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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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미 군사적으로 조선의 허약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7년여의 조-일 전쟁. 이후 조선은 절치부심 국가를 재건하지만 목적없는 군사력 회복은 허공에 쏘아대는 화살과도 같았다. 1차 조-청 전쟁(정묘호란)때 한차례 곤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로부터 9년 후, 2차 조-청 전쟁(병자호란)을 맞이하여 그 허약함을 또 한차례 여실히 드러냈다. 얼마전 온 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삼전도비가 전쟁의 결과물이다. 치욕스런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식. 과연 전장터였던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이미『칼의 노래』와『현의 노래』에서 세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인물과 심리묘사를 보여줬던 김훈은 이 책에서도 그의 장기를 재인식시켜주고 있다. 주인장이『칼의 노래』에서 보여줬던 이순신의 섬세한 내면묘사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내면묘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제는 이순신 하나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이라는 철벽을 사이에 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멍청이 임금 인조(하지만 소설 속에서 인조는 상당히 줏대있는, 그러면서도 왕의 위엄을 잃지 않는 임금으로 나온다)와 영의정 김류, 예조판서 김상헌, 최명길과 이시백,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마치 그 당시를 재현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까지의 조선으로 안내하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현실과 명분의 대립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독자들을 안내할 뿐, 이렇다 저렇다 결론짓지 않고 있다. 실천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조선이 버리지 말아야 명에 대한 의리, 오랑캐에 대한 비복종.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집스러움에 고통받는 것은 남한산성 내의 백성들과 조선팔도의 백성들이리라. 김상헌이 성밖으로 내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던 서날쇠가 대표적이리라. 조정은 해준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무던히 일어나 임금과 사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럼에도 일국의 예판이라는 자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치사하고 비열한 고관대작의 오만함이 꼴배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치『조선왕조실록』을 꺼내 한장 한장 넘기는 듯한 기분이다. 성안에 갇혀있는 동안 저자는 성 안팎을 넘나들며 너무나도 자세히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소설『미실』을 보면서『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을 했었는데 주인장의 그런 평을 빗대어 그럼 이 책은 어떻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해 나열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해 겨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거듭 말했는지도 모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 하고, 이뤄지지 않아서는 안 될 결과가 일어났다. 그 해 임금이 그 곳에 있던 시기에 말이다.『미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여운'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어떤 답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 계속 사색하게 한다. 그래서 주인장은 김훈의 책을 즐겨 읽는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내내 작가의 관점은 백성들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흔히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대청항쟁에 대해 이야기할때 나오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도 이 책에서는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고통받고 가장 큰 희생을 치루고 가장 노력했던 민초들임을 저자는 은연 중 내비치는 것 같다. 임금이 먹을 수라상에 올릴 반찬이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성안에서 병사와 관리와 임금을 보필할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벤뎅이젓갈 하나에 성안이 난리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꼴에 문명국의 임금으로서 비록 적군이지만 오랑캐 장수에게 내린다고 새해에 음식을 보냈다가 수치스럽게 퇴짜맞는 장면에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인가. 너라는 인간은! 인조~오!! 분노가 치밀고 주먹이 쥐어질 정도다. 그 상황에서 주전이나 주화니 떠들어대는 한심한 작태가 우습다. 저자는 어느새 주인장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삼배구고두.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란다. 한국사에 이처럼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자, 또 있었을까. 부끄러운 역사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다시는 되풀이되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주인장은 저자가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하고 그칠 수가 없었다. 저자도 한국인인데...분노하고 치가 떨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그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필치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나 개인적인 감정은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그려내는 저자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더 책이 전하는 메세지가 주인장에게 강하게 전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하다...

