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이미 군사적으로 조선의 허약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7년여의 조-일 전쟁. 이후 조선은 절치부심 국가를 재건하지만 목적없는 군사력 회복은 허공에 쏘아대는 화살과도 같았다. 1차 조-청 전쟁(정묘호란)때 한차례 곤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로부터 9년 후, 2차 조-청 전쟁(병자호란)을 맞이하여 그 허약함을 또 한차례 여실히 드러냈다. 얼마전 온 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삼전도비가 전쟁의 결과물이다. 치욕스런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식. 과연 전장터였던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이미『칼의 노래』와『현의 노래』에서 세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인물과 심리묘사를 보여줬던 김훈은 이 책에서도 그의 장기를 재인식시켜주고 있다. 주인장이『칼의 노래』에서 보여줬던 이순신의 섬세한 내면묘사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내면묘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제는 이순신 하나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이라는 철벽을 사이에 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멍청이 임금 인조(하지만 소설 속에서 인조는 상당히 줏대있는, 그러면서도 왕의 위엄을 잃지 않는 임금으로 나온다)와 영의정 김류, 예조판서 김상헌, 최명길과 이시백,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마치 그 당시를 재현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까지의 조선으로 안내하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현실과 명분의 대립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독자들을 안내할 뿐, 이렇다 저렇다 결론짓지 않고 있다. 실천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조선이 버리지 말아야 명에 대한 의리, 오랑캐에 대한 비복종.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집스러움에 고통받는 것은 남한산성 내의 백성들과 조선팔도의 백성들이리라. 김상헌이 성밖으로 내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던 서날쇠가 대표적이리라. 조정은 해준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무던히 일어나 임금과 사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럼에도 일국의 예판이라는 자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치사하고 비열한 고관대작의 오만함이 꼴배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치『조선왕조실록』을 꺼내 한장 한장 넘기는 듯한 기분이다. 성안에 갇혀있는 동안 저자는 성 안팎을 넘나들며 너무나도 자세히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소설『미실』을 보면서『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을 했었는데 주인장의 그런 평을 빗대어 그럼 이 책은 어떻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해 나열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해 겨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거듭 말했는지도 모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 하고, 이뤄지지 않아서는 안 될 결과가 일어났다. 그 해 임금이 그 곳에 있던 시기에 말이다.『미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여운'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어떤 답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 계속 사색하게 한다. 그래서 주인장은 김훈의 책을 즐겨 읽는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내내 작가의 관점은 백성들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흔히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대청항쟁에 대해 이야기할때 나오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도 이 책에서는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고통받고 가장 큰 희생을 치루고 가장 노력했던 민초들임을 저자는 은연 중 내비치는 것 같다. 임금이 먹을 수라상에 올릴 반찬이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성안에서 병사와 관리와 임금을 보필할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벤뎅이젓갈 하나에 성안이 난리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꼴에 문명국의 임금으로서 비록 적군이지만 오랑캐 장수에게 내린다고 새해에 음식을 보냈다가 수치스럽게 퇴짜맞는 장면에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인가. 너라는 인간은! 인조~오!! 분노가 치밀고 주먹이 쥐어질 정도다. 그 상황에서 주전이나 주화니 떠들어대는 한심한 작태가 우습다. 저자는 어느새 주인장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삼배구고두.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란다. 한국사에 이처럼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자, 또 있었을까. 부끄러운 역사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다시는 되풀이되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주인장은 저자가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하고 그칠 수가 없었다. 저자도 한국인인데...분노하고 치가 떨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그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필치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나 개인적인 감정은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그려내는 저자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더 책이 전하는 메세지가 주인장에게 강하게 전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하다...

한번쯤 꼭 읽어보길 권하는 책이고 싶다. 금년 하반기 들어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아마 이 책을 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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