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우혜령 옮김 / 뜨인돌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제목이 눈에 확 띄어서 바로 구입한 책이다. 바바리안(Babarians), 제목만 보더라도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종족들에 대해서 쓴 책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을 것이다. 책의 서문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 책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유럽판이라는 것이다. 흔히 북방사 혹은 변방사로 불리며 소외받고 중국사에 종속되어 취급받던 역사, 유목민족사가 독립적인 주제를 가지고 거론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으며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영국 왕립지리연구학회의 특별연구원으로서 '석기시대의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글을 집필해 큰 명성을 얻은 저자는 유럽 역사에서 잊혀져 왔던 변방사를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다겼다. 이 책의 소제목은 '야만인 혹은 정복자'인데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켈트족, 게르만족, 노르만족, 훈족 등등 유럽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유일한 문명인으로 취굽받던 로마족 이외의 모든 민족들에 대해서 이 책은 지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으며, 그 평가들은 하나같이 정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바~바' 하고 소리치는 외부인들을 두고 쓰기 시작한 단어 '바바리안'.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야만족이 아니었다. 씻지도 않는 더러운 곳에서 지저분하게 살아가는, 동물의 가죽 따위로 몸 중요 부위만 대강 가린 원시인들, 바바리안의 이미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중화인들이 추운 겨울, 값비싼 모피로 몸을 두른 유목민들을 두고 냄새가 나며 동물과도 같은 삶을 영위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추위를 그보다 효과적으로 막을만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 했다. 또한 우수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세력을 넓히던 치우천왕을 두고 동두철액의 괴물로 표현한 것만 봐도 선진 문물을 지닌 강력한 존재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그런 세태를 비판하고 있따. 과연 그들이 야만인이었을까? 물론 대답은 'No'다. 그들은 당당한 정복자였다. 아니, 대단히 문명화된 정복자였다.

인구 증가, 기후 변화, 세력 확장, 상업 활동 등 이유야 어쨌든 변방에 머무르던 그들은 중심 지대로 모여들었다. 지중해와 중부 유럽으로 말이다. 상당히 조직화된 정예군을 이끌고 탐욕스런 눈길로 유럽의 지배자 로마의 세력권 내로 넘어온 그들은 곧 정복자가 되기 이전, 동조자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탐욕과 야욕의 영토인 중원 - 흔히 말하는 황하 일대 - 으로 넘어온 이민족들은 곧 그 중원 문명에 동화되어 버렸다. 흔히 말하는 정복 5왕조인 요, 금, 서하, 원, 청 왕조들은 하나같이 중원으로 넘어와 지배자, 정복자로서의 위엄을 지켰지만 결국은 중화 문명에 빠져 그들 스스로의 모습을 버리고 말았다. 북위의 건국자인 도무제가 선비족의 변질된 모습을 보고 개탄한 사료만 보더라도 그런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란, 서하 모두 자기 민족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독특한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내려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용두사미에 불과해 얼마가지 못 했다. 정복 왕조는 하나같이 소박하고 강건한 무사의 기백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삶을 중화의 품에 맡겨버렸다. 그나마 청나라가 그런 문화를 양위할 수 있어서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바리안이라고 불리던 이 야만인들은 달랐다. 목조 기술, 직조술, 금속공예술 등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명을 그대로 유지한채 - 아니, 오히려 더 발전시킨채 - 유럽 중심부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멜팅 포트(Melting Pot - 인종이나 문화 등 여러 다른 요소가 융합, 동화되어 있는 장소)'처럼 기존 문명국인 로마 속에서 사라질까봐 두려웠지만 그들 고유의 문화가 그들 족속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해왔던 방식을 결코 버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 중화 문명이 로마 문명에 비해 워낙 뛰어났고 화려했기에 동방 유목민족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에 파묻혀 버렸으며, 서방 유목민족은 헤어나올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동방 유목민은 서방 유목민에 비해 자존심이 약했거나 문명적 힘이 약했던 것일까? 주인장은 양측 다 환경의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서방 유목민족들, 흔히 게르만족으로 통칭되는 - 동방 유목민족들이 흔히 흉노나 몽골로 통칭되었듯 - 야만족들은 강력한 돌파력으로 유럽 각국에 침투해 로마 붕괴후 그들만의 왕국을 세워 나갔다. 저자는 그들이 보여줬던 뛰어난 문명과 각종 역사의 발자취가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오늘날의 유럽은 기존에 주류로 취급되던 그리스-로마 문명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비주류였던 야만족들의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분법적 사고와 로마로부터 비롯된 비주류 세력에 대한 편견이 커다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뛰어난 문명과 더불어 논하는 것이 바로 종교, 즉 기독교였다. 종교라는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야만족이라고 불리는 그들이 주류로서 재등장해 화려하게 변신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저기 북쪽의 오지에서 나타난 노르만족, 바이킹족의 해상 활동, 멀리 아랍 세계에까지 뻗쳤던 그들의 저력은 오늘날 유럽을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재인식 말이다.

