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이라영 지음 / 동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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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부


쇳돌-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이라영, 동녘, 2026-02-20.

 


  세상이 급하게 변하고 미래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라지는 산업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산업이 사라지는 건 ‘자연적인 흐름’만이 아닌 ‘정책적 의도’에 의해 일어나기도 한다. 직업이라는 게 쉬이 바꾸기 어려운데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수록 이에 대한 이해와 기술력이 부족한 노동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내었을까.

  미래산업과 로봇 성장의 시대를 얘기하면 떠오르는 기막힌 이야기는 ‘일본의 도장찍는 로봇’ 이야기다. 제법 오래전부터 일본의 로봇 기술력은 세계에서 상위에 랭크되었다. 일본이 보여줄 로봇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높았을 게다. 그런데, ‘도장찍는 일본 로봇’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일본은 문서가 전자화되지 않고 아직 종이문서인데다 수기로 도장을 찍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인장협회 등 관련 단체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이런 형태를 바꾸지 못하고 해결책으로 좀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이런 로봇을 만들었다 한다. 이러한 얘기를 접하고선 도대체 일본의 지향점을 무얼까 싶었다. 기술이 발달하는 시대, 단지 물리적인 기술력이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다루고 무엇을 위해 기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과 ‘비전’ 속에 기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이 책 『쇳돌』의 저자는 “경제성, 합리화, 건전성 등의 언어로 포장된 정책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향일지 모르나 개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붕괴시키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속 ‘합리화’는 노동자들의 언어도 아니고, 어떠한 부정적 의미도 드러내지 않고, “직장을 잃은 광부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이들이 거주하던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해준다. 한 가족의 ‘광산 노동이동사’를, 그의 가족들을, 이들 거주하던 마을의 일들을. 그렇게 한 가정의 가정사가 사회 변화와 맞물리며 흘러온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거대한 담론을 논쟁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친구가 들려주는 ‘우리 아빠, 우리 집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사, 노동사라는 객관적인 실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 이라영은 정말 탁월한 수다쟁이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감정이입을 하며 진지하게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친구-다소 수다스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막장 드라마’할 때 ‘막장’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경상도에서는 쌈장같은 된장을 ‘막장’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와 얽힌 막장은 석탄이나 광석 등을 채굴하는 갱도를 말한다. ‘막장드라마, ’막장 인생‘은 이처럼 광산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막장 인생이 어떤 거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광산 산업은 90년대 이후 감소하며 광산이나 광산노동자, 광부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광산‘은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딱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대체로 가난하고 가난한 이들이 행하는 노동, 인생의 끝에 몰린 이들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이들 삶을 표현한다. ’막장‘은 위험하고 험한 일터이고 그들의 삶 또한 그렇다고. 공장단지가 떠난 지역이 그러하듯 폐허처럼 남은 빈 집, 늙어가는 노인과 그만큼 늙어가는 개들만이 남은 곳, 광산 지역. 그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저자의 아버지는 “다 죽었지”라고 답했다. 저자는 그제야 양양광업소 노동자, 민주노조위원장 출신인 아버지의 양양 광산에서 일했던 기록을 찾기로 한다. 광산노동자들이 열심히 캐고 골라내던 ’쇳돌‘처럼 철광산 산업의 흥망성쇠 속 그때 그 지역의 모습을, 가족의 삶을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하는 산업 지형과 소멸하는 직업 속에서 견디고 이동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

  이 책을 통해 “선광부”를 알게 된다. 광산하면 광부가 떠오르고 광부는 남성이다. 경리라고 부르는 일 정도는 여성이 했을지라도 광산은 남성의 일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아버지는 또 말한다. “거기 맨 젊은 여자지”. 쇳돌 고르는 작업은 거의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쇳돌이란 철광석처럼 광석을 고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선광부”라 한단다. 석탄 광산에선 선탄부라고 한단다. 저자의 고모도 선광부로 일을 했다 한다. 광부는 ’鑛夫‘로 ‘사내 부夫’자로 쓰이는데 선광부는 ‘부녀 부婦’자를 쓴단다. 광석 고르는 일을 여자가 주로 하니 쉬운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 일은 “광산의 굵직한 일 중 하나”이고 “분진 속에서 하는 일이라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에 '지상의 막장'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과거에 양양 사람들을 비하하던 표현인 “양양하와이”. 양양이 뒤늦게 남한에 편입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라 한다. 양양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심하느라 말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휴전된 지 3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진짜 남한이 아니’라는 배제의 시선이 깔려 있는 이 말을 저자는 적어도 지금은 잊혀진 말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서핑의 도시로 알려진 양양을 보면 ‘하와이’ 해변이라거나 까페 등 ‘하와이’라는 이름 붙은 가게들이 보인다. 지금은 비하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뭔가 아이러니하다.

