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의 연구
서대석 지음 / 집문당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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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신화 연구에 있어 선구적인 연구를 해온 서대석의 연구서적이다.
한국의 신화는 건국신화와 무속신화로 나눠질 수 있으며 그 중에서 문헌으로 전해지는 건국신화의 경우는 문헌사학이나 고고학의 측면에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속신화의 경우는 제전을 통해서, 그 제전을 주관하는 무속인의 입에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신화라 하더라도 지역마다, 또 무속인마다 틀릴 수가 있으며 시대가 흐를수록 원본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로 채록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솔직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주인장 역시 이런 신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 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헌에 기록된 신화에 한정되어 있었다. 각국 건국신화를 비롯한 신화가 아닌 거의 설화에 가까운 내용들을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었는데 이번 학기에 '한국신화의 세계'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텍스트북으로 지정된 몇권의 책을 구입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서대석의『한국 신화의 연구』인 셈이다. 이 책은 일단, 제목 그대로 한국의 신화 그 자체를 수록하기보다는 그런 신화들을 저자가 연구한 연구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 원본을 미리 보지 않고 이 책을 본다면 아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책은 한국신화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자료실상과 연구관점 등에서 먼저 소개한 다음 건국신화와 무속신화를 각각 나눠서 연구 성과를 싣고 있다. 그리고 한국신화에 나타난 북이라든가 천신과 수신의 상관관계 등 한국 신화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을 언급한 다음에, 마지막에는 한국신화와 주변 민족, 즉 만족이나 일본의 신화 등과 비교해놓은 장이 있어서 한국 신화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건국신화를 소개한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의 연구 성과가 크게 독창적인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 역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 관련 연구성과가 많이 나와있는만큼, 철저하게 문헌을 고증하지 않고 신화의 구조적인 성격 파악 위주로 이뤄진 신화 연구다보니까 이 부분에서는 기존 학계의 견해와 큰 차이도 없거니와, 그 전문성에서도 크게 주목될만한 것들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 부분의 연구성과는 대부분 기존 역사학계의 견해를 많이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연구성과들을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식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뒷부분의 무속신화의 경우는 확실히 주목해서 볼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왜 창세신화가 없느냐는 말을 많이 한다. 즉,『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에 해당하는 부분이 우리나라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장 역시 우리나라에 창세신화가 있다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 했다. 그나마『부도지』에서 마고할미와 연관된 우리가 잘 모르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창세시조신화 혹은 천지개벽신화라고 불리는 서사무가에 대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창세가와 천지왕본풀이, 셍굿, 삼태자풀이, 시루말, 당고마기 노래, 당금아기, 순산축원, 초감제 등 생각보다 많은 서사무가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 또한 창세신화로서의 기능을 다 하고 있어 더욱 주목할만 하다. 이런 창세신화의 특징을 꼽자면 제주도를 비롯한 동해안,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등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는 점인데 특히나 본토와 이질적인 문화양상을 보이고 있는 제주도에서 이런 신화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특히나 우리나라 무속신화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전국에서 제주도에 가장 이런 우리나라 고유의 신화가 많이 남아있어서 차후 제주도에서의 신화 연구가 더욱더 활발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우리나라 신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농경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점과 여성성이 지극히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요소이겠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굉장히 심한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겪었던 경험이 있었던터라 이러한 신화체계가 전해진 것이 더욱더 신기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렇듯 우리나라 신화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이전에 몰랐던 부분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체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때 이 책을 봐두면 그런 신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연구서적이기 때문에 글자도 많고 책도 두껍고, 가격 역시 비싼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화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신화 유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아마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나라 신화가 굉장히 흥미진진하다고 느낄 것이며 그리스-로마 신화만큼의 재미를 느낄 것이라고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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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 : 사상과 이론
브루스 트리거 지음, 성춘택 옮김 / 학연문화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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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고학史.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이 현재까지 걸어온 학사(學史)를 연구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상당히 어려운 작업일 뿐더러 그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학사를 왜 연구하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어떤 학문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 학문을 전공삼아 연구한다고 했을때 그 의미는 그 학문 자체로서의 연구이자 공부이지, 그 학문이 어떻게 형성되서 어떻게 변화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는지, 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그럴까? 어느 분야를 공부하든지 그 학문이 어떤 학문이고,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알 필요는 없는 것일까?