특히 이 종교라는 부분에 있어서 동-서양의 큰 차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종교라고 불릴만한 정신적 제재가 없었던 만큼, 동방에서는 유목민과 중원인들 간에 이어질 수 있는 끈이 그만큼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본다. 정신적인 면에 있어 야만족들이 적절히 중화(中化)할만한 부분이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물질적인 면이 방대할 정도로 물량 공세를 취함으로서 야만족들은 그 공세를 당해내지 못 했던 것은 아닐까? 선비족들이나 흉노족이 적석목곽분과 각종 황금 장신구들을 남겼지만 그것들을 중원에서도 볼 수 있는가? 그들은 만리장성을 넘는 순간, 어떠한 문화적 매개체나 방어막 없이 거대한 문화 충격을 접하면서 그들만의 고유 문화를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서양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어 항상 그들 문명 최후의 보루로 작용했다. 천년제국 로마를 버티게 한 것도 교황과 기독교요,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을 문명화시켜 그들의 수호자로 삼은 것도 교황과 기독교요, 가공할만한 잔인함과 무서움을 지닌 훈족의 서진을 저지한 것도 결국은 교황과 기독교였다. 그 기독교라는 뿌리는 게르만을 비롯한 야만족의 문화라는 양념까지 곁들여 오늘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유럽, 프랑스, 독일, 영국인 것이다.

불교나 도교가 동방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 했다. 교황이라고 하는 국가나 정치를 초월한 일인지배적인 종교로 거듭할 수 없었기에 - 동방에서는 밀교적 성격을 띈 티벳 불교가 유일하다 - 불교 역시 중화 문명의 한 축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훗날 선비족이라고 불리는 북방 민족은 경주 일대에 정착해 그들만의 화려한 북방 문화를 퍼뜨린다. 그리고 100년이라는 접촉기-과도기를 거쳐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오늘날의 유럽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잘못된 인식을 파헤치기 위해 20세기에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럽 각지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접한 칼과 선박, 화려한 무덤 등을 통해 이들의 수준 높은 사회상과 문화를 하나씩 추적했다. 가령 해적과 약탈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북게르만족 - 바이킹족 - 은 섬세한 기술을 발달시켜 유럽 항해사를 이끌어 나갔고, 로마인들이 처음 접촉할 때부터 무시한 켈트족의 언어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웨일스어와 아일랜드어 등의 뿌리가 됐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바바리안들도 로마 못지않은 사회를 건설하고 문화유산을 전해준 것이 확인되기에 서양사에서 암흑기로 기록된 야만 사회도 오늘날의 역사를 만드는 토양이 됐다고 평가한다. 일방적 시각에 의해서 쓰인 왜곡된 역사는 다름 아닌 강자의 논리라는 주장이다. 역사는 흑백논리로 기록돼서는 안 되며 중립을 지켜야 하는 대상이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슴에 와닿는다. 문명화된 로마인은 눈과 같이 순결한 것으로 묘사하고, 바바리안은 암흑과 무지의 상징으로 표현하려는 유혹을 극복하는 계기를 발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진가는 발휘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한국사의 범주를 너무 좁게 보고 있다. 예전에 혹자는 선비족의 역사도 우리의 것으로 같이 봐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여진족의 것도, 만주족의 것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유럽인들은 변방 게르만족들은 물론, 이슬람 문명도 유럽 문명의 틀에 녹이고 있다. 더 이상 바이킹족, 노르만족, 고트족, 반달족 등은 비유럽 족속이 아니다. 이미 고대 유럽 민족의 하나로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아래 변방사를 본격적으로, 노골적으로 강탈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우리의 것을 말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야 말할 것도 없는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유목민족사는 그들만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 그것을 두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제국적 요소를 測?왕조들이었다.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국가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한국이다. 그런 그들에 대해서 주체있게 서술할 책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가 없는 그런 책 말이다. 우리에게 흉노, 거란, 선비, 여진족 등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야만족? 중국 변방족? 정복자? 아니면 우리들과 피가 섞인 선조? 한번 생각해보자. 이 책은 주인장에게 다시 한번 뭔가를 깨우치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런 책이 한권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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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문명기행 1
혜초 지음, 정수일 역주 / 학고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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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위 시는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혜초의 오언시이다.

