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않는다(아니, 그래서도 안 되고). 또한 전면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추론해서도 안 된다(이런 부분에서 풍납토성 발굴책임자들은 조금 성급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건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문헌사학자라 하더라도 고고학자의 견해를 까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고학자와 같은 마인드로 접근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차라리 문헌에 기초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미 태생부터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현재 중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인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싶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자의 논리를 공파하기 위해 철저하게 고고학적 논리로 무장하지 않은 것은 분명 공동 저자들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럼 전체 목차를 따로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온라인상에서 구체적으로 토론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좀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 또한 이희진 쌤과 강찬석 쌤과 추후 있을 온라인 토론에 적용될 것이며, 서로간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어차피 문헌적인 부분에서는 문헌사학자인 이희진 쌤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니 말이다. 

1. 아차산장성에 대한 부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예전에 쓴 글(클릭)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문헌적인 측면에서 왈가왈부 할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장성이라는 존재가 만리장성과 같이 거대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이미 후대 훼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변 일대를 전부 전면 제토해서 발굴조사하지 않는 이상, 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입장에서 이것이 백제 도성과 관련해 해석되는 것은 무리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다만, 필자가 이에 대해서 필자의 논문에서 언급했던 것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141쪽). '아차산장성을 고구려군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별 타당성은 없는 듯하다. 아차산장성이 쌓여 막고 있는 방향은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다. 굳이 자신들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성을 자기들 손으로 쌓을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위에 제시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차산장성은 아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존재하며, 이는 오히려 고구려 보루들의 교통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라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2. 뚝섬 불상에 대한 부분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145~146쪽).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 만약 이 불상이 백제 불상이라면 이 역시 백제 북성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불상이 나온 지역이 바로 아차산 지역과 바로 붙어 있는 뚝섬 지역이기 때문이다.'라고. 과연 그럴까? 

맨 처음 뚝섬 불상이 발견되었을 때 김리나 선생님은 어느 나라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문명대 선생님은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했다(http://blog.naver.com/kw4?Redirect=Log&logNo=10038554541). 그리고 현재에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정확하게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http://arts.search.naver.com/service.naver?where=arts_detail&query=%EB%9A%9D%EC%84%AC+%EA%B8%88%EB%8F%99%EB%B6%88%EC%A2%8C%EC%83%81&os=643298),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떻게 이런 확신에 찬 발언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책 뒤에 적혀 있는 참고문헌을 봐도 뚝섬 불상과 관련된 논고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근거가 궁금했다. 하물며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면, 이 대체로에 들어가는 학자들이 꽤 있다는 소리인데, 이상하다 싶어 논문을 검색해봤다(왜냐하면 필자가 학부생때 배울 때에도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정영호는 고구려의 불교 전래가 372년이므로 4세기 말부터는 중국에서 불상을 가져갔다고 보고 그 한 예로 1959년 확인된 뚝섬 불상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5세기 경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유물은 아니라고도 했다(2001,「고구려불상조각의 특성 연구」『고구려연구』12, 고구려연구회, p.1043). 문명대 선생님(2003,「불상의 전래와 한국 초기 불상 조각, 뚝섬 금동불좌상」『한국의 불상 조각Ⅰ-삼국시대 불교조각사 연구-』, 예경, pp.147~154)과 양은경(2008,「대륙과 해양을 품은 고구려 불교조각」『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p.76)은 이것이 5세기대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리나 · 강우방 선생님은 뚝섬 불상이 한성백제 권역에서 출토되었지만, 그 조형이 북조나 남조에서 바로 건너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즉, 백제 영역 안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백제 불상의 조형으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고 있진 않았다(1993,「백제초기 불상양식의 성립과 중국불상」『백제연구총서』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pp.233~236). 반면, 이를 백제의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연구성과는 찾지 못 했다. 즉,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모른다는 견해와 고구려 것이라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지, 대체로 백제 불상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즉,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불상이 백제의 것이라는 전제 아래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전제 자체가 재고의 여지가 있다면 저자들의 논지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이 백제의 북성이고, 그 주변에서 백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논지는 일단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고고학적으로 공인된 '풍납토성=왕성' 설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썼고, 그렇게 제시된 고고자료 중 하나가 이 불상이라는 점을 봤을때 이는 상당히 무리수가 있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고고학계에서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유물은 그 유물이 아무리 완형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불상을 제시했으며, 이를 또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보고 있다는 다소 근거없는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필자처럼 일일히 확인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독자에게는 거짓을 말한 셈이 되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웅진도성 문제