저자 또한 양양에서 양양 비하의 경험자로 살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는 내내 저자의 어머니는 양양을, 광산을, 노조를 자식들과 분리하려 애썼다고 기록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연좌제의 피해자다. 남로당 활동을 했던 조부의 ‘행불’은 삶 내내 아버지와 고모를 따라다녀 공무원이 되지 못했고, 고모 역시 하고픈 일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국가에게 감시당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노조’ 활동을 했고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노조위원장’의 부인인 아내의 삶은 딱히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노조 때문에 “가정이라는 게 없이” 사는 삶이었고, 가난한 삶에 도움 또한 되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 뒤늦게 과거를 기록하는 시점에서 저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서로 다른 태도를 맞닥뜨린다.

 

“아니, 할아버지가 왜 서대문형무소에 갔냐니까?”라고 재차 물어보면 “그게 다 관련이 있는 거야”라며 거대한 역사 속에서 제 아버지의 위치를 해석하려 애쓴다.“ […] 개인의 삶을 역사 속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버지에게는 꽤 익숙해 보인다. 나는 이 점이 남성 중심의 역사와 문학적 서사를 다양하게 접한 개인이 체득한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모나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고모는 숨으려 했으나 흘러넘치는 분노의 말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 붕괴되고 미쳐버렸다. 어머니는 지금도 “옛날 이야기 하기 싫다”라며 외면하는 선택을 한다.

 

  저자는 동네서 가사만 하는 여성을 거의 본적 없다고 한다. 여성들은 하나같이 농사를 짓거나 시내에서 장사를 했고 겉보기에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여자들은 다들 집에서 부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광산 노동자의 부인으로서 가사노동만을 할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여성‘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성역할-가사노동과 돌봄노동-과 함께 광산 노조 투쟁에 함께 하고, 부업 활동도 해야만 했던 삶이었다. 한편, 저자는 아버지가 노조투쟁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부인들‘ 얘기를 들으며 적극적인 투쟁활동을 했던 여성들 외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가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어머니마저‘ 밖에서 투쟁에 참여했을 때 자식들의 위치가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얘기한다.

이처럼 이 책은 남성의 세계로 인식되는 광산 노동자의 삶을 얘기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 함께 해 온 역사인 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서울 중심, 중산층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되는 동안 밀려나고 사라진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 목소리를 함부로 제거하고 싶지 않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석탄 광산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다. 또한 광산을 소재로 영화, 드라마, 문학 작품 속에서 광산 산업과 노동자 가족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찾아낸 문학작품 속 이미지와 실제 ’목소리‘를 통해 본 삶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그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 비교해볼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단순 기억에 의존, 구술에 의존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다양한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광산 산업의 역사적 흐름과 실태를 잘 알 수 있는 사료를 파악하여 전해준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 방식이 딱딱하지 않고 친구가 들려주는 조금은 진지하게 듣게 되는 가정사같다.

  많은 이야기 속 머리를 치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노조 투쟁으로 얻은 주간업무에 대한 광산노동자들의 반응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 24시간 채광하는 교대근무가 사라지고 주간업무만 하게 되었지만 노동자들이 그렇게 달가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급여와 관련한 부분이 클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띵하게 했던 건 이 말이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는 저녁인데 그럼 우리는 하루종일 햇빝도 못 보고 살지 않느냐”

 

  비로소 이 말이 광산노동자의 ’일‘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모든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멸하는 직업 세계에 속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 또한 사라진 듯해서는 안될 텐데 살아온 삶이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를 높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AI로 대체되는 인간 노동에 대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다. 광산 노동과 이들의 노동이 다를까. 신성장산업이라는 정책 기조 속에 사라질 노동의 세계, 그 노동이 사라진다고 사람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저자가 계속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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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 ㅣ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전혜원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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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받는 투명인간 A.B.C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

