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 한국사의 잊혀진 무대, 한국 해양의 역사
강봉룡 지음 / 한얼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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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인장이『고구려 해양사 연구』를 보고 난 다음에, 다른 분의 추천으로 보게 된 책이다. 저자는 장보고와 같은 해양 활동의 주역들을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분인데 이 책은 해양사라는 관점에서 한국사를 관통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400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님에도 손에서 책을 쉽게 놓을 수 없을만큼 책은 흡입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일단 쉬우면서도 재미있고,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는데다가 해양사라는 관점에서 한국사를 잘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문에 책도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읽어냈다.

저자는 한국 해양사를 크게 '태동기', '융성기', '침체기', '부흥기'라는 4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었다. '태동기'는 동북아 연안항로가 개척되고 연안항로를 둘러싼 쟁패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삼국시대 이전을 말하고, '융성기'는 이전까지 간헐적으로만 활용되던 황해 횡단항로가 상시적인 항로로 본격 활용되면서 동북아시아 해상활동에 일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통일신라-고려시대를 일컫는다. 그리고 '침체기'는 공도정책(空島政策)과 해금정책(海禁政策)을 강하게 밀어붙여 해상활동을 크게 위축시킨 조선시대를 지칭하고 '부흥기'란 해방과 함께 해양의 문호가 다시 열린 이후 '대개방의 시대'로 가고 있는 오늘날까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책의 주된 내용은 '침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었다.

책은 전반적으로 해양사라는 측면에서 한국사를 바라봤기 때문에 몇가지 부분에서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면서 주인장이 가장 참신하고 독특하다고 여긴 내용은 3가지였다. 첫째는 고구려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와 백제 공격에 대한 부분이었고 둘째는 고려 최씨 정권에 대한 평가, 마지막은 고려말부터 진행되어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공도정책과 해금정책에 대한 해석이었다. 이들 부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기존에 주인장이 갖고 있던 인식들이 재검토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첫번째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와 백제 공격에 대한 부분을 말해보겠다. 앞서 윤명철은 그의 저서『고구려 해양사 연구』에서 장수왕의 평양으로의 남천은 고구려가 능동적으로 국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 선결해야 할 과제였으며 이를 토대로 고구려는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고구려와 남북조, 북방 세력 등 4개의 중심축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교섭을 갖는 '다핵다중방사상 외교' 형태의 등장을 이와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남진의 목표를 보다 구체적으로 백제를 위시한 남부 정치체로 설정하고 평양천도를 남진과 직결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반고구려 국제연대'가 백제를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간의 끊임없는 대립이 계속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의 한성 점령으로 인해 연안항로의 경색이 부채질되었고 동북아 해상교역이 위축됨에 따라 주변 여러 나라들의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어 자연히 고구려에 반대하는 여론이 국제사회에 더욱 확산되었다고 하고 있다. 즉,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천하 경영과 연결시켜 이해한 전자와 달리 후자는 고구려의 남진경략에 주목하였고, 그것이 오히려 고구려에 반대하는 집단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사실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얼만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했다.

둘째는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해석이었다. 일반적으로 고려사에 대한 몇가지 부분들을『국사』책에서 배울때 최씨 무신정권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최씨 무신정권은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몽골과의 무리한 항전을 지속했으며 고려를 망국으로 몰아가는 독재정치를 펼쳤다고 설명되어왔다. 주인장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는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피신하면서 육지의 관민에게 '몽골의 침입이 있을 시에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들어가 피신[入保]하라'는 지침을 하달한 것은 무책임한 조치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기마민족인 몽골족에 대항해 산성의 나라, 해양의 나라 고려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라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팔만대장경의 조판을 최씨 무시정권의 고려의 생명줄인 바닷길을 지켜내기 위한 주도면밀한 정치행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즉, 대장경 조판 사업이 강화도와 남해도를 잇는 바닷길을 넘나들며 수행되었음을 상기했을때 최씨 정권이 진주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 일대에 광대한 경제적 ·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시했다. 그리고 대장경 조판이라는 어마어마한 국책 사업을 일으킨 이유가 불력으로써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화도와 남해도를 잇는 바닷길의 네트워크를 유지 · 강화하려는 의도에서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최씨 무신정권은 서남해 지역에 머물고 있던 당대 최고의 고승들을 성심성의껏 섬기고 후원했으며 그로 인해 그 지역 해상 토호들의 협조를 이끌어냈던 것이라 한다. 이는 분명 기존 최씨 무신정권 치하의 몽골항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 할 수 있으며 주인장이 2번째로 눈여겨 본 부분이었다.

