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제국사
서병국 / 혜안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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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하고 책과 논문을 좀 보려고 계획했는데 연구소에서 이래저래 일하다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책을 보려고 했는데 새 자료들을 읽는 것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때는 대학교 1학년때였던 것 같다. 한참 고구려 관련 연구서적들을 구해보던 시기였는데 그때 같이 봤던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느꼈던 점은 '참신'했다는 점이었다. 이 책과 노태돈 선생님의『고구려사 연구』를 모두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발상의 전환이라든가, 사료의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이 책은 굉장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실제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를 폭넓게 인용하고 있어 기존 남한학계의 견해와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며, 그런 북한학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도 남한학계의 견해와도 다른 주장을 하는 부분도 있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 대해 다르게 볼 여지를 많이 남겨주었다. 더구나 연구서적으로는 흔치않게『환단고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어 놀라기까지 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봤을때 그런 부분들이 모두 참신하게 느껴졌었다.

실제 서병국의 다른 책들을 보면 기존 학계와 조금 다른 견해들을 보이는 경우도 있고, 그런 부분들이 이질적이기까지 한 부분들이 다소 보인다. 그러다보니 긍정적으로 보면 기존과 다른 새로운 견해들이어서 참신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지나치게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무리한 논리전개가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국초 고구려의 왕위다툼을 소노부와 계루부간의 권력다툼으로 해석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사료들을 확대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말 부분에 고구려의 국명에 대해서 고구리로 불러야 한다는 신선한 견해를 전제하고 글을 시작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참신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책은 전체적으로 고구려의 기원 및 건국, 고구려의 영토, 고구려의 토지형태, 고구려 통치형태의 변화, 고구려인의 민족정신 고수, 고구려의 융성과 중국사회의 동요, 연개소문의 신국가경영 정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눈에 봐도 생활사 부분이 빠져있고 정치사 관련 내용이 많은데 특이한 점이라면 '고구려의 토지형태'에 대해서 따로 장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는 북한학계의 유물사관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과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해보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저자는 고구려의 건국을 맥족(貊族)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 즉, 고구려는 맥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국가이며 고구려가 주변에 흡수했던 나라들은 모두 맥족 계열 집단이었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는 맥족을 통합한 국가라는 의미이다. 이는 기존에 고구려가 주변에 흡수했던 국가들이 고조선 멸망 이후 열국으로 잔존한 것이라고 파악했던 견해들,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여 동방에 단일문명권을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와 약간 다른,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 흔적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저자는 고-수, 고-당 전쟁을 '맥족의 생존권과 한족의 자존심 대결'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맥족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영역 확장사와 초기 정치사를 바라봤기 때문에 양맥 혹은 소수맥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수맥과 양맥 등의 맥족이 고구려 내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으로 존속했으며 이는 중국측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맥국과 맥족 등에 대한 설명 등 책 전체적으로 맥족과 연결시켜 고구려사를 이해하다보니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사료 해석이나 구성 등이 돋보인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고구려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지주소유의 토지, 농민소유의 토지, 국가소유의 토지 등으로 나눠서 고구려의 토지형태에 대해서 40여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었다. 경제사 중에서도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사 분야에 대한 연구인데 이처럼 연구서적에서 고구려 경제사(토지)에 대해 독립적인 장을 마련해서 서술하고 있는 책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 역시 주인장이 굉장히 주목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비록 북한학계의 용어나 사고체계 등이 엿보였지만 고구려의 토지형태와 생활사를 접목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연개소문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멸망과 연관지어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한명의 독재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 그 자체를 새롭게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참신했던 것 같다. 노태돈 선생님 역시『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서술했지만 이는 귀족연립정권과 고구려 멸망이라는 시대적 정황에 연결시켜 이해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연개소문 개인적인 부분과 그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봤기 때문에 이 역시 참신한 연구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봤을때는 참신했을지 몰라도 최근에 김용만 선생님의『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 의해 연개소문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나왔기 때문에 지금은 빛이 바랜 부분도 눈에 많이 띤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책의 연구성과가 그 가치까지 평가절하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제국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가 '제국(帝國)', 즉 중국과 독자적으로 동방에서 군림하던 존재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지는 몰라도 책 전체적으로 저자가 참신한 견해들을 내기 위해서 노력은 했다. 그렇지만 서술 범위가 영토와 경제, 정치조직이라는 점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노태돈 선생님의 연구성과보다 그 범위가 좁은 것이 사실이며 비록 토지를 중심으로 경제사적인 시각을 나타냈지만 그 연구가 피상적인 것이어서 아쉬운 점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다양한 사료들을 인용하여 고구려사를 서술한 흔적은 있지만 그런 사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라는 점에서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띄어 안타깝다. 예를 들면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노력은 역력하지만 오히려 중국측 기록에 의존한 고-수, 고-당 전쟁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사료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 않아 그의 연구성과가 다소 왜곡돼 보이기까지 했다. 더불어『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용해 중국측 기록과 비교 · 서술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본 텍스트로서의 사료 검증이라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점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주인장이 고구려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한축을 담당했던 연구서적인 것만은 사실이며 지금도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사료의 운용과 해석이라는 점에서 주인장에게 새로운 시각의 장을 열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극제로 작용할만한 책이며 충분히 다각도로 고구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책이기에 주인장은 이 책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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