 

전혜원, 서해문집, 2021-11-11

 

 

  비정규직이 역대 최대라는 기사가 뜬다. 어제, 산재사고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성과를 대대적으로 치하하는 모습 뒤로 2024년 23명이 사망한 아리셀 공장 대표들의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절규하는 유족들 모습이 겹친다. 대표들의 어마어마한 감형 기간 대비 유족들이 흘리고 흘릴 눈물의 시간이 뭐라고, 그렇게 또 지나갈 일이다. 반복된 산재사고는 늘, 형태가 같다. 그리고 어김없이 결과도 같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산재 사망자가 없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하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통계란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여지나 감춰지는 부분이 있다. 제조업 산재 사망자 수는 증가했다거나, 기사에서 지적하듯 노동자의 감소, 특히 “건설 경기 불황으로 현장이 줄어든 영향”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정부는 반박하며 “예방·감독과 현장의 안전 노력”이 이룬 결과라고 한다. 산재사고 발생 현장이 ‘제조업’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통계표를 보며 마냥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 ‘비숙련 노동자’의 증가는 ‘아리셀 공장 참사’에서도 드러난다. 생산 목표와 납품 일정을 위해 비숙련 노동자,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제품을 생산했다. 배터리를 다루는 위험한 생산환경에서 불량품 발생과 잇단 발열과 폭발이 이뤄졌음에도 공정을 계속했고, 공장은 비상상황에 대피하기 어려운 구조였으며 노동자들 대상으로 제품생산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안전관리’에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양형 사유는 유족과 합의란다. 놀라운 점은 “피해 회복 노력을 형량에 반영하지 않으면 피고인들이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줄이거나 포기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감형 사유다. 이건 늘 그래왔듯이 “돈이 장땡”이란 사고의 확정 아닌가. “유족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위로, 사과 한마디 없이 돈 몇푼 쥐어주며 처벌불원서를 받으려 하고 있는 회사 측을 용서할 수 없다(동아일보, 2025.1.9)”, "국가에 버려진 느낌(한겨레, 2026.10.20)는 유족이 말이 눈에 밟힌다. 이 또한 얼마나 반복되어 본 모습인가.

  왜 한국에선 ‘노동’과 ‘노동자’는 멸시받아 왔고 더불어 ‘불온’의 대상이 되었는가. 5월 1일 조차도 ‘노동자’라는 말 사용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한사코 ‘근로자’를 고집하던 한국 사회. 더구나 더 들아가서 ‘노동자’를 더 세세하게 분류하며 차별을 더 공고히 한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필연적으로 모두 노동자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그토록 세세하게 구분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에 매겨진 가치,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시장’이라 말하겠지만 그 ‘시장’에서 형성된 가치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농업사회를 거쳐왔음에도 너무도 오래 ‘육체적’ 노동을 천박하게 여겨 온, 세뇌된 인식이 그 기본틀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특정 집단들이 계속 이 틀이 유지되도록 힘쓰고 있다.

  저자는 이런 오래되고 고착화된 노동에 대한 인식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기자로서 노동현장의 취재를 바탕으로 현재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문제에 주목한다. 저자의 논점은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에서 주장하는 바와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논쟁적으로 접근한다.   2021년 출간된 책이니만큼 취재한 노동현장은 2020년 이전이다. 그때와 지금,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다를까. 다만, 오래 묵은 기본적인 관념틀을 배제하고서 ‘노동’에 대해 말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떠올린 건 “산재”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부분이 산재사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재를 다루며 소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일터에서 죽지 않을 권리-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노동현장 사고가 발생 기사를 보면 놀랍지 않다. 노동현장의 A씨, B씨, C씨……끝없는 A, B, C. 사고 발생 날짜와 사업장소만 다를 뿐 사고가 발생한 상황, 원인은 복사한 듯 똑같고 사고가 발생한 후 머리를 조아리며 울어대는(울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사업주의 모습, 시간이 지나면 특정 업체의 사고 소식은 다른 업체의 사고 소식을 덮이고 그렇게 어디가 어디였나 가물한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희미해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업주들은 대형 로펌을 수임하고 최소한의 법적 처벌을 받고, 죄가 사해진 양 환하게 웃는다. 사고가 나서 울고 사고처리 과정에서 울고 법적인 판결 후에도 우는 건 오로지 노동자, 미치게도 똑같은 데자뷰.

