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냅둬!


장자는 말했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고....


 


장자, 오강남, 현암사, 1999.


  혼란의 시대에는 단순명료해질 수 없는 걸까. 사상의 맞물림들이 아득하다. ‘혼란’이라는 단순하고 절대적 상황에서 내적인 단순함이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의 사유가, 그의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문장들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역시 정확한 출생연대가 기록되지 않고 있는 장자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당연 학창시절엔 공자와 맹자에 묻혀 조금 더 나아가서는 노자에 밀려 있던 사상가다. 내 기억으로는 어느 순간 장자의 열풍이었고 그러한 바람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던 때도 있더랬다. 그저 시대적 상황과 함께 생각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글이구나, 싶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대략 보다보니 그들 사상의 진보를 떠나 통찰을 떠나 사상가들의 행적은 비슷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탓일까. 내겐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앉아 생각해보면 별 차이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어 대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서로의 사상들의 논박의 물고 물림의 관계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깊이 있게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처럼 읽었나 보다. 가벼운 바람처럼......

  

  장자는 다른 여타의 사상가들처럼 본명은 따로 있다. 주(周)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로 알려져 있었더랜다. 도가(道家)의 사상가로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전해져 노자 사상의 종속물로 생각하다 이번 기회에 분리를 시키게 된다. 동양철학사에서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그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면야 저~지하에서 나를 얼마나 야속타 할꼬.

 한때 벼슬을 한 적도 있긴 했지만,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왕의 부름을 마다하고 저술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초나라 위왕이 대표적인 사람으로 장주를 재상으로 삼기 위해 사자를 보내 귀한 선물들로 그를 꼬시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장주는 “천금은 큰 이익이고 귀족과 재상이란 지위는 존귀한 자리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도시 밖의 예식에서 희생으로 쓰인 소를 본적이 없는가? 수 년 동안 배불리 먹인 후에, 그 소에게 무늬가 있는 옷을 입히고 조상의 묘로 끌고 간다. 그 순간에 그 소가 자신이 단지 버려진 송아지이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즉시 나가라.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평생토록 나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나의 뜻을 유쾌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장주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보면 제자들이 그에게 후한 장례식을 치러주려고 하자 “나는 하늘과 땅을 속 관과 겉 관으로 생각하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생각하며, 별들을 구슬들로 생각하고 만물들을 장례 예물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장례 용품에 어찌 빠진 것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에 무엇을 추가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는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힐 것이고, 땅 아래에서는 나는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먹힐 것이다.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주려고 하니,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편파적이냐!”고 했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장자를 야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구절을 읽고 그냥 넘겼다가 다시 글을 읽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런듯하다.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장자는 총 33편 6만 4606자로 이루어져 있고 <내편>, <외편>, <잡편>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위진 시대 사상가 곽상(郭象)이 편집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가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편에서는 장자가 10여 만 언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곽상이 편집한 것, 즉 오늘날 전해지는 [장자]는 원문이 일정 부분 소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실된 것인지, 곽상이 편집하면서 빼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자들은 이 중 <내편> 7편은 장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외의 편들은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기록한 일종의 논문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내편>은 1편 「소요유(逍遙遊)」, 2편 「제물론(齊物論)」, 3편 「양생주(養生主)」, 4편 「인간세(人間世)」, 5편 「덕충부(德充符)」, 6편 「대종사(大宗師)」, 7편 「응제왕(應帝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자[의 구성을 볼 때, 이 책은 [장자]의 <내편>을 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가 직접 썼다는 <내편>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외편>과 <잡편>의 몇 구절을 뽑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뼈대는 <내편>에 대한 저자식의 풀이이다.


  중요한 것은 제일 처음에 제시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처음이라 보다 꼼꼼하게 읽어서인지 제1편 소요유 편이 제일 인상에 남는다. 제목도 “자유롭게 노닐다~”이다.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만들어줬고 그와 더불어 다른 장자 책의 해석과 풀이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편에서 나오는 바람이야기가 왜 닿는지. 지금 이 책을 읽는 시점에선 소요유 편의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와 더불어 바람이야기가 내 맘에 얹어진다.