'왕오천축국전'과 '혜초'.

국사책을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에 대단히 익숙할 것이다. 신라인 혜초가 인도를 돌아보고 온 여행기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기로 끝일까?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 책은 과연 어떤 책일까? 솔직히 말해 주인장이 이 책을 실제로 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위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이 무슨 창피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주인장이 그간 신라사에 대해, 인도와 중앙아시아사에 대해 심각하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자위적인 변명을 가볍게 하고 넘어갈까 한다.

솔직히 이 책을 보게 된 목적은 당대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보려고 한 점도 있지만, 역사에 자세히 남아있지 않은 통일된 왕조가 없던 남인도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주인장은 남인도에 백제의 영토 혹은 전략적 거점, 상업 전진 기지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다 본 지금,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남인도 뿐만 아니라 중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그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이 단순히 해석에 치중한 역사서가 아니라 당대 천축국 일대를 조명한 사서라는 것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 정수일의 폭넓은 지식, 광범위한 범위에서의 주석 활용 등으로 이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혜초가 지나간 여정은 물론, 그 시절의 시대사가 떠오를 정도다. 또 하나, 이 책이 완본이 아니라 절략본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실제 남천축에서부터 당의 안서도호부까지의 일정은 남아있지만 그 전과 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귀중한 문화 유산이 타지에 남아, 또 외국에 흘러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후손들은 그 사실들을 모른다는 것. 정작 일본을 비롯한 외국 학자들이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다는 사실들이 주인장으로 하여금 선조들에게 한없이 죄송하게 할 따름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이국인 천축국과 중동의 여러 나라와 문물에 대해 자세한 기록들을 싣고 있다. 인도 하면 불교가 흔히 떠오르겠지만 8세기에는 이미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크게 성행하던 때였다. 그런 시기, 당대 유행처럼 번지던 해외 유학의 물결 속에서 혜초는 천축국까지 흘러간 것이다. 불법을 구하러 불교의 발생지로 찾아간 이 신라 승려가 아니였더라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8세기 인도와 중동 시대사에 대해 알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주인장은 혜초라는 인물 그 자체에 호기심이 가기 시작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기면서 그는 고국을 떠나 이억만리 타향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오언(五言)의 시를 남기기도 한다 - 위에 실었음 - 실제 그 시로 인해 이 책의 저자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한몫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생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드문게 사실이다. 주인장은 궁금했다. 분명 삼국 시대때부터 당으로 학문을 구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은 많았으며 남북국 시대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의 자제들이 학문을 구하기 위해서 입당(入唐)했었다. 그럼 그 수많은 해동의 유학생 중에서 유독 혜초라고 하는 승려만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희대의 기록을 남겼을까? 당대 삼국의 승려들 중에는 불심이 깊고 높은 덕을 지녀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이 많았으며 그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르긴 모르되, 분명 당시 신라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을 남긴 기록은 더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기행문 형식의 사료는 많지 않은데 이를 통해 역사와 사회, 경제등은 물론이요, 각지의 지리적 설명도 곁들어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정보를 남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과 토번, 이슬람 세력들의 첨예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던 서역 일대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 차원을 넘어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오늘날도 이처럼 자세한 여행기를 남기기 힘들진대, 머나먼 옛날 홀홀단신으로 수만리 타향을 거치면서 이런 기록을 남긴 혜초에게 정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기서 정수일은 책 앞부분에 미리 왕오천축국전의 발견 경위와 그동안의 연구사는 물론,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가로 42㎝, 세로 28.5㎝의 종이 9장을 이어붙인 것으로 총 227행에 5,893자가 필사돼 있는 현존 두루마리는 원래 왕오천축국전이 상·중·하 3권으로 돼 있었다는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와 비교해 볼 때 필사과정에서 3권으로 된 원본을 요약한 절략본(節略本) - 축약본 - 이라는 것이 역주자의 판단이다. 아울러 중국인이 아닌 한문화권의 신라인이었기에 언어 표현이나 문법 구조가 미숙해 펠리오로부터 '법현의 불국기'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 는 평가를 받았던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저자의 변론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이 절략본에다 필사본이기는 하지만 8세기 후반 황마지(黃麻紙)에 쓰인 그대로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책이란 점에 역주자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행기에는 실제 여행한 곳과 직접 답사하지 않고 전문(傳聞)한 곳에 대한 기록이 섞여 있기 마련인데 역주자는 원문의 표현과 내용 분석을 통해 당시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해 남해 바닷길로 동천축에 이르러 육로로 인도와 서역을 돌아본 뒤 파미르고원과 카슈가르, 쿠차 등을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르는 여정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특히 혜초가 서역 어디까지 여행했느냐는 것이 그동안의 논쟁거리였는데 역주자는 내용 분석을 통해 페르시아와 대식 - 아랍 - 까지 실제 이르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혜초가 방문한 대식국의 도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 호라산 총독부의 소재지인 니샤푸르 - 마슈하드 - 였다는 것이 역주자의 추정이다.