 

2016년 지진 당시 KTX 김천구미역에서 사람이 두 명 죽었다. 선로 보수유지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달려오는 열차에 치인 것이다. 그날 지진으로 열차가 두 시간 정도 연착된다는 사실은 《연합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도 수차례 예고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정작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2021년 출간된 이 책의 기사 속 KTX사고, 그후로도 몇 년이 지났건만 난 지역만 달리한 이러한 기사를 더 본 기억이 있다.

 

*청도 무궁화호 열차에 선로 작업자 7명 치여…하청근로자 2명 사망 <2025.8.19. 연합뉴스>

*아산 KTX 선로 공사장서 30대 작업자 컨베이어 벨트 끼여 숨져 <2026. 7. 1. 뉴스1>

*경부선 의왕역서 작업자 열차 사고…50대 코레일 직원 심정지 <2026.08.29. 기호일보>

 

  특히, 경북 청도에서 발생한 사고는 사고내용이나 원인이 같다. SPC 빵 공장과 쿠팡의 사망사고는 얼마나 또 반복적이었던가. 그래서 사고 후에 달라졌는가. 열악한 근무환경의 변화보다는 그저 사람이 대체될 뿐.

  저자는 2016년 사고 전까지 “외주화는 선험적으로 나쁜 것이며, 산재는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로만 여겼”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관점을 전환한다. “긴박하고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산된 고용구조가 어떻게 ‘조율 실패’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외주화가 왜 위험한지”. 물론 노동의 영역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상호작용’임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난, 그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이 균등하지 않고 불균형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랜 관념에 따른 ‘노동천시’, 기업가와 법률가란 행위자들의 힘을 우선하는 이 사회의 세계에서 ‘노동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제외하고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비교적 ‘노동’에 대한 가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여겨지는 유럽의 경우, 이러한 산재사고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

 

기업이 책임을 면하려면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기술 수준이나 경제 상황, 동종업계 관행에 비춰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를 했다고 기업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반면 한국은 안전규정을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주로 중간 이하 관리직)’가 지켜야 할 규정으로 이해한다. 사고가 나면 그 회사의 안전보건 시스템에 책임을 묻기보다 노동자 개인의 규정 위반을 처벌한다.‘

 

  그러고 보니 화성에서 23명의 사망 사고가 하나 더 떠오른다. 1999년 역시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씨랜드청소년 수련원 사고 말이다. 이 사고에서도 23명이 사망했고 대부분 어린이였다. 이 사고 대표자는 징역 1년형(금고 4년)을 받았고 씨랜드 사고가 난 그 장소 부근에서 대형 까페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1999년에도 처벌을 강화해야 하니, 처벌이 약하니 어쩌니 말은 많았는데 이렇다. 1999년 이후로 얼마나 흘렀나. 대한민국은 선진국,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문화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얼마나 변화했나.

 

누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그 죽음이 실은 무겁지 않다는 뜻이다. 그 죽음들에 부아가 치미는 인간의 수가 적다는 의미다. 그게 조직이든 사회든. 그럼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안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 사고는 일어나기보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많고, 사고가 나면 그건 운이 없고 재수없는 일일 뿐이고, 사고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 사고가 난 뒤의 벌금이 더 수익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끝없이 나오는 ’사람‘을 돈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행위자들, 그의 동조자들이 ’법‘을 통해 만들어내는 형태다. 이 책의 소갯말이, “소멸하는 일자리와 모멸받는 사람들에 관한 한국 노동”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줄, 이전보다는 나은 상황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하루하루 모멸감만 쌓여간다. 소멸하는 일자리보다 먼저, 내가 소멸해 버릴 것 같다.

 

 

*연합뉴스, 2026.10.20.(https://v.daum.net/v/20261020100237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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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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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감촉


시간의 감촉, 은희경, 문학동네, 2026-06-22.

 

  요즈음 난 ‘몸’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노년에 대해서도.

