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자 사회의 역사 - 서아프리카 모시족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형학술총서 7
가와다 준조 지음, 임경택 옮김 / 논형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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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고서 서평을 못 쓴 책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읽은지는 한참 됐는데, 책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혼자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느라 여지껏 서평을 못 쓴 것 같다. 그런데 더 시간을 뒀다가는 책을 한번 더 읽어야 할 판이라서 지금에라도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이 책을 2번 읽었는데, 이런저런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긴 했다).

이 책은 일단, 국내 학계에서 쉽게 나오기 힘든 내용의 책이다. 저자인 가와다 준조는 동경대 문화인류학과 출신으로 서아프리카에 직접 가서 모시족을 중심으로 한 인류학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썼다. 아직까지 필자는 국내 인류학자 중에서 이렇게 해외에 직접 가서 정리한 인류학 자료를 본 적이 없다(물론 필자가 접한 자료가 많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 그것도 아프리카의 자료를 접해서 그것을 '무문자사회'와 연결시켜 해석했다니. 무문자사회라는 구분 자체가 신선하기도 했고, 그런 사회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서아프리카의 인류학 자료를 정리한 것도 참신했다. 단순히 국내 학계에서 진행되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도 있지만, 일단 제목부터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에서 19세기 제국주의 문화의 확산과 함께 문자사회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 한국 고대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한국사에 있어 문자사회가 시작된 것은 언제쯤부터일까? 라는 생각과 직결될 수 있다.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을 보면 기원전 1세기 혹은 기원전후한 시기에 이미 붓(그리고 붓과 함께 한자가 같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아주 높다)은 한반도 남부 끝단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유물이 그 정도인 걸 보면, 사라져 없어진 붓은 더 많았을 것이고 창원 다호리에 살던 당대인들의 문자 생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 이전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 시절에도 모피교역 따위와 맞물려 한-중간 교류가 꾸준히 진행되었던 것은 사실이다(해당 글 강인욱 선생님 발표 부분 클릭). 하지만 문자가 없어도 교역이라든가, 원거리 상거래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의 상거래가 반드시 한자를 동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직접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물론 당시 고조선-위만조선 시절의 한-중 사이에 한자를 매개로 한 상거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지만). 그렇게 봤을때 일단 한국 고대사에서 한자가 폭넓게, 일상적으로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그 이전 사회의 한국 고대사는 '문자사회'였을까? 아니면 '무문자사회'였을까? 혹은 삼국시대 초기에 한자가 폭넓게 쓰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곧 '문자사회'로 볼 수 있을까? '무문자사회'로 볼 수 있을까? 그러한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단 목차만 봐도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첫 머리에
2. 비문자 사료의 일반적 성격
3. 문자 기록과 구연 전승
4. 모시족의 경우
5. 계보의 병합
6. 절대연대의 문제
7. 역사의 출발점
8. 반복되는 주제
9. 구연 전승의 정형화
10. 수장의 지위 계승
11. 역사 전승과 사회 정치조직
12. 이데올로기 - 표현으로서의 역사 전승
13. 역사 전승의 '객관성'
14. 역사 전승의 비교
15. 제도의 비교
16. 발전단계의 문제
17. '전통적' 사회라는 허상
18. 신화로서의 역사 연표로서의 역사19. 문자사회
20. 맺음말

1장과 2장부터 이미 책의 내용은 필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세계사라는 용어가 본래적 의미를 가지려면 무문자사회의 역사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문자로 기록된 과거를 가진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역사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구연 전승의 유무와 사회 구성원의 역사 의식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인지, (만일 있다면) 그러한 역사 의식의 차이가 사회구조 및 변화와 어떠한 상호작용을 가지는지 등이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인류는 언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문자라는 것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이는 저자도 얘기하고 있고 필자 또한 동의한다. 얼마전 동티모르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한글로 표현한다는 기사가 있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40765). 이처럼 언어는 있지만, 이를 표현할 문자가 없는 집단은 상당히 많다. 오히려 문자가 없는 집단이 보편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왜 인류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 문자사회를 보편적으로 보고 세계사 속에서 문자사회만을 주목하는 것일까? 