학문은 인류가 문명을 창출해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정신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학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또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고고학의 경우, 전공공부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인 학부생때 고고학사에 대해 각 대학마다 수업을 개설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특히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경계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학문이 고고학임을 상기한다면 고고학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특히나 더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뭐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했지만 보다 실질적으로 살펴본다면 학사를 배움으로써 그 학문이 지니는 기본적인 의미나 방법론, 접근하는 시각 등에 대한 기본 개념을 성립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하나를 추천하고자 한다.

고고학사(A History of Archaeological Thought)

이 책의 원제목이다. 단순히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역사가 아니라 '고고학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주 목적이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분명 차이가 있다. 사상적인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보다 고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본질에 접근해서 학사를 공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학문이 걸어온 길을 되짚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길을 걸어오게 됐는지를 되짚어 볼 것이며 당연히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난해한 부분들이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의 콜린 렌프류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현재 구할 수 있는 고고학사 가운데 가장 좋고 최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필독서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한다.

주인장이 이 책을 산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것이 군대에서니까 3년 전쯤일 것이다. 그때 책을 사서 조금씩 읽어봤지만 역시나 어려웠다. 한때 학문의 본질적인 부분을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에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의 유명한 이론서적들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황금가지, 역사란 무엇인가,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철학의 이해, 역사의 이해, 역사는 어떻게 쓰는가 등등. 그리고 같이 읽었던 책이 바로 고고학사였는데 이번에 전공수업 교과서로 채택된 김에 본격적으로 읽었으니, 책한테는 상당히 미안한 일이겠지만 사놓고 잘 안 봤던 것이 사실이다.

책은 고고학의 시작과 끝을 총망라하고 있다. 고전고고학과 고물애호주의부터 시작해서 북구에서의 본격적인 고고학의 학문으로서의 출발, 제국주의와 연결된 식민고고학, 인류학과 사회학 등과 연계된 문화사 고고학, 신진화론 이후의 신고고학과 후기(탈)과정주의 고고학까지 고고학이 걸어온 길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재미있기도 하다.

일단 책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은 이런 개설서가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외국에서, 특히 외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학문이고 1930년대 여러 서양학문과 같이 한국에 들어왔을때는 그 초보적인 수준때문에 당시 미술사학도(고유섭 같은...)들에게 우습게 취급받던 학문이기도 했다. 그런 한국 고고학계가 오늘날의 수준으로 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현단계에서 한국고고학계가 이론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외국인이 쓴, 고고학사지만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든,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봤으면 하는 책이 이 책이다. 한국에서 차후에 고고학사 혹은 한국고고학사가 나온다면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특히 책을 보면 당시의 사회적 환경의 변화,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기타 학문과 사상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그것과 결부시켜 고고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이 왜 그런 변화들을 겪어야만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책을 보고 후배 한명은 고고학과 서양 철학이나 사상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면서 전역하면 그 부분에 대해 공부할 소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다. 누가 고고학을 단순히 땅만 파고 유물만 캐내는 학문이라고 했는가. 고고학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길을 같이 해온,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책 맨 뒤를 보면 저자가 이 책 1권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서적를 참고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며, 초기 고고학이 모두 서양인에 의해 주도된만큼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모든 고고학 전공자들이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해서 서양의 모든 연구서적을 참고할 수 없는 이상, 이같은 번역서를 통해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꼭 읽어봐야만 할 책, 조심스럽게 한번 추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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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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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소위 유학자들이라고 통칭하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에 대해서 평자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라는 나라한테까지도 호감을 갖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국의 역사 중 어느 것은 좋아하고, 어느 것은 싫어하는 행위 자체가 상당히 치졸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조선사에서 사대주의적이고, 소중화주의적이고, 힘이 없는 약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조선사에 대해 쉬이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을.

  이성계라고 하는 강골의 무인에 의해 역성혁명이 일어나 고려를 뒤엎고 등장한 조선은 분명 그 군주만큼이나 신생국이 갖고 있는 생동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동감을 쓸 줄 몰라 그저 명에 대한 사대에 전심전력을 다하게 되니, 수만 마리의 말을 명에 갖다 바쳐 국력을 깎아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명이 뱃길을 금하니 이후 사행길은 전부 발이 부르트도록(그 발이 사람발이든, 동물의 발이든) 걸어서만 이뤄진 나라가 바로 조선이 아닌가.