이처럼 치밀하고 자세한 주석으로 1,200여년전 여행기를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살려낸 정수일의 노고와 함께 고급 천으로 제본한 장정과 편집도 돋보인다. 디지털 복원 전문가인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작업한 3차원 디지털 혜초 복원도 역시 눈길을 끄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혜초의 여행기가 여러가지 복원 작업을 거쳐 입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셈이다.

혜초는 이 여행기를 쓰면서 지고지순한 종교인 불법을 알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을 것이며, 불도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그것도 불교의 발생지에서 불교가 이미 쇠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그 문화적, 정신적 공백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혜초의 심정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런 혜초의 1,200여년 전 역사적 공백기를 재현해낸 정수일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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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5-03-2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보천리]를 읽고, 지은이의 열정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 님의 글을 보니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麗輝 2005-03-2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 ^^ 제 서평을 보고 책이 꼭 읽고 싶어졌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충고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좋은 서평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marine 2005-09-1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보천리 읽으면서 학자로서의 열정에 참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이 책 읽어 봐야겠네요 좋은 리뷰도 더불어 감사드립니다 ^^

麗輝 2005-10-0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오히려 제 서평을 보시고 이 책이 보고 싶으시다니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1
김진명 지음 / 해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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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즈오의 나라.
하늘이여 땅이여.
한반도.
코리아 닷컴.
바이코리아 등등.

늘 느끼는 거지만 김진명의 책은 사실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소설이다. 그렇지만 마치 그 소설 속의 내용이 실재한다고 느끼게 할만큼 대단한 흡입력을 자랑으로 여긴다. 김진명의 소설은 대부분 독파했는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줄거리, 흥미있는 소재 - 일반인이 쉽게 지나쳐버리는 -, 무겁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메세지를 강력히 전달하는 필력 등등 모든 부분에서 하나 나무랄데 없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베스트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과거 민비라고 불렸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된 소설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역사 소설은 아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심금에 경종을 울리게 할만한 그런 책이다.

주인장 친구 중에 책을 별로 안 보는 사람이 1명 있다. - 생각해보니 친구 중에 책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 그 친구가 군대에 있으면서 이 책을 본 것 같다. 하루는 편지가 왔는데 정말 재밌다고, 이 사람은 글을 정말 잘 쓴다고, 어떻게 이렇게 잘 쓸수가 있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2명의 친구는 가즈오의 나라를 보면서 주인장한테 김진명에 대해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책을 주인장은 입대하기 전에 봤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두고 역사 까페에서 한창 떠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사건의 중심, 논쟁의 쟁점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두고 일본놈들이 과연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친구의 편지를 계기로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한번 더 읽게 됐다.