저자는 2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고고학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단편적인 과거의 유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료 간의 상호관계를 해석하려고 하지만, 구연 전승의 경우에 연구자는 우선 철저히 해석되어진 것들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파편을 맞붙여서 항아리를 복원하는 대신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해석'의 항아리를 파괴하고 그것을 다시 변경하여 과거의 파편을 하나씩 골라내고 가려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 '해석'이라는 것이 전승을 갖고 있는 사회의 성원들에 의한 사물과 현상을 안으로부터 해석한 것이기에, 연구자는 일단 자료의 단편적인 부분들을 골라내어 정리한 후에 연구자 자신의 해석을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고고학과 인류학(그것도 신화와 관련한)의 방법론 차이에 대해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고고학으로 밝혀내기 힘든 무문자사회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첫머리에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모시족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왕조를 수립했다고 보이는 남부 모시족의 텐코도고 왕의 궁정에서 필자가 역사 전승의 채록을 막 시작했던 때의 일이다. 왕의 계보는 주민들의 주요 작물인 수수의 수확 후 지내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중요한 제사 의식 때 정중하게 낭송된다. … 이윽고 안면이 있는 벤다(이야기꾼 혹은 악사)들이 나타나 우산 밑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큰 표주박에 소가죽을 붙인 큰 북을 양손으로 장단을 맞춰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 녹음을 시작했지만, 전주로 생각되는 부분이 너무 길어져서 낭송에 대비하여 테이프를 절약하기 위해 도중에 녹음을 중단하고 … 그렇게 40여 분 정도 되었을까?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큰 북의 연주를 끝낸 벤다는, 편안하게 큰 숨을 쉬고 땀을 닦으며 나에게 "녹음은 잘 했겠죠?"라고 말하고 "그럼~" 하며 일어나 큰북을 메고 문을 나가 버렸다. … 나이 많은 하인에게 "벤다가 언제 다시 돌아와서 계보의 낭송을 하나요?" 라고 부자연스럽게 더듬거리는 말씨로 묻자, 그는 "낭송이라면 이제 막 끝나지 않았느나?" 라고 하였다. … 큰 북의 소리만으로 역대 왕에 대한 이야기와 각각의 왕들에 대한 찬미를 표현한다는 것을 그후의 여러 기회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란 말인가. 책을 겨우 30여쪽 읽었을때 나오는 이 사례를 보고 필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소리만 갖고 역대 왕의 계보를 읊고, 그것이 제사에서 중요한 의식이라고? 물론 저자는 뒤이어 얘기한다. 왕이라든가 노인(그 부족의 원로 혹은 장로를 의미)들이 그 소리의 의미를 전부 100% 이해하지는 못 하지만 필요한 부분은 알고 있다고(그래서 옆에서 듣고 있던 왕이 "지금 왕의 것을 연주하고 있다."라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는 북의 소리(음악)만 갖고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고 한다. 요루바족의 케투 왕은 즉위식에서 그 부족의 시조인 알라케투 대왕이 이페부터 케투에 도착할 때까지의 노정을 의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알려주기도 한단다. 이러한 음악의 형태를 띤 조상과 그 부족의 계보는 의례를 통해 그 구성원들에게 반복적으로 인지되었고, 그들의 의식 수준을 지배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런 부분은 일단 고고학적으로 전혀 검증 혹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설령 악기가 확인된다 한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그런 부분들의 상당수를 인류학이 보완할 수 있겠으나, 그 부분 역시 이처럼 현재의 자료를 갖고 고대 혹은 선사시대의 것들을 추정할 뿐이다. 암튼, 생각의 폭을 넓힌다거나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사를 접근한다는 측면에서 이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저자는 하나하나 모시족과 주변 부족을 조사한 인류학적 자료를 갖고 무문자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 전승설화 혹은 신화를 통해 그것이 생겨난 배경이나 기원지를 추정하는 것, 그 신화 속에 나오는 왕이나 영웅의 일대기(신화로 포장된)를 통해 그 민족의 기원지 혹은 이동 경로 등을 추정하는 것 등이다. 우리도 이런 방법을 통해 단군신화 혹은 삼국시대 각 국가 시조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따지고보면 별다를 것이 없다. 다만, 고대 한국사에서는 어느 시점 이후로 문자화된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것들이 역사 이전(先史) 이야기, 즉 설화나 신화, 전설 등으로 다소 다르게 구분된다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기존에 연구된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다시 그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 등 마치 正-反-合의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다. 하지만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고,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순간, 이 책을 쓴 사람도 대단하지만 한글로 번역한 사람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이래서 번역은 제2의 집필이라고 하는 걸까? 휴우~).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필자가 이를 제대로 요약 정리한 건지나 모르겠다. -.-;).





