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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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감촉


시간의 감촉, 은희경, 문학동네, 2026-06-22.

 

  요즈음 난 ‘몸’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노년에 대해서도.

  이 소설은 ‘몸’에 대한 기억이다. 아니, 그보다는 ‘밀도 있는 삶의 기록,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를 설명하려 해도 ‘나’의 생김새는 ‘몸’이란 형체에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보다는 ‘정신’에 더 우위를 두듯 이야기한다. ‘한낱’이나 ‘기껏’ 육체로 폄하하고 병든 육체일수록 노화된 몸일수록 더더욱 소외되기 일쑤다. 하지만 ‘몸’과 분리한 ‘정신’이 있을 수 있을까. ‘몸’은 필연코 ‘정신’, ‘영혼’을 발산하는 기본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몸’의 변화에 따라 삶의 변화가 이어지듯이. 그렇다.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몸’이란 형체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소설 속 안나가 말하듯 “몸에 관한 한 타인은 결코 개입하지 못한다. 남이 볼 때 남루하든 비참하든 한심하든 몸의 당사자에게만 유일하게 감각되는 고유의 삶인 것이다.”

  여기 ‘몸’의 주인 둘이 있다. 안나와 경선 두 자매다. 자매의 이름이 안나와 경선인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듯 이름을 들여다본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항렬자를 쓰는 탓에 이름 끝자만 다르다. 대체로 형제자매라면 비슷하게 이름을 지을 텐데,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어감으로 자매의 이름을 설정한 것에 쓸데없이 의문을 품는다. 더구나 안나는 1월생, 경선은 12월생이다. 의문은 품지만 끝내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하고, 괜시리 이름 때문인지 ‘안나’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삶, ‘경선’은 경쟁적이며 북적한 삶을 그 이름 속에 품은 듯이 여긴다.

  안나가 예순다섯 생일 아침 홀로 커피를 마시며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위와 단조로움’이 한몫한다. 안나는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지만 하루의 삶을 유지하려면 ‘몸’이 기본적인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유기체의 숙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년 정도는 보지 않고 지낼 정도인 자매, 오랜만에 만난 ‘경선’의 변화, 늙음을 압축적으로 느낀다. 안나는 경선의 간병인으로 병원에서 경선을 만난다.

  ‘경선’은 오피스텔에서 “무력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깨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전남편의 사망 소식과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에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실체는 잠든 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태로 상상”된다. “죽음은 소멸이고,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매가 만나게 되니 서로가 지난 과거를 떠올린다. 안나는 경선을 중심으로 경선의 탄생과 백일, 그즈음의 이웃들과 친척들까지, ‘생로병사’의 사건들을 생각하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들을 생각한다. 또한, 안나의 사랑과 경선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경선의 경우, 막연한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 따라오고 있음도.

  일년에 한번쯤 만날까 하는 두 자매는 격렬하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하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야 함께 성장한다지만 성인이 된 후에야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래도 동생의 병간호를 부탁하고 해줄 만큼의 사이인 자매. 사사건건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차이를 나타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자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마음은 그토록 지난 기억을 갖고 있는 ‘어린’ 자매이건만 지금 두 자매는 시간의 흐름에 따는 필연적인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경선은 ‘노화’와 함께 ‘병마’까지를 ‘몸’에 새기고 있는 순간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안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에게 답답함과 짜증을 느껴왔는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자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자기혐오가 우울증이 되고 우울증이 때로 증오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경선에게 안나가 그 대상이 된다.

  두 자매는 노인으로 보이기 싫은 시기에 이르렀고, 노화와 병마 속에 이처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은 “노인으로 대해지는 게 불만스러운 마음 안에는 스스로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잣대에 맞춰야 했던 데 대한 분함과 심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혐오 속에 점멸될지 모르는 두 ‘노인’은 경선의 손녀 ‘다니엘’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며, ‘우리의 첫 경험에 대한 게임’을 하며 생각의 전환을 맞는다.

  경선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가난과 고독에 견주며 그보다는 낫다는 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던” 경선도 왜 안나와 친밀한 사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자매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며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하며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마는 것”임을 인식한다.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두 노인의 ‘몸’에 대한 이야기, ‘노인’으로서 ‘노화’된 몸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삶의 기록과 엉기어 자연스럽게 노화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것은 몸이 살아온 시간만큼 겪은 그 수많은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고 기억을 재생하며 현재에 그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화해’를 담는다. 비록 힘겨운 몸으로 인해 짜증이 나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한걸을 더 나아가는 길이다. 비록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나 남았을지, 아니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 모른데도 마냥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첫 경험인 듯 첫 기억인 듯 살아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것은 모두 ‘첫’이니까.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두 자매처럼 노년과 병마에 힘겨운 부모님이 ‘노화’를 ‘노년’을 좀더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좀더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두 자매는 부모님에 비해서 너무나 청춘이다. 육십 오세, 그래 아직은 청춘 아닌가. 세상의 변화는 빠르기도 하다. 삶을 살아내는 데 좀더 바빠 어떤 여유를 가지기 힘겨웠던 부모님 세대, 삶을 반추하기도 전에 ‘자기혐오’ 속에 허우적거리는 건 아닐지, 아니 그러고 있는 것도 같은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를 시간이 간다. 자식에게도 힘겨운 시간이다. 처음 겪어보는 현실이니까. 안나와 경선처럼 저 나이가 되면 노화를 긍정하면서 더 깊어지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손에 쥐어지는 시간의 감촉이 갑자기 너무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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