김진명은 쓰노다 후사코 여사가 쓴 '민비암살'이라는 책에서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라는 한줄의 기록을 통해 이 책을 써 내려갔다. 그것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간 - 이미 죽은 자를 범함 - 을 한뒤 불태웠다는 것이다. 충격. 아무리 여인이라지만, 엄연히 일국의 국모인 자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 했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글쎄, 몇년 전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주인장은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시신을 불태웠다는 자체가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종과 순종을 살해하고 -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명성황후까지...향후 전범 국가로서 여러가지 만행을 보여준 일본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 문건이 오죽 많겠는가? 심지어 우리나라의 역사서를 강탈해간 것만 해도 수십만권이라고 하는데 다른 중요 문서야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신을 태웠다는 소리는 뭔가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는 소리이며, 그 흔적이 어떤 것인지는 조금만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김인후라는 사람과 임선규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둘은 일본 황실의 황태자비를 납치하는 대담한 범행을 감행한다. 주인장이 이 책을 볼때면 꼭 김인후란 사람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김인후, 임선규는 또한 김진명이 자신의 마음을 이 둘을 통해 나란히 투영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한쪽은 좀더 극단적으로, 다른 한쪽은 좀더 부드러울 뿐, 두 사람이 한국사의 왜곡을 보고 땅을 치며 한탄했을 그 심정이 절실히 느껴진다. 김진명은 이 책이 일본에서 발간돼 전 일본인이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고 했다. 황태자비가 소설 안에서 이 둘에게 연민을 느끼고 마지막에는 한국의 편에 서서 그들 스스로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도 다 민족성 탓인가? 임선규는 결국 황태자비를 죽여 명성황후가 시해된 것처럼 복수하지 못 했다. 김인후는 그런 그녀를 죽이지 못 하자 결국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으로 민족에게 사죄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 글을 보는 당신, 이 책을 봤던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냄비 정신? 잠깐동안 울분하고 마는 그런 생각은 필요치 않다. 당신이 진정 한국인이라면 느끼는게 있어야만 마땅하다. 주인장이 김진명의 책들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들이 주인장으로 하여금,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 많구나~하는 것을 느끼게끔 하는 일종의 동질성을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또 이런 생각을 하겠지. 그게 좋다. 주인장도 언젠가는 책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주인장의 소설 집필 모델은 김진명씨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숨가쁘게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그걸 아는가? 말로만 외치고 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가끔 주인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이스라엘과 그들을 지지하는 최강대국 미국, 전세계 민주주의 서방 국가와도 거침없이 대적하는 그들, 그런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 중 과연 몇 %나 우리 한국인이 지니고 있을까? 한번 자문해보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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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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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이 참 눈에 들어오는 소설이었다. 후임병이 보고 있던 책이었는데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더니 역사 소설이란다. 글쎄~왠만한 책은 제목만 보고는 그 내용이 뭔지 잘 모르지만 역사 소설은 달라서 제목만 보고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그러지가 않았으니 당연히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책을 보기 전에 무슨 내용인지 한번 ?어보고 볼만한 책이면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러질 못 해서 볼까 말까 고민을 좀 했었다. 하지만 역사 소설이라고 하질 않는가. 역사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주인장이기에 후임병이 보는걸 거의 뺏다시피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임병이 책을 주면서 하는 말이 좀 의외였다. 중남미 멕시코 일대로 이주한 이주민의 역사라는 것이다. 글쎄, 호기심 반, 기대 반에 보기 시작한 책을 다 덮고 난 후 내가 느낀 감정은 정말 뭐랄까? 가슴 깊이 뭉클거리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해외 이주가 한창이던 때, 하와이 이주민들이 이미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 러시아와 일본이 국운을 걸고 대회전을 버리던 시기인 1905년 4월, 영국 기선 일포드호는 조선인 1,033명을 싣고 멕시코로 떠난다. 거기서 그들은 멕시코 전역에 널려있는 에네켄 - 속칭 애니깽 - 농장의 노동자로 4년간의 계약을 맺고 팔린 것이다. 외교관 1명 없고, 전혀 외교 관계도 맺지 않았던 조선으로서는 불모의 나라 멕시코. 그 곳으로 떠난 1,033명의 조선인은 전혀 낯선 문명, 처음 보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곧 그 곳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이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마치 단막극처럼 보여준다.