 오래 전 한문으로 쓰여진 다른 나라의 글을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장자에 대한 해석을 단 많은 책들이 있듯이 결국 세상의 모든 책들은 자기식대로 소화하고 읽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의 특징은 물론, 장자에 대한 오늘날의 시각, 현대적 의미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요즈음의 책들이 다 그러하니 이 책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기엔 미흡하다. 그렇다면 뭘까.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데 이 책은 장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보다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라면 멈칫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장자 원전 자체가 지나치게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기독교적인 해석이 들어가 더욱 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더욱 몽롱해진다는 이야기다. 좀더 명쾌함이 필요하지 않나.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 이해, 영적인 해석에 덜 노출된 나 혼자만의 문제일까.

 원문을 해석하고 풀이하면서 반복적으로 단어를 쓰는 경향이 있다. 해석의 폭이 일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좁다고 해야 할지, 거듭 반복된 문장과 단어가 내용에 대한 일관됨을 견지할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는, 미흡하다는 느낌이 반복적으로 들게 했다. 프레임의 차이일 수 있을 것이고 몇 번 거듭됨 때문인지 강신주와 왕멍의 장자 해석이 더 일깨움으로 다가왔다. 글이란 어찌어찌 해도 코드라는 것이 있구나 생각한다. 나의 이 ‘코드’를 물리치는 책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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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충동을 몰고 온 여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Writing Down the Bone

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욱 옮김, 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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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글쓰기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한 기술에 대한 글이기보다는 글쓰기를 잘하기 위한 마음가짐, 의식에 관한 조언이 주가 되고 있다. 이러한 조언을 위해 저자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수련하고 있던 ‘선명상’의 방법적인 것을 글쓰기를 위한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가 전하는 글쓰기의 방법은 보다 많이 비우고 덜어내고 느낌대로 따라가라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목차를 구성하기 보다는 에세이 형태로 짧게 글쓰기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하여 60가지가 넘는 소꼭지로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독려하고 있다.

 책을 처음 읽은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 새 검열관이 들어왔다. 처음엔 음~하며 읽었던 듯한데 북리뷰로 쓰려다 보니 제법 많은 검열관이 이 책을 검열한다. 글쓰기가 안됨에 대한 반발일까.

 이 책의 장점이라면 자연스러웠다는 정도. 작가가 제시하는 글쓰기 책이라고 하기엔 명료한 느낌이 들지 않은 책. 물론, 혼을 빼놓을 순 있겠다 싶다. 그것은 이 책이 조금 몽환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가 글을 쓰는 방식이 그러한 모양이다. 동양철학, 선명상을 글쓰기에 접목하고 있다고 말하듯이 곳곳에 그 느낌이 들어 있다. 그런 탓에 오히려 ‘나도 글을 쓸 수 있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느껴졌다. 몽환적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단, 한번이다. 다시 읽으니까 검열관이 살아나며 냉철하게 봐지더라...

  우선, 이 책은 글쓰기를 내세운 명상(?) 수련 책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마치 글쓰기를 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신비체험을 하는 것인 마냥 깊은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맞다. 그렇게 몰입과 황홀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글쓰기다. ‘선’을 접목한 글쓰기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글쓰기가 모든 영감의, 생각을 비우는 형태의 명상수련법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니까.

  두 번째, 다른 책들도 그렇고 나도 쓰게 되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녀의 글쓰기 방법이 다른 글쓰기 책과 차별점이 무얼까. 선을 공부하는 그녀의 체험이 가미된 ‘생각하라’ ‘몰입하라’ ‘버려라’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마침 다른 글쓰기 책을 읽었고 그 책은 그녀의 책보다 이전에 출간된 책이었다. 말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 즉 글쓰기 방법이라 소개하는 내용이 독특하다거나 하지 않다는 것.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책은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내용을 좀더 깔끔하게 정리했으면 한다. 나열된 제목처럼 나탈리는 글쓰기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매우 많았던 듯하다. 하지만, 읽다 보니 반복적이다.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그녀 자신이 첫 문장에 사로잡혀, 영감에 사로잡혀 검열관은 냅두고 마구 글을 써내려간 듯한 느낌이다. 조금 검열관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관련된 내용과 메시지, 제목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을 듯 보인다. 글쓰기의 방법론은 적게 나왔지만, 방법론과 글쓰기를 위한 마음가짐, 작가에 대한 인식 등의 카테고리를 나누어 생각들을 전개해 나갔다면 글의 내용이 좀 더 깔끔하게 와 닿았을 것 같다.