  군주와 국가의 힘이 약함을 조상들 덕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요행에 무수히 많은 선조들을 신격화하여 그에 대한 제사로 국력을 낭비할지언정, 명의 억압과 잘나빠진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휘둘려 하늘에 대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던 조선이요, 편협될지언정 부질없는 것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억불숭유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아 일종의 사상 통제를 강하게 가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1,500년 이전에 이미 서양의 플라톤이라는 사람이『국가(Politeia)』라는 책을 쓰면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정한 학문이며 인생지도의 지침, 인간형성의 힘으로서의 철학으로 국가지배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동 ․ 서양을 통틀어 쉽게 등장하지 않았고 굳이 언급한다면 조선이 가장 적합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 자체가 문제가 있는 만큼,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문제가 많이 있었다.

  중국사상 가장 약한 왕조를 흔히 송(宋)에 비유하듯이 평자는 한국사상 가장 약한 왕조는 조선(朝鮮)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송은 당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기 때문에 송의 경제력은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활동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지만, 조선은 당대 국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미비한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대마도의 사신이 찾아와 조선왕을 황제 대하듯이 깍듯이 모시자 기분 좋아 엄청난 하사품을 내리며 자기만족을 해야만 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철저한 사대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성리학의 실현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나라이면서도 내심으로는 허황된 꿈을 꾸던 나라, 그런 조선에 대해서 평자가 유일하게 자랑하고픈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심오한 성리학의 세계일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이 아니면서도 이미 당대 동아시아에서 성리학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고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나라는 바로 명이 아닌 조선이었다. 그런 자부심 속에서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발현되어 현실감각을 잊어버린 채 청(淸)에 대항하는 우를 범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과 학문적 성과는 세계사에 내놓아도 될 정도의 자랑이라고 본다.

  평자가 가장 처음 조선시대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은 송자라고 불리던 송시열이 조선왕조 500년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었다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가 바로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에 대한 산문집을 보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 바 있었다. 조선의 몰락을 성리학에서 찾을 수 있으면서도 조선의 발전을 성리학에서 찾을 수 있는 모순은, 바로 이들 유학자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풀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약간의 서평을 쓸까 한다.

        Ⅱ. 책의 구성과 시각

  책은 전체적으로 조선후기 몇몇 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테마별로 정리해서 싣고 있다. 목차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벽癖에 들린 사람들
                미쳐야 미친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
                독서광 이야기
                지리산의 물고기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2. 맛난 만남
                이런 집을 그려주게
                산자고새의 노래
                어떤 사제간
                삶을 바꾼 만남
                실내악이 있는 풍경
                돈 좀 꿔주게
                노을치마에 써준 글
      
         3. 일상 속의 깨달음
                연기 속의 깨달음
                그림자놀이
                천하의 지극한 문장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
                세검정 구경하는 법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는 평소 자신이 공부하던 몇몇 조선 후기 산문에 대해 이미 책을 낸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일련의 집필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싶다. 특히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 한다는 주제 아래 언뜻 보면 천재(天才)이고, 언뜻 보면 기인(奇人)이라 불릴 수 있는 인물들을 한데 모아놨기 때문에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전체적인 학풍이나 사상적인 면을 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저자는 첫 번째 테마로 벽(癖), 즉 일종의 마니아적인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미쳐야 미친다, 라고 하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에 가장 잘 맞는 내용들이 실려 있다. 그러면서 그는『벽전소사(癖顚小史)』라고 하는 명말청초의 저서에서 나온 유옹(劉邕)이라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부스럼 딱지를 잘 먹는 벽, 즉 창가벽(瘡痂癖)이 있던 인물인데 생각만 해도 메스꺼울 정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벽’이며 그 벽이야말로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코드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옹을 언급하며 그런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벽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보이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뭔가 하나에 미쳐 그 분야에서 최고로 칭해질 만큼의 마니아적 경향을 보였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을 언급하면서 오늘날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와 귀감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저자가 언급하는 이런 인물들은 최근에야 일반인들이 주목할 정도로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천재적인 능력과 뭔가 한 가지 분야에서 보여준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세상에서 괴리된 채, 사회에 수용되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다. 성리학이라고 하는 사상적 틀 안에 갇힌 채 그 재능을 썩혀둔 셈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그런 천재성을 수용하지 못한 조선은 근대화의 이행이 늦어져 오늘날 후손들에게 뼈아픈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전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테마는 ‘맛난 만남’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얼핏 발음하면 앞단어와 뒷단어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만남이라는 제재를 맛나다는 미감(味感)으로 표현한 것 또한 감칠나다. 그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나 산문, 시를 통해 그들만의 정신적 공유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인연과 만남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인지 언급하는 것 또한 빼먹지 않고 있다.

