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봄 2024 ㅣ 소설 보다
김채원.이선진.이연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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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밤

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



소설 보다 : 봄 2024, 김채원, 이선진, 이연지, 문학과지성사, 2024-03-14.

 


”그거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밤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이 속에 갓 난 어둠이 있는 셈이지. 그런데 사람의 몸속에 밤이 심겨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게 버림받아. 너도 그렇고. 그런데 나랑 내 딸은 버림받지 않았단다. 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선택했고, 내가 계속 밤을 품고 있기를 선택한 거야. 너,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천만에.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차 있는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어. 다 내 밤 덕분이지. 그리고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이담에 나는 내 딸한테 내 밤을 물려줄 거란다.“

 

  빛조차 감지 못하는 전맹인 엄마 ‘미수 씨’의 말이다. 보통 밤은 어두움이고 불길하고 불안정함을 대표하는 말이다. 다운의 엄마 미수 씨의 ‘밤’은 그렇지 않은 걸까. 제 아이에게 ”밤을 물려줄 거라“ 말하는 저 자랑찬 언사라니. ‘밤’이 장애를 말한다면 다운은 전맹인 엄마 미수의 장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결국 제 엄마처럼 흰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다운이다. 엄마는 제 말을 잘 지킨 셈이다.

  어떤 존재에게 매혹됨은 그에 대한 많은 것을 닮고 싶게끔 한다. 사소한 하나라도 같은 것을 찾아내고야 말며 닮아지려 버둥거리게 한다. 어린 시절엔 동화 속 공주가 그렇게 부럽고 좋다고 하면서도 마녀에게 끌리게 된다. 겁먹어서 얼어붙은 건가? 마녀들을 매력적으로 그리며 기존 동화를 전복시키는 이야기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속절없는 끌림은 결핍과 욕망에서 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모녀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인 ‘미숙’ 또한 다운을 좋아하는 만큼, 이들에 대한 끌림이 있는 만큼 제게도 ‘밤’이 있노라(”나한테도 있어요, 나만의 밤이“) 외치며 기꺼이 제 밤을 찾아내고야 만다.

  미숙의 밤들……. 미숙의 삶에 켜켜이 쌓인, 묻어둔 어떤 밤들. 어쩌면 미숙은 제가 가진 ‘밤’이 있기에 그 모녀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 삶 속 그 밤들이 마냥 어두운 채로 제 삶을 휘감지 않아도 됨을 알게 되었을지도. 조금씩 꺼내는 미숙의 ‘밤’이 미숙을 외롭고 힘들게 두지 않고도 미숙이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위로와 격려, 채찍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밤’을 힘있는 매혹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아련함이 있다. 무서운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가 그 또렷한 경계가 파스텔톤으로 바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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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토요일 새벽 - 제1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정덕시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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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거미


거미는 토요일 새벽,  정덕시, 은행나무, 2024-11-25.

 


  “개가 사람을 물었는데”

  옆집 개가 사람을 물었다. 피를 닦을 휴지를 찾고 병원 얘기가 오가는 소리가 휴일 새벽 동네를 흔들었다. 개에 물린 남자는 다음날도 찾아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외쳤다.

  옆집 대문을 지날 때면 개가 짖을 때가 있었다. 개를 키우지 않고 개의 습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개가 짖을 때면 가끔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집인데 설마 경계한다고 그렇게 짖어댈까 싶어서. 왜 어떨 때는 짖었다가 어떨 때는 짖지 않을까 의아함도 가지며. 사람을 물은 저 개가 또 사람을 물게 될까. 그동안 짖는 일은 있어도 사람을 물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왜 그 사람은 물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반려동물 관련 다양한 산업이 성행하고 물림 사고 등 반려동물로 인한 피해, 반려동물 유기 문제도 증가하고 있다.

