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뜯어보다


   


  



  연암은 어떤 글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생생한 움직임과 미묘한 내적 본질을 꿰뚫어볼 때 비로소 그 글자를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열하일기 속의 사물에 대한 묘사는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듯 생생하며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고 명쾌하다. 그의 글쓰기가 완결되는데 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의 몸에 체득된 사상이 당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에게 내재한 가치체계를 통해, 그는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 인식하며 사물과 연관된 또 다른 관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시각, 그의 프레임들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그의 삶 속에 스며들어 그의 사고를 정립시킨 그의 세상을 찾아본다.


1) 눈(目) - 세상을 보다


 박지원은 1737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기 조선 후기, 연암은 영・정조 시대를 살아 내었다. ‘살아 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서에서 기록하듯이 그 시기가 혼란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혼란의 흐름 속에서 연암이 보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연암의 집안은 당대 명문 양반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이었으며 청빈과 청렴결백을 생활화하였고 연암 또한 이러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와 함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였기에 집안 형편은 좋지 못하였다. 연암은 5세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서는 장인으로부터 맹자를 배웠고 외삼촌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들에게서 배운 사상과 학문은 연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태를 미워하였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학, 경세제국(經世濟國)학, 명물도수(名物度數)학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며 자신의 사상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2) 귀(耳) - 세상을 듣다


 연암은 훤칠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목소리 또한 우렁찼다고 한다. 연암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신붙은 여자의 병이 나았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고 나아가 연암의 사상의학적으로 태양인의 기질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이렇게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하였던 연암은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으며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담헌 홍대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와 교류하였다.

 언뜻 우람한 풍채와 호탕한 기개, 사람들과의 사귐을 좋아하는 연암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하나 거칠 것 없어 보인다. 열하일기 속, 무수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유쾌한 기개와 더불어 익살과 해학의 인자를 가지고 있고 천지사방을 유람하는 이에게서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흘러 나온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오래 전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전진만을 할 듯하다.

 그런데, 연암이 보는 것에서 나아가 ‘듣는’ 삶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어린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연암의 저서 《민옹전》에 “지난 계유・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의 연암은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거식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였고 스스로 기록하였듯이 밤새워 가며 머슴부터 기인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연암은 울적한 병증을 이기고자 연암은 거리로 나갔고 익살과 해학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노력했으니 그가 이처럼 거리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들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연암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있다. 이때 쓴 글이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양반전》《김신선전》《광문자전》《우상전》《역학대도전(학문을 팔아먹은 큰 도둑놈전)》《봉산학자전》의 9가지 전이다.

 연암은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쾌 있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연암이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 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였으나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어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였다.또한, 연암은 노론으로서 소론인 이광려와의 친분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당파가 심한 그 시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할지언정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 적확한 비판과 자신과의 공감, 사람됨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코(鼻) - 세상을 욕망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에 의하면 점쟁이에게 박지원의 사주로 길흉을 물은 적이 있는데, 연암의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으로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 점쟁이가 영험하였는지 연암은 그의 ‘문장’으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질시를 받게 된다.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은 한 국가의 왕으로부터 이른바 ‘찍혔다’라고 할 수 있는 문체반정 사건이다. 정조가 이덕무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이란 글을 보고 연암의 문체를 본떴다라고 할 정도로 연암의 문장은 나름의 특성과 개성을 가지고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당시의 지배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있어 글쓰기가 하나의 역할을 한다면 그의 대표적인 선두에 연암이 있고 대표적인 글로 열하일기가 지목되었다. 이미 10년 전에 성행한 열하일기가 문제의 근원지로 최종 낙찰되면서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엇갈리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왕으로부터의 지목이 글에 대한 은근한 비호일지도 모른다며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문책에 따른 반성글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다. 이에 연암은 당시의 문인들이 일신을 위해 고문주의로 회귀하여 글을 지은 것과는 달리,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연암은 과거 시험에 일등으로 뽑히기도 하고 그의 문장에 대한 칭송으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연암을 과거시험에 합격시키고자 하였으나, 연암은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거나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고는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연암을 어리석다며 비웃기도 하였지만 이는 연암이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연암이 생애를 통해 전혀 관직에서의 생활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벗 유언호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으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쉰 살이었다. 또한 선공감 감역은 연암의 이용후생과 직접 관계되는 직책으로 연암은 이후에도 안의 현감에 임명되는 듯 몇 번의 벼슬을 맡게 된다. 연암은 엄정한 판결로 송사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다. 관아에까지 침범하던 도적을 퇴치하고 흉년에 굶주린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털기도 하는 등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 관공서 전각을 세울 때나 창고를 세울 때 중국의 벽돌 제도를 써서 벽돌을 손수 굽고 쌓고 하기도 하였다. 즉, 쉰 살의 나이에 수락한 그의 벼슬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기회였다. 실제로 그는 욕심으로 가득하여 큰 자리에 연연한다거나 이치에 맞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진정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에 힘쓰는 벼슬아치였다.


4) 이(口) - 세상에 내뱉다


 연암의 약력을 정리하다 보니, 유독 가족이나 벗들의 사망이 많았다. 연암이 6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날까지, 조부와 부모, 형님과 형수님, 아내와 자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가 사랑하는 벗들까지 연암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연암은 이를 지켜보며 통곡해 했다. 연암은 아버지가 병환이 위중할 때 칼로 왼손 중지를 베어 약에 자신의 피를 타서 올렸을 정도였다.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보내며 통곡할 때마다 연암은 묘비명을 짓거나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래었다.

 많은 소설들을 쓰며 기존의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였고, 만민이 평등하여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상업과 공업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피력하기도 하는 등, 연암은 거침없이 그의 사상과 가치를 글로써 풀어 내었다.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지은 특히 <역학대도전>은 실제 모델인 자가 죽자 박지원은 스스로 남을 비판하여 명성을 얻은 자가 있지만 자신이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가 없다하며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팔촌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암을 개인 수행원으로 참여케 하여 연암은 대망하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6개월 여의 여정 동안 열하를 여행하면서 열하일기를 기록하였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었다. 또한 연암은 정조의 명으로 《과농소초》의 농서를 지었으며 여기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기구, 수리의 방식과 기재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끊임없이 내어 놓으며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벼슬에 대한 큰 뜻은 없으나 세상의 변화에 대한 큰 뜻을 가진 이로써 변화와 개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글로써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5) 얼굴 - 세상과 소통하다


  ‘연암’은 스스로가 부여한 호칭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닉네임이다. 흔히, 닉네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목표, 자신을 대변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연암’이라 자호한 것은 연암골에 정착하여 살고자 하면서이다.

 박지원은 벼슬에 큰 뜻이 없었고, 부를 위해 정진하지도 않았다. 늘, 길도 언덕도 아닌 사이의 그 경계점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세상을 살던 연암에게 있어 유일한 세상과의 호흡, 소통처는 ‘연암골’이 아닌가 한다. 연암은 이 곳을 터전으로 하여 유언호,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더 심화해 나갔다. 이들 중 몇은 서얼이었으나 이들은 당파나 신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서로 진정한 우정을 추구했다. 문학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연암의 경우 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北學)을 지향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이라는 문하생을 두어 그의 뜻을 나누고 함께 했다. 이들이 연암과 그들 벗들의 뜻들을 계속 이어갈 터였다. 나아가 이들 또한 문장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는 연암의 덕이 클 터이다. 연암이 세상과의 유대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벗들과 제자들을 통해 경계 저 멀리에 머물지 않고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고미숙/박지원 원저,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박종채 저/고미숙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998.

•박지원 저/김혈조 역,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학고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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