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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토요일 새벽 - 제1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정덕시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평점 :
반려, 거미
거미는 토요일 새벽, 정덕시, 은행나무, 2024-11-25.
“개가 사람을 물었는데”
옆집 개가 사람을 물었다. 피를 닦을 휴지를 찾고 병원 얘기가 오가는 소리가 휴일 새벽 동네를 흔들었다. 개에 물린 남자는 다음날도 찾아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외쳤다.
옆집 대문을 지날 때면 개가 짖을 때가 있었다. 개를 키우지 않고 개의 습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개가 짖을 때면 가끔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집인데 설마 경계한다고 그렇게 짖어댈까 싶어서. 왜 어떨 때는 짖었다가 어떨 때는 짖지 않을까 의아함도 가지며. 사람을 물은 저 개가 또 사람을 물게 될까. 그동안 짖는 일은 있어도 사람을 물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왜 그 사람은 물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반려동물 관련 다양한 산업이 성행하고 물림 사고 등 반려동물로 인한 피해, 반려동물 유기 문제도 증가하고 있다.
반려식물도 키우기 힘든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더더욱 난제라 내게 속하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반려동물’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을 갖는 일은 그또한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일 테니……. 어쩌다 나도 ‘타란툴라’를 마주치면 스파크가 튀거나 은근하게 소유하고픈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반려동물 ‘두희’에 관한 이야기다. 반려동물의 종류는 ‘거미’, ‘타란툴라’이고 화자인 수현에겐 17년을 함께 한 ‘가족이었다’. ‘두희’의 죽음으로 시작해 어떻게 두희와 함께 하게 되었는지 ‘두희’와 함께 했던 날들을 회고하며 ‘두희’가 수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라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결국 반려거미를 보내고 남아있는 자의 넋두리다. 떠난 것에 대한 애도이며 상실에 대한 위로다. ‘거미’를 반려동물로 삼고 살아가는 수현은 ‘거미’를 반려동물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외롭고 힘겹다. 수현은 ‘두희’와 교감하고 있지만 이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며 ‘두희’로 인해 일상이, 관계들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거미 ‘두희’를 떠나보내고 난 뒤의 수현이 기억하는 17년은 아주 길다. 두희가 가족이기에, ‘가족’에 대한 얘기가 많다. 경험한 자로서 수현이 느끼는 ‘가족’에 설명이 충분히 이해된다.
“괜찮아. 가족이잖니. 원래 가족끼리는 한 번씩 싸우면서 지내는 거야. 너무 화목하기만 하면 그것도 밋밋하고 재미없어.”
엄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사람처럼 활기가 넘쳤다. 엄마에게 가족이란 모든 사건의 주범이며,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것 같았다. 내게도 가족이란 마법 같은 단어였다. 그것은 평생을 할애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단번에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두희는 내 가족이었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에게 불가피한 영역을 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 가족인 ‘두희’를 수현은 이해했을까. 얼마나. ‘반려묘’만 해도 사람의 손길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특별히 스킨쉽도 쉽지 않고 비바리움에 두고 ‘보는’, 어쩌면 ‘관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두희’에 대한 수현의 마음이란 ‘교감’이 아닌 일방적 관계인 것은 아니었을까. 장식장에 둔 고가의 장식품, 명품가방을 대하는 그런 것. 글쎄, 반려견이 제 이름에 반응하지만 ‘두희’라 부르면 그것이 제 이름인지조차 알지 못했을 타란툴라 거미에 대하여.
“두희는 자기 이름이 두희였다는 걸 알았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걔도 너의 무언가를 알아채는 순간들이 있었을 거야. 그게 아주 찰나였을지라도.”
오로지 열일곱해를 두희에게 마음쓰며 삶의 순간순간을 함께 했던 수현은 ‘두희’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두희’의 존재가 그저 나쁘기만 한다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함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긍정의 영향을 미쳤음을,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러한 존재였음을 느끼고 알아간다.
내 생애 의미있는 어떤 것, 그것이 무엇인든 그 존재가 나를 더욱 더 단단하게 올려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