저자들은 158쪽에서 일제시대 조사된 석성을 기준으로 공산성이 총 길이 2,660m의 도성으로 소개하고 있다(그런데 이 책 19쪽에서는 웅진성의 왕성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고 적고 있다. 이건 무슨 근거인가? 이는 약 6,612,000㎡에 해당하는 엄청난 면적이다. 공산성이 정사각형의 도성이라 치면 한변의 길이는 665m가 된다. 그리고 내부 면적을 곱하면 442,225㎡, 약 133,800평이 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웅진성의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pp.83~85)을 보면 내부에서 확인된 것은 임류각지와 추정왕궁지 등이다. 그런데 추정왕궁지에서 나온 것이라곤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 굴건식건물지2동, 지당지 1기, 목곽고지 1기 등이다. 이 중 왕궁터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공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웅진도성이 저자들이 말하는 왕궁터에 걸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저자들은 이미 앞부분에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왕궁과 왕성의 넓이가 넓은데 반해 풍납토성에는 그럴만한 왕궁이 없고, 그런 왕성도 아니라는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18~20쪽). 즉, 일국의 왕성이라면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성에서 확인되는 왕궁터는 전체 면적 6,800㎡ 정도, 즉 2,057평 정도밖에 안 된다. 또한 사비도성은 어떠한가? 내부에서 제대로 된 왕궁터라도 나왔는가? 필자가 알기로 없다. 

한국 고고학계의 최신 개설서라고 할 수 있는『한국 고고학 강의(개정 신판)』(한국고고학회, 2010, pp.268~272)을 보면 백제 도성에 대한 현 학계의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단 풍납토성 내부에서 뚜렷하게 왕궁터가 확인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성 내부에서 의례용 건물과 제의유구, 대형 수혈주거지, 성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3중 환호 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다. 또한 웅진성은 공산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산성 내부설과 외부설이 있다. 내부설에서 왕궁터라고 주장되는 건물지는 규모나 시기에 문제가 있으나, 공산성 외부에서 왕궁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고 있다. 더불어 사비도성의 경우에서도 내부에서 왕궁터가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도로 유구와 부소산성, 동남리유적, 관북리유적, 군수리사지, 나성 등을 통해 계획된 도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즉, 저자들은 풍납토성과 공산성, 사비도성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자들은 책 앞에서 주변 국가의 왕궁과 왕성 면적을 제시하면서 풍납토성은 왕궁도 없고, 주변 국가만한 왕궁이 나올만한 땅도 없으니깐 왕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공산성에서 나온 왕궁터 얘기는 뒤에 하나도 없다. 면적이 분명 적다면 이는 왕성이라 보기 힘든 것 아닌가? 또한 사비도성에서는 왕궁터라고 볼만한 유적보다 대형 건물지가 나온 유적만이 나왔을 뿐인데도 역시 이에 대해서 별말이 없다. 즉, 왕궁만 갖고 왕성 여부를 따지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돼니깐 저자들이 제시한 주변 국가들의 면적도 의심스러워졌다. 무슨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일단 중국 도성에 대한 면적을 살펴보고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5년에 발간한『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를 펼쳐봤다. 저자들은 후한 낙양성의 왕궁을 30만 평, 왕성은 300만 평으로 봤다. 보고서를 보니, 한진 시기의 낙양성은 북위 시기의 내성이라 한다. 그리고 동벽의 3,895m, 북벽 2,820m, 서벽 3,510m, 남벽 2,460m로 유실된 부분까지 합치면 총 14㎞ 정도라고 한다. 그럼 이 또한 정사각형이라 가정하면 한쪽 벽의 길이는 3.5㎞가 나온다. 그리고 왕성의 넓이는 12,250,000㎡, 약 370만 평에 달한다. 또한 도면의 축적대로 왕궁터의 면적을 곱해보니 1,375m×625m 해서 총 859,375㎡, 약 26만평이 나왔다. 즉, 후한 낙양성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왜 정확한 수치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논지 흐름상 큰 상관은 없으니). 또한 저자들은 수 · 당 장안성은 왕성이 2,560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보고서를 보니 수 · 당 장안성의 외곽은 거대하여 면적은 83㎢, 즉 2510만평에 달하며, 황성(왕궁)은 사방이 9.2㎞에 면적 5.2㎢, 약 157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일단 중국 도성은 얼추 비슷한 수치가 나오고 있으며, 그밖에 고구려 도성이나 신라 도성의 면적 역시 비슷한 수치가 추산됐다. 