 ‘선’,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명상하는 서양 여자.


 서점을 가면 글쓰기 책이 즐비하다. 세상은 글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 마냥, 글을 쓰는 것이 인생과 직결되는 것처럼 글쓰기 책이 연이어 생산되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글쓰기 책은 증가하는 이 현상은 뭐지? 넘치는 글쓰기 책 중에서 나탈리의 글쓰기 책이 많이 거론된다. 왜지? 이 책은 1986년도 출간이고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이 나오지 않은 걸까. 당시 이 책은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또, 백만부의 판매고까지 올리며 전세계에 번역, 출간되었다 한다.

 사람들은, 이 책에서 어떠한 글쓰기의 맛을 느꼈을까. 실질적으로 글쓰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떠나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을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나탈리는 폴란드계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결혼과 이혼 과정을 거치며 살다가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면서 인생의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그림도 그리고 있다. 그녀의 글쓰기와 그림보다 선행하는 것은 ‘선명상’으로 보인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맛도 약간 몽환적, 동양적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이 명상을 통한 수련으로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듯하다. 글쓰기의 내용도 명상이 상당히 접목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사상을 널리 전하며 여전히 명상을 수행하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강의를 하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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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쓰기에 대한 직진 안내서



내 인생의 첫 책쓰기 - 인생 반전을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

오병곤, 홍승완, 위즈덤하우스, 2008.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책쓰기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왜 책을 써야 하는지와 책을 쓸 때의 원칙, 구체적인 책쓰기 실천방법, 그리고 책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클리닉을 단계별로 제시함으로써 책을 쓰는 동기부여에서부터 실천까지 일관성 있게 가이드해주고 싶었다. p11


  저자들은 이 책의 목적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서 7장의 뼈대를 만들고 책을 써야 하는 이유와 책을 쓰기 위한 구상방법, 재료, 글쓰기방법, 출판을 위한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중간 중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한 질의를 코멘트해주는 ‘책쓰기 클리닉’을 삽입하여 감칠맛을 더한다. 이 책쓰기 클리닉은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한 뒤데 붙여져 있다. 즉,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부분을 글쓰기, 책쓰기 과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또 하나, 첫 책을 낸 저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실제 책을 내본 저자와 출판사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생에서 왜 책을 쓰는 이유가 중요한지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들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이야기로 ‘책쓰기’가 인생의 변화에, 전환에 매우 큰 영향력이 있음을 열렬하게 설득하고 있다. 책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마치 정말 그래야 할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방법적인 노하우를 알려준다 해도 주술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듯하다.