  이 소설은 ‘몸’에 대한 기억이다. 아니, 그보다는 ‘밀도 있는 삶의 기록,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를 설명하려 해도 ‘나’의 생김새는 ‘몸’이란 형체에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보다는 ‘정신’에 더 우위를 두듯 이야기한다. ‘한낱’이나 ‘기껏’ 육체로 폄하하고 병든 육체일수록 노화된 몸일수록 더더욱 소외되기 일쑤다. 하지만 ‘몸’과 분리한 ‘정신’이 있을 수 있을까. ‘몸’은 필연코 ‘정신’, ‘영혼’을 발산하는 기본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몸’의 변화에 따라 삶의 변화가 이어지듯이. 그렇다.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몸’이란 형체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소설 속 안나가 말하듯 “몸에 관한 한 타인은 결코 개입하지 못한다. 남이 볼 때 남루하든 비참하든 한심하든 몸의 당사자에게만 유일하게 감각되는 고유의 삶인 것이다.”

  여기 ‘몸’의 주인 둘이 있다. 안나와 경선 두 자매다. 자매의 이름이 안나와 경선인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듯 이름을 들여다본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항렬자를 쓰는 탓에 이름 끝자만 다르다. 대체로 형제자매라면 비슷하게 이름을 지을 텐데,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어감으로 자매의 이름을 설정한 것에 쓸데없이 의문을 품는다. 더구나 안나는 1월생, 경선은 12월생이다. 의문은 품지만 끝내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하고, 괜시리 이름 때문인지 ‘안나’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삶, ‘경선’은 경쟁적이며 북적한 삶을 그 이름 속에 품은 듯이 여긴다.

  안나가 예순다섯 생일 아침 홀로 커피를 마시며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위와 단조로움’이 한몫한다. 안나는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지만 하루의 삶을 유지하려면 ‘몸’이 기본적인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유기체의 숙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년 정도는 보지 않고 지낼 정도인 자매, 오랜만에 만난 ‘경선’의 변화, 늙음을 압축적으로 느낀다. 안나는 경선의 간병인으로 병원에서 경선을 만난다.

  ‘경선’은 오피스텔에서 “무력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깨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전남편의 사망 소식과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에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실체는 잠든 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태로 상상”된다. “죽음은 소멸이고,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매가 만나게 되니 서로가 지난 과거를 떠올린다. 안나는 경선을 중심으로 경선의 탄생과 백일, 그즈음의 이웃들과 친척들까지, ‘생로병사’의 사건들을 생각하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들을 생각한다. 또한, 안나의 사랑과 경선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경선의 경우, 막연한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 따라오고 있음도.

  일년에 한번쯤 만날까 하는 두 자매는 격렬하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하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야 함께 성장한다지만 성인이 된 후에야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래도 동생의 병간호를 부탁하고 해줄 만큼의 사이인 자매. 사사건건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차이를 나타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자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마음은 그토록 지난 기억을 갖고 있는 ‘어린’ 자매이건만 지금 두 자매는 시간의 흐름에 따는 필연적인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경선은 ‘노화’와 함께 ‘병마’까지를 ‘몸’에 새기고 있는 순간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안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에게 답답함과 짜증을 느껴왔는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자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자기혐오가 우울증이 되고 우울증이 때로 증오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경선에게 안나가 그 대상이 된다.

  두 자매는 노인으로 보이기 싫은 시기에 이르렀고, 노화와 병마 속에 이처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은 “노인으로 대해지는 게 불만스러운 마음 안에는 스스로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잣대에 맞춰야 했던 데 대한 분함과 심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혐오 속에 점멸될지 모르는 두 ‘노인’은 경선의 손녀 ‘다니엘’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며, ‘우리의 첫 경험에 대한 게임’을 하며 생각의 전환을 맞는다.

