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문명기행 1
혜초 지음, 정수일 역주 / 학고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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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위 시는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혜초의 오언시이다.

'왕오천축국전'과 '혜초'.

국사책을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에 대단히 익숙할 것이다. 신라인 혜초가 인도를 돌아보고 온 여행기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기로 끝일까?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 책은 과연 어떤 책일까? 솔직히 말해 주인장이 이 책을 실제로 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위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이 무슨 창피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주인장이 그간 신라사에 대해, 인도와 중앙아시아사에 대해 심각하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자위적인 변명을 가볍게 하고 넘어갈까 한다.

솔직히 이 책을 보게 된 목적은 당대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보려고 한 점도 있지만, 역사에 자세히 남아있지 않은 통일된 왕조가 없던 남인도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주인장은 남인도에 백제의 영토 혹은 전략적 거점, 상업 전진 기지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다 본 지금,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남인도 뿐만 아니라 중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그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이 단순히 해석에 치중한 역사서가 아니라 당대 천축국 일대를 조명한 사서라는 것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 정수일의 폭넓은 지식, 광범위한 범위에서의 주석 활용 등으로 이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혜초가 지나간 여정은 물론, 그 시절의 시대사가 떠오를 정도다. 또 하나, 이 책이 완본이 아니라 절략본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실제 남천축에서부터 당의 안서도호부까지의 일정은 남아있지만 그 전과 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귀중한 문화 유산이 타지에 남아, 또 외국에 흘러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후손들은 그 사실들을 모른다는 것. 정작 일본을 비롯한 외국 학자들이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다는 사실들이 주인장으로 하여금 선조들에게 한없이 죄송하게 할 따름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이국인 천축국과 중동의 여러 나라와 문물에 대해 자세한 기록들을 싣고 있다. 인도 하면 불교가 흔히 떠오르겠지만 8세기에는 이미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크게 성행하던 때였다. 그런 시기, 당대 유행처럼 번지던 해외 유학의 물결 속에서 혜초는 천축국까지 흘러간 것이다. 불법을 구하러 불교의 발생지로 찾아간 이 신라 승려가 아니였더라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8세기 인도와 중동 시대사에 대해 알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주인장은 혜초라는 인물 그 자체에 호기심이 가기 시작했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기면서 그는 고국을 떠나 이억만리 타향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오언(五言)의 시를 남기기도 한다 - 위에 실었음 - 실제 그 시로 인해 이 책의 저자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한몫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생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드문게 사실이다. 주인장은 궁금했다. 분명 삼국 시대때부터 당으로 학문을 구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은 많았으며 남북국 시대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의 자제들이 학문을 구하기 위해서 입당(入唐)했었다. 그럼 그 수많은 해동의 유학생 중에서 유독 혜초라고 하는 승려만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희대의 기록을 남겼을까? 당대 삼국의 승려들 중에는 불심이 깊고 높은 덕을 지녀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이 많았으며 그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르긴 모르되, 분명 당시 신라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을 남긴 기록은 더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기행문 형식의 사료는 많지 않은데 이를 통해 역사와 사회, 경제등은 물론이요, 각지의 지리적 설명도 곁들어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정보를 남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과 토번, 이슬람 세력들의 첨예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던 서역 일대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 차원을 넘어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오늘날도 이처럼 자세한 여행기를 남기기 힘들진대, 머나먼 옛날 홀홀단신으로 수만리 타향을 거치면서 이런 기록을 남긴 혜초에게 정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기서 정수일은 책 앞부분에 미리 왕오천축국전의 발견 경위와 그동안의 연구사는 물론,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가로 42㎝, 세로 28.5㎝의 종이 9장을 이어붙인 것으로 총 227행에 5,893자가 필사돼 있는 현존 두루마리는 원래 왕오천축국전이 상·중·하 3권으로 돼 있었다는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와 비교해 볼 때 필사과정에서 3권으로 된 원본을 요약한 절략본(節略本) - 축약본 - 이라는 것이 역주자의 판단이다. 아울러 중국인이 아닌 한문화권의 신라인이었기에 언어 표현이나 문법 구조가 미숙해 펠리오로부터 '법현의 불국기'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 는 평가를 받았던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저자의 변론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이 절략본에다 필사본이기는 하지만 8세기 후반 황마지(黃麻紙)에 쓰인 그대로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책이란 점에 역주자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행기에는 실제 여행한 곳과 직접 답사하지 않고 전문(傳聞)한 곳에 대한 기록이 섞여 있기 마련인데 역주자는 원문의 표현과 내용 분석을 통해 당시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해 남해 바닷길로 동천축에 이르러 육로로 인도와 서역을 돌아본 뒤 파미르고원과 카슈가르, 쿠차 등을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르는 여정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특히 혜초가 서역 어디까지 여행했느냐는 것이 그동안의 논쟁거리였는데 역주자는 내용 분석을 통해 페르시아와 대식 - 아랍 - 까지 실제 이르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혜초가 방문한 대식국의 도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 호라산 총독부의 소재지인 니샤푸르 - 마슈하드 - 였다는 것이 역주자의 추정이다.

이처럼 치밀하고 자세한 주석으로 1,200여년전 여행기를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살려낸 정수일의 노고와 함께 고급 천으로 제본한 장정과 편집도 돋보인다. 디지털 복원 전문가인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작업한 3차원 디지털 혜초 복원도 역시 눈길을 끄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혜초의 여행기가 여러가지 복원 작업을 거쳐 입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셈이다.

혜초는 이 여행기를 쓰면서 지고지순한 종교인 불법을 알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을 것이며, 불도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그것도 불교의 발생지에서 불교가 이미 쇠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그 문화적, 정신적 공백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혜초의 심정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런 혜초의 1,200여년 전 역사적 공백기를 재현해낸 정수일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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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5-03-2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보천리]를 읽고, 지은이의 열정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 님의 글을 보니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麗輝 2005-03-2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 ^^ 제 서평을 보고 책이 꼭 읽고 싶어졌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충고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좋은 서평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marine 2005-09-1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보천리 읽으면서 학자로서의 열정에 참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이 책 읽어 봐야겠네요 좋은 리뷰도 더불어 감사드립니다 ^^

麗輝 2005-10-0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오히려 제 서평을 보시고 이 책이 보고 싶으시다니 저로서는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