 글쓰기, 책쓰기에 갖는 어려움에 대한 친절한 고민상담란을 두고 있어 많은 이들이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구나 하는 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또한 책을 쓴 저자들의 경험담을 보여주어 좋았고, 마찬가지로 출판사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실상 글쓰기 책은 너무 많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바라고 책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수많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나와 있다. 한번도 글을 써보지 않은 이가 글쓰기 책을 내기도 한다. 글쓰기의 매력이 무엇이기에를 느끼기 전에 대부분 자신은 이렇게 글쓰기를 했다라고 말을 하면서 방법을 전하는데 사실 많은 책들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은 차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하려는 핵심이 비슷하고 실제 글을 쓰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공통적이기에 그에 대한 방법 역시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기대가 덜한 탓일까. 그저 그런 글쓰기 책이라고 생각했다가 오,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특히 글쓰기보다는 책쓰기에 집중이 된 책이라 ‘책을 써내야 한다’는 나의 의무로 인해 흡인력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구성이 짜임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일기가 있어서 재미있긴 했지만 출간일기가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실제 진행과정을 정리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책을 쓰는 과정의 일정별 체크리스트를 보여주면 시간계획을 세울 때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처음엔 장뒤에 붙은 책쓰기 클리닉이 내용과 너무 중복되는 측면이 있기도 해서 이 부분을 뒤에 한챕터로 몰아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 읽고 나서 핵심을 다시 되새기는 측면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관련 방법과 연결된다는 측면으로 보면 이 구성도 나쁘진 않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저자들을 내가 알고 있다. 도서관에 책방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 내가 저자를 제법 알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명의 저자가 쓴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많이 보지 않았는데, 이것을 구별해 낸다니. 그만큼 저자들의 글쓰기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인 오병곤의 평소 하는 말투나 전하는 메시지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홍승완의 경우도 강연에서 하는 말투나 메시지가 드러났다. 결국 책이란,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풀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 다 ‘구본형’이라는 사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애제자로서 사부가 전한 메시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열심히 공헌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잘 모르고 보면 낯선 저자들이긴 하지만, 잘 보면 친근한 느낌이다. 책쓰기라는 어렵고 힘들다는 과정을 편하게 이끌어가는 주축이다.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좀, ‘푼수?’같아 보이지만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쓰기 책 만큼은 경쾌함과 묵직함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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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뜯어보다


   


  



  연암은 어떤 글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생생한 움직임과 미묘한 내적 본질을 꿰뚫어볼 때 비로소 그 글자를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열하일기 속의 사물에 대한 묘사는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듯 생생하며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고 명쾌하다. 그의 글쓰기가 완결되는데 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의 몸에 체득된 사상이 당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에게 내재한 가치체계를 통해, 그는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 인식하며 사물과 연관된 또 다른 관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시각, 그의 프레임들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그의 삶 속에 스며들어 그의 사고를 정립시킨 그의 세상을 찾아본다.


1) 눈(目) - 세상을 보다


 박지원은 1737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기 조선 후기, 연암은 영・정조 시대를 살아 내었다. ‘살아 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서에서 기록하듯이 그 시기가 혼란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혼란의 흐름 속에서 연암이 보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연암의 집안은 당대 명문 양반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이었으며 청빈과 청렴결백을 생활화하였고 연암 또한 이러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와 함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였기에 집안 형편은 좋지 못하였다. 연암은 5세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서는 장인으로부터 맹자를 배웠고 외삼촌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들에게서 배운 사상과 학문은 연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태를 미워하였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학, 경세제국(經世濟國)학, 명물도수(名物度數)학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며 자신의 사상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2) 귀(耳) - 세상을 듣다


 연암은 훤칠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목소리 또한 우렁찼다고 한다. 연암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신붙은 여자의 병이 나았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고 나아가 연암의 사상의학적으로 태양인의 기질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이렇게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하였던 연암은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으며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담헌 홍대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와 교류하였다.

 언뜻 우람한 풍채와 호탕한 기개, 사람들과의 사귐을 좋아하는 연암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하나 거칠 것 없어 보인다. 열하일기 속, 무수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유쾌한 기개와 더불어 익살과 해학의 인자를 가지고 있고 천지사방을 유람하는 이에게서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흘러 나온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오래 전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전진만을 할 듯하다.

 그런데, 연암이 보는 것에서 나아가 ‘듣는’ 삶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어린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연암의 저서 《민옹전》에 “지난 계유・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의 연암은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거식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였고 스스로 기록하였듯이 밤새워 가며 머슴부터 기인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연암은 울적한 병증을 이기고자 연암은 거리로 나갔고 익살과 해학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노력했으니 그가 이처럼 거리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들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연암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있다. 이때 쓴 글이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양반전》《김신선전》《광문자전》《우상전》《역학대도전(학문을 팔아먹은 큰 도둑놈전)》《봉산학자전》의 9가지 전이다.