마지막 3번째는 고려말부터 조선때까지 지속되었던 공도 · 해금정책인데 지금까지는 막연히 왜구의 침탈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문헌에 나와있고, 주인장 역시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진도를 중심으로 해양왕국을 건설했던 삼별초에 주목하여 이 부분을 해석했는데, 고려정부가 삼별초를 진압하면서 해상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공도정책을 단행했던 것이라 한다. 실제 왜구의 침탈때문이었다면 오히려 도서지역에 방어체계를 단단히하여 격퇴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해상세력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라고 봤던 것이다. 실제 삼별초 정부가 일본과 연계하여 항몽전쟁을 지속하려 했던 점을 상기했을때 고려왕조의 이러한 정책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하겠다.

이처럼 고려말기에 시행된 공도정책은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결국 조선시대는 명의 해금정책을 좇아 바다에 대한 모든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스스로 폐쇄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이나 이순신의 조-일전쟁에서의 눈부신 활약상이 확인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조선은 바다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했었다. 조-일전쟁 이후에도 해금 · 쇄국정책을 지속했던 조선이 열강들의 침입 속에서 결국 일제강점기를 맞이한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이 3가지 부분 말고도 전체적으로 해양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다보니 기존의 견해와 다른 내용들을 상당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를 얼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해양사에 대한 책이 적지 않게 나와있지만 이 책은 한국사 전반을 관통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만큼 해양사를 공부하는 사람 혹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반드시 읽어봐야만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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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고구려 건국신화연구
이복규 지음 / 집문당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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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학기, 부여의 건국신화(본까페 [뿌리아름]열국시대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음)에 대한 글을 쓰면서 참고했던 책 중 하나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문학자이며, 고로 책의 내용 역시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국문학적인 입장, 즉 글자와 원문 자체의 내용을 갖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본래 이러한 신화의 경우는 신화학(?)이라고 불릴만한, 신화만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학, 사회학, 국문학, 역사학, 민속학 등 여러가지 분야에 걸쳐져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의 전공자가 독점할 수 없는 연구 분야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국문학자의 입장에서 쓴 이 책 역시 신화를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참고해야 하는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국문학적 연구만이 아니라 그 외 참고해야만 하는 연구성과는 굉장히 많다. 문헌사학적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는 물론 인류학적 연구, 사회학적 연구까지 골고루 참고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화라고 하는 거시적인 틀에서 봤을때 근본적으로 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문헌, 그 자체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신화에 대한 이해를 다 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게 봤을때 국문학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는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꼭 참고해야할 기본적인 텍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실, 고구려의 경우는 관련 서적은 물론 연구성과 역시 폭발적이라 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고 또한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그 관심과 수요가 더할나위 없이 늘어나고 있지만 부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학계에 부여사 관련 통사 혹은 개론서 하나 없는 것만 보더라도 부여사 연구가 어느정도로 미진한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여의 건국신화 분야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다. 하물며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모티브나 구성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의 것에 비해 찬밥 신세를 받기 마찬가지였으므로 부여의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성과가 많이 나오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나마 남아있는 부여 관련 문헌 기록 중 건국신화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체 부여사에서 건국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했지만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이 있지만 반대로 차이점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고구려가 부여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어떤 필요성에 의해 부여 건국신화의 잔재를 고구려 건국신화에서만 약간 찾아볼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부여의 멸망과 함께 부여 건국신화 역시 망국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만 그 모습이 잠깐 남아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고 논리적으로 비교 · 분석하고 있다.