  반려식물도 키우기 힘든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더더욱 난제라 내게 속하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반려동물’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을 갖는 일은 그또한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일 테니……. 어쩌다 나도 ‘타란툴라’를 마주치면 스파크가 튀거나 은근하게 소유하고픈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반려동물 ‘두희’에 관한 이야기다. 반려동물의 종류는 ‘거미’, ‘타란툴라’이고 화자인 수현에겐 17년을 함께 한 ‘가족이었다’. ‘두희’의 죽음으로 시작해 어떻게 두희와 함께 하게 되었는지 ‘두희’와 함께 했던 날들을 회고하며 ‘두희’가 수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라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결국 반려거미를 보내고 남아있는 자의 넋두리다. 떠난 것에 대한 애도이며 상실에 대한 위로다. ‘거미’를 반려동물로 삼고 살아가는 수현은 ‘거미’를 반려동물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외롭고 힘겹다. 수현은 ‘두희’와 교감하고 있지만 이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며 ‘두희’로 인해 일상이, 관계들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거미 ‘두희’를 떠나보내고 난 뒤의 수현이 기억하는 17년은 아주 길다. 두희가 가족이기에, ‘가족’에 대한 얘기가 많다. 경험한 자로서 수현이 느끼는 ‘가족’에 설명이 충분히 이해된다.

 

“괜찮아. 가족이잖니. 원래 가족끼리는 한 번씩 싸우면서 지내는 거야. 너무 화목하기만 하면 그것도 밋밋하고 재미없어.”

엄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사람처럼 활기가 넘쳤다. 엄마에게 가족이란 모든 사건의 주범이며,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것 같았다. 내게도 가족이란 마법 같은 단어였다. 그것은 평생을 할애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단번에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두희는 내 가족이었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에게 불가피한 영역을 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 가족인 ‘두희’를 수현은 이해했을까. 얼마나. ‘반려묘’만 해도 사람의 손길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특별히 스킨쉽도 쉽지 않고 비바리움에 두고 ‘보는’, 어쩌면 ‘관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두희’에 대한 수현의 마음이란 ‘교감’이 아닌 일방적 관계인 것은 아니었을까. 장식장에 둔 고가의 장식품, 명품가방을 대하는 그런 것. 글쎄, 반려견이 제 이름에 반응하지만 ‘두희’라 부르면 그것이 제 이름인지조차 알지 못했을 타란툴라 거미에 대하여.

 

“두희는 자기 이름이 두희였다는 걸 알았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걔도 너의 무언가를 알아채는 순간들이 있었을 거야. 그게 아주 찰나였을지라도.”

  오로지 열일곱해를 두희에게 마음쓰며 삶의 순간순간을 함께 했던 수현은 ‘두희’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두희’의 존재가 그저 나쁘기만 한다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함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긍정의 영향을 미쳤음을,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러한 존재였음을 느끼고 알아간다.

   내 생애 의미있는 어떤 것, 그것이 무엇인든 그 존재가 나를 더욱 더 단단하게 올려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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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4 ㅣ 소설 보다
성혜령.이주혜.이희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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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는 愚美[최애의 아이]


소설 보다 : 겨울 2024, 성혜령, 이주혜, 이희주, 문학과지성사, 2024-12-09.

 

 

  딱히 열광적으로 연예인의 팬이 된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한국 특성으로 대표되는 아이돌의 세계에 놀랄 따름이었다. 열광적이라고 한다면 관련된 콘텐츠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굿즈’라고 표현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라거나 팬덤으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이돌 팬덤은 경계 너머의 세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경계를 넘어가는데 뭔가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고(조건보다는 진입장벽인가), 그 조건이란 대표적으로 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암튼.

아이돌 팬덤에 대한 관심과 인식 전환이 된 계기는 누가 뭐라 해도 12·3 불법계엄 이후 ‘남태령의 밤‘일 것이다. 눈오는 날의 키세스 군단, 응원봉. 그리고 응원 문화의 선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BTS 아미들까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급변하며, 사람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소설 보다 : 겨울 2024』에 수록된 「최애의 아이」의 ’우미‘와 같은 아이돌 팬도 있으니까. ’팬덤‘의 분위기와 지향하는 바가 있을지언정 개개인의 팬의 마음은 또 다를 테니까.