1. 모시족 여러 왕조의 대선조에 '준그라나'라는 왕이 있다.
2. 현재 오토볼타 공화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에도 준그라나 대왕은 공통의 대선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그러나 남부 모시족의 여러 전승을 채록하면서 나(저자)는 의아함이 들었다.
4. 내가 텐코도고 남부의 라루가이나 와루가이 수장이 있는 곳을 찾았을 때, 그 곳의 신하가 수장의 앞에 엎드려 '준그라나, 준그라나~'라고 하는 것을 듣고 감짝 놀랐다. 즉, 준그라나는 특정왕의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라루가이 와루가이 수장의 고유한 이름도 아니고, 단순히 '대수장'이라는 의미로 수장들에게 경의를 표할 때 찬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5. 그 지역 사람들도 준그라나가 어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6. 그런데 지리적으로 라루가이 및 와루가이 사이에 끼어 있지만 계보상 거리가 먼 둘텐가나 혹은 라루가이 북쪽에 인접해 있으며 수장끼리의 계통상 연계가 깊은 텐코도고에서는 이 말이 보통명사로 쓰이지 않고, 대수장이라는 의미도 없다.
7. 또한 중부 모시의 와가두구의 역사전승에서는 준그라나가 중요하지만, 정작 모시족의 초창기 선조들이 정착했던 지역과 가까운 라루가이 및 와루가이의 계보 전승에서는 준그라나가 이야기되지 않는다(준그라나라는 말이 쓰임에도 불구하고).
8. 오히려 텐코도고에는 계보상 준그라나의 이름이 있으나 그는 텐코도고의 왕이 아니라 텐코도고 서북쪽의 모시족 거주지와 떨어진 비사족의 촌락에 둘러싸인 황야에 매장되어 있는 대수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더불어 텐코도고 계보에 있는 준그나라 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9. 와가두구의 전승지도 모시 왕조의 창시자들이 나오는데 그는 준그라나의 아버지로 보이는 웨도라오고, 준그라나의 아들인 우브리이며 정작 준그라나는 대단히 하찮은 존재로 나온다.
10. 준그라나를 가장 자세히 소개한 구비에서도 준그라나는 극히 수동적으로 비인격적인 종족의 시조 정도로만 묘사되어 있다.
11. 맘프루시족의 오래된 도읍지로서 모시족의 발원지인 감바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이 지방의 수장에 대한 칭호에 '존고라나'라는 것이 있음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들었다. 물론 그게 특별한 지위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12. 나는 이것이 하우사어 기원의 '존고'라는 말에 맘프루시어에서 소유를 나타내는 접미어 '-라나'가 붙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존고'는 원래 '隊商을 위한 야간 숙영지'를 의미하며, 현재에도 하우사 상인이 정착했던 한 구역을 지칭한다. 그러나 '존고'는 맘프루시어로 '이주자가 새로 만든 취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고라나'라고 하면 맘프루시어로 '새로운 취락을 지배하는 것' 또는 '접견이나 의례를 위한 큰 건물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여 수장과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현대 맘프루시어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뭐 대략 이런 식이다. 저자는 하나의 사실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들을 제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나열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언급한다. 이후 저자는 맘프루시어의 존고라나의 의미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련 자료를 찾고, 지방을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시 피드백이 될 수 있는 조언을 구하는 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강화시킨다. 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필자는 '단군왕검'이라는 호칭에 대해 기존 학계에서 어떤 식으로 연구되고 있는지가 퍼뜩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접근하여 해석한 것이 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 역시 필자가 접하지 못한 자료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처럼 책을 읽는 내내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부분까지 필자가 기존에 생각치 못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필자는 또 하나 재밌는 사실에 직면했다. 바로 '전통'이라는 용어때문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유럽 세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영향이 침투하기 이전 흑인 아프리카 사회를 가리키는데 '전통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였다고 밝혔다(실제로도 그러했고). 그것은 어느 한 사회, 특히 비서양 사회를 근대화된 사회와 대치시켜 전통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무의식 중에 '전통적=비서양적=고정적', '근대적=서양적=발전적'이라고 보는 피상적인 이원론에 빠져들 가능성을 기본적인 용어에서부터 배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순간, 머리를 한대 딱!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내용이 책의 195쪽에 나와있는데 필자는 지금껏 이런 생각을 갖고 무문자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기존의 선사시대 혹은 고대사를 바라볼때 이러한 전제조건을 정해놨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194쪽까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읽었다. -.