  아마도 첫 번째 내용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다 보니 다소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대한 일면만 보게끔 할 가능성이 있어 두 번째 테마에서 이런 소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테마까지 지나치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어떤 한 분야에 있어 천재라고 불릴 정도의 수준에 있었고 그만큼 일반인들과 달리 다소 특이한 생활을 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런 그들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정감 있고 운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며 학문을 단지 앎에서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했던 인물들인지를 알게 해 준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벽이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지성인(知性人)이 되고자 했던 인물이며, 그 안에서 삶의 여유를 찾았던 인물들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테마로 넘어오면 일상 속의 깨달음을 언급하는데 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테마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해준다. 즉, ‘어떻게 마니아였던 그들이 삶의 운치와 인생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이 마지막에 놓여있다. 연기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이옥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그림자를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앎을 얻었던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이상한 방식으로 기행문을 씀으로써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홍길주, 유학자의 생각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글을 썼던 허균, 정약용의 유기(遊記)를 통해서 남들과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던 것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고수는 확실히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즉, 핵심을 한 번에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하면서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극한 수준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비범한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 가지 테마로 준비한 몇몇 인물에 대해서 알아가다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이런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그렇게 많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중국의 명사나 위인은 많이 알면서도 조선의 이런 훌륭한 조상님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 한없이 죄스럽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수용하지 못 했던 조선사회가 더욱더 안타까운 것이다.

        Ⅲ. 비평

  이 책에 대해서 비평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책에 대한 평자의 느낌을 적는 것 이상으로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 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나올 것이며 그 말들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냉정하겠는가.

  첫 번째 테마를 보면 천문학자 김영, 독서광 김득신과 이덕무를 비롯해 박제가와 노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평자는 과거 몇몇 역사기록에서 희대의 천재과학자 김영이라는 인물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 바 있다. 또한 이덕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책을 통해서 접한 바 있기 때문에 그 인물에 대해서는 한없는 존경심을 품고 있는 터였고『북학의』를 통해 박제가라는 인물이 서양의 마키아벨리에 비견될 정도의 혁신적인 개혁가였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주목되는 인물이 노긍이라는 사람이었다. 우선 그 이름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이가환이라는 인물이 노긍을 두고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평한 부분이 이채로웠다. 실제로 그는 관직에 나가 정치를 했던 인물이 아니라 홍봉한이라는 사람의 문객으로 수십 년간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는 답안지를 팔아 선비의 기풍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귀양살이까지 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도 커닝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험 답안지를 대필하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가환은 왜? 저자가 소개한 그의 글을 보면 하나같이 수천 년 세상을 살아본 신선이 인간사는 부질없다는 투로 쓴 것들이다. 그런 사람에게 과거가 무슨 소용이며, 현세의 영욕과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니 막돌이라고 하는 자신의 노비가 죽자 거침없이 제문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노비에게 제문을 지어준 것도 충격이지만 그 내용이 어찌나 애절한지 진심을 다해서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가환은 역대 뛰어난 인재들을 비유하면서 노긍을 높이 평가했음에도 그는 세상에 수용되지 못한 천재였기에 결국에는 과거 시험을 대필했다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죄목을 안고 귀양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현명했던 노긍, 첫 번째 테마에서 두 번째 테마로 넘어가는 마지막 부분에 노긍을 실었던 것이 우연인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했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테마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 테마에서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정약용과 강진 시설 제자인 황상에 대한 부분이었다.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을 두고 천주쟁이라고 그 지역 사람들이 꺼려하던 터에 15살의 황상은 서울에서 유명한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거침없이 찾아가 공부 가르쳐주기를 청했다. 머리가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소개한 순박한 시골 청년은 주눅이 든 채, 정약용 앞에 나섰고, 그런 황상에게 정약용은 첫째도 부지런함, 둘째도 부지런함, 셋째로 부지런함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용기를 복돋아준다.

