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참 눈에 들어오는 소설이었다. 후임병이 보고 있던 책이었는데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더니 역사 소설이란다. 글쎄~왠만한 책은 제목만 보고는 그 내용이 뭔지 잘 모르지만 역사 소설은 달라서 제목만 보고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그러지가 않았으니 당연히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책을 보기 전에 무슨 내용인지 한번 ?어보고 볼만한 책이면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러질 못 해서 볼까 말까 고민을 좀 했었다. 하지만 역사 소설이라고 하질 않는가. 역사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주인장이기에 후임병이 보는걸 거의 뺏다시피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임병이 책을 주면서 하는 말이 좀 의외였다. 중남미 멕시코 일대로 이주한 이주민의 역사라는 것이다. 글쎄, 호기심 반, 기대 반에 보기 시작한 책을 다 덮고 난 후 내가 느낀 감정은 정말 뭐랄까? 가슴 깊이 뭉클거리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해외 이주가 한창이던 때, 하와이 이주민들이 이미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 러시아와 일본이 국운을 걸고 대회전을 버리던 시기인 1905년 4월, 영국 기선 일포드호는 조선인 1,033명을 싣고 멕시코로 떠난다. 거기서 그들은 멕시코 전역에 널려있는 에네켄 - 속칭 애니깽 - 농장의 노동자로 4년간의 계약을 맺고 팔린 것이다. 외교관 1명 없고, 전혀 외교 관계도 맺지 않았던 조선으로서는 불모의 나라 멕시코. 그 곳으로 떠난 1,033명의 조선인은 전혀 낯선 문명, 처음 보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곧 그 곳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이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마치 단막극처럼 보여준다.

- 소설 '검은꽃'은 역사적 사실을 다큐멘터리 필름이 아닌 숏컷 스냅 사진처럼 처리하면서 그 위로 사람들의 생을 판화처럼 떠오르게 서술해 나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쩐지 빈 먼지 바람이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간 듯 하다 -

소설가 황석영의 평처럼 이 책은 숏컷의 스냅 사진이다. 마치 제 3자가, 정말 철저하게 제 3자가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글쎄, 대한제국 건국이 천명되고 그들은 조국에서 발행한 여권을 지닌채 금의환향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있다. 이처럼 조국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의 삶이 책 안에서 정말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들 조선인들은 비참한 삶을 살다고 스스로 자존의 길을 찾게 됐고,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로 뭉쳐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도 잠시,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반란에 그들이 연루되면서 그들은 정부군과 반군과의 싸움에 끼여 개죽음을 당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 박광수 - 전직 신부 - 가 모든 것을 체념한채 정부군에 의해 죽고 그의 품에서는 정부군이 전혀 읽을 수 없는, 대한제국의 관인이 찍힌 너덜너덜해진 여권만이 남아있었다. 그 가슴 뭉클한 고향에로의 귀환, 어머니의 품으로, 대지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사라져간 것이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생활, 한인회의 설립, 점차 멕시코 생활에 적응하는 그들은 점점 자아의 주체로서 생활하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사람을 동물처럼 채찍으로 때리며 부리는 전혀 상상도 못할 그런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하나로 뭉쳐 자립해나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이상 처음에 멕시코에 왔을 때처럼, 알아보지도 못하는 계약서에 몸이 묶인 미약한 채무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일을 했고, 돈을 벌어 계약서에 명시된채로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농장주로부터 회수했다. 그리고는 숭무 학교라는 군관 학교를 세우고 조선인들로 이뤄진 조직을 만들어 하나로 뭉쳤으며 조국(祖國),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조국 - 일제에 강제합병당하고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 을 위해 노력한다.

주인장은 여기에서 두 종류 세상으로 양분된 모습을 보았다. 그 두 종류의 세상이란 어느 한쪽이 잘 됐거나 선이며, 다른 한쪽이 못 됐거나 악인 그런 두 종류의 세상이 아니다. 주인장이 더욱 이 책이, 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 마냥, 소설은 그렇게 흘러간다. 대화체가 없이 소설이흘러가는 것도 역시 이런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딱딱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더욱더 조선인들의 삶을 애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러가지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한 그들의 삶을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리라.