 연암은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쾌 있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연암이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 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였으나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어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였다.또한, 연암은 노론으로서 소론인 이광려와의 친분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당파가 심한 그 시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할지언정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 적확한 비판과 자신과의 공감, 사람됨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코(鼻) - 세상을 욕망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에 의하면 점쟁이에게 박지원의 사주로 길흉을 물은 적이 있는데, 연암의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으로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 점쟁이가 영험하였는지 연암은 그의 ‘문장’으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질시를 받게 된다.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은 한 국가의 왕으로부터 이른바 ‘찍혔다’라고 할 수 있는 문체반정 사건이다. 정조가 이덕무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이란 글을 보고 연암의 문체를 본떴다라고 할 정도로 연암의 문장은 나름의 특성과 개성을 가지고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당시의 지배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있어 글쓰기가 하나의 역할을 한다면 그의 대표적인 선두에 연암이 있고 대표적인 글로 열하일기가 지목되었다. 이미 10년 전에 성행한 열하일기가 문제의 근원지로 최종 낙찰되면서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엇갈리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왕으로부터의 지목이 글에 대한 은근한 비호일지도 모른다며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문책에 따른 반성글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다. 이에 연암은 당시의 문인들이 일신을 위해 고문주의로 회귀하여 글을 지은 것과는 달리,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연암은 과거 시험에 일등으로 뽑히기도 하고 그의 문장에 대한 칭송으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연암을 과거시험에 합격시키고자 하였으나, 연암은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거나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고는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연암을 어리석다며 비웃기도 하였지만 이는 연암이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연암이 생애를 통해 전혀 관직에서의 생활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벗 유언호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으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쉰 살이었다. 또한 선공감 감역은 연암의 이용후생과 직접 관계되는 직책으로 연암은 이후에도 안의 현감에 임명되는 듯 몇 번의 벼슬을 맡게 된다. 연암은 엄정한 판결로 송사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다. 관아에까지 침범하던 도적을 퇴치하고 흉년에 굶주린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털기도 하는 등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 관공서 전각을 세울 때나 창고를 세울 때 중국의 벽돌 제도를 써서 벽돌을 손수 굽고 쌓고 하기도 하였다. 즉, 쉰 살의 나이에 수락한 그의 벼슬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기회였다. 실제로 그는 욕심으로 가득하여 큰 자리에 연연한다거나 이치에 맞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진정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에 힘쓰는 벼슬아치였다.


4) 이(口) - 세상에 내뱉다


 연암의 약력을 정리하다 보니, 유독 가족이나 벗들의 사망이 많았다. 연암이 6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날까지, 조부와 부모, 형님과 형수님, 아내와 자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가 사랑하는 벗들까지 연암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연암은 이를 지켜보며 통곡해 했다. 연암은 아버지가 병환이 위중할 때 칼로 왼손 중지를 베어 약에 자신의 피를 타서 올렸을 정도였다.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보내며 통곡할 때마다 연암은 묘비명을 짓거나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래었다.

 많은 소설들을 쓰며 기존의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였고, 만민이 평등하여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상업과 공업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피력하기도 하는 등, 연암은 거침없이 그의 사상과 가치를 글로써 풀어 내었다.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지은 특히 <역학대도전>은 실제 모델인 자가 죽자 박지원은 스스로 남을 비판하여 명성을 얻은 자가 있지만 자신이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가 없다하며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팔촌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암을 개인 수행원으로 참여케 하여 연암은 대망하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6개월 여의 여정 동안 열하를 여행하면서 열하일기를 기록하였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었다. 또한 연암은 정조의 명으로 《과농소초》의 농서를 지었으며 여기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기구, 수리의 방식과 기재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끊임없이 내어 놓으며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벼슬에 대한 큰 뜻은 없으나 세상의 변화에 대한 큰 뜻을 가진 이로써 변화와 개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글로써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5) 얼굴 - 세상과 소통하다


  ‘연암’은 스스로가 부여한 호칭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닉네임이다. 흔히, 닉네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목표, 자신을 대변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연암’이라 자호한 것은 연암골에 정착하여 살고자 하면서이다.