  정약용의 이런 가르침을 황상은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며 61년이 지나 76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승과 자신의 첫 만남을 기억하며「임술기(壬戌記)」란 글을 썼다. 자신이 76살이 된 지금까지 스승이 남겨주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자나 깨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눈물겹게 고백하는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사제 간의 애틋한 사랑과 존경이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정약용이 병중에 있던 때, 쉰이 넘어간 옛 제자는 스승이 계시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문안을 드릴 정도로 열성을 다 하였으며 정약용이 세상을 뜨자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그 집안을 방문할 정도의 예를 다 하였다.

  아버지의 제자가 이처럼 잊지 않고 집을 방문하자 그 아들 정학연은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 내려갈 정도로 황상을 반겼다. 이제 황상은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발은 부르튼 예순에 다다른 늙은이였으니 정학연이 그런 황상을 붙잡고 울지 않았으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의 손에는 아버지가 준 부채가 있었고, 그 아들은 거기에 시를 써서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부터 자손 대대로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정학연이 66살, 황상이 61살 때의 일이니 정약용이 가르쳐준 부지런해라는 조언이 순박한 시골 청년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은 후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면서 사세지간의 인연이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지 전해주고 있다.

  세 번째 테마에서는 대부분이 좋은 글들이어서 딱히 뭐가 좋았다, 라고 꼬집기 힘들 정도였는데 굳이 언급한다면『연경(烟經)』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골초였던 이옥이 연기를 두고 송광사의 행문 사미에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았고, 독특한 기행문을 써서 글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준 홍길주의 기행문이 여운에 남는다.

  먼저 이옥의 경우는 그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연기(煙氣)에 빗대어 행문 사미에 불교적 사상에 대해 논쟁하는 내용이 절묘한지라 놀랐다. 그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옥이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이토록 정통하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물론 이덕무의 경우에도 역사,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사상 그 어느 분야에서 빠지는 법 없이 박학다식했었기에 유학자들이 성리학 이외에 대해 정통하다 해도 신기할 것은 없겠지만 이옥이 대화한 상대가 불가에 입문한 행문 사미라는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연기설과 담배 연기, 향의 연기를 비교하면서 행문 사미를 옴짝달싹 못하게 몰아치는 대목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1년, 도교는 5~6년만 공부해도 알 수 있지만 불교는 20년을 넘게 공부해도 그 본질을 꿰뚫기가 어렵다는 말을 할 정도로 불교가 이룩한 종교로서의 사상적 체계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사상에 대해서 일부분이지만 자신이 마니아적으로 매달린 담배를 통해서 해석해낸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 많이 쌓여서 될 부분은 아닐 것이다.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옥은 결국 행문 사미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지금까지 얻은 깨달음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게끔 만들 정도였으니 어찌 이옥이 대단하지 않으리오.

  게다가 홍길주는 ‘문장은 다만 책 읽는 데 있지 않다. 독서는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천운물(山川雲物)과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볼거리 및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독서다’라고 하면서 정말 그 깊이를 알기 힘들 정도의 독서관을 역설한 인물이다. 저자 역시 2년째 대학원 제자들과 홍길주의 수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생각의 깊이와 너비에 감탄한다고 하면서 그의 생각은 언제나 신선하다고 평하고 있다.

  저자는『수여방필(睡餘放筆)』이라는 글에서 홍길주가 쓴 제목도 없는 여행기를 발췌해서 책에 실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어떻게 글쓰기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면서 글을 읽고 안절부절 어쩌지 못하다가 원문을 정리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글이었기에 이토록 저자가 놀랐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본바, 정말로 폐부를 찌르는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글이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홍길주 삼형제가 함께 했던 두 차례의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성동격서(城東擊西)라는 표현이 이런 글에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홍길주는 여행기를 쓰면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문장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같은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고,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고 글의 말미에는 여운을, 글의 중간 중간에는 파란과 복선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모두 여행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중심으로 말이다. 이처럼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같지 않다고 해도 또한 안 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라고 설명하는 과정이 여행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홍길주 역시 그런 식으로 이 여행기를 썼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말 천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적절하게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Ⅳ. 맺음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천재(天才)’, ‘기인(奇人)’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했을까? 혹은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을까? 아니면 이덕무처럼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할 만큼 겸손하면서도 사회에 저항적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평자 같은 범인이 함부로 언급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아님을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 그들을 수용할 포용력과 능력이 없던 사회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과 다른 괴리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뿐이다. 그 당시, 파격이고 혁신이고 세상을 뒤엎을만한 혁명적인 사고방식으로 취급받으며 위험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 보면 얼마나 선구적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벽(癖)이라는 겉포장에 둘러싸여 특이하게 취급받고, 또 수용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자가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조선사에 대해 긍정적은 커녕,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힘든 상태에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삶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삶은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후손들의 눈에는 굉장히 진실되고 매순간 노력하고 긴장하면서 나태해지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학문을 실천하고 지식이 아닌 지성을 향해 전진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 그런 그들의 삶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하나의 산수화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여유와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기풍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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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1
박혁문 지음 / 늘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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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들은 대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읽은 역사소설 중 하나였다. 얼마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먼지묻은 책들 속에 있길래 기억을 되살려 서평을 간단하게 쓰고자 한다.