그런데 왜 유독 백제 웅진성에서만 저런 오차가 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혹시 풍납토성의 면적이 제일 작다고 강조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닐까? 하는 음모론까지 떠올렸다. -.-; 왜냐하면 저자들은 국내성의 왕궁 넓이는 알 수 있지만, 왕성 넓이는 알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왕궁의 넓이는 약 17만평으로 적었다. 국내성의 총 둘레는 2,686m이다. 역시 정사각형이라고 생각하면 한변의 길이는 671.5m, 해서 672m로 잡겠다. 그럼 성내 면적은 451,584㎡, 즉 13만 7천평 정도가 나온다(역시 수치가 틀린 것쯤 무시하겠다. 어차피 개설서고 논지 전개상 큰 문제가 없으니).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자들은 분명 구분하기를 '왕궁은 순수 궁전, 왕성은 왕궁을 포함한 민가들'의 개념으로 쓰고 있었다. 그렇게 봤을때 현재 확인된 국내성을 순수 왕궁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게 더 의문이었다. 그런데 왕성이라고 해서 그 면적을 17만평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약 25만평 가량인 풍납토성보다 작아지게 되니깐 이렇게 정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풍납토성이 주변 국가의 왕성 중 가장 작아야만 논지가 전개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왕궁과 왕성의 구분, 단순히 면적만 갖고 도성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저자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취약점이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일국의 도성이면 규모가 커야 한다는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필자도 딱히 그것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면적만 갖고 다른 나라의 도성과 비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 마치 보루의 규모만 갖고 산성인지, 보루인지를 구분하는 기존 학계의 입장처럼 말이다(필자는 그게 싫어서 보루와 산성 내부의 구조 및 성벽의 유무 등으로 따져서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풍납토성의 조사-연구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백제 초기도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중요한 단서만을 찾아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풍납토성 내외가 급속한 개발로 인하여 체계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아 여러 면에서 매우 부담스런 상태라 하겠다.'라고 밝힌 심정보 선생님의 입장(2005,「풍납토성과 중국 고대도성과의 비교연구」『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p.215)처럼 아직 풍납토성은 정답이 아니라 최선일 뿐이며, 현재진행형이라는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4. 백제 기와만의 특징 모골흔의 해석

저자들은『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천왕사 터에서 의미심장한 기와가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백제는 신라와 전혀 다른 제작 기법으로 기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모골흔'이라고 해서 흔히 보는 신라 계통의 기와처럼 둥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이 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백제 와당의 제작 방식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강하게 영향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결론 부분에 대해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다고 그렇게 해석해서 되겠냐? 오히려 백제 문화의 영향이 오래도록 남았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라는 식의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198~199쪽).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모골흔이라는 것은 흔히 모골와통을 쓰면 나타나는 흔적이다. 쉽게 얘기해서 기와를 만들때 곡선의 형태로 만들기 위한 원통형의 통이 필요하다(이를 와통이라 한다). 그때 나무편이나 대나무를 발처럼 세로로 길게 엮어 '모골와통'을 만들거나(중국 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나무 책을 동그랗게 말은 형태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아예 통나무를 파내거나 넓은 판자를 이어만든 '원통와통'을 만들어 쓸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는 모두 모골와통을 사용해서 기와를 만들었지만 신라는 대부분 원통와통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백제 기와의 흔적인 모골흔이 나왔음에 주목한 것이다(즉, 198쪽 위에 실린 기와의 탁본 중 오른쪽에 나타나는 것이 모골흔과 포목흔이다. 왼쪽은 외형을 만들기 위한 성형타날의 흔적이고. 혹시 책을 읽을 독자 중 모르는 분이 계실까봐 자세히 기재한다). 