- 소설 '검은꽃'은 역사적 사실을 다큐멘터리 필름이 아닌 숏컷 스냅 사진처럼 처리하면서 그 위로 사람들의 생을 판화처럼 떠오르게 서술해 나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쩐지 빈 먼지 바람이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간 듯 하다 -

소설가 황석영의 평처럼 이 책은 숏컷의 스냅 사진이다. 마치 제 3자가, 정말 철저하게 제 3자가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글쎄, 대한제국 건국이 천명되고 그들은 조국에서 발행한 여권을 지닌채 금의환향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있다. 이처럼 조국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의 삶이 책 안에서 정말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들 조선인들은 비참한 삶을 살다고 스스로 자존의 길을 찾게 됐고,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로 뭉쳐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도 잠시,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반란에 그들이 연루되면서 그들은 정부군과 반군과의 싸움에 끼여 개죽음을 당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 박광수 - 전직 신부 - 가 모든 것을 체념한채 정부군에 의해 죽고 그의 품에서는 정부군이 전혀 읽을 수 없는, 대한제국의 관인이 찍힌 너덜너덜해진 여권만이 남아있었다. 그 가슴 뭉클한 고향에로의 귀환, 어머니의 품으로, 대지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사라져간 것이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생활, 한인회의 설립, 점차 멕시코 생활에 적응하는 그들은 점점 자아의 주체로서 생활하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채찍으로 때리며 부리는 전혀 상상도 못할 그런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하나로 뭉쳐 자립해나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이상 처음에 멕시코에 왔을 때처럼, 알아보지도 못하는 계약서에 몸이 묶인 미약한 채무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일을 했고, 돈을 벌어 계약서에 명시된채로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농장주로부터 회수했다. 그리고는 숭무 학교라는 군관 학교를 세우고 조선인들로 이뤄진 조직을 만들어 하나로 뭉쳤으며 조국(祖國),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조국 - 일제에 강제합병당하고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 을 위해 노력한다.

주인장은 여기에서 두 종류 세상으로 양분된 모습을 보았다. 그 두 종류의 세상이란 어느 한쪽이 잘 됐거나 선이며, 다른 한쪽이 못 됐거나 악인 그런 두 종류의 세상이 아니다. 주인장이 더욱 이 책이, 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 마냥, 소설은 그렇게 흘러간다. 대화체가 없이 소설이흘러가는 것도 역시 이런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딱딱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더욱더 조선인들의 삶을 애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러가지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한 그들의 삶을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리라.

대한제국 수립이 선포되고 왕은 황제로, 왕실은 황실로 격상됐지만 제국의 운명은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진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기어코 멸망하기에 이른다. 그즈음 하와이와 멕시코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된다. 하와이의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은 그나마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향으로 어느정도 풍족한 삶을 영위하지만 멕시코에 간 조선인들은 채찍으로 맞는 등 비인간적인 처사에 하나둘씩 쓰러진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자본주의화를 실행하려고 하는 독재자 국가 멕시코의 두 시대, 두 문명의 환경 속에 떨어진 같은 조선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또한 멕시코에 도착한 조선인들도 각각 삶의 방향이 다르다. 통역관의 신분으로 처음부터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던 권용준, 황실이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이종도, 전자는 자본주의 세계에 걸맞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부와 지위를 상승시킨다. 하지만 이하응 - 대원군 - 만 아니었어도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다고 자괴하는 이종도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채 새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한다. 결국 황족의 집안은 분열되어 그 아들은 권용준에게 통역일을 배우며 성장하고 딸은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다가 결국은 통역관의 첩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부인 역시 농장의 노동자 감독관과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두 사람은 곧 근대 국가로 넘어가는 대한제국의 음과 양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랄 수 있는 김이정과 조장윤 무리들, 전자는 보부상의 잔심부름꾼으로 지내다가 멕시코로 떠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이정도의 딸인 이연수와 멕시코로 떠나는 배 안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왔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고 만다. 어머니에게서 한번 떠나야 했고 조국에서 떠나야 했으며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떠나야만 했던 그는 멕시코 내전에 이어 과테말라 내전에도 휩싸인다. 거기서 그는 수십명 무리들을 이끌고 밀림 오지에 '신대한(新大韓)'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그들이 아는 세상은 대한제국이 전부였기에 근대를 향한 그들의 몸부림도 결국은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대한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결국은 과테말라 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뜨거운 피와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남자,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 마치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문명을 접하고 자아와 정체성을 상실한 당시 조선인들을 대변해는 듯 하다.