먼저 팔기군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만주족의 군사-행정조직을 의미한다. 본래 만주팔기만 존재했다가 후에 몽고, 거란 등 주변 부족민들을 통합하여 팔기군을 늘려갔고 결국 십여만의 팔기군은 수십만의 명나라 대군을 격퇴하고 중원대륙을 정복하게 된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만주족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리고 만주족하면, 청나라를 떠올릴 수 있고 청나라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조-청 전쟁, 흔히들 병자호란이라고 일컫는 전쟁을 말이다.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허약한 국방력을 지니고 있던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이야기의 시공간적 배경은 바로 그 전후의 조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인장은 조선사를 상당히 싫어한다. 지금이야 그나마 그런 생각이 약간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인장은 조선사를 '한국사의 이단아'라고 칭하며 싫어한다. 그만큼 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국제적 위상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왕조보다도 못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조-일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과 조-청 전쟁(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수차례 이어지는 국난 속에서도 계속되는 당쟁과 국력분열은 추악한 위정자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시대에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은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반증하는 현상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요, 금, 청 등이 동북방 만주 일대에서 흥기한 집단임을 이유로 이들이 우리 민족과 동일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고 알고보면 그 뿌리는 고구려, 더 나아가 고조선과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때 청 황실의 성인 '애신각라'가 마의태자를 비롯한 신라말기사나 고려사와 연관되어 주목받기까지 하였다. 이 책은 그런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만주족은 고구려를 계승한 민족으로서 조선과 한족속이고 중국과 대응하기 위해서 조선과 만주족은 힘을 합쳐야만 했다, 는 식의 논지 전개가 소설 전반적으로 흐른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이 가능한 실존 인물들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실존인물들을 극화시켜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살리면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첫장면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화친 의식을 치루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실존인물인 마부태를 조선인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로웠다. 즉, 조선 내에서 명나라 말기에 친 여진파가 생겨나게 됐는데 당쟁에 휩싸여 몇몇 중신들이 희생되고 그 희생된 중신의 후손이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결국 병자호란때 조선에 대해 복수를 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이런 식의 스토리를 가진 역사 소설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 중에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대내의 혼란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실제 이것이 역사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흡입력있는 작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다시 책을 펼쳐봤을때도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만주족의 역사적 귀속 문제였다. 그 당시만해도 동북공정이 국가적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동북공정이 중요한 사안이 된만큼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만주족이 여진족의 후신이고, 여진족이 말갈족의 후신이라면 말갈족과 한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만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만주족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남겨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이다. 이들이 완완부와 건주여진의 역사와 같이 실린 것은 단순히 만주 일대에 이들 국가의 흔적들이 남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는 현재 그 후손들에 의해 어디로 귀속되어지는지가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마사가 이탈리아로 귀속되고,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독일사로 귀속되고, 고구려사가 대한민국으로 귀속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그런 것들을 악용하고 있어 영토 분쟁뿐만 아니라 역사 분쟁까지도 서슴없이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학술적인 부분은 약하지만 정말로 그럴법한 내용을 서술한 이 책을 한번쯤은 읽혔으면 한다. 그리고 단순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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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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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은 1994년 1월 1일 NAFTA 발족일날 무장봉기한 멕시코의 혁명군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조직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 유수의 언론기관과 주고받은 편지와 성명서를 모아 만든 책이다. 일단 다소 엉뚱할지도 모르는 이 책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이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말해야 할 듯 싶다.