 박지원은 벼슬에 큰 뜻이 없었고, 부를 위해 정진하지도 않았다. 늘, 길도 언덕도 아닌 사이의 그 경계점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세상을 살던 연암에게 있어 유일한 세상과의 호흡, 소통처는 ‘연암골’이 아닌가 한다. 연암은 이 곳을 터전으로 하여 유언호,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더 심화해 나갔다. 이들 중 몇은 서얼이었으나 이들은 당파나 신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서로 진정한 우정을 추구했다. 문학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연암의 경우 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北學)을 지향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이라는 문하생을 두어 그의 뜻을 나누고 함께 했다. 이들이 연암과 그들 벗들의 뜻들을 계속 이어갈 터였다. 나아가 이들 또한 문장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는 연암의 덕이 클 터이다. 연암이 세상과의 유대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벗들과 제자들을 통해 경계 저 멀리에 머물지 않고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고미숙/박지원 원저,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박종채 저/고미숙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998.

•박지원 저/김혈조 역,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학고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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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괴테와의 대화, 요한 페터 에커만,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8.


  저자에 대한 기록이라면 『괴테와의 대화』의 머리말과 시작 전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 책 속에 부분 부분 들어 있는 그의 생각들이 전부다. 니체라는 대작가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책”이라 칭한 책의 작가임에도 에커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내가 독일인이 아니다 보니 그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고라도 수백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지는 책의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위치가 그에게 없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부여해준 위치 말이다. 그의 책은 에커만의 책이 아니라, 괴테의 책이고 괴테에 관한 책이었다. 괴테를 빼고서는 에커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기록한 그를 보면서, 연보를 보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참으로 안쓰럽고 아련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에커만이 괴테를 만나 성장하고 변화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에커만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고 느껴진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그만큼의 위치를 점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난했기에 길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를 곱씹는 동안 신경림의 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구절이 계속 맴돌았는지 모른다. 이 시의 부제가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이다. 1800년대 가난한 독일 젊은이의 쓸쓸한 생애가 내 이웃의 이야기인 것 마냥 책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였음에도 부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혹여 사치스러운 젊은이인가 오해하였더랬다. 오랜 세월 자신의 의지와 꿈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괴테의 전집과 자서전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가던 에커만. 자신의 작품으로서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을 보다 일찍 출간하고자 했으나 결국 괴테의 뜻으로 인해 출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괴테의 전집을 도우며 유고작을 정리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한 에커만은 그렇게 많은 보수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가 따랐던 괴테도 죽고 그의 아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그를 떠났다. 그는 그들보다 20여년을 더 세상에 머물렀지만 『괴테와의 대화』이후 괴테와 관련된 서적 이외에 그의 이름으로 된 다른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 가난하다고 해서 꿈조차 없겠는가


 에커만은 1792년 독일 빈젠에서 태어났다.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어린 시절 일이 곧 놀이였으며 이삭줍기, 도토리 열매 모으기 등을 통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자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학교를 다니며 읽기와 쓰기를 익혔다.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의 그림이 지방 유지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겐 그림이 무엇인지, 화가가 무엇인지, 그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림에 대한 그의 꿈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배움에 매료된 에커만은 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곧 경제적인 문제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법원의 서기로서 기록과 잡무를 맡으면서 일을 했고, 이후 감독청과 군청 등 관공서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며 공부를 하다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때 네델란드 그림을 접하며 그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제대 후 홀로 그림을 그리다 스승에게서 배우기로 결심하며 눈쌓인 길을 40여 시간 동안 걸어 람베르크에게 배움을 청한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전장에서 얻은 병으로 치료가 필요하고 생계가 어렵게 되자 다시 회사에 취직한다. 즉 상황에 의해 예술가로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여건에 따른 예술가의 삶에 대한 포기는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겐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했다. 병으로 휴식을 취하며 많은 책들을 접하다가 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를 지어 자비로 시집을 내게 된다. 이 시가 잡지에 실리고 여러 지방에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괴테의 책을 접하고는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더 많은 배움을 위해 일하는 틈틈이 라틴어, 그리스어 교습을 받았고 더욱 더 배우기 위해 스물다섯의 나이에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일을 병행하며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보니 다시 병을 얻게 되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생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에겐 후원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돈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우에만 협력을 약속하였다. 배우고 싶은 열정, 학교를 가고 싶은 열정으로 시집을 내고 수입을 얻게 되자 약혼녀를 두고 괴팅겐으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법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줄곧 그가 원하는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고 종국에는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시학논고』가 탄생되었다. 에커만에게는 이를 통해 충분한 원고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겐 어느 정도 생계를 보장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괴테에게로 보냈고 이후 직접 괴테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골짜기를 걷고 걸어서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로 가게 된다. 극심한 더위로 힘든 고비를 수없이 넘긴 열흘 간의 기간을 지나서였다. 그 길로 괴테의 문학 조수가 되어 1823년부터 1832년까지 10여년 동안 괴테와 교류한다.