일단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그 전승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양자간의 차이점을 알아보고 그 안에서 '동명'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인하고 있다. 특히나 부여 건국신화와 고구려 건국신화의 관계 연구사를 총 정리하는 것은 물론 부여 건국신화를 두고 삼국시대부터 근 ·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식으로 인식했는지 시대순으로 정리한 것은 부여 건국신화를 공부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 저자는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주인장 역시 똑같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부여 건국신화와 고구려 건국신화가 기록된 모든 문헌을 총정리하고 있어 이쪽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록으로는 부여 · 고구려 건국신화를 연구한 초기의 일본 논문 4편까지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어 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대한 총체적인 부분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해 놓았다. 고로 이 책에 실린 각종 내용들은 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대해 이해하는데 있어 충분한 기초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밑바탕 위에 역사학적인 시각으로 신화를 재해석한다면 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책은 어디까지나 국문학자가 그 분야의 시각에서 서술한 책이라는 점이다. 고로, 문헌에 정리된 신화의 내용을 통해서 역사를 복원하고 고고학적 성과와 함께 지명 비정, 연대 편년 등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 책의 내용은 이런 후속 작업이 이뤄지기 전에 문헌에 정리된 신화를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이, 주인장이 앞서 이 책을 두고 부여, 고구려 건국신화를 공부하는데 있어 텍스트처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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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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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휴가를 맞아 집에서 쉬고 있었다.
밖에 나가봤자 덥고, 땀 나고, 사람에 치일 것 같아서 샤워하고 시원한 인공(?) 바람 맞으며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책 한권을 주시면서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손바닥만하고 얇은 책 한권을 말이다. 회사 아는 분이 읽어보라고 주면서 한 두시간이면 읽는다는데 넌 아마 30분이면 읽을꺼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보던 책을 마저 접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이 쓴 인생지침서? 정도 되는 책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마시멜로가 왜 나올까? 하는 의문에 책을 한장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분량도 얼마 되지 않고 해서 말이다. 저자가 제목을 마시멜로에서 따온 이유는 간단했다. 마시멜로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데, 15분동안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15분 후, 먹은 아이도 있고 안 먹은 아이도 있었는데 10년후 그 아이들을 다시 살펴보니 안 먹은 아이들이 참을성이나 리더쉽이나 이런 사회에서의 생활도가 더 높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어렸을때 이 실험에 참여했었고 결국 안 먹었다고 한다. 적절한 제목 선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살밖에 안 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이후 10년이 흘러도 영향을 준다...이런 실험을 한 스탠퍼드 대학의 월터 미셀 박사라는 사람도 신기하지만 어릴때의 영향이 훗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이렇게 제목 선정의 이유만 보더라도 이 책의 내용이 대강 어떠할지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군대 가기 전이었을 것이다.『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었다. 그냥 무난하게 봤던 책이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이 책과 비슷한 지침(?)을 내렸던 것 같다. 실천, 생각만 하는게 아니라 실천을 하라고 말이다.

주인장은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이런 류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가의 열풍으로 휘몰아칠때 의아하기까지 하다.
왜 이런 책을 서로 못 읽어 안달이 날까.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책의 저자가 쓴 내용들이 분명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고 중요한 것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낸 독자들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책들을 아무리 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일단 본격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소재 선택이 신선했다. 마시멜로라는 상징적인 대상을 통해서 성공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집착해서 장기적인 이익, 더 큰 이익을 놓치지 않게끔 하는 것 말이다. 내용은 전체적으로 조나단(사장)과 찰리(운전사)라고 하는 2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해 회사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나누는 몇마디 대화들로 짜여져있다. 예전에도 느끼지만 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설정해 이야기하듯이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 트렌드인 듯 싶다. 뭐 어느 책을 보니 이런 식의 내용 전달이 불특정다수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암튼, 전체적인 내용은 그렇다치고 짧은 내용 속에 재밌는 이야기거리가 많이 들어있다.
여러 상황들 속에서 찾아내는 마시멜로 이야기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게 느끼지 않게 해 주었다.
일상 속에서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상황들을 갖고 독자에게 무언가 메세지를 전달하다보니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쉽게 와닿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인데 책에서 저자가 마시멜로로 상징화해서 언급하니까 더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매일 밖에서 밥을 사 먹는 식비를 절약하면 1년에 얼마를 줄일 수 있다, 자주 마시는 술을 줄이면 1년에 얼마를 줄일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서 사고의 전환을 꾀하다보면 전반적인 생활 자체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과 다른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원동력을 얻게 되고 그러다보면 인생 자체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저축, 하지만 간단히 돈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대비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뭔가를 대비하지 않은 사람은 매사에 여유로울 수가 없다. 믿을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준비되어 있고 대비되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 주인장이 날씨 탓인지, 많이 헤이해지고 게을러지고 있다.
그런 마당에 잠깐이나마 이 책을 읽으니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되었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생각을 줬으니 말이다. 이제 곧 있으면 9월이다. 새 학기가 시작하는데 이 책에서처럼 사고의 전환을 꾀해 스스로에게 후회없는, 마시멜로를 먹고 싶지만 참아갈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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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글방 132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서성철 옮김 / 까치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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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영상으로 본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라는 수업을 들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틴문화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는데 실제로 어려울 수도 있는, 일반적으로 쉽게 접하기 힘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쉽게 배울 수 있었다. 하루에 3시간 가량의 수업 시간 중 1시간 가량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나머지 2시간 동안은 비디오나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보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분야는 역사와 지리, 문화, 생활 등 전반적인 것에 해당된다.