주인장은 이번에 '영상으로 보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라는 수업을 듣는다. 원래는 학점을 꽉 채워서 들으려고 이런저런 수업을 찾던 중에 후배들이 이 수업이 괜찮다는 얘기를 해줘서 수강신청을 하게 된 과목이다. 그리고 실제 3시간 수업 중 1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강의하고 2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된 영상을 보는 것이어서 널널했다. 중간고사나 리포트는 없었고 단지 발표 1개와 기말고사만 준비하면 되는 거였다. 기말고사는 상당히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서술형으로 문제를 내는 거였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걱정될 건 없었다. 문제는 발표 준비였다. 지난 학기에 하도 발표수업에 질려버려서 이번 학기에는 발표수업을 하나도 안 들으려고 고르고 골랐는데 미처 이 수업에 발표가 있다는 건 체크를 못 했던 것이다.

주제는 고고미술사학과나 혹은 역사와는 전혀 관련없는 것들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와 정치, 경제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탱고나 삼바, 축제, 벽화작가들, 군부독재자들 뭐 이런 식이었다. 그 중에서 뭘 고를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후배 하나가 사파티스타를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사파티스타? 그게 뭐야? 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혁명군인데 체 게바라 만큼이나 유명한 아이템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사파티스타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하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봤는데 관련 논문도 생각보다 적었고 개설서격으로 나올만한 책도 없었다. 물론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노란색 표지에 박힌 검정색 스키마스크를 쓴 한 인물. 이 사람이 바로 EZLN의 부사령관 마르코스였던 것이다.

EZLN이 활동하는 멕시코 동남부의 치아파스州는 멕시코에서 가장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곳이다. 뭐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와 외세 자본이 이 곳에서 모든 천연자원을 뽑아가면서도 정작 이 곳 원주민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과테말라에 속해있던 이 곳은 몇몇 엘리트주의자들에 의해 멕시코로 이탈하여 복속되었고 그 이후 줄곧 수탈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사파티스타 몇몇 혁명군이 1983년에 도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애초에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가지고 이 곳에 도착해, 위로부터의 지도와 교육을 통한 혁명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오랜 아즈텍-마야 문명지였던 이 곳의 사상과 정신에 감응하여 독특한 혁명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마르코스는 실질적으로 이 반군의 지도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는 이곳 마야 원주민이 아닌 까닭에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직에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은 CCRI-CG라고 하는 군사조직이 있고 그 대리인으로서 마르코스가 활동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JBG라는 행정조직도 새롭게 꾸려 각 자치도시 운영에 있어서 군사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진일보를 겪기도 했다. 복면을 쓴 그의 모습은 탈냉전 시대 자본주의의 세계적 지배에 도전하는 반란의 상징이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략 덕분에 포스트모던 전사로서의 이미지도 얻고 있다.

그의 이름인 마르코스는 군사 검문소에서 죽임을 당한 한 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는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가면을 벗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사람들은 그 위선과 실체를 알게 되어 엄청나게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지만 본인이 가면을 벗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냉소적으로 멕시코 사회를 비웃기도 한다. 실제 그들이 쓰는 스키마스크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검은색인 이유는 불씨를 안고 살아가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숯검정색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라는 모토 아래 활동하는 혁명군의 자서전 격이 바로 이 책인 셈이다.

그는 멕시코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파리대학교를 졸업한 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중 원주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령관직을 거부했다. 그의 학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 나와있는 그의 편지와 성명서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우아하다. 혁명군의 문체가 이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유수의 언론은 그를 두고 최고의 문학가라고 칭할 정도로 그의 글솜씨와 학식은 대단하다. 혁명군 지도자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EZLN과 마르코스는 하나같이 멕시코 정부의 진실된 모습과 양측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악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를 실현해나갈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실제 이들의 요구조건을 보면 국가를 전복시키거나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없다. 단지, 민중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지개혁이나 원주민, 여성,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든 부분들 때문에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최초의 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정말로 대단한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을 연구한 연구서적도 아니요, 그에 대한 개설서도 아니다. 다만 그 혁명군을 이끌고 있는 부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조직을 대표하여 전세계에 호소했던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호소력짙은 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만든다. 비록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멕시코에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의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용한 분노의 그림자, 우리의 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쌀 것입니다'

마르코스가 '원주민과 캄페시노의 주 평의회, 멕시코 민중, 전세계 민중과 정부, 국내 및 전세계 언론에게'라는 제목으로 1994년 발표한 성명서에 나온 말이다. 이만큼 사파티사트민족해방군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어서 이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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