-; 그러면서 저자는 전통적(traditionnel, elle)이라는 형용사를 가리키는 용어인 '흑인 아프리카의 전통적 사회구조', '족의 전통적 토지제도', '상아해안의 전통적 미술' 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였다(이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남부 모시족 독립 수장의 한 사람인 와루가이 나바는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큰 저택을 지어, 각각의 관직명을 지닌 궁정 신하가 있는 궁정 기구를 지니고, 궁정 악사의 수도 많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수확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하고 있다. 한편 와루가이 나바와 선조의 계보가 같은 이웃의 독립 수장 라루가이 나바는 특별히 가까운 신하도 없으며, 주거도 다른 많은 모시족의 수장들의 저택과 같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저 흔한 형태의 건물만 가지고 있으며, 수장으로서의 의례도 지극히 간략한 것들만 행하고 있다. … 이 두 수장에 대해 각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현재만을 관찰한다면, 와루가이 나바 쪽이 훨씬 모시족의 전통에 충실하여 '전통적' 수장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양자가 분립하기까지의 계보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 라루가이의 전승과, 분립된 이후에 매우 혼란스러워진 와루가이의 전승을 비교 검토해보면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토고에 침략한 프랑스군 지휘관의 병력 제공 명령을 당시 라루가이 나바인 시그리는 따르지 않고, 당시 와루가이 나바인 쿠도가레는 이를 따랐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까지 'chef de province(지방 수정)'의 지위를 부여했던 라루가이 나바를 1917년 와루가이 나바로 대체했다. 그 결과, 프랑스 식민지 행정당국에게 '급여'를 받게 된 와루가이의 수장은 증가된 수입으로 궁정 신하를 임명하고 모시족의 대수장에 어울리는 의례를 성대하게 행하였으며, 격식 있는 '전통적' 수장으로서 체제를 마련하고 강화하는데 고심한 듯하다. 각 궁정 신하의 직분이 명확하지 않고 그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1~2대에서 단절되어 버리고, 숫자로는 모양새를 갖춘 수장의 악사들이 이야기하는 선조의 계보가 혼란스러운 것 등은 와루가이 나바의 이러한 과거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 결국 이 두 명의 모시족 수장은 식민지화 이후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힘의 영향을 받아, 한 쪽은 '전통적'이 되었고, 다른 한 쪽은 '전통적'이 아니게 되었다.



오호라...그렇겠구나~그동안 전통사회 혹은 전통문화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로부터 아주 강한 문화적 혹은 정치적 충격이 가해지면, 그건 기존 사회에 아주 큰 변혁을 몰고 올 수가 있다. 순간, 낙랑군과 같은 한군현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때 조선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접근은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이에 있던 몽골(원) 간섭기때의 고려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예전부터 있는' 문화형태를 두고 '근대적'인 것과 대치시켜 '전통적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 고고자료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본다. 고고학적으로 토기 및 철기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실물자료에서 변화상이 감지되면 이를 형식분류하여 상대편년하곤 한다(일반적으로). 그런데, 그러한 실물자료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작스런, 혹은 강제적인 사회적 변혁의 결과로 본다면 과연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사회를 다른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마치 3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원삼국시대, 그 이후는 삼국시대로 나눠 백제의 건국시점을 3세기대로 보는 것과 같은 시각 말이다)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유명한 인류학자)의 발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문자라는 것은 신석기 문화가 문자 없이도 달성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지식의 축적에 공헌한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다수의 사람을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통합하고 그들에게 카스트나 계급 등의 지위를 매기는 것은, 문자의 출현에 부수적인 것으로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의무교육이 보급되었지만 그것은 병역의 확장이나 프롤레타리아의 형성과 하나의 짝이 되어 진행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문맹을 없애려는 운동은 권력에 의한 시민 통제의 강화와 불가분 관계에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에도 간략한 포스팅으로 정리한 바가 있지만, 문자가 반드시 필요하고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클릭). 