자아~그럼 모골흔에 대해 설명이 끝났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01년, 2002년에 발간한『하남 천왕사지 시굴조사 보고서』및『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저자들이 봤던 그 책)를 보면, 천왕사지를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이 유적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백제 기와제작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모골와통으로 만든 기와가 나왔음에도 이를 백제 유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일까? 간단하다.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다. 필자가 누누히 얘기하지만, 유적에서 유물의 출토 양상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고려시대 유물이 즐비하게 나오는 유적 안에서 별다른 토층상의 상하관계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기와가 나왔다고 해보자. 그럼 그걸 백제시대부터 주욱 사용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백제계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하는가? 여기에서 고고학적 훈련이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단순히 기와 몇점만 갖고 그 유적을 해석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유적에 대한 편년 및 고찰을 작성할때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유물 및 유적을 모두 살펴본다. 그리고 상대편년도 시도하고, 문헌도 찾아보고, 유물 출토양상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봤을때 천왕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몇점은 백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의아한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단다. 이 무슨 이현령 비현령식 해석이란 말인가. 그럼 사비기 백제토기 양식에 고구려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니, 사비는 고구려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는가? 앞뒤 정황을 봐 가면서 해석을 내려야지, 이 무슨 억지논리란 말인가.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봐도 이 정도인데, 교수님들이나 필자보다 오래 고고학을 공부한 선배들이 봤다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릴지 안 봐도 뻔하다. 이처럼 이 책의 저자들이 문헌사적으로는 얼마나 잘 살펴봤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취약점이 여기저기 빵빵 뚫린 것처럼 확인되고 있었다.


5.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의 해석

이 부분은 강찬석 쌤이 필자와 다음까페에서 벌인 논쟁 이외에도 끊임없이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한번 펼쳐봤다. 책 200쪽에 실린 이성산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 파편 3점의 사진은『이성산성(제8차 발굴조사 보고서)』(한양대학교 박물관 · 하남시, 2000, p.44)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했다(그런데 스캔이 잘못 됐는지 책에 실린 사진은 상당히 흐려서 백제토기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갖고 다른 분과 강찬석 쌤 사이에 언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암튼, 필자는 보고서에 실린 원판을 봤으니 이에 대해 얘기하겠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당시 한양대 발굴팀장이었던 유태용은 2000년에 발간된 ,이성사성 8차 발굴보고서>에서 "이성산성 출토 토기 기종 가운데 태토, 문양, 기형, 색조, 제작 수법 등에서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가 발굴되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201쪽).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보고서의 문구가 곧바로 백제 토기 발굴과 연결될 수가 있단 말인가? 보고서에는 분명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보고서를 열어보니 44쪽에 그와 같은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바로 뒷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이들 토기들은 잠정적으로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하였다.'라고. 응? 이상했다. 왜 잠정적이라고 했지? 전기 토기면 토기지, 왜 잠정적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그 부분의 앞뒤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그나저나 문장을 전부 옮기지 않으니 보고서를 따로 보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하나? ^^;). 

그랬더니 금방 답을 알 수 있었다. 8차 조사에서 발굴단은 초축성벽을 절개해서 단면을 조사하고, 또한 1차 저수지를 조사했다. 1차 저수지는 2차 발굴시 규모가 대강 밝혀졌고, 3차 조사시 33개의 퇴적 층위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8차 보고서에서는 29개층의 퇴적 층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중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된 토기 3점이 10층에서 2점, 11층에서 1점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초축성벽 앞의 무너진 할석을 치우는 과정에서 2점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일단 저자들이 저수지 출토 토기 3점에 대해 언급했으니 뒤의 2점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일단, 토기편은 구연부편 1점, 동체부편 1점, 저부편 1점이다. 대개 구연부편은 기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속성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단순히 동체부편이나 저부편만 있다면 어떤 기종의 것인지 알 수가 어렵다. 기종을 모르면 당연히 전체적인 기형(형태)도 모를테고 그 말은 곧 형식분류가 중요시되는 고고학 연구상 시기를 편년할 수 없다는 소리와 상통한다. 즉, 구연부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편년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소리다. 그런데 왜 발굴단은 이를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으로 봤을까?