대한제국 수립이 선포되고 왕은 황제로, 왕실은 황실로 격상됐지만 제국의 운명은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진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기어코 멸망하기에 이른다. 그즈음 하와이와 멕시코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된다. 하와이의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은 그나마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향으로 어느정도 풍족한 삶을 영위하지만 멕시코에 간 조선인들은 채찍으로 맞는 등 비인간적인 처사에 하나둘씩 쓰러진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자본주의화를 실행하려고 하는 독재자 국가 멕시코의 두 시대, 두 문명의 환경 속에 떨어진 같은 조선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또한 멕시코에 도착한 조선인들도 각각 삶의 방향이 다르다. 통역관의 신분으로 처음부터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던 권용준, 황실이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이종도, 전자는 자본주의 세계에 걸맞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부와 지위를 상승시킨다. 하지만 이하응 - 대원군 - 만 아니었어도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다고 자괴하는 이종도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채 새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한다. 결국 황족의 집안은 분열되어 그 아들은 권용준에게 통역일을 배우며 성장하고 딸은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다가 결국은 통역관의 첩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부인 역시 농장의 노동자 감독관과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두 사람은 곧 근대 국가로 넘어가는 대한제국의 음과 양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랄 수 있는 김이정과 조장윤 무리들, 전자는 보부상의 잔심부름꾼으로 지내다가 멕시코로 떠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이정도의 딸인 이연수와 멕시코로 떠나는 배 안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왔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고 만다. 어머니에게서 한번 떠나야 했고 조국에서 떠나야 했으며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떠나야만 했던 그는 멕시코 내전에 이어 과테말라 내전에도 휩싸인다. 거기서 그는 수십명 무리들을 이끌고 밀림 오지에 '신대한(新大韓)'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그들이 아는 세상은 대한제국이 전부였기에 근대를 향한 그들의 몸부림도 결국은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대한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결국은 과테말라 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뜨거운 피와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남자,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 마치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문명을 접하고 자아와 정체성을 상실한 당시 조선인들을 대변해는 듯 하다.

그에 비해 조장윤과 그 무리들, 과거 러시아식 훈련을 받던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들이었던 그들은 멕시코에 설립된 한인회의 지도자로 여생을 편안히 보낸다. 농장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도, 한인회를 설립했을 때도, 과테말라 반군에게 군사 지원을 해주기 위해 수십명을 데리고 밀림으로 떠날 때에도, 그들은 항상 앞장서서 일을 지휘했지만 위급할때는 가장 먼저 사라졌었다. 대단한 협상가, 지도자처럼 굴었지만 결국은 아주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 눈에는 그런 그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주인장이 보기엔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해버린 인간들이었다.

책은 이렇게 이원화된 시각으로 당시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역사 소설? 글쎄, 그렇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인장은 이것이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라 아주 잘 쓰여진, 감동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해두고 싶다. 이런 류의 역사 소설은 처음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감정적 통찰을 이 책은 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기록 사진첩을 보듯이 이 책은 멕시코 이주민들의 삶을 그만큼 역동적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책의 결말은 더욱 그런 모습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 나오는 권용준, 이종도, 이진우 - 이종도의 아들로 권용준에게 통역일을 배운 사람 - , 박정훈 -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훗날 이연수와 재혼함 - 등은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근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 하고 스러져간다. 마치 IMF 시대 속의 기업들처럼 힘없이 말이다. 주인공이 이 책에는 없다. 모든 등장 인물이 주인공이며 하나하나의 사건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느것 하나 없다. 그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멕시코 이주민에 대해 이렇게 책으로 써서 알려주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현지를 답사하는 등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신 작가 김영하님께도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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