  경선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가난과 고독에 견주며 그보다는 낫다는 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던” 경선도 왜 안나와 친밀한 사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자매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며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하며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마는 것”임을 인식한다.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두 노인의 ‘몸’에 대한 이야기, ‘노인’으로서 ‘노화’된 몸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삶의 기록과 엉기어 자연스럽게 노화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것은 몸이 살아온 시간만큼 겪은 그 수많은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고 기억을 재생하며 현재에 그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화해’를 담는다. 비록 힘겨운 몸으로 인해 짜증이 나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는 길이다. 비록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나 남았을지, 아니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 모른데도 마냥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첫 경험인 듯 첫 기억인 듯 살아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것은 모두 ‘첫’이니까.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두 자매처럼 노년과 병마에 힘겨운 부모님이 ‘노화’를 ‘노년’을 좀더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좀더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두 자매는 부모님에 비해서 너무나 청춘이다. 육십 오세, 그래 아직은 청춘 아닌가. 세상의 변화는 빠르기도 하다. 삶을 살아내는 데 좀더 바빠 어떤 여유를 가지기 힘겨웠던 부모님 세대, 삶을 반추하기도 전에 ‘자기혐오’ 속에 허우적거리는 건 아닐지, 아니 그러고 있는 것도 같은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를 시간이 간다. 자식에게도 힘겨운 시간이다. 처음 겪어보는 현실이니까. 안나와 경선처럼 저 나이가 되면 노화를 긍정하면서 더 깊어진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손에 쥐어지는 시간의 감촉이 갑자기 너무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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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성수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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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만 더 숨쉬다가


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성수진, 나무옆의자, 2026-05-20.

 


  도망치는 일도, 힘을 쏟아야 한다. 책을 덮고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유리 조각 시간’이란 게 가늠되지 않아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했다. 시간이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되는 것을 말하는가.

  책을 읽는 동안엔 오래 전 스쳐 본 유튜브 영상이 떠올랐다. 단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몇 날 며칠 유튜브를 헤맸다. 실로 일주일 넘게 미친듯한 집착이었다. 마침내 찾았을 때 감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몇 단어에서 기억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왜 그토록 이 기억을 완전하게 할 원본을 찾고 싶었을까. 대략 6분 정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열아홉 살에 엄마, 아빠, 오빠를 교통사고로 한번에 잃었다. 장례식 후 가족 따라 가려고 양화대교에 섰다. 10분만 더 숨 쉬다가 뛰어야지, 가야지 하다가 해가 뜨고 지나가는 차들이 많아져서 조금 기다리는데 조금씩 밝아지면서 보이는 강물이 너무 예뻐서 잠깐 보고 있다가 잠시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서 있었는데 자전거가 지나가다 멈췄다. 자전거에서 누가 손을 잡았는데도 세상에 감흥이 없어 놀라지도 않고 그 사람을 쳐다보는데, “새벽공기 좋지?”하는데 눈물이 났다. 따스한 말에 주저앉아 마구 울었고 또래였던 그 친구가 자기 얘기를 오래도록 들어주었다.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챙겨줘서 살고 싶어졌다고. 그 친구가 말하길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너무 슬퍼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옆에 갔서 말 건 거라고. 스무살 둘이 원룸을 구해서 같이 의지하며 잘 생활하며 행복하게 지냈는데 5년 지나 그 친구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울기만 하고 쓰러지기도 했는데 열아홉 살 때처럼 극단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친구가 알려준 것이 너무 많아서, 그 친구가 준 사랑에 힘입어, 삶으로 이끌어준 그 친구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설 속 유영은 하루하루 ‘10분만 더 숨 쉬다가’를 읊조리는 ‘나’ 같다. 그러면 ‘경진’은 그 친구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놓여본” 유영은 아홉 살에 감각적으로 그 실체를 파악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사고로 사망한 언니 유경의 존재였다. “곁에 있는 나를, 내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듬어줄 것”을 바라지만 영원한 아픈 손가락 유경이 엄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유영은 엄마가 “내가 죽어야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영은 제 존재에 대한 의심과 외롭고 쓸쓸함을 가득 안고서 성장하게 된다.