뒷장을 들춰봤다. 아하! 고구려계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 토기(이때에는 고구려系라는 표현을 썼으나, 한강유역에서 고구려 보루가 연이어 발굴되면서 이제 그 지역의 토기군은 고구려 토기로 명명해도 무방하니, 필자 역시 시대성을 무시하고 정확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고구려 토기로 지칭하겠다)보다 기술적으로 발전된 형태라고 하니 시기적으로 6세기를 넘어가는 것들일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구려 토기들이 한결같이 저수지의 21층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려 15점이나. 기종도 다양하다. 확실히 저수지 21층 시기에 고구려가 이 곳을 점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재밌는 것이 바로 위에 퇴적된 22층부터 이제 통일신라시대 토기(고신라식, 즉 삼국시대 신라토기는 없었다고 한다)가 수두룩하게 출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갔다. 21층보다 낮은 10~11층에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편년이 가능한 것은 호의 구연부편 1점 밖에 없다. 그런데 21층은 최소한 6세기를 넘어서는 고구려 문화층이다. 22층부터는 통일신라 문화층이고. 그럼 10~11층은 6세기 고구려 문화층보다 앞선 문화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인지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경호 구연부 1점으로는 편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구연부편의 태토가 적갈색 연질태토에 격자타날문이 흐릿하게 확인되고 있으니, 일단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듯 싶다(필자라도 저 상태에서라면 딱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을 듯 싶다). 토기의 기형을 만드는 성형작업시 타날성형은 기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물레성형은 아주아주 뒷시기의 일이고, 조선시대까지도 일부 기종은 타날성형, 즉 뭔가로 두들겨서 둥그렇게 모양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뭐가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삼국시대 전기 후반 토기라고 볼만한 녀석들이 출토된 10~11층 위에 퇴적된 14층에서 '戌辰'명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그 제작수법이나 서체가 C지구 저수지 5층에서 출토된 고구려 목간과 동일했다고 한다(해당 보고서 78쪽). 거기다가 고구려 목간과 함께 고구려척도 출토됐었고. 자아~만약 내가 이성산성 8차 발굴단의 책임자라고 해보자. 여기에서 어떻게 했을까? 단순히 고구려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토기이고, 고신라식 토기가 없으니 백제토기다! 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이 책의 저자들처럼) 아니다. 절대로! 각 층위의 절대연대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결정은 아주아주 위험하다. 특히나 고구려것이 분명한 목간과 척과 동일한 목간이 바로 14층에서 나왔는데, 11~14층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퇴적 양상과 상대적인 시기차를 알 수 있지만 그 층위 양상에서 절대연대를 뽑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시기차가 크지 않아서 그 토기들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과거에는 고구려 토기에 타날기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마 2000년 보고서이므로 고구려 토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라도 당연히 백제토기라는 확답을 내리기보다는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분류했을 것이다. 불명확한 상태에서 일반에게 공개되는 보고서에 개인적인 의지나 견해를 넣을 수는 없지.

보고서를 직접 보니 이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필자가 그런 의도로 이 책을 썼더라면 차라리 5차 발굴조사 보고서(1998년) 92쪽 사진 145번의 종방향의 승문타날문이 찍힌 호 구연부편이라든가(물론 대부분의 토기는 통일신라시대 토기였다)나 10차 발굴조사 보고서(2003)의 타날문이 찍힌 호를 언급했을 것이다. 그게 차라리 더 백제토기 스러우니깐. 하지만 그마저도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0차 발굴조사 보고서 172쪽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거다.