이 책은 그때 읽었던 책이다. 기말고사 시험범위가 책 전부(?)라고 하는 다소 황당한 선생님의 말씀이 있어서 억지로라도 읽어야만 했기에 책을 읽었지만 다 읽은 뒤에는 '재밌다'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이 책을 쓴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라틴아메리카계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로서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체에 있어서 딱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글을 읽을 수가 있다. 거기다가 내용면에서 라틴아메리카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전혀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주인장은 이 책 1권을 읽음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개괄적인 틀을 잡을 수가 있었다.

책은 먼저 스페인, 보다 크게 말하면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언급한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는 이후 로마시대를 지나서 중세시대까지 죽 서술되는데 마치 재미있는 세계사 책을 읽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주인장이 지금까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세계사에 대한 것, 그리고 수업 시간에 들었던 부분들이 머릿속에 있기에 책의 내용이 보다 쉽게 와닿는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이 전문적인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보다는 전문적인 내용을 부담없이 읽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 구체적으로 스페인의 역사가 다양성을 가진 역사, 개방성을 지닌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지방색이 강하고 개인주의가 심화된 존재임을 역설한다. 어느 나라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저자의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듯 싶다. 저자 스스로가 라틴 아메리카인으로서 자신의 역사를 자신이 쓰다보니 주관적이면서 열정적인 필체가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구인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용어일 뿐이다. 그래서 최근에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양대륙의 만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정복자이면서도 어머니인 독특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 유럽인들이 신대륙이라고 불러야만 했던 곳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의 후손이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부터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한국사인만큼 우리들도 한국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한반도 안에서의 역사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역시 라틴아메리카의 지역사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 역시 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를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에, 양자가 융합되어가는 그 과정을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정복자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피정복자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스페인은 신대륙에 기독교와 유럽의 새로운 문화를 전수했지만 반대로 원주민을 억압하고 그들을 강간했으며 그들의 토착 문화를 억압하기도 하였다. 물론 원주민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그들의 토착 문화를 잃지 않고 보존해내는데 성공했다. 싱크레티즘(syncretism)이 바로 그것이다. 잉카와 마야 제국이 멸망당하고 그 과정에서 최초의 혼혈인이 탄생하고, 기독교를 통해 원주민들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라틴 아메리카는 만드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간의 대립, 즉 어머니와 원치 않았던 자식간의 대립에 대해서 묘사한 뒤에 저자는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로 촛점을 바꾼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들은 주인을 잃어버린다. 그 와중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부강, 멕시코의 발전 등 격동적인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단순히 역사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역사책이라면 대부분 정치사에 치중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문화사와 생활사에 대한 부분까지도 언급하고 있어 전반적인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해놨다. 음악과 미술, 종교와 예술, 음식과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모르는 라틴 아메리카의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균형잡힌 시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끔 해 놨던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책에서 문화나 생활과 같은 오히려 사실적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하는데 그런 단점을 무리없이 보완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언급하면서 히스패닉 계열이 아메리카 전역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역설한다. 제국주의의 횡포와 라틴 아메리카의 저력을 언급하려는 듯 하는데 이 부분에서 특히 저자의 열정적인 저작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역사를 언급함으로써 역사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애국자이어야만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분명히 진정한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애국적인 저자가 쓴 아주 재밌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책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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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제국사
서병국 / 혜안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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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하고 책과 논문을 좀 보려고 계획했는데 연구소에서 이래저래 일하다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책을 보려고 했는데 새 자료들을 읽는 것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때는 대학교 1학년때였던 것 같다. 한참 고구려 관련 연구서적들을 구해보던 시기였는데 그때 같이 봤던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느꼈던 점은 '참신'했다는 점이었다. 이 책과 노태돈 선생님의『고구려사 연구』를 모두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발상의 전환이라든가, 사료의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이 책은 굉장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실제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를 폭넓게 인용하고 있어 기존 남한학계의 견해와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며, 그런 북한학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도 남한학계의 견해와도 다른 주장을 하는 부분도 있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 대해 다르게 볼 여지를 많이 남겨주었다. 더구나 연구서적으로는 흔치않게『환단고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어 놀라기까지 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봤을때 그런 부분들이 모두 참신하게 느껴졌었다.