한번쯤 꼭 읽어보길 권하는 책이고 싶다. 금년 하반기 들어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아마 이 책을 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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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패배 클라시커 50 9
볼프강 헤볼트 지음, 안성찬 옮김 / 해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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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금 특이하면서도 재밌는 전쟁사 책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전산학강사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전쟁사를 독특하게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그는 정통(?) 전쟁사학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의 문체에서는 자유분방함이 묻어 있었다. 전쟁을 간단하면서도 요점만 짚어서 언급하는 방식이라든가, 마지막 부분에 저자 자신의 간단한 비평(분석이 아닌)을 적어놓는 것 등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다양한 연구성과를 섭렵하여 객관성을 보강하였는데 여러가지 전쟁에 대한 견해들을 소개하고 정리만 할뿐, 자신의 전문지식을 활용해서 어렵게 책을 써 나가지 않았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세기의 중요한 전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부담이 적게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각 장은 4~5쪽의 적은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책은 전쟁사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도판과 도면들이었다. 전쟁의 흔적과 전투 장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도판, 도면이 300컷이나 실려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전쟁을 소재로 삼은 유명한 미술작품들이 상당수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물론 제1 · 2차세계대전으로 넘어오게 되면 사진이나 기록영화, 엽서, 영화의 한장면 등이 자주 소개되었지만 고대 및 중세시대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화가들의 미술작품을 소개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을 많이 접할 수가 있다.

그와 더불어 독특한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전쟁을 묘사한 예술작품들, 즉 영화나 책, 음악 등을 소개하고 있어 이 점이 주인장에게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역사를 영화나 책 등으로 재현해낸 작품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널리 사랑을 받아왔다. 가장 최근까지도 주목받았던 스파르타군의 테르모필라이 전투라든가(『불의 문』이나 영화〈300〉에서 알 수 있듯이),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히는 트로이 전쟁(브래드 피트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파트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렵고 다소 이해하기 난해한 전쟁에 대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특히 주인장은 여기서 소개된 전쟁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거나 책에 나온 박물관 싸이트나 책 등을 검색해서 자료를 얻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점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은 각 장마다 마지막에 전쟁의 진행과정과 역사적 영향 등을 요점정리식으로 정리해놨다는 사실이다. 각 전쟁에 대해 역사적 배경, 시기, 장소, 목표, 전쟁 상대 및 지휘관 및 무기, 손실, 승자, 전투진행과정(상당히 정확한 것은 일자와 시간까지 표기), 평가 등의 항목으로 나눠서 한쪽에 요약정리를 해놓고 있었다. 마치 전쟁사 관련 교과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지금까지 여러 전쟁사 서적을 봐도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짚어서 정리해놓은 책은 보질 못 했다. 아~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다른 서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주인장은 지금 저자가 아주 독특한 구성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전쟁사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제목은 역사를 바꾼 세기의 전쟁 50이지만 주인장이 보기에 각 전쟁들을 구분한 기준이 애매모호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뭐 수백년만에 중국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당과 겨룬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부터 저자는 일관되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전쟁을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1 · 2차 세계대전을 언급할 뿐이었다.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도 한 파트를 장식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쟁의 주 전장은 서구 열강을 벗어나질 않았다.

즉, 50개의 주요 전쟁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그야말로 시대와 역사를 구분하고 변혁을 가져올 정도의 '결전'을 소개하지 못 하고 있는 듯 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 내에서의 패권 다툼인 레욱트라 전투(테베와 스파르타의 대결)를 투르 & 푸아티에 전투(이슬람교의 물결을 막아낸)나 아쟁쿠르 전투(기사시대의 몰락을 가져온), 세키가하라 전투(에도막부의 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독일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등과 나란히 소개한 것이 그러했다. 차라리 레욱트라 전투보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싶었다. 이렇듯 저자는 말로는 세기의 주요 전쟁 50이라고 했지만 따지고보면 이런저런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전쟁을 선정해놓았다. 