 에커만은 그 자신도 생계로 인해 꿈을 포기한 일들을 얘기하며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 못하리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가난으로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난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을 뿐, 늘 그는 꿈을 위해 내달리며 배우고 또 배워갔던 것이다. 그림을 배우고자 할 때도 스스로 스승을 찾았고, 문학에의 열정이 가득찼을 때에도 배우고 공부하며 시를 썼다. 그리고 또한 힘든 여정들을 거치며 괴테를 찾아 나섰다. 그가 진정 가난으로 예술가의 길을 포기한 자라면 여전히 그는 법학이나 군청에서 일을 하는 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후세에 전하고 있고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는 니체를 통해 칭송받는 작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2) 가난하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음을


 문학에의 열정으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며 스스로 스승을 찾는 여정을 떠난 청년은 시간이 지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까.

 에커만은 지금으로 봐선 아직 청춘인 시절인 62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삶에 많은 시간을 괴테와 함께 했고, 괴테의 작품과 함께 했고, 괴테의 목소리와 함께 했다. 그가 괴테의 작품을 읽고 괴테를 만나 그와 함께 삶과 예술과 다양한 학문들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동안 에커만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했으며, 이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커만에게 있어 괴테는 지적 동반자이자 절대자였던 것이다.

 괴테 역시 그의 유고작을 에커만이 편집해 주기를 바랐고 괴테가 세상을 뜰 때까지 에커만은 괴테의 원고를 정리하며 <예술과 고대>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괴테 사후에는 <유고 전집>을 펴냈다.

 그의 삶에서 괴테의 자리가 크기에,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가난으로 더디게 도달한 자리였기에 애정이 남달랐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또 한편 외롭게 외면받았을 존재가 있다면 그의 약혼녀이다. 에커만은 괴테를 만나기 전 요한나 베르트람과 약혼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은 하지 못했고 에커만의 공부를 위해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괴테의 아들과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인생에 대해 고뇌하던 중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마침 대공의 자제를 교육하는 일을 제의받아 기쁨으로 여행에서 돌아오지만 그와 같이 여행하던 괴테의 아들이 여행에서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여전히 에커만은 결혼하지 못하고 괴테의 건강을 걱정하며 괴테의 일을 돕게 된다. 이후 1년이 지나 약혼 12년 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3) 그는 벽 속에 갇혔다


 어쩌면 에커만에게 괴테는 끊임없는 벽이었다. 오직 괴테의 작품에 대한 감탄과 괴테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찬 한 사나이의 순수한 열정들을 가두는 벽 말이다. 그 자신 어려움 속에서 남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적당한 거짓을 배웠다고 얘기했지만 괴테와의 만남 속에서 그것은 발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터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처럼 에커만은 괴테 앞에서 너무 작아진 듯하다. 게다가 주눅든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청년 시절까지만 해도 당당했고 열의가 넘쳤던 그였는데 말이다.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학구열에 불타올랐고 그 자신 또한 창작열에 불타는 문학도로서 그는 시를 짓기도 하고 『시학논고』를 펴내기도 했던 그였는데 말이다. 반면 ‘장인님, 이제 장가보내줘유‘를 외치는 ’나‘에게 자꾸 점순이의 자라지 않은 키를 얘기하며 외면해 버리는 김유정 소설 <봄봄>의 장인처럼 괴테는 심술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에커만의 생애마다 괴테라는 존재로 막혀 있었던 듯도 하다.