예전에, 커다란 스케치북 한 면을 모두 연필로 검게 칠하고 가수의 이니셜대로 지우고 있더라는 어떤 학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미는 고무지우개 위에 유리의 이니셜을 새기고 회의 시간에도 유리의 이름을 반복해서 적는 아이돌 유리의 팬이다. 애정하는 연예인에 대한 팬들의 행동은 소소하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우미는 다르다. 하긴, 그런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면 소설이 나아가겠는가. ’우미의 다름‘. 우미는 미성년이 아니며, ’최애‘ 아이돌 ’유리‘의 팬으로서 다른 것을 꿈꾼다.

  최애 아이돌의 연인이 되는 것은 아이돌 팬이라면 한번쯤은 꿈꿨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돌의 연애나 결혼 기사가 파파라치든 공식적인 연예기사로 보도되면 그 아이돌의 ’생명력‘은 끝인 경우도 허다하다. 우미는 ’연인‘이라는 환상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애 아이돌 유리의 아이를 갖는 것을 꿈꾸고, 이룬다.


그렇게 남자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던 순간이,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이십대가 생각나 슬퍼졌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 미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이 박여버린 높은 미적 기준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슬프게 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 기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진짜 비참하지?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의 아이를.

 

  우미의 이 꿈이 가능한 현실, 에 놀랍지만 우미의 이러한 독백을 보건데, 우미가 아이돌 ’유리‘를 애정하고 ’유리의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애정이 아니라 ’미‘에 대한 강박관념이 이루어낸 집착으로 보인다. 아름다움을 트로피처럼 갖추고 싶은 우미는 ’愚美‘가 아닐까. 아름다움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트로피처럼 갖고 싶은 ’우미‘가 있다면, 역시 그 욕망을 걸머쥐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또다른 이들이 우미의 대척점에 있다. 욕망에 관한 탁월한 쟁취능력이 갖추어진 익숙한 그들-정치인이라거나 권력층이라 일컬어지는 혹은 남성이라 대변될 수 있는-, 어쩌면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환경, 그들만의 공고한 카르텔, 시스템.

 

우미와 같은 화이트칼라 계층에 소시오 패스 비중이 높은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나라 곳간 빼먹는 건 눈감아도 공병을 훔친 기초 수급자 노인은 실형을 주는 판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처음부터 ’최애‘ 아이돌에 대한 우미 행동의 의외성은 소설 마지막까지도 이어진다. 단순히, 요즘 넘쳐나는 한국형 아이돌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이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행태를 다루는 건가 싶은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를 섞어 놓은 채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를 ’기겁‘하게 만든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황에 그저 놀라워하고만 있기에는 그저 개개인을 ’소시오 패스‘로 격앙하여 이야기하기에는 ’자기들만 인간인 줄 아는 역겨운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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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데이[탱크]


탱크, 김희재, 한겨레출판, 2023-07-25.

 


  탱크가 핫하기에.

  이 소설은 2023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덕분에 아니 때문에, 이 책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이 책에서 느꼈던 그 이미지에는 스타벅스가 일으킨 ‘탱크 데이’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탱크 텀블러를 확장하면 소설 속 탱크가 되려나.

 

  소설 속 탱크는 전투용 차가 아니라 ‘컨테이너’다. 5평 정도되는 텅 빈 기도실이다. 흔히 이러한 기도가 먹히는 곳이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듯 탱크 또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마을 야산에 놓인 밀폐된 공간이다. 그냥 놓인 빈 공간이 아니라, ‘자율적 기도 시스템’으로 ‘홍보’되고 커뮤니티에서 예약제로 운영되고 돈도 받는 곳이다. 마케팅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상업시설 같다. 최초의 탱크 설립자 ‘루벤’에게 사사 받아 ‘탱크의 시대’를 창립한 이는 황영경이라는데, 루벤의 이름은 종교 색채가 강하고, 이런 설립자 운운은 ‘사이비’ 냄새를 열렬하게 풍기기도 한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빈 컨테이너를 기도 공간이라며 운영하는데 왜 사람들은 종교 공간이나 시설이 아닌 이 탱크를 찾는가. 아, 비종교인도 있을 테니……. 그것도 그렇지만 ‘탱크에서 기도하면 원하는 미래가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그러한 형태로 이 공간은 홍보되었다. 근데, 바로 이런 이유가 ‘사이비’의 전형 아니던가.