또 중간에 도판이 잘못 삽입된 점 등을 빼면 전체적으로 상당히 재밌고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정통 전쟁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책은 전반적으로 어렵거나 이해하기 난해한 군사용어로 도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구성과 재미있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어 상당히 좋은 개설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해 가볍게 알고 싶다면 주인장은 이 책을 한번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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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고학의 방법과 이론
최성락 / 학연문화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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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이 갖고 있는 것은 2001년도에 발간된 것인데 책 표지가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98년도에 발간된 것도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물론 새롭게 추가된 내용들이 있지만 기존의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 책은 예전에 한번 읽어봤었는데(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시간에 쓸 교재로 채택되어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그때랑 느낌이 달라서 이번에는 그럭저럭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한국고고학을 두고 전통고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뭐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고고학史 관련 수업을 들어보면 이미 다른 나라들은 신고고학이나 과정주의고고학이나 탈(후기)과정주의고고학이니 새로운 고고학 사조들이 한번씩 휩쓸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지껏 전통고고학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 하고 있으며 외국에서 이론 몇개 차용해서 갖고 오면 그게 뭔 전부인양~대단하게 취급받는 분위기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는 고고학 연구방법론과 이론의 不在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곤 한다. 그러다보니 발굴조사로 인해 얻어진 고고자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이것들이 '왜' 여기서 발견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에 취약하다고 말이다.

이 부분은 주인장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발간하는 조사보고서는 상당히 뛰어난 가치를 지니지만(외국 중에 우리나라처럼 조사보고서를 잘 만드는 나라는 일본 정도로 알고 있다) 개개 고고학자들의 개별 서적들은 발간되는 예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물론 외국 학자들의 고고학 개설서들이 적지않게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쓴 이론서 혹은 개설서들이 우리나라에 극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김원용 선생님의『한국고고학개설』정도랄까? 즉, 어느 학자 1명이 자신의 이론과 주관에 따라 일관되게 고고학 이론이나 방법론을 소개한 책이 김원용 선생님 책 말고는 현재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봤을때 최성락 선생님의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성락 선생님의 그간 논문을 모아 편집한 책이긴 하지만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일관되게 정리된 생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비록 개설서로서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고고학 방법론 서설을 시작으로 고고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형식학적 방법과 C14 연대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뒤이어 화산회층과 통계학적 방법론에 대해 알아본다. 마지막에는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단순히 발견된 유물, 유적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화를 복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선생님이 지금까지 썼던 논문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는게 사실이다. 주인장도 예전에 그냥 읽어볼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 책 일부를 요약 발표하다보니 상당히 해석에 난해한 부분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전공자한테는 쉽게 와닿지 않는 내용들이 꽤 있을 듯 싶다. 왜냐하면 김원용 선생님의 책처럼 한국사를 고고학의 시각에서 통사적으로 서술한 책도 아니거니와, 고고학 일반적인 이론이나 방법론에 대해 개설서식으로 서술한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만큼 고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고고학 관련 서적들이 얼마나 더 나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성락 선생님의 이 책이 발간된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대략 10여년) 그 내용에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고고학계에서 거론되는 여러 쟁점들이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루빨리 한국고고학의 수준이 진일보하여 전통고고학의 그늘에서 탈피했으면 하는 작은 바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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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지음 / 창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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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태왕사신기』를 즐겨보시던 선배가 광개토태왕에 대해 볼만한 책이 없냐고 하셔서 이 책을 추천해드렸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광개토태왕에 대한 인물 평전은 그렇다치고 관련 서적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관련자료가 '광개토태왕비문'이나『삼국사기』등의 단편적인 기록들인데 그것만으로 얼마나 그 인물을 복원해낼 수 있겠느냐,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해도 관련서적이 별로 없다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선배한테 빌려줬던 책을 돌려받은 뒤에 한장한장 책장을 넘겨봤다.

'코리아에 고구려가 없다면, 코리아는 없다!'