그에 비해 조장윤과 그 무리들, 과거 러시아식 훈련을 받던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들이었던 그들은 멕시코에 설립된 한인회의 지도자로 여생을 편안히 보낸다. 농장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도, 한인회를 설립했을 때도, 과테말라 반군에게 군사 지원을 해주기 위해 수십명을 데리고 밀림으로 떠날 때에도, 그들은 항상 앞장서서 일을 지휘했지만 위급할때는 가장 먼저 사라졌었다. 대단한 협상가, 지도자처럼 굴었지만 결국은 아주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 눈에는 그런 그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주인장이 보기엔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해버린 인간들이었다.

책은 이렇게 이원화된 시각으로 당시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역사 소설? 글쎄, 그렇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인장은 이것이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라 아주 잘 쓰여진, 감동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해두고 싶다. 이런 류의 역사 소설은 처음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감정적 통찰을 이 책은 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기록 사진첩을 보듯이 이 책은 멕시코 이주민들의 삶을 그만큼 역동적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책의 결말은 더욱 그런 모습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 나오는 권용준, 이종도, 이진우 - 이종도의 아들로 권용준에게 통역일을 배운 사람 - , 박정훈 -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훗날 이연수와 재혼함 - 등은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근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 하고 스러져간다. 마치 IMF 시대 속의 기업들처럼 힘없이 말이다. 주인공이 이 책에는 없다. 모든 등장 인물이 주인공이며 하나하나의 사건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느것 하나 없다. 그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멕시코 이주민에 대해 이렇게 책으로 써서 알려주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현지를 답사하는 등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신 작가 김영하님께도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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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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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이 책은 신문에서 처음 접했다. 신간 도서를 매주 정리하는데 그때 봤던 책이었다. 그 뒤에 군대 선임병 한명이 구입해 보던 것을 빌려봤는데 책을 빌려주며 하는 말이 '재미가 별로 없다. 그래도 볼래?' 였었다. 중간에 내용 전개가 억지스러운 면이 많고, 억지로 짜맞춘듯한 내용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글쎄, 주인장은 일단 직접 보지 않았으니깐, 하면서 책을 펼쳤다. 이유는 애덤 스미스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이 소설을 통해서 뭔가 새롭다고 할만한 지식을 얻어보기 위해서였다. 또한 경제 소설이라고 할만한 것도 처음이었고, 그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책을 보면 볼수록 주인장이 느꼈던 것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세간에서 이 책에 대해서 떠드는걸까? 하는 것이었다. 신문에서 이 책에 대해 말하길,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장은 그게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첫장을 열면서부터 이 책은 주인장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경제 소설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구성으로 이뤄진 것일까? 하는 주인장의 의문점에 대해서 이 책은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애덤 스미스, 즉 18세기에 살았던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대학자의 혼(魂)이 21세기로 넘어와 어떤 차량 정비사의 몸에 빙의된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물론 왜 하필, 경제학과 전혀 상관없는 차량 정비사의 몸에 빙의되었을까 하는 점, 대체 자신이 현재로 넘어와 자신의 업적을 현대인이 잘못 이해하는데서 오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점, 자신의 과거 친구들 - 루소, 볼테르, 흉 등 당대의 지식인들 - 이 다 현대인에게 빙의되어 한자리에 모여 포커를 치고 예전처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점 등이 물론 내용 전개상에서 어설픈 점은 있다.