'평탄면의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회절하는 지점의 지표에서 수습된 완형의 호는 특기할 만하다. 이 호는 지표에 구연 부분이 노출되어 수습한 것으로, 호가 위치한 지점은 평소 시민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던 지점이다. 이 호는 회백색의 연질로 복합적인 기형을 띠고 있다. 평저에 동체부엔 중앙에 횡침선이 한줄 돌아가고 있고, 구연부는 직각으로 외반구연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된 위치가 안정된 층위가 아니라 거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유물과의 직접적인 비교가 곤란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토기의 요소가 고루 융합되어 나타나는 예가 될 수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자아~이렇다. 이게 일반적인 고고학자의 유물 해석이다. 유물의 기형도 중요하고, 완형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물의 출토 양상이다. 앞서 저자들이 제시한 토기 3점도 유물의 출토 양상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보고서에 왜 그렇게 기재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저자들은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삼국시대 전기 토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백제토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이래서 고고자료는 고고학적으로 훈련이나 연습이 된 사람이 다룰때랑 안 그럴때랑 천지차이인 것이다. 이 책을 그냥 읽을 사람들이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읽느냐, 안 하고 그냥 읽느냐의 차이는 이처럼 큰데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이 알면서도 독자들은 현혹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문헌사학계나 건축학계에서 뛰어난 분이라 하더라도, 고고학적으로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것으로 넘어가보자.


6. 그밖의 고고학적 근거들(하남시 일대의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

저자들은 207~211쪽에 걸쳐 하남시 일대에서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 하나가 광암동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과 백제 단경호, 그리고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나온 백제문화층, 하남시 동사지의 한성백제식 기와와 토기들 이렇게 3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세종대학교박물관, 2005,『하남 덕풍-감북간 도로확포장공사 4차구간 발굴조사 약보고서』를 보면 광암동에서 백제 석실분 2기가 확인된 것이 맞다. 이밖에 기전문화재연구원, 2003,『하남 시가지우회도로 확 · 포장공사구간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덕풍동 수리골 유적에서는 백제 토광묘에서 원저단경호 1점과 심발형 토기 1점, 철도자 1점이 출토되기도 했고. 자아! 그런데? 이게 다다. 고분 3기 갖고, 이 지역에 백제의 중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저자들도 알지 않을까? 그나마 토광묘는 필자가 제시한 사례이고. 소위 고분群이라고 말하려면 상당히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석촌동이나 방이동 고분군 정도는 되어야 비교 대상으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다음은 남한산성 행궁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군, 1999,『남한산성 행궁지 시굴(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 및 기와편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대형토기 호와 기와편, 17~18세기의 조선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단다. 또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 2001,『남한행궁지 제3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편 등과 회색 연질,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을 비롯해서 12~20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자기편들이 확인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도, 2002,『남한산성』이나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시, 2003,『남한행궁지 제4~5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봐도 고려시대보다 올라가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경기문화재단 · 한양대학교박물관, 2005,『남한산성 행궁권역 내 건축물 이축지 시 · 발굴조사 보고서』나  기호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2009,『남한산성 인화관 및 침괘정 주변지역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등을 보면 조선시대 유물 및 유적이 확인됨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행궁지 8차 발굴조사 제3차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지와 대형기와 등이 나와서 한때 이슈화됐으며, 중원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 암문(4) · 수구지 일대 발굴조사』를 보면 체성에 대해 고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지금 필자가 확인 못한 보고서가 2002년에 발간된 남한행궁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인데 거기에는 백제 문화층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왜 이거만 없지? 흐음). 왜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냐면, 강찬석 쌤이 직접 가서 백제토기를 봤다고 하는 그 발굴현장에 필자도 가서 직접 백제토기가 출토된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필자가 보기에도 그것은 조선시대 도기류 혹은 토기와는 확연히 달랐었다. 필자도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화층이 전체 유적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수량도 중요하고, 출토양상도 중요하며, 유구와의 상관관계도 꼼꼼히 따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백제토기들이 다수 나왔다고 해서 능사는 아닌 것이다. 늘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출토양상이니깐. 이 부분은 추후 필자가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동사지에 대한 부분. 저자들은 문명대 쌤의 발언을 주 근거로 삼았다. 