책 표지의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렇다. 코리아에 고구려가 없어지면 안 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말살하려는 작금의 사태를 한번 되돌아보라. 이 책은 2001년에 나왔는데, 그때 저자는 제대로 된 인물사 책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2007년 막바지에 이르는 지금도 제대로 된 인물사 책은 여전히 없다. 앞서 주인장이 광개토태왕에 대한 제대로 된 책 하나 없다고 한 것도 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암튼,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는데도 역시 고구려 인물사를 잘 알려면 이 책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고구려에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어떠한 것들인지를 알려주고자 하고 있다. 그는 추모성왕을 '벤처창업가'라고 칭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처음 봤을때 그 표현이 굉장히 신선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혹시『태왕북벌기』라는 만화를 아는가? 그 중에 '타다르'라 불리는 흉노족(왜 흉노족인지 모르겠지만) 족장이 6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부여성(암튼 巨城으로 나온다) 일대를 공략하려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 타다르가 "고구려를 세운 자가 주몽이라 했던가? 그 역시도 시작은 이처럼 협소하였을 것이다. 안 그런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요즘으로 치면 추모성왕은 그야말로 無에서 有를 일궈낸 창업군주였던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신선한 표현들을 써서 그간 잘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이 고구려의 왠만한 인물들을 다 다룬 인물사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단순히 왕(당시 역사서의 주인공)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호동왕자, 명림답부, 을파소, 밀우와 유옥구, 유유, 도림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유화부인, 부여태후, 우씨왕후, 관나부의 장발미녀, 한씨미녀, 평강공주 등 30여명의 주인공 중 무려 6명이나 되는 고구려 여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관나부의 장발미녀를 제외하면 모두 강건하고 웅대한 기상을 가진 고구려의 여성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이 요구하는 모델로서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얼마전 신사임당은 요즘 여성상과 맞지 않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지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어떤 인간들의 반론을 보고 기가 찼다). 안장태왕과 한씨미녀 이야기가 춘향전과 비교할만한 것도 흥미롭다. 고구려의 다양한 인물상을 그려주고 있기에 이 책을 읽음으로서 독자들은 고구려 인물들에 대한 좋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주인장 개인적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연구자들도 별로 신경 안 썼던) 인물들을 발굴(?)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종의 대가가 된 승랑 스님, 북위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 고조가 바로 그들이다. 지금이야 이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 책이 나올 당시에만 해도(2001년) 이 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 고구려 인물사에 대한 또 다른 책이 나온다면 최근 금석문에서 확인된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추가되겠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이 책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뒷부분에는 참고자료도 첨가되어 있어 고구려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 개설서로는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일무이한 고구려 인물사 서적인데, 그것만으로도 한번쯤은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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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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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윗 부분에 조그맣게 한줄 써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 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헤겔 -

이 책을 사게 된 이유가 이 글귀 한줄이라면 우스울라나? 솔직히 주인장은 대규모 전쟁이나 세계사적 전환점이 될만한 決戰을 언급할때 한-중-북방이 뒤엉킨 것 말고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물론 현재 전쟁사 혹은 군사사 관련 서적에서는 그 반대 현상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카데쉬 전투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같은 것은 분명 주목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도 마찬가지고 말이다(이후 언급할 살라미스 해전을 포함해서). 그렇지만 정신의 힘과 물질의 양을 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따질려면 고-수, 고-당 전쟁은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지,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맞붙은 페르시아 원정군에 비해 수, 당의 원정군은 그 위력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예군이었는데 그런 수, 당과 맞붙었던 고구려를 어디 감히 그리스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거 봐라~한번 뭔말 해보나 보자!'라는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책장을 넘길수록 책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대 전쟁사의 권위자인데 이 책 한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했다. 책장을 별로 넘기지 않았는데도 과연 그런 대접을 받을만 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덧붙여 드는 생각은 김용만 선생님의『새로 쓰는 연개소문傳』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과 구성으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단언컨대, 주인장이 아는 한 전쟁사에 대한 책 중에서 이 정도의 Quality를 지닌 책을 주인장은 앞서 언급한『새로 쓰는 연개소문傳』말고는 지금까지 보질 못 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아니 독특한 장점?이라면) 이 책은 B.C 480년 5~10월까지 벌어진 '제3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의 원정)' 중 9월 25일 한나절 동안 벌어진 '살라미스 전쟁'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건 사료의 多少에 따른 결과물이겠지만, 하나의 전투를 갖고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책은 분명 秀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책 첫장에서 저자는 전쟁의 전체적인 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해전에서 활약한 삼단노선(직접 제작한 배를 통한 여러 실험 결과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저작물을 위해서 제작된 것은 아니다)에 대해서 기초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뒤이어 살라미스 해전 이후의 상황에 대해 가볍게 소개한 다음 본격적으로 B.C 480년, 전쟁이 벌어지려는 정황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헌사료나 고고자료 이외에 아이스킬르소의 희곡이라든가, 다소 전설과 주관적 사상이 주입된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의 저작물을 주요 사료로 삼고 있었다. 즉, 중국식 史書(이건 비교적 정확하고 자세한, 사실에 근거한 기록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와 고고자료로 점철된 역사책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적지 않은 부분이 추정과 정황근거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할만한 책이라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보다 생생하고 인간적인 묘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쉽게 보기 힘든 사료에 의존한,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이라는 소리다.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동안 저자는 주인장을 어느새 에게해로 이끌고 있었다.