애덤 스미스의 혼이 해럴드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 동안 해럴드는 심각한 체력 소모를 겪으면서 힘들어한다. 하지만 후에는 아예 애덤 스미스가 해럴드의 몸을 완전히 지배해 마치 자신의 몸인 마냥 행동하며 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소재는 참신할지 몰라도 내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미흡한 면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 전개의 미흡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충분히 그런 약점을 보완할만큼 흥미롭고, 또 재미있다. 더구나 음모를 꾸미고 있는 한 단체에서 이 해럴드 몸 속에 있는 애덤 스미스를 노리고 있다는 설정 또한 흥미로웠다. 즉, 이 책은 단순한 경제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모험 소설의 요소도 적절하게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책은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일단,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으로 너무나 유명한 애덤 스미스의 책 중에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라는 책이 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인장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경제 활동,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철저한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주장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라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를 했던 그가, 실상은 그보다 덕과 양심이라는 부분에 대해 더 주장하고 중요시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단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에 사람들은 충분히 신선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 조나단 B. 와이트(Jonathan B. Wight)는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밴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댄포스(Danforth) 특별연구원을 역임했다. 리치먼드 대학의 로빈스 경영 대학원에서 경제학 및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같은 대학에서 우수 교육자상과 우수 봉사가상을 수상했으며 논문 '애덤 스미스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로 2001년 팍스톤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의 논문에 이어 이 책을 쓰면서 애덤 스미스 바로보기에 열성을 다 했다. 풍부한 자료들을 인용했으며 실제 소설은 역사에 근접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사실감에 읽는 사람들은 더욱더 빠져들고 말이다.

특히나 주인공인 경제학자 번스는 애덤 스미스의 혼이 씌인 해럴드와 대화를 하면서 경제학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있게 성찰하기 시작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오늘날 애덤 스미스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국부론'이다. 그러나 스미스 자신은 사람들에게 잘 읽히지 않는 '도덕감정론'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있다. '도덕감정론'은 인간이 행복과 덕성의 근원을 탐구하는 고전으로서 시장에도 덕성은 존재한다는 기본 전제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신이 주고 난 다음에 주욱 살면서 인간 관계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다. 시장의 기본요소인 도덕 구조가 결여된 세상, 철저한 경쟁을 통한 시장 경제 체제를 숭배하는,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자본주의 세상! 즉,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말이다.

그처럼 이 소설은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소설 속 애덤 스미스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비판이 아닌, 비난이다. 그가 꿈꿨던 자유 시장 경제 체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 그런 것들이 애덤 스미스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무절제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만약 이 땅 위에 다시 태어난다면, 전 세계가 자신의 이론을 받들어 자본주의 체제가 이 땅위에 뿌리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겠는가? 아니면 경악하겠는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상상력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을 펼쳤기에 소설이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원래 동양에서의 상업 활동은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 장사로 인식된지 오래였다. 사람 장사라고 해서 사람을 사고파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아닌, 사람과 인간 관계를 남기는 장사였다는 소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이는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상도(商道)를 중시하는 것이 바로 동양에서의 상거래의 기본 도리였었다. 그에 반해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서구주의 경제학자들은 철저히 원리원칙에 입각해 계산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 상업 활동을 전개했었다. 동양에는 없는 서양의 길드나 조합같은 조직의 개념도 알고보면 독점적 상업활동을 위한 이기적인 집단의 발로나 마찬가지다. 즉, 서양의 합리주의와 동양의 덕리주의의 대립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미국에서는 대학 경제학 수업의 교과서로도 쓰일 정도로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킬지는 몰라도 동양인이나, 한국에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동-서양의 이질적인 감정적인 면을 떠나서라도 이 책의 내용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경제사에 대한 기존 개념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늘 느끼지만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새롭고도 참신한 생각은 늘 그걸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주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분명 이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을 충분히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돈과 이득보다 사랑과 애정, 올바른 경영 윤리가 중요시되는 세상,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경제 사회는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인장이 경제사나 기타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접해씨에 2번을 읽어야만 했었다. 내용을 읽는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내용안에 나오는 경제학자의 의견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주인장에게는 이 책이 어떤 시금석과도 같은 존재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시장 경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피부에 와닿게 했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는 중요하고도 재밌는 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인장이 다는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서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에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 나오는 부분 중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이념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론을 펼치는 부분을 한번 인용하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애덤 스미스가 오늘날의 자유 시장 경제 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통탄할지가 눈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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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중요한 듯 힘주어 말했다. 엄습해 오는 피로가 오히려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았다. "시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인간 본성이야. 그것이 자비심 및 정의와 균형을 이뤄야만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무시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탐욕만이 넘처난다면 사람들이 자유시장이라는 체제를 변함없이 지지할까? 비인간적인 논리와 합리성을. 옳지 못한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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