'제2사지에서는 고식기와와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만약 백제 때의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면 이 사찰의 시창은 백제 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어쩌면 백제 최초의 사원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3사지의 마애불까지 포함하여 앞으로 발굴에서 역점을 두어야 할 문제라 하겠다.'

그러면서 '그 당시 발굴자로서는 한성기 백제기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옛날 식의 기와가 출토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역시 하남시 지역과 한성백제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다(211쪽). 충북대박물관, 1988,『판교-구리 · 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동사지(사적 제352호)는 분명 삼국~고려시대까지로 편년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각종 명문기와와 귀면기와, 쌍조문 수막새, 금동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오랜 시간 존속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성백제 시절 동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곧 한성백제 도성이 이 근처에 있다~라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필자는 그게 더 궁금하다. 그저 하남시에 있는 유적들을 다 그러모아 이런 것들이 있으니 여기는 당시 백제 도성지였다~라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 도출인건가? 싶다.

이상으로 앞부분 중 저자들과의 토론에서 빠진 내용과 이 책의 <5장. 백제 첫 도읍지의 흔적들>에 나오는 고고자료에 대해 다 살펴봤고, 전부 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필자의 생각을 정리했다(아! 혹시 천왕사지에서 나온 목탑 심초석에 대해 반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왕사의 유적 및 유물 조합상에서 이미 통일신라~고려시대 절터로 판명난 이상 심초석 하나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백제시대와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심초석 하나만 갖고는 힘들다. 심초석과 연결된 문화층이 통일신라시대 문화층 아래에서 충분히 확인되어야만 이건 성립이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보고서 상에 그런 내용은 없기에 따로 언급조차 안 했다). 

그럼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필자는 딱 3지만 더 언급하도록 하겠다(물론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그와 관련된 것만! 민속학이라든가, 역사학 관련된 것까지 굳이 언급할 것도 없고).



1. 하남시의 고고자료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판단한 저자들은 108쪽에 백제 왕성의 개념도를, 122쪽에 개로왕때 쌓은 제방과 당시 지형복원도를 실어놓았다. 자아~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 대신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볼만한 고고자료가 무엇이냐 이거다. 위에서 제시한 저자들의 고고자료는 이미 필자가 보기에 근거가 취약함을 밝혔다. 그 다음에, 하남시 일대에는 풍납토성에서 안 나왔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왕성이 될 수 없다는 왕궁도 안 나왔다. 그렇다고 하남시 일대를 둘러싼 나성이나 그 일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취락지도 없고. 확인된 것은 2기의 횡혈식 석실묘와 백제때부터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동사지(절터) 1개소, 이성산성을 초축했을 것이라는 흔적들 정도이다. 이것과 풍납토성의 고고자료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판정승을 거둘지는 뻔한 일이다. 

물론 하남시 일대에도 과거부터 백제의 도성일 것이라는 얘기와 함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필자가 그 연구사를 가볍게 정리해보겠다(괄호 안은 발굴조사기관과 보고서 발간년도)

1. 동사지 - 삼국~고려시대(충북대박물관 1988)
2. 교산동 일대 지표조사 - 삼국~조선시대(세종연구원 1996)
3.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Ⅰ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4.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1)
5.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Ⅲ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2)
6. 천왕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1, 2002)
7. 광주향교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3, 2005)
8. 교산동 건물지 종합보고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4)
9. 춘궁동 245-2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0. 교산동 유적1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4)
11. 춘궁동 401-8번지 유적 - 통일신라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2. 춘궁동 산 39-1번지 유적 - 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5)
13. 서부농협창고부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6)
14. 교산동 주택이축부지 내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수원대박물관 2006)
15. 법화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7)
16. 약정사지 - 통일신라~조선시대(세종대박물관 및 하남역사박물관 여러차례 조사)
17. 춘궁동 243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09)
18. 춘궁동 242-6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서해문화재연구원 2009)
19, 춘궁동 393-5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0. 항동 121-3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1. 춘궁동 271-11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2. 하사창동 341-4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자아~어떻게 생각하는가? 설마 이 많은 조사기관이 이렇게 많이 조사를 했는데, 의도적으로 백제 유적지를 은폐했다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할 수 없고, 필자도 이에 대해 더 할 얘기도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정도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통일신라 이전의 유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상황이 이 모양인데, 이걸로 어떻게 풍납토성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그러니 고고학적 연구가 더 진행될 때까지 더 기다렸다가 이런 주장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풍납토성의 C14 연대측정