  물론 소설에선 ‘탱크’를 이렇게 말한다. “뿌리 없는, 종교도 아니고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도 아니고 딱히 자기계발도 아닌, 그야말로 뭣도 아닌 것”이라고. 하지만 설립자 루벤은 주술처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텅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어쩌면 너무 뻔한 말. 그리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말. 이미 저러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탱크 데이’라는 날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이미 조롱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홀린 듯이 모여드는 이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 아닐까. 마음껏 욕설과 조롱을 펼칠 공간이 있다는 것, 허락이듯 구원이듯 그것을 허용하는 공간이 주어졌으니, 주저없이! 뭔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신성한’ ‘영험한’ 곳으로 홍보되는 탱크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그 삶에서 ‘어려움’과 ‘외로움’과 ‘불편함’과 ‘슬픔’ 등등을 겪은 이들이 찾을 것이라는 걸. 이들이 하는 기도의 내용은 욕망의 성취 혹은 결핍의 채움, 그리고 고통의 치유. 공간이 주는 상징에 ‘의미’와 ‘의지’를 더해 사람들은 제 결핍과 욕망을 내어놓는다. 어쩌면 자기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쏟아내고 버리고 싶은 ‘공간’으로서 사람들이 ‘탱크’를 선택했다. 어떤 이는 실제 종교시설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심리상담사를 찾거나 병원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점집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친구나 가족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탱크 데이’에 이 책이 떠오른 걸 보면,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사이비 종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로 탱크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탱크를 찾은 이들 중 왜 ‘둡둡’은 닉네임으로 나오는지, 왜 ‘둡둡’은 죽는지, 성정체성은 어떤 경우라도 해결되지 못할 문제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지만, 믿음과 신념에 관한 문제 이 부분이 강한 건 여전하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듯 작가는 한국에 ‘탱크의 시대’를 만든 황영경이 손부경에게 하는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 탱크를 믿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잘못된 숭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이야. 너는 언젠가 사람들이 탱크를 신으로 모시게 될 거라고 했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탱크 안에 가만히 앉아 억만장자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신자들만 남을 수도 있다고 했어. 그때 난 네가 나를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기도하는 이들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너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부경아, 그거 아니. 그렇게 사람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는 거. 너는 삶을 방어하듯 살지. 늘 최악의 것을 먼저 상상하고 그래야 최악의 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믿지.

 

  무엇이든 결국 선택한 자의 몫이라 이야기한다. ‘탱크’ 또한 그러한 것이라면, 컨테이너 ‘탱크’는 계속 이어질까. 적어도 ‘탱크’를 찾는 이들이 저마다의 사연들로 희망을 꿈꾸기도 하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한 ‘믿음’을 품는 곳이라고 한다면 ‘탱크 데이 스타벅스’는 어떤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적어도 ‘문화를 파는 공간’이라는 스타벅스에 맞게 어떤 문화든 파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겠다. 저렴하고 몰염치한 문화도 수용되는 곳. 그것을 부추기는 곳이 한국형 스타벅스라는 것. 권력을 향한 풍자도 아니고 5.18이나 민주적 가치나 활동, 참혹한 참사에 대한 조롱을 당연시하는 마케팅. 그러한 행태가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결재라인을 거치는 동안 전혀 걸러지지도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도대체 그 공간은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이런 일들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지, 이러한 행태를 해도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고 제미를 느끼고 나아가 돈까지 번다니, 그치지 않을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소설 속 탱크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탱크 데이’에 몰려드는 무리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행태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지속된 신념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지 탱크에 가두어 그들의 내면의 소리가 무엇을 뱉어내는지 듣고 싶, 아니 듣고 싶지는 않다. 뻔한 말같지 않은 말이 난립할 테니까.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그저 긍정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조금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더라도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한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싶어 숨을 돌릴라 치면 무섭게 되돌아가는 어떤 힘이 있는 듯, 계속 제자리를 맴돌게 하는 나라다.