The Advance (진격)
The Trap (함정)
The Battle (전투)
The Retreat (퇴각)

책의 각 章도 이처럼 운치가 있었다. 아주 당연한 이 4개의 장으로 저자는 살라미스 해전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묘사하고 있었다. 먼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주인장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아테네를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군(해군)과 페르시아(연합군)이 좁은 해협에서 싸워 그리스가 승리했고, 전투 결과 페르시아는 그리스에서 손을 뗐으며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된 아테네는 覇者가 되었다는 것 정도다. 아마 서양사 시간이나 세계사 시간에도 이 정도를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더 배운다면 동양 전제왕권에 대항한 서양 민주주의의 승리와 이후 야기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이 발생했다는 것 정도? 암튼 주인장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이 이 책에 다 나온다. 하지만 보다 더 자세하고 생동감있게 나와있어 읽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읽었다.

일단 주인장은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이름은 몇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처럼 대단한 인물인지는 몰랐다. 교활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간계에 능한 인물, 아테네 해군력을 창시한 군개혁자이자(아테네는 이등 육군보유국에서 일등 해군보유국으로 탈바꿈했다) 적과 아군을 속여 전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 대단한 인물이었다. 물론 살라미스 해전에서 직접적으로 그가 미친 영향은 적다 하더라도 분명 그의 혀와 머리를 통해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졌고, 그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영광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직한 노예 시킨노스를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내 적과 아군을 속이고, 천문과 지리를 읽어 살라미스라는 최적의 전장에서 적을 맞이한 그리스군은 반나절의 전투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전쟁이 끝나고 이곳저곳을 떠다니다가 크세르크세스가 죽고 난 이후의 페르시아에서 지방 태수직을 전전하며 호화로운 망명 생활을 했다는 것은 다소 충격이었다. 아니, 그리스라는 나라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실리에 매달리는 집단들이라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암튼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은 마치『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을 주물렀던 제갈량을 묘사한 것과 맞먹는 듯 했다. 

게다가 페르시아와 그리스를 넘나들며 저자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어색하지 않게 버무려서 표현하고 있었다. 분명 사료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만한 부분에서 저자는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짚어내려고 노력하는 면이 돋보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쟁의 실체'를 몇몇 영웅적인 장군의 활약이나 거시적인 전략 · 전술 재현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삼단노선 밑바닥에서(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모른채) 살갗이 까지도록 노를 저어대는 노예나 갑판 위에서 죽을 힘을 다해 적과 싸우는 수병에게서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묘사가 가능했기에 하나의 전투로도 400쪽이 넘는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은 소설에 가까운 영역일수도 있지만 저자는 분명히 주석을 달아 이 모든 서술이 고고자료 혹은 미술자료 등에서 얻어진 정보의 재해석임을 명시해놓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까지 치밀하게 신경쓴 책은 분명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묘사는 독자가 살라미스 해전을 TV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생동감 있게 이뤄졌는데 이 모든 서술이 한나절동안의 일을 묘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때마다 놀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 '전쟁터에서 그 찰나의 순간,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거듭 넘기다보면 어느새 전투는 막바지에 치닫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미니아스의 명령으로 그리스 삼단노선의 충각이 페니키아 함선을 들이받았을때부터 시작된 전투는 페니키아 함대의 몰락과 함께 크세르크세스의 공포에 떠밀려 전진하려는 자와 후퇴하려는 자의 혼돈 속에 계속되어 결국 결판이 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300에서 표현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뒤에서는 채찍질을 하며 전진을 외치지만 앞에서는 스파르타군의 창날에 떠밀려 오히려 후퇴를 거듭하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어쨌든,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도 자세하게 알아갈 때쯤, 저자는 독자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전투가 끝난 후 크세르크세스에 대한 묘사(혹은 그 이후 페르시아에 대한 묘사)에서 주인장은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알아갔다.