저자들은 260~261쪽에 걸쳐 풍납토성 발굴보고서 Ⅴ권의 연대측정 결과를 예로 들면서, 연대치의 오차가 크게는 200년 가까이 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오차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보장해 줄 수 없어 근거로 못 믿겠다는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풍납토성의 유물을 두고 연대측정을 한 당사자가 가장 억울해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 만약 자신이 연대측정을 잘못했다면 표본마다 완전히 다르게 나와야지 어떻게 비슷한 수치가 나오겠느냐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부분도 이 책에서 잘못된 점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당시 풍납토성의 연대측정을 어느 기관에서 누가 했는지 알고 있다(그렇다고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연대측정을 하는 일반적인 기관의 입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온라인상에 공론화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왜 이 글에서 주욱 보고서면 논문이며 나열했는지 알 것이다. 바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책에 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얼마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이미 강찬석 쌤은 온라인 상에서 여러차례 이 부분때문에 다른 분들과 마찰이 있어왔다. 마치 내가 말은 못 하지만 학계의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있다. 모르면 가만 있어라~라는 식의 태토 때문이랄까).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목탄 시료는 반드시 불에 타야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석탄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유기질은 불에 타서 그렇게 됐는가? 아니다. 땅 속에서 오래도록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변질될 수 있다. 땅 속에서 수백년, 수천년간 벌어지는 지질현상은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불에 탔네 마네를 따질 필요는 없다. 또 하나, 목재의 경우, 오래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자란지 얼마 안 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대측정치가 나무를 베어서 사용했을 때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나무가 폐기된 상태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분할 필요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개의 연대치만 갖고 그 유적의 절대연대가 나왔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며, 다른 유물과 유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연대측정 상의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원로고고학자 혹은 중견고고학자들은 이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수년전 일본 학계에서 AMS 연대치로 야요이시대 개시기가 상한된다고 난리쳤다가, 그 이후로 잠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 우진육각형 주거지와 석촌동 고분군

262~263쪽에 걸쳐 저자들은 우진육각형 주거지가 금강 이남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문화상 아주 특수한 경우로 이 고분군이 가까이 있다고 근처인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필자가 저 위의 글에서도 썼듯이 호서지역에서 13기의 凸자형 혹은 呂자형 주거지가 확인된 것을. 앞으로도 더 확인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역시 고고학계의 최신 경향(이 책이 나올 시점에 이미 그런 얘기들이 있었다)을 반영하지 않고 성급하게 책을 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이다. 兵家에서 말하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단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쓴 저자들은 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 했고, 나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상태에서 섣불리 싸움을 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처럼 이제 막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근거의 취약성을 지적받을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만한 고고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덤볐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 헛점이 너무 많았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가장 아쉬웠다. 허나,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필자 역시도 풍납토성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으려고 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다. 

다소 글이 길어졌지만, 토론의 자료로도 활용할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므로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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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輝 2011-06-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실수 하나 있습니다. 책 마지막 문단에 보면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에서 '석촌동'이 아니라 '방이동'이었습니다. 허어~왜 이런 실수를 -.-;; 방이동의 횡혈식석실묘 계통을 백제가 아니라 신라 것으로 보는 입장이 최근에는 더 많이 늘어나도 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책의 논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책에서는 풍납토성과 같은 유물이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왔으니 양자는 같은 집단일테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죠. 허나 오히려 백제 것으로 볼 수 있는 방이동 고분군이 최근에는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재고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만약 방이동 고분군도, 석촌동 고분군도 백제 것이 아니라면, 한강 유역에는 백제 고분군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될테니깐요. 하남시에서 나오는 횡혈식 석실묘 2기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요.

암튼, 내용 수정 참고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