  여러 사건들로 단련된 민주시민들이 탱크를 뒤집고 단도리를 하는데도 조금만 숨을 돌리면 되돌아가고 무수한 탱크 데이가 생겨나 회의가 들라치면, 이처럼 불매운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을 ‘방어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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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속삭임 ㅣ 위픽
예소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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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소란한 속삭임, 예소연, 위즈덤하우스, 2025-02-26.

 

 

  인터넷 시대 별의별 사람의 이야기를 빠르게, 많이 접하게 된다. 세상에 그런 사람(사람이라고 칭하기보다는 ‘인간’이라 칭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을 봤다고? 그런 일을 겪었다고? 놀라면서 눈으로 훑게 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 소설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다가와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일이, 어떤 상황에 동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내게 그 일이 일어나는가 아닌가도 관건이지만 이처럼, 타인에게 쉬이 ‘무엇을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특히나 소설 속의 이유를 들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문도 든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면 난 어떻게 행동하려나.

  마치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엮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하루하루를 보낸 일상인 것처럼 되어버린, 갈수록 세상에 대해 무감해지며 어떤 말도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 같은 요즘의 삶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연결을 꿈꾸고 있다. 타인을 힘들어하면서도 오히려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 때문일지도.

  그리하여 만들어진 연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해방클럽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속삭이는 모임’의 구성원이다. 그러니까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여야 하는’,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이 주요 활동인 모임. 급작스럽게 지하철에서 만나 만들어진 이 모임. 그러면 왜 속삭이는가.


중요하지 않아도 속삭임으로써 중요해져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허투루 하는 말은 없는 거죠.

 

  속삭임의 힘은 있는 건가. 분명 모임의 몇몇은 속삭임이 주는 강력한 힘을 느끼고 믿는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부드럽게 타이를 수 있는 힘.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할 수 있는 힘 같은 것.” 속삭이는 말의 힘을 믿으며 무엇이라도 속삭이지만 온갖 소리로 난무하는 세상에서 당연처럼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말이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보다 오래 전부터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고 금값이 비싸지고 있지만 웬걸, 한국 사회에서는 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긴 하다. 그리하여 모아와 시내 두 명의 회원만이 있는 모임에는 속삭임만이 아니라 ‘소란함’도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50대 여성 '수자'. 이리하여 제목이 ‘소란한 속삭임’인가.

  궁극적으로 속삭이는 모임에서 이들은 무엇을 해방하고자 하는 걸까. 어떤 비밀을 속삭이고 싶은 건지, 결국 속삭이는 모임에 합류하게 된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인지, 당연하게도 각자가 가진 사연이 드러나고, 그 사연을 소란함으로 또는 속삭임으로 상쇄하고자 할 것이다. 다만, 홀로가 아닌 채로.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 군데가 단단이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어떤 모임이란 추구하는 목표가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나간다. 급작스럽게 만들어졌다 해도 그렇게 어느 한 모임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것은 소설에서 나타난 것처럼 서로가 가진 필요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건 끼리끼리인가.

  짧은 소설 속에서 아래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내게 남은 이유와 슬픔 그리고 못내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악’ 때문에. 내게도 소란한 소삭임이 필요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만, 명동역 4번 출구를 지날 때면 이 모임을 떠올려보기는 할 듯하다.

 

'저는 슬퍼요.'

'왜요?'

'분명히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았어요.'

모아가 시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는 반대예요.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았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자꾸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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