  가족 속 결핍을 외부에서 찾게 된 유영은 중학생 시절 채팅 사이트에서 ‘경진’을 만나 우정을 나눈다. 채팅 속 문장으로 만난 ‘경진’, 채팅명 ‘델’은 유영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였다. 유영은 “찬란한 아픔. 아름다운 구역감.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말로 하면 빛바래고 어딘지 유치해지는 그 느낌”을 델하고만 공유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던 ‘경진’에게서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 간호사가 된 유영은 업무 문제와 가족 안에서 여전히 편치 않은 상황에서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병원을 그만두고 출국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5년 만에 경진에게서 메일이 도착한다. ‘경진’이 보내온 ‘유영’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돌이키면 상처 가득한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채팅으로만 만나던 둘이 처음으로 만나던 날, 유영은 다리 난간에 섰었다. 그날 델은 필사적으로 유영을 끌어안았다. 이제야 생각하면 그때 유영이 다리 난간에 선 것은 ‘치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는지 그때 델은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듯한 태도”로 유영을 붙들었다. 그날 델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울던 유영은 델의 왼쪽팔에서 ‘부풀어 오른 흉터’를 보았다. ‘하나의 긴 선과 그것을 가르는 짧은 선들을’. 델은 주머니에 유리 조각을 넣고 다니며 제 몸에 상처가 나길 기다리는 아이였다. 그런 델, 아니 경진은 “자신이 어떤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지 파악했으며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면서 연락이 뜸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사랑과 우정의 공통된 과정”이지만 그래도 변화된 관계가 눈물 날 만큼 서글펐던 유영은 갑작스런 경진의 소식에 불길한 느낌과 함께 경진을 찾는다.

  아마도 다리 난간에 섰었던 유영과 이를 막으려던 경진의 모습에서 “10분만 더 숨쉬다가” 영상이 연상되었을 거다. 5년이라는 시간 또한 연상작용에 한 역할을 했을 테고. 물론 유튜브 영상 속 10분만 더 숨쉬다가와 유영이 가진 상처와 외로움이 ‘가족’으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다르다. 그 곁에 선 ‘친구’의 존재가 삶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숨을 쉬게 해주는 존재인지는 알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갑작스런 소식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유영이 생각한 것처럼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이 반복적인 과정에서 가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게 될 때,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뭐, 그런.

  학창시절엔 이상하게도 ‘친구’에 대해 ‘우정’에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뭔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해야 하는’ 형태로 움직였던 것도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은 친구에게 본능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신경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간의 길이’의 우위를 ‘우정’의 선택 순위에 높여 놓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취향이나 생활반경 내 존재하는 이들이 우정의 대상이 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특정한 몇을 제외하고 직장에서 만난 관계는 오래 유지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때 만난 친구들일수록 취향이나 사회를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가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가끔 생각나는 친구도 있고. 달라진 게 있다면 한때는 ‘친구’란 같은 나이인 경우에 한정했다면, ‘친구’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 속에 내가 ‘유영’이라면 시간이 흘러 찾아온 이 상황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그렇게 각별한 친구야?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며…….”

희주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마음속에 아주 확고하게 다른 결심이 들어섰다.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는지,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직 내게 중요한 건 김경진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친구’라는 단어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김경진. 우리가 서로를 만났다는 것.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경진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경진은 “자신이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나는 영화나 소설 속에 묘사되는 ‘멋진’ 친구의 모습이 되고자 한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엔 내겐 그런 친구가 있는가란 물음을 하게 되곤 한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오면서 사소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일들로 관계를 끊었다고 얘기하는 주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뒤늦게 ‘관계를 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유영은 ‘각별한 친구’는 몇 번 만나지 않은 것 정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났다’는 이유, ‘존재’ 자체로 ‘김경진’을 각별한 친구로 정의했다. 그들의 학창시절이 그 기억이 유영과 경진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요인이 된다. 마음 속에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어떤 시간을 나누었느냐가 현재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친구란 “삶으로 이끌어주는” 존재, 지금은 이 말이 와 닿는다.


손바닥에 유리 조각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주병 혹은 사이다병이 깨지고 난 뒤의 시간을 짐작해보았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모래사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서히 마모되어온 시간을. 수많은 모래알 사이에서 나는 초록으로 빛나는 작은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 경진에게 건네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경진은 그것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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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비테이 -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 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
최재천 지음 / 지식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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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심비우스


히스토리아 비테이 

-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 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  

최재천 (지은이), 지식서재, 2026-06-08.



  ‘히스토리아 비테이Historia Vitae’는 저자가 정의한 ‘역사와 삶의 관계’를 의미한다.

  “Historia Magistra Vitae(역사는 삶의 스승이다)”는 로마의 정치 사상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변론가에 대하여』에서 역사를 정의한 말이다. 이 책은 “지구가 탄생한 46억 년 전부터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지구 역사의 빅히스토리”를 다루기 때문에 저자는 이 말에서 제목을 차용한다.