또한, 이는 '책을 밝히는(bookish)' 서적 편중의 지(知)의 세계에 빠져들기 쉬운 현대 인문 사회과학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겠다(지식이 많은 것과 지혜가 많은 것을 예로 들면 이해가 좀 쉬울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단순히 문자의 유무를 기준으로 '문자사회'와 '무문자사회'를 상호 단절된 두 가지의 이질적인 사회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문자성과 무문자성은 서로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복사, 인장, 달력, 목록, 비명 등은 분명 일반적으로 문자라고 불리지 않는 기호임에도 충분히 문자의 기능을 대행해왔다. 물론 이러한 원문자(原文字 - 문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불확실한, 원삼국시대와 같은 용례로 보면 이해가 빠를 듯)가 단순 기호보다는 더 문자에 가깝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호나 원문자는 분명 문자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를 단순히 시간의 축에 따라 '무문자사회 → 문자사회'라고 보지 말고 공존한 것으로 이해해야 적절할 것이다. 실제 현대 이후에도 문자사회의 어느 한 분야에서는 분명히 '무문자성'이 계속 남아있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교통표지판이라든가, 이모티콘을 생각하면 좋을 듯).

그렇게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려운 내용이 있어 그런 부분들은 몇장씩 앞으로 돌려가며 다시 읽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2번을 읽기도 했으며, 솔직히 지금 서평을 쓰는 중간중간에도 인용할 부분을 찾아서(미리 체크해놨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기억조차 못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보고 있지만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고 재미있다(어려운데 뭐가 재밌어!? 라고 하셔도 할말은 없다. T.T). 그리고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책의 말미에 저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 자신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또 자신이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등을 적어놓은 부분이었다. 인류학(그 중에서도 문화인류학)은 아니지만 관련학문으로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주옥같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게 한 내용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가와다 준조의 몇마디 조언(필자는 감히 조언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을 끝으로 이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소위 말하는 필드워크가, 문헌연구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 틀에 따른, 현지에서의 단순한 자료수집 작업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 또한 역사연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시점의 상호성으로부터 역사의 본질에 닿을 수 있는 과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때때로 언급하였듯이, 역사를 보는 시점의 원근감각을 바로 고치거나 문자기록의 연구만을 중심으로 삼는 대상을 넘어선 넓은 장에, 역사를 다시 한번 자리잡게 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 등이다. 모두에서 밝힌 것처럼 무문자사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문자사회의 '변경'에 있었기에 기성 학문이 돌아보지 못한 것들을, 정통적인 역사의 보조 자료로 수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문화인류학이 문화 안의 무문자성에 집착하는 것은 문자성의 변방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다. 기성의 문명 안에서 확립된 너무나 '책을 밝히는' 서재적인 인문적 知의 체계를 더 넓직한 세계에 해방시키고, 기성의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약간의 바람을 불어넣어 보고 싶어서이다.


나의 관심의 하나는 지배자의 혈연집단의 분절화의 과정과 정치조직의 분절적 성격이 사회계층의 분화와 분절간 상호 서열화와 어떠한 관계를 갖고, 특히 후자가 어떠한 생태학적, 역사적 조건 하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점은 흑인 아프리카 사회에 관한 한, 국가형성론, 넓게는 정치구조의 동태론 일반에 있어서 하나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제2차 대전 후의 학문상의 풍조 가운데 아프리카 연구 분야에서 소홀히 다루어 온 기술론, 물질문화론의 시점에서의 검토도 아울러 진행함으로써, 신진화주의의 탈역사적인 유형론이나,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는 프로세스 · 모델론을, 별도의 측면에서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망을 여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자~어떤가. 학문을 정말 사랑하고, 그를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학자의 심정이 절로 느껴지지 않는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금년도 상반기에 읽는 책 베스트 3 안에 들어갈만한 秀作으로 꼽고 싶다!

덧글. 책은 어렵지만 선사~고대사에 관심이 많고, 정치구조 및 사회변혁 등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필독 권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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