저자는 페르시아군이 그리스군에게 패한 이유로 3가지를 꼽았다. 무리한 상태에서 노잡이들을 혹사시켜 전투에 임했던 점, 전투 중 지휘관들이 사망하여 전열 유지에 혼란이 있었던 점(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페르시아였기에 지휘관의 죽음은 곧 전장의 혼란으로 이어짐), 지형이 페르시아군에게 불리한 점 이렇게 3가지를. 그리고 전후 24시간도 안 돼 크세르크세스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데 저자는 여기에서도 3가지 실수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살라미스 해전 직후 크세르크세스가 아직 막강한 대규모 병력이 남아있음에도 후퇴를 결정한 것에 대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달리 국경이 장대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페르시아는 여전히 금은보화로 그리스를 회유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페르시아의 어설픈 외교는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그리스 최강의 두 군사도시)가 힘을 합치게 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아테네를 공격하여 협박한다는 것이 오히려 아테네로 하여금 '내가 페르시아와 손 잡기 전에 나와 손잡자'에 대한 대답을 스파르타가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마르도니우스에게 병력의 지휘권을 맡겨 그리스에 잔류시켰지만 그는 페르시아의 정예기병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B.C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전사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마으로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 이후 해군을 재건하지 못 했고(안 한 듯 싶다) 오히려 지상군에 주력하고 말았다(마치 고구려가 거듭된 고-당 전쟁으로 지상군에 대한 상곽 방어체제를 강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던 주인장은 에필로그 부분에서 눈을 떼질 못 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분명 그리스 원정에서 실패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왕중의 왕으로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다리를 놓고, 그의 기치 아래 수평선을 까맣게 물들일 정도의 대병력을 모집하기도 했으며,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을 테르모필라이에서 꺾었다. 그 다음엔 아테네를 점령해 유린하고 도주하지 않았던 주민들은 노예로 만들었으며 트라키아에서 코린트 지협까지 전 지역에 조공을 요구한 뒤 아나톨리아로 당당히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책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머리를 세게 한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테르모필라이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결국 방어선은 뚫렸으며 아테네는 점령당해 신전은 부서지고 생산기반은 모두 파괴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단지 살라미스 해전에서 '부하 장교들의 실수로' 패한 것 뿐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며 크세르크세스를 위대한 왕으로 찬양했을 것이다. 같은 전쟁을 두고 이런 상반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오히려 델로스 동맹을 만들어 제국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고 말았다. 페르시아 대신 아테네가 제국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 말이다. 여기까지 보면 과연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란 말인가? 아테네? 그리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돌입했고 그리스인들은 차라리 이민족(페르시아)의 침입이 더 낫다고 울부짖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럼 왜 살라미스 해전이 중요하단 말인가. 별거 없지 않은가. 저자는 불과 두 세대만에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던 아테네가 다시 세계 최초의 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해 그리스가 모두 페르시아 제국에 지배당한다 하여도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문명을 영위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아테네는 교활함과 탐욕이라는 유혹에 빠졌고 그 덕에 한세기 이상이나 민주제와 제국이라는 사상이 그리스 안에서 충돌하게 된다. 자유의 이상을 지키지 못한 아테네 덕분에 헤로도토스, 투기디데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비평가들이 세상에 났으며, 이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해 서양 정치철학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오점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의 진정한 유산이라고 저자는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살라미스 해전을 고대의 가장 위대한 전쟁이자 가장 위대한 해전이 되게 하는 궁극적 이유인 셈이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 아테네인들. 델로스 동맹은 80년도 못 갔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그로부터 150년 가량을 버텨냈다(알렉산더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테네는 결국 제국을 추앙했다가 몰락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늘날의 서양 사상체계가 파생되었다. 좋든 싫든간에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페르시아 제국이 남긴 사상적인 유산은 그리스가 남긴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모든 것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진정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을 압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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