 에커만은 괴테의 작품을 정리해주는 조수이자 동료로 만년의 괴테에게는 동반자였다고 얘기된다. 물론 에커만에게도 괴테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자신의 의지로 괴테와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동반자였다면 같이 성장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괴테는 성장하기에는 이미 다 자란, 그리고 원숙하게 성장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커만은 스스로 성숙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한 면이 책 속에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행한 만큼의 강렬함이나 열정이 덜하게 보인다.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자신을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한 젊은 청춘의 재능을 보았다면 그의 재능을 더욱 이끌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에커만이 좀더 자신의 순수한 창작물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괴테의 그러한 점이 아쉽고 애석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가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참 스승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괴테는 오히려 그를 가두었다. 그의 재능을 확실히 인지하고서야 그를 동료가 아니라 정말, 조수로 부린 듯한 인상이다.

 어쩌면 에커만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이끌어주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커만의 재능을 평가한 시점, 중요한 지점은 여기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시점이다. 그것은 괴테가 아픈 동안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기간이었다. 그때 괴테는 에커만에게 일을 맡겼고 에커만은 충실히 그 일을 해내었다. 괴테는 에커만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물론 처음 에커만이 논문을 보냈을 때도 호의적이었기에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일단 그가 아픈 기간 동안 에커만이 대신한 일을 두고 괴테는 재능이 있다며 환호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네에게 말해 두겠네만 만일 다른 곳에서 문학과 관련된 청탁을 받는다면 거부하게. 아니면 최소한 나에게 미리 말해 주게나. 자네는 일단 나와 연을 맺었으니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다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아.”(괴테와의 대화 1권, p102)


  이뿐만 아니다. 오랜 시간 괴테와 함께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문학은 창작하지 못했던 에커만은 드디어, 자신에 대한 각성에 이른다. 진정 익숙한 곳과 결별하고 낯선 곳에서는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길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 지 모르는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의 욕구와 마주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식을 늘리고, 그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고팠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욕구가 강하여서인지 그는 여행에 대한 감흥은 사라지고 오직 원고를 마무리짓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찼다. 바이마르로 되돌아가면 자질구레한 일들에 시달리며 시간만 뺏기고 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약혼녀 곁에 머무르며 원고를 마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학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얻고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람도 가지며 글을 쓸 때에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에서 밝혔듯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필요로 하였기도 했다.

 그러나 괴테에게 전한 이 강렬한 열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떠나 있었기에 진실한 그의 마음을 말할 수 있었을 그 고백들은 괴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괴테는 대화록을 빠른 시일 내에 발간하려는 나의 생각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문학적 이력을 성공적으로 개시하려던 나의 구상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괴테와의 대화 1권, p623)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약혼 후 10여년을 떨어져 지낸 이유도 있지만 에커만의 책을 내고 싶은 강렬한 욕구의 좌절이 아마도 약혼녀를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으로 대체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무렵 여건도 그에게 좋게 진행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때 괴테의 아들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갈망을 이루지 않았을까. 그의 생에서 조금은 괴테라는 인물이 중점이 되어 돌아가던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갈망을 품고 되돌아 온 에커만은 아들의 사망이라는 슬픈 격랑 속의 괴테를 걱정하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괴테의 일을 돕는다.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괴테를 만나, 스스로를 너무 낮추었던 에커만의 청춘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그토록 경외하던 괴테가 사라지고 난 후 그의 남은 생애가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 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음울하게 있지는 않았을지 궁금하다. 그의 생에서 괴테로부터 많은 교양을 얻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그의 생을 돌아보며 흔들릴 때, 그는 괴테에게서 독립을 꿈꾸었다. 물론 괴테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격려 없이는 무엇도 시작하기 어려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좀더 괴테라는 벽 속에서 튀어 나왔어야 했다. 그 벽 속에 그가 열 수 있는 문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의 생에, 괴테라는 벽 속에서 문을 만들지 못하였다는 점, 그 자신이 문을 여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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