  최초의 생명 탄생부터 지금까지 지구 생명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변화했다. 지구 탄생 46억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담기에 328쪽은 매우 적다. 저자가 택한 방법은 지구 생명체의 탄생과 더불어 생태계 변화에서 생명체의 소멸과 진화, 그 생명력을 주요하게 다룬다. 더불어 그에 생명체에 대해 종종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부분을 질문 형태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겪어온 위험한 생태계와 더불어 현재 진행되고 있고 곧 도래할 위험한 생태계 환경에서 ‘생명체’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들은 무언가.

  지구 탄생은 46억 년 전이다. 우주를 떠돌던 성운이 뭉쳐져 지구가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8억 년쯤 뒤 “늪처럼 물이 있는 환경에서 다른 것은 할 줄 모르지만 자기와 똑같이 생긴 물질을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이상한 화학물질이 어쩌다 우연히 탄생”했다. 이 지구 최초 생명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받으며 분화를 거듭한 결과,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했다.

  다양한 생명체, 그중에 “인간 종, 호모 사피엔스”가 있다. 동물이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으로 나누어지고 포유류 일부는 영장류로, 영장류에서 약 30만 년 전에 하나의 가지 끝에서 탄생한 인간 종, 그러니까 “모든 생명이 하나로부터 왔다는 다윈의 ‘생명 일원성’”. “인간”이 모든 생명체의 우위에 있는 별도가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다윈이 탐구 과정에서 이를 ‘진화론’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자연이란 항상 경쟁적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의 몸부림이지만 ‘누가 더 강한가’에 집착하는 인간이 자연을 그렇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식물은 동물보다 열등하다고 치부하고, 또다시 동물은 ‘본능’에 따르는 존재로 인간은 ‘이성’이 있음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라고 했듯 식물의 능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사과나무의 입장도 들어 보자고 한다. “사과나무는 자신의 씨앗을 먼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동물을 이용한다.” 식물은 단것으로 적극적인 구애 활동으로 벌을 유인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1983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진은 곤충 공격 시 공격받지 않은 쪽의 나무들도 유독한 화학물질을 내뿜어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매커니즘으로 곤충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많은 연구들에서 알려졌듯이 동물의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정교화되며 단순하지만 않은 의사소통을 사용하기도 하며 짝짓기 시에는 다른 종의 의사소통 수단을 익혀서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인간에 대해서만 보다 가치를 부여하는 오랜 습성을 가진 인간은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홀로 잘난 종이라고 생각하며 독야청청 살다가는 자멸할 거라는 것, 자연은 모든 생물과 함께 하는 ‘장’이다.

  오래도록 인간이 파괴해 온 자연을 되살리려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의치 않다. 기후변화는 너무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저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뇌의 4단계 ‘설명의 뇌’로 보는데 이것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었고 “소수 집단으로 몰려다니던 네안데르탈인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가 열등한 신체 조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건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심비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저자가 거의 30년 전부터 제안한 새로운 학명으로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하지만)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라고 주장했다. _데이비드 윌슨

 

  저자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로 인한 이익은 혼자 가지려는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기 쉽고 결국 응징당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호혜성 이타주의를 발달시키는 진화 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낸 효율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팬더믹을 겪고 기후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다. 다른 생명체들이 하나의 속 안에 여러 종들이 공존하며 살아갈 때 인간 종 사피엔스만이 같은 호모 속에 속하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을 없애고 독야청청 살아남았다. 그뿐인가. 수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킨 이력이 있다. 과거에만이 아니라 최근에도 진행형이기도 하다. 어쩌면 깊이 박혔을 ’멸종의 DNA에 “데이비드 윌슨”의 말이 유효할까. 아니, 동물도 본능만이 아니라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행동이 정교화된다는데, 인간이라면 학습하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양성’을 인식할 수 있는 충분한 사료들이 존재함에도 자연을 보며 좀더 겸허해지고 공존하는 방식에서 비껴가는 현재에 끊임없이 자연의 생물들을 통해 자연은 이러하다고 보여주고 있음에도 ‘인간은 말이야’로 받아치고 있는 듯하다.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가 계속 인기라고 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인”은 생존과 진화의 측면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데 여전히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는데 급급한 인간이다. “호모 심비우스”, 저자가 30년 전부터 주장하던 학명인데 오래도록 이 학명이 확산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함께”,“같이”라는 공생의 말이 공허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건만. 과연, 공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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