실제 서병국의 다른 책들을 보면 기존 학계와 조금 다른 견해들을 보이는 경우도 있고, 그런 부분들이 이질적이기까지 한 부분들이 다소 보인다. 그러다보니 긍정적으로 보면 기존과 다른 새로운 견해들이어서 참신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지나치게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무리한 논리전개가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국초 고구려의 왕위다툼을 소노부와 계루부간의 권력다툼으로 해석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사료들을 확대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말 부분에 고구려의 국명에 대해서 고구리로 불러야 한다는 신선한 견해를 전제하고 글을 시작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참신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책은 전체적으로 고구려의 기원 및 건국, 고구려의 영토, 고구려의 토지형태, 고구려 통치형태의 변화, 고구려인의 민족정신 고수, 고구려의 융성과 중국사회의 동요, 연개소문의 신국가경영 정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눈에 봐도 생활사 부분이 빠져있고 정치사 관련 내용이 많은데 특이한 점이라면 '고구려의 토지형태'에 대해서 따로 장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는 북한학계의 유물사관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과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해보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저자는 고구려의 건국을 맥족(貊族)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 즉, 고구려는 맥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국가이며 고구려가 주변에 흡수했던 나라들은 모두 맥족 계열 집단이었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는 맥족을 통합한 국가라는 의미이다. 이는 기존에 고구려가 주변에 흡수했던 국가들이 고조선 멸망 이후 열국으로 잔존한 것이라고 파악했던 견해들,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여 동방에 단일문명권을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와 약간 다른,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 흔적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저자는 고-수, 고-당 전쟁을 '맥족의 생존권과 한족의 자존심 대결'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맥족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영역 확장사와 초기 정치사를 바라봤기 때문에 양맥 혹은 소수맥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수맥과 양맥 등의 맥족이 고구려 내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으로 존속했으며 이는 중국측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맥국과 맥족 등에 대한 설명 등 책 전체적으로 맥족과 연결시켜 고구려사를 이해하다보니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사료 해석이나 구성 등이 돋보인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고구려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지주소유의 토지, 농민소유의 토지, 국가소유의 토지 등으로 나눠서 고구려의 토지형태에 대해서 40여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었다. 경제사 중에서도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사 분야에 대한 연구인데 이처럼 연구서적에서 고구려 경제사(토지)에 대해 독립적인 장을 마련해서 서술하고 있는 책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 역시 주인장이 굉장히 주목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비록 북한학계의 용어나 사고체계 등이 엿보였지만 고구려의 토지형태와 생활사를 접목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연개소문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멸망과 연관지어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한명의 독재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 그 자체를 새롭게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참신했던 것 같다. 노태돈 선생님 역시『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서술했지만 이는 귀족연립정권과 고구려 멸망이라는 시대적 정황에 연결시켜 이해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연개소문 개인적인 부분과 그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봤기 때문에 이 역시 참신한 연구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봤을때는 참신했을지 몰라도 최근에 김용만 선생님의『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 의해 연개소문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나왔기 때문에 지금은 빛이 바랜 부분도 눈에 많이 띤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책의 연구성과가 그 가치까지 평가절하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제국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가 '제국(帝國)', 즉 중국과 독자적으로 동방에서 군림하던 존재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지는 몰라도 책 전체적으로 저자가 참신한 견해들을 내기 위해서 노력은 했다. 그렇지만 서술 범위가 영토와 경제, 정치조직이라는 점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노태돈 선생님의 연구성과보다 그 범위가 좁은 것이 사실이며 비록 토지를 중심으로 경제사적인 시각을 나타냈지만 그 연구가 피상적인 것이어서 아쉬운 점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다양한 사료들을 인용하여 고구려사를 서술한 흔적은 있지만 그런 사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라는 점에서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띄어 안타깝다. 예를 들면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노력은 역력하지만 오히려 중국측 기록에 의존한 고-수, 고-당 전쟁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사료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 않아 그의 연구성과가 다소 왜곡돼 보이기까지 했다. 더불어『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용해 중국측 기록과 비교 · 서술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본 텍스트로서의 사료 검증이라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점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주인장이 고구려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한축을 담당했던 연구서적인 것만은 사실이며 지금도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사료의 운용과 해석이라는 점에서 주인장에게 새로운 시각의 장을 열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극제로 작용할만한 책이며 충분히 다각도로 고구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책이기에 주인장은 이 책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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